▣ '退溪 선생께서
'곱고 화려함이 마치 비단 장막 속을 지나는 것 같다' 고 일갈한
소백산록의 연분홍 철쭉을 만나러 떠난 길에..
비로사의 아픈 역사와 함께
아직껏 제대로 된 복원이 이뤄지지 않는 현장에서
머문 하루 餘滴 ▣
☆ 일시 : 2024년 5월 26일.
☆ 산행코스 : 풍기 삼가리~비로사~달밭골~비로봉~제1연화봉~연화봉-희방사-희방폭포.
☆ 산행거리 : 14km.
비로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소백산(1,439m) 동남쪽 중턱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승려 진정이 창건한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라 불렀다.
의상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던 진정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문도를 거느리고
현 비로사로 추정되는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한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신라 683년(신문왕 3년)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말에는 한 승려가 중창하고 진공(眞空)을 이곳에서 살게 하였다 하며,
고려 1126년(인종 4년) 왕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년) 환암이 중창하였다. 조선 1469년(예종 1년)에는 김수온이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석불상 2구만이 남고 절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년) 경희가 중건하였다.
1684년(숙종 10년) 월하가 법당과 산신각 등 40여 칸을 중창하였으며, 1907년 범선이 요사를 증축하였는데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19년 주지 범선이 법당을 중수, 1927년 요사를 중건,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는 등 중수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불교에서 법회 따위의 의식이 있을 때 쓰는 기(旗)를 달아 세우는 장대인 당간(幢竿)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기둥.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20년(937년)에 입적한 인물로 그가 입적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939년
고려 태조가 그에게 진공(眞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탑을 건립하도록 하였는데
탑호(塔號)를 보탑(普法)이라 하였고 그 옆에 탑비를 세운 것이다.
비신은 높이 173㎝, 너비 102㎝, 두께 22㎝의 크기이며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산 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은 갈라져서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해 보이는데 등 중앙에는 비를 꽂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고
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
비문은 최언위가 짓고 글씨는 자경 2㎝의 구양순체 해서로 이환추가 썼으며
비음(碑陰)에는 진공의 유계를 새겼는데 역시 구양순체의 해서이고
머릿돌 가운데의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라는 전액도 이환추가 쓴 것이다.
신라의 왕족 출신인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다.
후고구려는 남쪽으로 소백산에서 북쪽으로 대동강에 이르는 한반도의 중앙을 차지한다.
이때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이 진공대사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법을 구하기 위해 소백산사를 찾았다는 것이다.
대사는 왕건의 인품을 보고 그가 왕이 될 것을 예측했다고 한다.
이 말을 새겨들은 왕건은 918년 고려를 세워 왕이 된다.
왕이 된 후 태조 왕건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소백산사를 찾아 진공대사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 예를 표하게 되는데 이 때 머리를 대도록 만든 것이 '연화문배례석'이라고 한다.
탑비는 탑에 따라 다니는 부속물이다.
왜냐하면 탑호가 내려지고 나야 탑비가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비로사에는 보법탑비는 있는데 보법탑은 없다.
그럼 진공대사 보법탑은 어디로 간 걸까?
비로사 경내의 석부재물로 보아서는 적광전 앞의 탑 부재가 보법탑의 일부로 추정된다.
비로사 경내에 흩어져 있던 각종 석조물의 잔재들을 모아서 만들어 놓은 석탑이다.
석탑 몸돌 1개, 옥개석 2개, 뒤집혀진 노반과 지대석은 석탑 부재로 여겨지며,
안상에 가릉빈가와 꽃그림과 사자가 새겨진 부재는 진공대사 부도의 부재이며
맨 위 옥개석은 석등의 부재로 보여진다.
비로사는 어느 정도 불사가 완성되어 당우로는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부처님의 뼈를 묻은 탑과 조사들의 뼈를 묻은 부도탑을 온전한 형태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비로사 뒷편에서 발견된 건물터가
고려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史庫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있다.
향토사학자인 송지향(1918-2004) 선생은 영주향토지(1987)에
「사고터는 달밭골 기점 비로봉 등산로 450m 지점에 있다.
조선 때는 소백산 사고터 기록이 없으니 필시 고려시대 사고터로 짐작된다.
이곳은 고려 태조의 왕사 진공대사가 주석(柱石)했던 비로사가 있는 등
사고지를 두엄직한 곳」이라고 적었으며,
2013년 영주시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표조사 결과
이 건물터에서는 6동의 건물지와 20m길이의 하부석렬, 주초석 12기,
고려시대 삼층석탑 1기 등이 발견됐다.
풍기산악회원으로 1987년 빙벽 훈련 중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