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 여행5 - 고베 차이나타운을 구경하고는 걸어서 해변으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다!
2019년 4월 4일 고베 3대 신사의 하나 이쿠타진자 生前神社(생전신사) 를 보고는
일본 전통 정원 소라쿠엔 相樂園(상락원) 을 거쳐 토어 로드 トアロ-ド 를
찾아 보고는 아케이드식 대형 상점가 모토마치 상점가 元町 商店街 를 구경합니다.
차이나타운 난킨마치 南京町(남경정) 에 도착하는데 요코하마와 나가사키등 일본 3대 차이나타운
중에 하나로.... 200미터 길을 사이에 두고 중국 음식과 식재료상 이 밀집한 곳이니, 중앙에
남경정 광장에는 8각정이 서있고 주변에는 닭과 뱀, 돼지등 12지상 조각상 들이 세워졌는데
12 띠와 60간지에 태극과 8괘에 음양오행 등... 중국 문화가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걸 생각합니다.
남경정 광장 에 1915년 부터 영업한 로쇼키 (老祥記 노상기) 식당은 부타망 中華まん
(豚まん)이라고 부르는 돼지고기 만두 를 파는데, 줄이 길게 서 있으니 5분은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으며 주방 안에만 12명 이 쉴새없이 만두를 만드니 놀랍습니다.
그러고는 난킨마치 이웃에 구 거류지 旧 居留地 를 구경하고는 남쪽으로
걸어서 이윽고 해변인 메리켄 파크 メリケンバ-ク 에
도착하니..... 먼저 엄청 큰 물고기 조각상 이 우리 부부를 맞이 합니다.
계속 걸어들어가니 왼쪽이 바닷가 인데 거기에 일왕(천황)의 시 가 적힌
바위 옆에는 "고베항 지진 메모리얼 파크" 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1995년 1월 17일 아와지섬(淡路島) 을 진앙지로 강도 7.2의 한신 지진 이 덥쳐 고베 시민
4천 5백명이 죽고 부상자 1만 5천명, 가옥 파괴 12만동 이라는 큰 피해 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부숴진 해안 방벽 일부를 보존 해 두었는데 그렇다고 무슨 건물이 세워진 것은
아니고 그냥 바닷가에 부숴진 해안벽을 그대로 보존한채... 육상에는
아주 작은 조형물 을 배치해 높이가 아주 낮으니.... 모르고 그냥 지나칠수도 있습니다.
현재 고베 시가지 는 그때의 파괴에서 완전히 새로 복구 가 된지라 이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런 미증유의 대 재난 이 있었는지 조차도 전혀 눈치조차 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그때 참상을 겪은 사람들 은 다를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이 도시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
옛날에 이탈리아를 일주하면서 시칠리아섬의 동부 에 있는 대도시인 카타니아
Catania 에 갔었는데.... 도시 한 복판에 화산 폭발로 인해 참상을 겪어
파괴된 시가지 건물 일부를 전시해 둔 곳을 보고는 소름이 끼치는걸 느꼈습니다.
카타니아 Catania 는 BC 8세기에 건설된 이래 시칠리아 섬 에서 인구 2위 도시로 17세기
애트나 화산 폭발로 파괴된후 18세기에 바로크 양식 으로 재건되었는데 도시가
용암과 화산재에 뒤덮인 횟수는 무려 7번 이었다니 지금 시가지는 8번째로 지어진 것입니다!
특히 1,669년의 화산 폭발 은 도시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무려 1만 2천명의
시민들이 죽었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도시를 재건 했다는데....
“애트나 화산은 카타니아를 만들었고 역사는 카타니아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해진다는데..... 카타니아 는 19세기에
음악가 빈첸초 벨리니 탄생지 로 애트나 화산 관광의 출발지 라고 합니다.
개항 120주년 기념물 로 범선의 돛과 파도를 형상화 한 건물에 배와 항구를
테마로 했으며.... 고베항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는 고베
해양박물관 은 시간이 지나 입장을 못하고.. 붉은색 포트타워 를 바라봅니다.
고베 항구 에는 크루즈선 이 많이 정박해 있으니, 루미나스호 가 막 출항하는
장면을 지켜보는데.... 그 외에 또 다른 배로는
고베 유람선, 파르데메르, 미나토모노가타리, 콘체르트호 등이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왔을때 배 위 갑판 에 까지 올라가 보았던 고풍스러운 범선 은 밤이 되서
안보이는건지, 아님 아예 없어졌는지.... 두리번거리다 왼쪽으로
보니 멀리 바다 건너편에 포트라이너 ポ-トライナ 전철이 붉은색
고베대교를 지나 포트 아일랜드 ポ-ト アイランド 로 들어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건너편에 중앙부두 터미날 이 있고 모자이크
빌딩이며 대관람차 가 그 색깔이 형형색색 으로 바뀌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여기 바다를 넘나드는 대형 선박들을 보노라니 문득 떠오르는게 있으니 몇년전에
신문에 “1915년에 하와이로 간 ‘사진신부’”라는 기사가 실렸으니
한복을 차려 입은 옛날 사진 을 보자니.... 인천에서 배로 하와이 로
가는 도중에 바로 이 도시 고베에 내려서 잠시 쉬는 중에 찍은 사진 들 입니다.
“하와이 사진 신부 란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에 노동 이민을 간 남성과 서로 사진만
교환한뒤 혼인한 조선 여성 을 일컬으니 1910, 20년대에 1000명 가까이
이렇게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갔는데... 그런 사진신부였던 천연희 여사
(1896∼1997)의 자전적 기록이 담긴‘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가 출간됐다.”
“나는 소설가도 아니요, 작문가도 아니다. 우리 한국 여자 사진 혼인해 온 이들이 대단히
일찍 깨었고 살기를 원했지만..... 남편들은 나이 많고 아무 재주 없고
일도 잘 못하는데다 아이들은 많아서 여자들이 살길을 찾아서 빨래숍 도 내고
바느질도 하고 장사는 하려도 밑천이 없어 큰 회사나 청국 사람에게 헌집을 몇해 세내어…”
“‘하와이…’는 천 여사가 1971년부터 1984년까지 남긴 노트 7권을 현대 말투로 옮기고
해제를 달았는데, 진주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여사는 1915년 마우이섬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길찬록 에게 시집을 왔는데,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의 허락과 지원 이 있었고 일제강점기란 식민지 현실 이 있었다.”
“모든 것이 압박과 압제 를 주었다. …제국 정치의 반대자라거나 도모자 라고
하고 옥에 가두고 추달하여 병신 을 만들어 정신병자 모양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을 만들어 버렸다. 그와 같이 자유 없는 나라 백성 은 참으로
불쌍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상처 가 되어 자유 세상을 찾게 되었다.”
“천 여사는 노트와 함께 구술 녹음테이프 24개와 사진, 편지도 남겼으니 소중한 기록을
남긴 하와이 사진신부는 2명뿐 인데, 천여사의 자료는 이덕희 하와이 이민연구소장
주선으로 미국 하와이대 에 기증됐다가 2014년 한국학 중앙연구원 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부두를 뒤로 하고 돌아오다가 30층짜리 고베시청 전망 로비 를
찾으니 수위 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어.... 神戸 市役所 展望 ロビ
(고베시청 전망로비) 24층 전망대 에 올라서는 도시의 야경 을 구경합니다.
특히나 롯코산 에 “KOBE" 라고 글씨가 새겨진게 특이해 보이는데
무슨 전구 를 설치해 불을 밝히는 것인지.....
주변 고층 빌딩 은 물론이고 왼쪽으로는 포트 아일랜드 섬 ポ-ト アイランド
이며 또 오른쪽으로로는 붉은색 포트 타워 를 넘어서....
그 뒤편에 중앙부두 터미널 에 모자이크 빌딩 이며 대관람차
색깔이 형형색색 으로 바뀌는 것이 참으로 볼만합니다.
그러고는 고베시청 전망로비 (神戸 市役所 展望 ロビ) 를 내려와 주변에 꽃시계 를 찾는데
밤이라 어두워 보이지 않으니 결국 포기하고는 고베 산노미야 기차역 으로 돌아옵니다.
교민 (漁民 어민) 이나 와라와라 (笑笑 소소) 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이자카야(居酒屋) 인 시로키야 白木屋(백목옥) 로 들어가는데 몇년전 처음에 이
술집을 보았을 때는“일본옥”으로 잘못 읽었던 적이 있어 그만 쓴 웃음 을 짓는데
술이 오르니‘이준식의 한시 한수’칼럼“백거이의 中隱(중은)”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능숙하니 서투니, 잘났니 못났니 서로 시시비비하지만 / 흠뻑 취해 세상만사 다 잊은들
어떠리 그대 아실 테지, 천지는 공교롭게도 넓고 또 좁아서 / 보라매든 봉황이든
제 흥대로 떠난다는 걸. (巧拙賢愚相是非, 何如一醉盡忘機. 君知天地中寬窄,
雕악鸞皇各自飛.) ―‘술을 마주하고 (대주·對酒)’ (백거이·白居易·772∼846)
“白木 백목”은“시로키”라고 읽지만“시라키”라고도 읽으니, 1868년 메이지유신후
일본 군국주의는 민족주의로 일본에서 백제와 신라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는데
신라(新羅) 는 일본에서는 시라기(しらぎ) 라고 읽으니 음이 서로 유사한 지라!
“新羅(신라)”를 "白木(백목)" 으로 글자를 바꾸고“시라키”라고 발음했던 것이지요?
또 규슈 서북쪽인 사가현(佐賀県) 에 옛날에 한국(가야) 과 중국으로 가는 배가 출항
하던 옛 무역항을 현재는 唐津(당진) 이라 쓰고“가라쓰” 라고 발음하는데...
옛날에는 唐津(당진)이 아니라 아마도“韓津(한진)”이라고 썼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중국과 인더스등 4대 문명 은 말할것도 없고, 6천년 인류역사 에서
수백개 문명 은 저마다 고유 문자 를 만들면서 민족문명 이 발전했는데... 한국과 일본은
문자가 없었으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라, 문자가 필요없을 정도로 나라가 단순 했나요?
고조선 나라를 세웠지만 강역이 작고 행정이 단순하니 문자없이 말로 다스려도 불편함이 없었나?
옛날 한국과 일본은 자기 고유 문자를 발명하지 못했으니 청동기 시대가 도래해서 소규모
읍락 군장 국가가 성립하고도 천년간 문자가 없었으니... 책이나 서류라는게 없이
말로만 이어지다 오랜 세월이 흐른후 중국 한나라에서 문자가 전해지니 漢字(한자) 인데
중국과 한국은 적대국 이라 국경에서는 전투가 그치지 않으니 적국의 문자는 보급 이 더딥니다!
문화 전달은 우호국 일때 순조로우니 372년 前秦(전진) 은 고구려에 승려 순도를 보내 불교를 전하니
소수림왕은 초문사를 지어 불교를 수용하는데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전연은 고구려의 적대국 으로
고구려는 위나라에 이어 전연에게 2번째로 수도 국내성이 함락 되고 왕이 단기로 도망친지라, 적의
적은 우호국이니 전진과 수교 했지만 한나라와 조선, 고구려는 적국이라 한자 전달이 늦았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적국 원수놈들의 문화인 생경한 漢字(한자) 가 띄엄띄엄 들어오는지라
한국과 일본은 자기 고유의 말을 한자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가야 를
뜻하는 말만 해도.....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한(韓) 등인데... 모두 같은 뜻 입니다?
생맥주 나마비루 2잔 에다가 안주겸 저녁으로 피자와 군만두 를 시키는데 술을 못먹는 울
마눌은 주먹밥 “오니기리” 한 개를 시켜 저녁을 떼우며 오늘 하루 빡빡했던 일정에
피로를 풀고는 도요코인 고베 산노미야 2 호텔 東橫 inn 神戸 三ノ宮 Hotel 로 돌아옵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차이나 타운이 있는것을 보면 중국의 위상을 실감케 합니다
차이나타운과 코리아타운의 차이점은....
코리아타운이 있는 나라는 몇나라 안되지만
우선 차이나타운은 전 세계에 걸쳐 다 있고
두번째는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인들이 산다는 것이지요?
코리아타운은 장사만 하고 밤에 다른 지역으로 퇴근하니
일본이나 미국의 교포들은 한국말을 못합니다.
반면에 차이나타운은 실제로 생활하니 중국 본토보다
더 중국적이라는 말을 들으며 중국화폐도 사용하고
영어 대신에 중국말만 해도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지요?
중국문화와 언어를 지키는 것은 이민간 중국인들이
"중화문화에 대한 자부심" 이 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지진 이야기를 보고 듣고 나면 두통이 오는건
막연한 염려와 트라우마 같습니다.
많은 정보 이야기
잘 봤습니다.
일본의 재벌 회장님들이 20~30평대 작은 주택에 살고
60이 넘은 재벌 회장 사모님이 가정부나 운전수도 없이
손수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봐서 회장님 저녁을 차린다는데
이러한 일본인들의 일상과 종교를 이해하자면....
지진, 해일 쓰나미, 화산 폭발, 홍수, 산사태, 태풍등
일본은 사시사철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이니.......
이런 현상으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며
또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이 신사와 불교도인 이유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