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비
(요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주님이 그를 맞이하며 묻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느냐?’ 그 선생이 대답합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 무엇을 가르쳤느냐?’ ‘요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주님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요한을 불러 물었습니다. ‘요한아, 네가 요한 신학이라는 것을 가르쳤느냐?’ 요한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주님 말씀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신약 신학에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 나타나는 교리와 신학을 요한 신학이라고 하는데, 요한은 교리도 만들지 않았고, 신학 이론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는 신학 이론, 교리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교리는 때로 주님의 말씀처럼 ‘절대적 권위’를 가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경전을 쓰지도 않았고, 교리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율법학자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해석하고, 교리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교리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교리는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고발하고 죽였을까요? 과연 그들이 말하는 교리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었을까요?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리로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물론 교리와 신학은 필요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신앙고백이며 신앙의 결단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쁨을 얻은 신도들이 ‘나는 이렇게 믿는다’고 고백한 것이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고백한 것을 기록한 문서가 경전이 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 보낸 편지도 경전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경전과 교리, 신앙고백이 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인정한 것을 교리와 경전으로 정했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신앙고백을 가지고 논쟁을 했는데, 이긴 세력의 이론이 경전과 교리가 된 것입니다. 경전, 교리로 확정된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이나 이론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핵심이 되는 가르침을 찾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리는 주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교회사에서 수많은 신학과 교리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교회는 분열되고, 폭력적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교리는 분명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옳은 일이라 믿었습니다. 교리가 어리석은 신앙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을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약 2:17) 교리와 신학은 하나님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믿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기쁨을 얻게 만드는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와 다른 생각, 믿음을 구별하고, 차별하고, 파괴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즘 종교가 폭력과 분열과 파괴를 일삼는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죽이는 일이 신의 뜻이라면 그 신앙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종교도 역시 건강한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신의 뜻을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끔찍한 사건들이 많고, 잔인한 하나님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중에 많은 것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뜻으로 변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면서도 회개를 촉구하고, 용서를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심판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심판은 멸망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멸망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셔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서로 싸우고 분열하고, 죽이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며 멸망하는 것조차도 안타까워하시며 이들을 살릴 계획을 세우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동기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방법은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목적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서 이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분열하고 파괴하고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신다는 것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피조물이 파괴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험을 합니다. 곧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독생자는 유일한 후손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는 것입니다. 모든 계획이 끝날 수도 있는데 보내신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계산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계산하지 않는 사랑의 순종을 아브라함이 보여줍니다. 곧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아브라함이 따른 것입니다. 그 아들이 죽으면 후손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산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이야기입니다. (마 18:10-14) 양 아흔아홉을 들판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면 무모한 일입니다. 한 마리를 포기하고 아흔아홉을 지키는 것이 이익일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자의 행동은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릅니다. 예수님은 교훈을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와 약함을 아시면서도 사랑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끝없는 사랑은 탕자의 비유로 설명해주십니다.(눅 14:11이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교리로 만들고, 율법으로 만들어서 차별하고, 분열하고, 정죄하며 생명을 파괴합니다. 아마 인간의 이런 행위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의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는데 이 진리를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고집이 세고,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상태로 멸망의 길을 가겠지요. 하나님은 ‘이제 믿든 안 믿든 네 책임이다’라고 떠맡기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요 14:26)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믿음을 고백하며 평안을 누리고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은 지식이나 깨달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에 이끌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기쁨과 평화를 깨뜨리는 교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끼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