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리더의 특별한 삶.
대한민국의 진정한 리더, '공병우' 박사
(1906 ~ 1995)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공병우' 박사의 삶은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로 가득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의사!
최초의 안과 병원 개원!
최초의 쌍꺼풀 수술!
최초로 콘택트렌즈 도입!
이같이 화려한 경력으로 한 때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병우 박사는 돈 버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어떻게 사용할까였습니다.
그런 그의 삶에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눈병 치료를 받으러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와의 만남으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우리의 한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관심을 쏟게 된 것입니다.
이후 공병우 박사는 3벌식 한글 타자기 개발을 시작합니다.
병원도 그만두고 얼마나 온 정신을 기울였던지 사람들은
‘공병우 박사가 미쳤다’며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열정 덕에 공병우 박사의
한글 타자기는 미국 특허를 받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병우 박사의 도전은 멈춤이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한글 타자기도 개발해 내었습니다.
누구보다 한글을 아꼈던 공병우 박사는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도
그 열정을 잃지 않고 한글문화원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좀 더 편리하게
한글 자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였으며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며
프로그램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결과
지금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문서 입력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이 탄생하게 됩니다.
한글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의사로서도 본분을 잊지 않았던 그는
미국에 갔을 때 보았던 구급차를 수입해
전국을 돌며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학교도 세웠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한평생 자신에게는 검소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공병우 박사의 성품은
그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서 써라.”
그의 유언대로 공병우 박사의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죽음은 이틀 후에서야 신문을 통해 알려졌고,
빈소도 없고, 장례식도 없고, 묘지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또 죽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길 바랐던 우리시대의 진정한 리더!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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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에 자음과 모음 외에 받침까지 함께 있는 세벌식 배열 타자기로, 공병우(公丙禹; 1906-1995)가 1949년에 개발한 뒤 미국의 타자기 회사 언더우드(Underwood)사에 생산을 의뢰하여 한국으로 수입한 모델이다.
초성·중성·종성으로 구성된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맞게 타자기의 글쇠를 자음·모음·받침으로 구현하였다. 1950년에 일반에 보급되었고 6·25전쟁 중에는 군에 납품되면서 한글 타자기로서는 최초로 대중화에 성공하였다.
안과의사인 공병우는 1938년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광화문 동아일보 근처)에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 개인병원인 ‘공안과’를 개원한 인물이다.
병원을 개원한 해 눈병에 걸려 병원에 찾아온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1893-1978)의 한글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공병우는 일본어 책을 한글로 번역하던 중 필기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확하고 빠른 작업이 가능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깨닫고 수동식 영어 타자기를 해부하며 새로운 타자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타자기와는 달리 공병우가 개발한 타자기는 가로 찍기가 가능했으며 세벌식으로 자판을 배열하여 타자기 글씨 꼴이 아름답고 실용성이 높았다.
공병우는 활자가 찍히는 곳을 정확하게 고정하기 위해 홈을 이중으로 만드는 쌍초점(雙焦點) 방식을 개발하여 한 방향으로만 개별 문자를 나열하는 영문 타자기와는 다른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 덕분에 공병우 타자기는 타자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며, 손가락에 부담이 적게 간다는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정부가 1968년 7월28일에 자음 한 벌, 모음 두 벌, 받침 한 벌로 된 네벌식 글자판을 표준 자판으로 공표하면서 세벌식 타자기의 입지는 좁아졌다.
첫댓글 아지금의 편리함은 선구자의 노력의 덕분이네요^^
저도 일찍부터 타이핑을 할때
공병우식 3벌 타자기를 사용하다가
4벌식응 사용했었지요.
지금의 컴퓨터는 2벌식에 가까울꺼얘요.
공박사님은 진정 멋진 리더시네요
숨은 공로자 이삽니다.
@샤론 늘 도전하는 멋지신 분
감동받고 갑니다감사드려요
많은 공적이 있으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던 훌륭하신 분이지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하시고 가셨네요
그래요...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한글의 위용을 더욱 나타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와한마디로 멋쟁이세요 최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국민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신분... 정말 멋지죠:
모국에 살고있는 저희보다 공병우박사님의 진정한 리더로서의 특별한 삶에
대해 소상히 알고 계시군요. 한편으론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군요...
선구자 사셨던 공병우박사님의 잊고 있었네요^^*
다시한번 더 경의를 표합니다
샤론님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