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경주김씨 인복종친회
카페 가입하기
 
 
 
 

카페 파이

  1.  
  2.  
  3.  
  4.  
  1.  
  2.  
  3.  
  4.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김민철
    2. 사람
    3. 정겨운사람
    4. 초산
    5. 촌장
    1. 민박사
    2. 김은비
    3. 여정범
    4. 김지태
    5. 김일동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역사 교양 지혜 스크랩 백인엽 (전) 선인학원 이사장. 예 육군중장 [태극무공훈장]
성기숙 추천 0 조회 481 18.06.05 09:3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국군 창군 원로이자 백선엽 장군의 친동생인 백인엽 예비역 중장이 1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1923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백인엽 장군은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임관했다.

백인엽 장군은 1948년 육군 제17연대장에 임명된 뒤 1950년 8월에는 수도사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영천전투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국군 제17연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백인엽 장군은 휴전이후 9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역임하다 1960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선인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백인엽 장군의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질 수 있으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른다.

유족으로는 주광숙(71) 여사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02-2072-2114)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9시 30분이다.

백인엽 장군은 천안 풍산 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사진출쳐= http://koreanwar60.tistory.com/
성명 백인엽 白仁燁

영문명 BAEK, IN-YEOB

생년월일 1923/02/18 (양력)

출생지 평남 강서 (출생)

본관 수원 (水原)

종교 기독교

성별 남

학력

- 1943 일본 메이지대학교 경제과 (졸업)

일본 육군항공학교 (졸업)

- 1946 군사영어학교 1기생 (졸업)

미국 육군지휘참모학교 (수학)

경력

1946/01 -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8/02 - 육군 제1연대 부연대장

1948/11 - 제17연대 연대장

1950/08 - 수도사단 사단장

1950/10 -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 및 육군준장

1951/01 - 육군 제1훈련소장

1952/01 - 제6사단 사단장

1952/11 - 육군 소장

1955 - 육군 제5대 육군훈련소장

1954/06 - 제9사단 사단장

1955/09 -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 및 육군 중장

1956/04 - 제1군단 군단장

1956/09 - 제6군단 군단장

1958 - 성광학원 인수

1959/02 -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1960/06 - 예편 (육군 중장)

1964 - 선인학원으로 법인명칭 변경, 선인재단 이사장

1981 - 선인학원 이사장 사임, 선인학원 국가 헌납

선인학원 건설본부 자문위원장

 

[최초 인터뷰] ‘잘 싸운’ 군인, 白仁燁의 6·25

“李承晩 대통령께 서울탈환 보고하러 갔다가, 불부터 끄라고 혼났지”

글 :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글 : 咸承玟 月刊朝鮮 인턴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사진 : 徐炅利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白仁燁
⊙ 88세. 평안남도 강서 출생. 군사영어학교 졸업(1차). 미국 지휘참모대학 수료.
⊙ 육군참위(소위) 임관(군번 23번), 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및 특무부대장 겸직,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장, 6사단장, 9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예비역 육군중장(1960년 7월).
⊙전 선인학원 이사장.

⊙ 6·25전쟁에서 3차례 부상… 옹진반도에서 부대후퇴 엄호사격하다 ‘고립’
⊙ 한국군 역사상 27세 ‘최연소 사단장’ 기록
⊙ 인천상륙작전 때, 수도사단장에서 상륙작전연대의 연대장으로 직급 낮춰 참전
⊙ 육군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 중공군 개입 후 전선 투입되는 신병 10만명 양성
⊙ “선봉에서 싸우고, 후퇴는 가장 마지막에”

자문 : 南廷屋 박사·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백인엽(白仁燁) 예비역 육군중장의 청년시절 모습은 ‘미소년’이다. 그는 ‘6·25전쟁 영웅’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육군대장의 아우다. 그러나 그는 백선엽의 친동생이기 이전에 ‘용장(勇將)’이다. 그가 평소 가혹할 정도의 교육훈련을 통해 강군(强軍)을 만들었고, 그 결과 6·25전쟁에서 그의 부대가 ‘불패(不敗)’에 가까운 기록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에르빈 롬멜의 전차군단을 격파한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의 ‘전쟁 10계명’, ‘한 방울의 땀으로 한 드럼의 피를 아낀다’ ‘돌격은 사상자를 줄인다’ ‘뒤에서 미는 지휘관은 리더가 아니라 운전수다’ ‘정보를 전술작전의 최우선으로 한다’를 그는 6·25전쟁 기간 내내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6·25전쟁 전사가(戰史家)들은 그를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김종오(金鍾五) 예비역 육군대장, 임부택(林富澤) 예비역 육군소장과 함께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잘 싸운 군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23년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신인 그는 평양 약송국민학교·서울 중동고를 거쳐 일본 기후현(岐阜縣)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민족지도자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경호대장을 지냈다. 광복 직후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의 물결 속에서, 그는 조만식 선생의 ‘밀서(密書)’를 이승만(李承晩) 박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는 원용덕(元容德) 당시 군사영어학교(陸士 전신) 부교장의 소개로 ‘군영(軍英)’을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1대대 부관, 12연대 부연대장, 12연대장, 17연대장, 수도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및 특무부대장, 초대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장, 6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7월 군 생활을 마감했다. ‘참모’보다는 ‘야전 지휘관’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경력들이다.
 
  지난 4월 중순, 기자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백인엽 장군 자택을 찾았다. 올해로 졸수(卒壽,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 아시갔어요?”라고 카랑카랑한 평안도 사투리로 되물을 때는 지금도 전장(戰場)을 호령하는 지휘관 말투였다.
 
  전역 이후 그는 언론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스컴에 나와 잘난 체할 것도 없고, 내가 떠들면 형님(백선엽)에게 누(累)가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6·25전쟁을 치르면서 군인 자식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58년 성광학원재단을 인수, ‘선인학원(善仁學園)’을 설립했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그의 학원설립 이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선인학원이 시·공립화 정책에 따라 인천시(市)로 넘어갈 때까지 학원경영에 전념했다.
 
  백인엽 장군은 6·25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인천상륙작전 때, 수도사단장(당시 대령) 직책을 버리고 17연대장(당시 중령)을 맡았다. 장군 진급의 지름길인 사단장 직책을 버리고, 사지(死地)로 가는 인천상륙작전연대의 연대장으로 종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6·25전쟁 기간 중 세 차례의 큰 부상을 입었다. 그 기간 중 사단장급 이상의 장교 가운데 몸에 적탄(敵彈)의 흔적을 갖고 있는 군인은 드물다. 그는 기자에게 “군인(軍人)은 전장에서 싸워야 참군인”이라면서 6·25전쟁 당시 입은 허벅지와 두부(頭部) 관통상 ‘흉터’를 훈장처럼 내보였다.
 
 
  曺晩植 선생 ‘밀서’ 들고 38선 넘어

이승만 대통령이 백인엽 장군의 모친 방효열 여사(왼쪽 세번째)의 환갑을 맞아 방 여사 가족을 경무대로 초대, ‘금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왼쪽부터 백인엽 장군, 백선엽 장군, 방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변영태 국무총리, 이호 국방부차관.

 

백인엽은 평양에서 진남포로 2km 떨어진 강서군 덕흥리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는 강서군수를 지냈고, 부친 백윤상(白潤相)은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백인엽은 “구한말(舊韓末) 참령(소령)을 지낸 외할아버지가 강서군에 훈련차 군수 집에 유하면서 막내딸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결시켰던 것”이라고 했다.
 
  백인엽은 최규동(崔奎東) 전 서울대총장(6·25전쟁 중 납북)이 설립한 중동학교(중동고)의 한 수학교사 소개로 중동학교로 진학한다. 그는 “이병철(李秉喆) 전 삼성그룹 회장도 중동고 별과를 나왔다”면서 “중동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 기후(岐阜) 비행학교로 갔다”고 했다.
 
  백인엽은 학병출신으로 비행대대에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사흘 만에 귀국한 당시 평양은 이미 소련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애송이’ 김일성(金日成)의 등장으로 평양은 술렁이고 있었다. 조만식 선생은 평남 인민정치위원장이었다. 백인엽은 매형인 조만식 선생 비서...

 전문을 보시려면 프리미엄, 1일권, 캐시로 보기(건별)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월간조선 정기독자는 추가 비용 없이 프리미엄 이용이 가능합니다.  

백인엽 장군의 백의종군과 서울탈환작전

사단장서 연대장으로 전투 지휘

백의종군은 정식 계급이나 직책을 떠나 그보다 낮은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종’에 가까운 신분으로 복무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6·25 때 자신의 계급보다 낮은 보직을 받거나 높은 직책에서 낮은 직책으로 전투에 참가한 사례가 있다.

그중 하나가 개전 이후 1년 동안 3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 중장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2사단장에 임명될 때, “이충무공의 백의종군 정신으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3성 장군의 사단장 임명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또 하나는 전공이 많은 백인엽 대령이 사단장에서 연대장을 한 경우다. 그는 1950년 8월 초 17연대장에서 수도사단장에 임명됐다.

수도사단은 8월 1일 경북 안동에서 철수한 후 청송에서 2개 연대(기갑연대·18연대)가 적의 포위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국방부는 지휘책임을 물어 김석원 사단장을 해임하고 백인엽 대령을 임명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사단장에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인엽을 추천해 재가를 받았다.

최연소(27) 사단장이 된 백인엽은 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전선인 안강~기계에서 북한군 12사단과 766부대에 궤멸적 타격을 주고 이 지역을 사수했다. 이때 수도사단에 패한 766부대는 비학산에서 해체돼 북한군 12사단에 흡수됐다.한편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육군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지휘관 선정문제가 논의됐다.

대통령이 이때도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좋겠다고 하자 국방장관이 백인엽이가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대통령이 좋다고 해서 그가 결정됐다. 그런데 신장관은 사단장을 한 사람에게 연대장하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에게 사단장을 했는데 연대장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떤가. 중대장도 괜찮다. 백의종군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사단장 보직은 장군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17연대와 서울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부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대통령은 신장관에게 육군부대를 유엔군으로 보내되 훌륭한 부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신장관은 백연대장에게 어느 부대를 데리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생사고락을 같이한 17연대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자 정일권 참모총장이 전황상 17연대는 안 된다고 했다. 17연대는 경주에서 중요한 전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차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측면에서 보다 중요한 임무를 위해 17연대 차출이 불가피했다. 이로써 그는 사단장에서 17연대장이 돼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했다.이대통령의 뜨거운 환송을 받은 17연대는 인천상륙에 이어 미7사단 예하로 서울탈환을 위해 잠실에서 도하작전을 실시해 남산을 점령하고, 적의 증원과 퇴로 차단을 위해 망우리에 배치된 후 서울시내로 이동했다.

9월 28일 서울수복 후 17연대가 경무대 경호와 수도경비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고 미군들은 17연대를 ‘서울연대’로 불렀다. 이렇듯 백인엽의 17연대는 서울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결과 백인엽은 장군 진급과 동시 정보국장으로 영전했고, 17연대는 2사단에 예속된 후 저격능선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그 용맹을 과시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2007.09.17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8.06.05 09:35

    첫댓글 ㅎㅎㅎㅎㅎㅎ

  • 18.06.05 09:37

  • 18.06.07 09:18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