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17. 씨앗 -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렇게도 비가 내리지 않더니 어제 해갈의 단비가 내려 주었다. 충분치는 않지만. 마침 비 오기 작전에 파종을 마쳐서 얼마나 다행인지! 올 농사 계획은 이렇다. 상추 세 고랑, 쑥갓 한 고랑, 질경이 한 고랑, 들깨 두 고랑, 쑥과 꿀풀을 합해 한 고랑, 이렇게 모두 여덟 고랑이다. 그리고 따로 꾸민 야생초 화단에는 다년생 야생초들이 속속 싹을 내밀고 있다. 지금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은 2년생 부추다. 덕분에 운동시간에 나는 몹시 바쁘다. 테니스도 한게임 쳐야지, 채소밭에 물도 주고 풀도 뽑아 주어야지. 풀들이 자라면 더욱 바빠진다. 그것을 뜯어다 씻어서 요리하는 것도 내 몫이거든. 말하자면 나는 우리 사동의 농부 겸 요리사인 셈이지.
채소밭에 뿌릴 씨앗을 구하는 경로는 대체로 세 가지이다. 먼저 텃밭을 가꾸고 있는 다른 공장에서 얻는다. 대개는 자기 밭에다 뿌리고 남은 것이 있거든, 물론 그 공장 안에 친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얻기가 쉽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오징어라도 몇 마리 사주면서 얻어온단다. 두 번째는 평소에 잘 사귀어 둔 담당 교도관을 통해 구하는 거다. 징역도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려면 두루두루 잘 사귀어 놓아야 한다. 세 번째는 먼저 출소한 동료에게 부탁하여 구하는 것이다. 이번 것은 작년에 출소한 한 후배가 우편으로 보내 준 것이다.
나는 먼저 나간 후배에게 토종 씨앗을 좀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건만 편지와 함께 보내온 씨앗들은 일반 종묘상에서 파는 것이었다. 자기 어머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신다고 하여 특별히 부탁했는데 어머니 집에도 토종 씨가 없다는 거야. 이해가 갔다. 요즘같이 상업화된 시대에 어딜 가나 싸고 좋은 수입 개량종 씨앗이 널려 있는데 누가 힘들게 토종 씨앗을 간직하고 있겠니? 게다가 씨앗이란 것은 한두 해 재배하지 않으면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 토종이 사라진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황대권. 야생초 편지. 도솔.
황대권은 195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사회과학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1년 6월 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극이었다고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널리 밝혀졌다. 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어지는 《야생초 편지》는 풀 향기 가득한 식물 일기이고 생명 일기이며, 감옥에서도 자유로운 한 구도자의 사색 일기이고 수련 일기이다. 야생초에 대한 그의 관찰과 연구는 전문가 수준이며, 이 관찰은 식물적인 견해를 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인간관계에 대한 묵상으로까지 확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