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형
데이빗의 경우 36세, 미술전공 대학원생, 미국
데이빗(David)은 30대 중반의 미술 학도입니다. 그는 유태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지금도 유월절(passover) 같은 유태교의 축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노스웨스턴 대학의 석사 과정에 있는 데이빗은 예전에 2년 남짓 태극권 수련을 했었고 1983~84년에는 약 1년 동안 매일 20분씩 호흡 명상을 했습니다.
1997년 10월, 제가 지도하던 태극권 소그룹에 참여하면서 만나게 된 그는 1998년 6월에는 제임스가 속해 있던 태극권 명상 소그룹에 합류했습니다. 그 당시 데이빗은 약 4년 동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제가 지도하던 태극권 저녁반에 들어왔을 때의 그의 얼굴은 어둡고 무거워 보였으며 전반적으로 폐쇄적인 분위기를 주었습니다.
태극권 수련에서부터
태극권을 지도할 때 나는 수련생들에게 몸에 주시를 기울이는 능력과 기(氣)@의도@주시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가르칩니다. 따라서 수련생들은 자세를 익히기 전에 태극권의 내부 원리를 먼저 터득하여 몸의 구조 속의 수많은 음양의 상호 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능력은 수년 간의 수련을 통해 점진적으로 배양됩니다.
이 과정은 악기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악기를 배우려면 처음 몇 년 동안은 기본기를 익히는 훈련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복잡한 체계를 지닌 음악을 연주하려면 이 기본기가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이 같은 기본기의 습득이 완결되었을 때 원리가 자세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일련의 자세를 통해서 심신이 단련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련생이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수행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한 태극권 수련은 위빠싸나의 통찰수행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극권 수련생들도 명상 수련생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량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량들은 은연중 그들의 인생에 유익한 영향을 미칩니다. 처음에는 단지 태극권만 배우던 수련생들이 점차 집착을 없애는 수행에도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태극권에서 배운 기술들을 그대로 번뇌 제거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첫번째 태극권 수업에서는 의식으로부터 주시를 구별하고, 신식(身識)을 주시하는 것과 의식(意識)을 주시하는 것의 차이를 연습했습니다. 데이빗은 의식 활동을 놓아버리고 몸을 발견해 거기에 주시를 기울이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과거에 그가 태극권과 호흡 명상을 수련했었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의식으로부터 주시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식을 6근@6경〔六根(六境):눈(色)@귀(聲)@코(香)@입(味)@몸(觸)@마음의 의식(法)〕으로 구분하는 것조차 배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는 주시를 몸에 기울이는 대신에 의식에 기울이도록 지도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몸을 [발견]하고부터 몸에 주시를 고정시킬 수 있게 되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주의는 몸에 몇 초 동안만 머물다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 속에 떠오른 몸의 영상쪽으로 옮겨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옮김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지만, 수련이 거듭됨에 따라 점차 주의가 몸에 머무르게 되었고, 몸에 대한 확고한 알아차림이 서서히, 저절로 증가하였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기량이 강화되자 수련생들에게 당일의 수행 과정을 마음챙김으로 다시 살펴보도록 하여 바로 점검함으로써, 수행 중의 어려움의 원인을 추리가 아니라 있는 대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기량을 습득하면 수행에 잘 적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의가 몸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 주의가 몸에서 떠나기 전에 10~20초 동안 머물지 않았던 과정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마음챙김으로 되돌아봄으로써 그 요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이빗은 이러한 기량을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수련상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숙련되고 체계적인 마음챙김 기술을 활용하기보다는 그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는] 쪽을 선호했습니다. 그는 되돌아보는 수행법이 너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이견을 제기했습니다. 다시금 설득을 해서 이 수행법을 익히도록 했지만 몇 주일이 지나자 다시 못하겠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부하면 수강을 못하도록 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야만 했습니다.
1998년 봄 무렵, 데이빗은 태극권 기술의 습득 덕분에 훨씬 맑고 밝아졌으며 좀더 깨어있고 활기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에 고무된 그는 내게 명상 지도를 청했습니다.
자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무아에 대한 각성으로
유형을 분별해 진단해 본 결과 데이빗은 무지형에 속했습니다.
그는 마음챙김으로 다시 살펴보는 대신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견해를 조성하는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몸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성향으로, 전반적으로 둔하고 폐쇄적이며 몸과 마음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데이빗이 무명형의 두 유형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1998년 11월에 개인 교습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판별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명상 그룹에서 수련을 시작했을 때 데이빗은 6감각기관〔六根〕의 의식으로부터 주의를 구별하는 훈련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태극권 수련을 통해 이 기량들을 이미 익혔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色〕과 몸의 한 지점〔觸〕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그 상태를 조용히 유지하는 기술은 이미 숙달되어 있었습니다. 보이는 대상에 머무는 안식이든 바닥에 복사뼈가 닿는 느낌인 신식(身識)이든 간에, 언어 이전의 주시를 적어도 10초 정도 머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량들에 데이빗은 이미 능했기 때문에 그에게도 제임스와 같은 수준의 훈련이 주어졌습니다. 다만 주시하는 시간을 15초로 늘려서 유지하게 했습니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놓아버림과 중지를 가르쳤습니다. 데이빗은 이 기술을 습득하고 이것을 매일의 훈련에 적용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각 시간 간격 전에, 동안에, 후에 무반응적 앎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와는 달리, 그는 수련에 대한 반응(상념)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두 번째 명상 수업이란 점을 감안할 때 소질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따금 발생하는 유일한 어려움은 놓아버림과 중지가 실제로 어디에서 행해졌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의가 실제로 6근 중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아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무지형의 특성입니다.
데이빗에게는 보이는 대상이나 몸의 한 부분에 명칭을 붙이지 않고주시를 머무르게 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서 그 시간 간격을 30초로 늘렸습니다. 수 주일에 걸쳐 이러한 기량들이 강화되자 시간 간격은 점점 더(30초에서 45초, 60초로) 연장되었습니다.
1998년 11월, 데이빗은 그의 인생을 힘들게 해온 번뇌를 좀더 적극적으로 떨쳐버리고자 나에게 개인 교습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수련생들에게 자신의 문제점들을 첫번째 수련 시간에 털어놓게 함으로써 그것을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도록 유도하곤 했는데, 그는 장차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는 막연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데이빗은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도 심리적 장애는 남아있었습니다. 이 장애가 수련 중에도 일어나자 그가 어려움을 겪는 원인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데이빗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반응과 견해를 있는 대로 단순히 얘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실패에 대한 혐오감, 바보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혐오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 동시에 자신은 미숙하다는 생각, 그리고 현재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미숙하다는 생각은 개방적이 되는 것과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미숙하다는 느낌은 실체가 없는 무아를 실재하는 [나]로 착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 때문에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이 착각된 전도는 수많은 혐오감을 일으킵니다. 혐오감은 폐쇄성과 위축감을 일으키므로 이런 상태에서 개방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 같은 개방성의 결핍은 다시금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함으로써 결국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를 계속 조성하는 원인을 점검함으로써 혐오감으로 반응하는 성향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 악순환의 과정이 명확하게 설명되면 그 원인이 드러나므로, 저는 데이빗에게 과거의 비슷한 경험을 마음챙김의 되돌아봄을 통하여 얘기해보도록 했습니다. 그는 며칠 전에(1998년 11월) 겪었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미술학과 사무실에서 한 저명한 미술학자가 방문한다는 유인물을 보았습니다. 그 학자는 제 작품을 포함한 학생들의 작품을 돌아볼 예정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저는 기회가 왔다고 한껏 흥분되었습니다. 이러한 흥분은 곧 저를 만난 학자가 제 작품을 맘에 들어하고 저에게도 호감을 갖게 되는 상상으로 이어졌습니다(이 부분에서 그가 자신의 작품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주목하세요).
그러나 다음 순간, 주의는 제가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과거의 기억으로 옮겨갔습니다(이때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과거의 경험에 의해 와해되는 과정에 유의하세요). 그때의 어려움이 실패로 되씹어지자 동일한 형태의 실패가 학자를 만났을 때 되풀이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유인물 앞에 서있는 동안 저는 이렇게 이어지는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학자와 만나는 것을 혐오하고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이 계속된 관념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챙겨보게 한 결과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조건 지워진 것〔無我〕이고 비영원성〔無常〕이라는 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견해는 단지 일시적인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임을 이해함으로써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한 상황의 일어남의 계속성만 보고 사라지는 것은 보지 못함으로써 고정된 견해가 실재한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조건성과 무상에 대한 각성은 데이빗에게 즉각적인 구원을 안겨주었습니다. 나의 설명을 듣는 그의 얼굴에는 점차 밝은 빛이 번져갔습니다. 잘못된 견해의 추방 앞에는 결코 저항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바로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둠 속에서 빛이 밝혀졌을 때 구원의 감정을 느끼는 현상은 무지형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견착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에 강하게 저항하며 견해를 버리는 것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견해야말로 그들의 최우선적인 집착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무지형은 좀더 쉽게 견해를 놓아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첫번째 장애는 견해가 아니라 어둠〔無明〕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에서 무지형의 길은 [즐거움]으로 불립니다. 왜냐하면 수행을 통해 무지형 사람들은 어둠으로부터 밝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연속적인 관념을 갖는 경우에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로부터 떼어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데이빗의 경우에 이 연속적인 [자아]에 대한 견해가 발생하는 원인은 미래의 자신의 이미지를 현재의 상황 속에서 상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미래에 대한 조성이 통제되고 그것이 처음 일어날 때 놓아버린다면, 과거에 대한 기억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과거에 의해서 조건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과거가 미래에 투사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연속성은 만들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양상에 대처하기 위해서, 데이빗에게 연속적인 관념을 드러내어 미래를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경향에 붙잡히지 않도록 지도했습니다. 주의가 여기에 사로잡히면 놓아버림과 중지를 하도록 했고, 이것이 되풀이될 때는 주의가 안정될 때까지 [열림, 열림, 열림……]의 만트라를 염송하게 했습니다. 이 만트라는 혐오감과 폐쇄성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일주일 뒤의 두 번째 개인 교습에서는 그 대처 방법들의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앞의 양상의 발생 빈도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개인 교습이 시작된 첫주일에 이미 그 빈도가 감소되기 시작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주일의 처음 며칠 동안은 발생 빈도가 하루에 12~13번 정도였고 주말쯤에는 9번으로 감소되었습니다. 개인 교습 이전에는 이러한 양상에 대해 자각조차 못했던 그가 일주일만에 이것을 확연히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놓아버림과 중지를 하기 전에 주의를 3초 동안 머물게 하면서 그 현상의 위험성을 직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열림, 열림, 열림……]의 만트라를 염송하게 했습니다.
이 빈도는 11월 이후로도 꾸준하게 감소되어 이듬해 4월경에는 그 양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일어나도 하루에 한두 번 정도였고 그마저도 이내 극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데이빗은 좀더 개방적이 되었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개인 교습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대한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들에 관해 좀더 체계적으로 점검했습니다. 그러자 발생의 빈도는 대폭 감소되었습니다. 이 같은 점검 작업에는 내적으로 연계된 숱한 그릇된 가정(假定)과 그와 관련된 인연들을 드러내주는 수련생과의 대화가 수반되었습니다. 그런 오류들이 드러나기만 하면 그것들을 떼어내기 위하여 체계적인 삭제 과정을 밟았습니다.
데이빗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어렵다]고 간주되는 것은 무조건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어렵다]고 간주되는 것은 [나쁘다]는 판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어렵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자 [자신을 드러내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죄다 어려운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드러냄]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리 치료 과정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숱하게 노출되었으나 데이빗은 그 혐오감과 두려움이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야기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무지에 수행의 초점을 맞추자, 데이빗은 그 무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그 두려움을 대면하는 것을 혐오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어서 [드러내기]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자, 그에게 있어서 드러내는 것은 [상처받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상처받기 쉽다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개방성이 주는 두려움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다음과 같이 조건화된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자기 자신을 확실히 모르는 두려움에 대한 혐오감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합니다. 이로 인해 노력하지 않게 되어 그 결과 게으름@폐쇄성@어리석음〔無知〕을 불러옵니다(게으름과 무감각 등은 무지를 야기하는 요인입니다). 폐쇄성과 어리석음이 클수록 자신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지고, 따라서 이 두려움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혐오감이 점차 심화됩니다. 이러한 혐오감과 무지의 반복되는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되면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