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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참 빠르네, 라고 말할 무렵 파란 하늘 아래 핀, 빨간색 석류꽃의 교정을
아내와 함께 걸으며, 그간 걸어온 길을 더듬고 더듬어 본다.
上海홍차오 국제공항에서 96년 9월 11일 合肥국내선 작은 비행기에 오른다. 그것도 같이온 아들을 먼저
보내고 말이다. 정말 작은 비행기로 스릴은 있었다. 잠시 후 움직이는 사람을 따라서 내리는데, 合肥국내
선 공항이라는데, 활주로에서 내려 걸어서 나오던 그 시절 뜨거운 먼지 바람이 불어 와 이곳이 이런 곳이
구나 할 즈음, 짐은 트럭에서 찾았고, 學校의 黃山路는 좀다란 길로 정문은 철조망 문으로 그 밑으로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넓은 신 캠퍼스의 아름다움, 와 그 세월 17년 세월을 마감하는 몇 개월 앞에 놓고, 17년의
마지막 수업을 마칠 무렵 合肥市방송국에서 취제를 나와 전 과정을 녹화한다.
때는 2013년 7월 초 학년말 시험을 치르고 여름방학이 들어가는 문에서 말이다.
이렇게 달라진 합비학원의 신캠퍼스 이런 전문만도 두개가 있으니 대단한 발전이라 하겠다.
그간의 살아온 과정은 하나하나 合肥市 발전에 외국인으로선 산 증인 이겠어요? 라고 기자의 질문으로
시작이 된다.
17년 전의 合肥市는 참으로 궁금해요?
하하 上海홍차오에서 국내선 合肥를 향하는 비행기를 탑승했니다. 하하하~한 마디로 작은 비행기였지요.
비행기에 사람의 움직음을 따라서 내렸는데ㅡ활주로 였어요. 그 활주로를 사람을 따라 걸어 나오는데, 뜨
거운 먼지 바람 잊을 수 없어요. 中國말을 전혀 모르니 사람을 따라 설설 걸어 나올 수 밖에 없지요.
집은 과원신촌 이었고, 黃山路373 역시 좀은 길에, 학교의 정문은 철조망 문에 그 밑에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지요. 당시의 合肥市 인구는 120만으로 말들을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보세요. 黃山路 얼마나 아름다
운 길이 되었는 모릅니다. 또한 인구 760만 바로 1000만의 도시가 된다는 데, 정말 무지한 발전, 남과 북
으로 이어지는 고가도로 와 빈호의 신도시, 시청사인민정부 등 말할 수 없는 발전과 변화, 방금 오픈을 한
신공항을 비롯하여, 지하철 1~2호선이 공사 중에 있고, 合肥 남역전이 건설 중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合肥 땅을 선택 하시게 되었어요?
우리는 본래 美國을 계획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미국에 갈곳까지 확정된 상태에서 중3 큰아들이 제안
을 하더군요. 우리가 한국을 떠난다면 "해가 뜨는 일출의 땅으로 가자" 는 것입니다.
오후의 태양 보다는 일출의 태양 中國을 말입니다.
이에 가족은 일주 후 투표를 했는데 3:1로 중국이 결정 되었습니다.
사실 合肥도 큰 아들이 제안을 한 것입니다.
한국사람이 적은 곳 특히 우리 큰 아들은 삼국지는 물론 중국역사를 참 좋아 했고요, 삼국오락 개임과
만화 등 合肥에서 삼국의 마지막 전쟁인 "소요진전쟁" 등 교육과 과학 휘상의 발원지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역시中國을 알면 세계가 보입니다.
그 아들이 지금?
예, 이 달(7월)에 석사를 두 아들이 다 논문 통과를 받았습니다.
큰 아들은 북경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도 2년 어학을 공부하고 와서 中國과학기술대학교
MBA 석사 논문 심사에서 1차 2차 3차 다 통과를 해, 이제 학위를 받고 석사모를 쓰게 되었습니다.
막내 아들은 역시 安徽중의대학교 학부 5년과정을 졸업하고, 역시 석사에 입문하여 논문 심사 1차 2차
3차 다 통과를 하여 학위를 받고 석사모를 쓰게 되었습니다.
무엇 보다도 두 아들이 같은 달에 석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같이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을 같이 하게 되었을까요?
예, 막내가 학부 시절 군인 입대를 지원해서 간것입니다.
사실 초등학교도 한국에서 나오지 않고 다 여기 중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대에는 안가도 되는데,
스스로 지원하여 군생활을 참 여렵게 마치고 복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려움은?
언어 였습니다. 한국어보다 중국말로 하는 것이 더 쉼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런 어려움이 없답니다.
두 아들에 대한 눈물나는 일들이 무척이 많이 있음을 후에 들었는데, 소름이 끼첬습니다. 한번은 중국
친국들과 과학대학교 부속학교 운동장에서 축을 하는데, 중국친구가 고의로 동생의 볼을 받아 입안이 다
큰아들 형이 괴로워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그러면 초등학교는?
예, 두 아들 다 철도4국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참 우리 두 아들 고생 많이 했지요. 지금이야 국제학교가
있지만, 당시는 그런 학교가 없었어요, 일단 소학 1학년에 입학을 하면 기초부터 공부를 할줄 알았는데,
이미 우치원에서 다 공부를 마치고 온 학생들, 게다가 외국인 이라는 것, 학생도 선생도 韓國人이 우리와
같으네, 구경을 하느라...참.. 생각해 보세요...그러한 환경에서 우리 큰 아들은 스스로 공부를 하는데.
어느 날 "엄마, 저 공부 못하는 자의 심정을 알았어요" 韓國에서 공부를 아주 잘 했어요, 담임이 학교를
떠나 中國으로 간다고 하니 울정도 였습니다.
또한 아들도 시험보는 날이 즐거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빈 시험지 들고 있어야 하는 그 심정을
깊이 깨닫고 공부를 하는데, 하룻밤 사이 A4 용지 서너장에 깨알 같은 중국어 하나하나 한자를 외워가는
것입니다.
천자, 이천자, 삼천자, 사천자, 당시 사천자는 전문대학을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천자를 알아야 신문을
읽을 수도 있고요, 당시 安徽大學校 가려면 오천에서 륙천, 北京大學校 정도면 팔천에서 구천자를 알아야
된다는데, 아들이 그렇게 악척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강의를 하나요?
예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사무실도 있고요. 99년 9월 25일 첫 한국에 있는 제 고향의 대학교와 교류를 시작
합니다. 지금은 합비대학만도 한국에 있는 14개 대학교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黃山路연합대학이라는 그 이름에서 출범할 당시 여행학과 = 현대비서 학생 1개반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한국어가 외국어시로 들어간지 6년이 되었고, 여행학과 및 중문과에서 대외한어 와 컴푸터 학과
등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만도 500 여명에 이릅니다. 물론 이들에게 계속 한국어 우수장학금이
전해지고 있으며, 한국으로 매년 100 여명의 학생들이 2+2. 1.5+1.5 복수 학위로 한국을 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금년 6차를 맞이 하게 되었는데, 省교육청과 함께 큰 행사로 치러지고 있습
니다. 지난해는 주중대사까지 참여 하는 큰 행사 였습니다. 물론 순천향대학교에서 주관을 합니다.
자리를 학교로 옮겼습니다. 학급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자리로 말입니다.
참으로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재 역시 큰 문제 였습니다. 하하 지금 생각하면 넘 초라 했습니다.
상하이 총영사관에 들려 문화관광부에서 나온 책좀 부탁합니다. 하하 이 책을 받기가 넘 힘들었져,
간신이 영사님이 그냥 한권 가지고 있는것을 ,이렇게 자렇게 하여 교재를 복사하고, 복사해서 쓰는데,
사실 복사는 안되는 것인데, 영사께서 좋은 일인데요 뭐, 그렇다 이 일로 문제를 삼는 다면 기꺼이
내가 당당히, 아주 당당히 잡혀서 말 하리라! 그 세월 17년 세월이 흘러가 이제는 홍수처럼 중국
출판사에서 또 각 대학에서 나오는 교재가 물결 치고 있으니 문제는 없지만, 아쉬움은 꼭 있다.
정부에 보고 한 일도 있는데,
첫째는 이 땅에서 마음놓고 사용할 기본 한국어 교재를 선정해 달라. 한국어 관련 많은 자료가 부족하니
사전 및 교재를, 이는 국익이 되는 일로 사료된다고,,,
둘째는 각 대학에 한국어는 물론 태권도 학과를 국가가 지지 하고, 그에 따른 자료를 밀어주면 후에는
국익이 될것이다. 이는 조선어가 정식 한국어 대접을 받도록 하는 일도 국가의 몫으로 본다.
셋째는 한국어 관련 세종학교든 문화학교든 각처에 세우고, 문화원을 세워라. 일본은 인구100만만
있어도 문화원을 세워,,중은 공자학교를 세워가고 있으니,,그 자료가 있나요? 예 있습니다.
그 자료공ㅈ를 넣어주던 그 때가 어그제의 일 같으다,,,그후 북경문화원이 자체문화원건물을 가지게
되었고, 상하이문화원이 당당히 건물을 가지게 돠었고, 세종학교가 시작되었으니 조금 일을 했다고
본다..알아주든 몰라 주든 사실 이니 말이다.
사실 정부가 할 일은 너무 많이 있다고 본다.
한국어 및 테권도 관련하여 각 대학에 학과로 개설 지원하고(년수를 정해)도장 역시, 지지를 해주고
지지란 홍보물 및 교재와 사전 등 자료를 말한다. 영어, 일어 등은 어떤 학교에서든지 요청을 하면 그
관련 테이프 및 cd를 지원 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 정부도 할 수 있는 일, 하고 있는데요. 라고 말을
한다면 그 만큼 문지방이 높고, 또 줄이 있어야 된다는 뜻일터,,!
한국어의 보급과 태권도의 보급은 줄로 문지방으로 되는 것이 아닐것이다.
물론 줄과 문지방을 잘 이용할 수 있는 힘도 민간인이 아닌 힘있다는 공무원 바로 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 지원 없이 민간인이, 그대들이 말하는 촌민이 20여 대학에 한국어를 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초, 중, 고, 대하교, 교육국 과 교육청. 방송사, 신문사, 병원, 시, 의회 등 다양한 교류의 정착 시대를 통하
여 국익이 창출되기를 바라나,,,,환보 관련 역시 영 미치지 않는 묘한 물결을 발견하고, 아하~~그렇구나.
인천에 있는 환경공단을 통하여, 이 하나를 공부한바 있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해 봅니다. 한국어가 재미 있는지? 왜,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그리고
공부시간에 선생님은 어떤지....등...넘 재미 있고, 또 내일에 설자리가 많아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선생님 역시 자상하시고 또한 너무 친절합니다.
한국어 공부시간이 기다려 집니다.
이러한 시간을 다 녹화한다.
사무실에 까지 들립니다.
이러면서 기자는 교정을 걸어 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캠퍼스의 교정을 걸으면서 지나온 일들을 이야기 합니다.
흘러간 세월에 참 잊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어요..아들이 북경대학교 합격한 날 통지를 받던날
우리 부부는 성교육청의 안내로 천주산에 있었지요, 안휘성내의 외국교사 교수들이 ㅎㅎ 그때 전화를
아들이 해 북경대학교 합격했어요~함께한 자들이 건배를 해주고 즐거워 하던 그때 생생 합니다.
그리고 농촌소학교를 재건축해주고 태극기를 건다는데 있어야지요,,무조건 총영사관을 찾아갔습니다.
참 오래된 일인데, 우봉구 영사님, 문창부 영사님, 박찬현 영사님, 하하 많이 도와 주셨지요..태극기
영사관에 보관된 태극기를 주십니다. 그것을 재건축한 소학교에 전하니 오성기와 태극기가 같이 휘날
리는데, 눈물이 나더라구요, 줄줄,,그 태극기는 이제 3곳에서 휘날리고 있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교정의 호수에서
기자가 찍어준 사진 입니다.
처음 우리 연합대학은 호수가 없었는데, 이제 이름도 바꾸워 합비학원(대학)이 되니
호수를 어찌나 잘 꾸미어 놓았는지 가는 곳 마다 아름다운 물들이 춤추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태극기를 꽂을까?
최소 8개는 날려야 멋이 있을 텐데,
팔팔하게 휘날리는 태극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늙어가는 이 合肥大學에 정작 태극기가 날려야 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살아 있는데 날리겠어!
죽으면 날려 주겠지! 정말 그럴까?
우리 15주년 나무 말야, 좋은 나무가 아닌것 같아, 좀 좋은 것을 골라주지,
그냥! 받은 모양이야. 내가 볼때는 작아도 좀 좋아보이고, 예뻐보이는 나무가 많은데,
우리 나무는 그렇지 않아, 그냥 돈주고 산 나무가 아닌것 같아,,우리가
직접 삿어야 됐는데,,아 괞아 후에 크고 보면 그런대로,,,그냥 좋게 넘어가,,,알써~
뒤에 보이는 아파트는 학생들 기숙사 입니다.
7월에 핀 석류꽃 입니다. 아름답다.
그런데 이 성류꽃은 또 만발을 했던데,,,참 ,,,지금 9월에 말입니다.
9월에 피는 성류 꽃도 있다는 건데,,,넘 아름다워요....길가의 성류꽃 가로수 말입니다.
중의대학교 옆길의 성류꽃이 만발했고, 남칠에서 철도4국학교 가는 길 역시 성류꽃길 입니다.
이 사진이 제일 잘 나온것 같으네요.
걸어 온 17년의 길은 길이라기 보다는 터널을 산것입니다.
터널의 빛은 작은 빛만 있어도 밝아 소중함 같이.
우리는 참으로 "벙어리" 였어!
울 부부, 두 아들 다" 벙어리"로 와 참 대단한, 터널!,
터널 속의 멍어리!
타향, 타국 이라는 삶!
타국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 그 삶을 알 수 있을터,
타국 생활을 어찌 누가 요리 저리 걸려진~
그져 살아온 길,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삶을 산다는 그자체가 대견 스럽고, 놀랍다.
취제녹화를 마치고 교정을 나오니 하늘이 넘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아주 자세히 취제를 하여 방송이 되었는데, 본 사람들이 넘 잘했다는 칭찬을 받았답니다.
기자는 선물까지 받았답니다. 이 녹화된 방송은 7월 15일경 방송되었고.
앵콜방송은 물론
8월말에는 안휘방송에서 천하안휘인이 재방송 되었답니다...
정리.. 2013년 09월 25일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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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여전히 멋지시게 일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늘 강건하시고 한국을 빛내주세요.
17년의 타국 생활 ~ 18년의 삶에선 꽃과 향기~그
열매를 좀 딸 듯 하옵니다...
긴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
감사~타향은 타향으로 타국생활의 고초는 그 생활을 해본 사람많이 알지요,,,
잘 지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