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적은대로 수안보면 수회리의 마애비를 찾지 못한 뒤 온천리로 들어왔다. 여기서 탑과 석불을 본 뒤 미륵리사지로 갔지만 편의상 미륵리사지를 먼저 올렸다. 온천리에는 두 기의 탑이 있는데 먼저 탑동다기능회관 앞에 있는 석탑을 찾았다. 온천리석탑(溫泉里石塔)으로 불리는 이 탑은 수안보면 온천리 295-7번지, 온천리파출소(치안센터)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탑동마을에서 수차례 탄원서를 제출한 끝에 지난 2010년 온천리 867번지 현위치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 때 탑동마을에 있었던 소위 대사리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온천리석탑은 많은 부재가 결실되어 있는 상태로 구체적인 층수는 알 수 없지만 3층일 가능성이 높은 석탑이다. 작은 규모의 석탑으로 건립되었으며, 기단부가 간략하게 결구된 석탑이다. 옥개석의 치석 수법이 약간 다른 점이 의문점이다. 이것은 다른 석탑 부재가 올려졌거나,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치석 수법이 다른 옥개석이 올려졌을 가능성 등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고 한다.
탑 바로 옆에 서 있는 온천리 석상(溫泉里 石像) 역시 수안보 치안센터 내에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얼굴의 조각이 비교적 뚜렷한 석인상으로 이목구비는 구분이 가능한데,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으며 입은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옷은 긴 두루마리를 입은 듯하고, 동자 형태의 석인상으로 머리 위에 두 개의 묶음이 있다. 옷 주름은 거의 표현이 없고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무언가를 잡고 있다. 불상이라기보다는 조선시대 민간 토속신앙과 결합한 무덤가에 놓았던 동자형 석상이다. 이 석상 뒤로 보이는 기구에서 운동을 하시던 동네 어르신께서 석탑이 파출소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내력을 들려주셨다.
탑동회관에서 마을 쪽으로 조금 들어가다 봉불사 못 미처 온천리 탑동 삼층석탑(溫泉里 塔洞 三層石塔)이 나온다. 주소지는 수안보면 온천리 853 탑동이다. 봉불사 전 좌측이고, 입구 좌우에 측백나무가 도열하고 있다. 탑은 탑동 개울가에 있는 넓은 암반을 기초로 하여 하부에 시멘트를 마련하여 세워놓았다. 석탑이 원위치인지 불분명하고 심하게 훼손된 것을 후대에 크게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옥개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후대에 새롭게 보강된 부재들로 보인다.
봉불사는 길에서 오른쪽 언덕 위로 바로 올려다 보이며 좁은 터에 법당과 산신각, 석불을 모시는 시멘트 보호각을 만들어두었다. 하지만 현재 봉불사는 폐사가 되어 스러져 가고 있다.
그런 중에 산신각에는 편액이 三仙閣으로 되어 있으니 알 수 없다. 편액 옆 액자에는 ‘산신각’공덕시주자라는 내용이 붙어 있고, 내부에는 산신도와 치성광여래도, 나한도(?)가 걸려 있으니 三聖閣 이 맞을 것 같다. 하긴 이미 스러진 절집 편액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다.
봉불사 석조약사여래입상(奉佛寺 石造藥師如來立像)의 원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봉불사의 창건과 동시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최근에 보수한 시멘트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 140㎝, 어깨 폭 50㎝로 아담한 규모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약간 높은 육계가 있고 나발이 표현되었으며, 이마에는 백호의 흔적이 있다. 얼굴은 원만하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수회리의 서유돈마애비를 다시 찾기로 하고 우리 카페 회원으로 청주에 사시는 푸른바다님께 전화를 드렸다. 푸른바다님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처음 정차를 하고 살펴봤던 마당바위 쉼터의 건너편 쪽에 입구가 있다고 한다. 한편 이 마애비를 다시 보기로 하면서 동선도 꼬이고, 산길은 눈이 덜 녹은 듯하여 석불 2구가 있다는 살미면의 내사리 40번지, 몽선암과 공이리암각바둑판은 포기하게 되었다. 사실 이 비는 선정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끌리는 비는 아니다. 하지만 마애(磨崖)라는 점이 포기하기 아쉽게 만들었다. 내가 현재까지 본 마애비는 모두 합해도 아직 열손가락 이내이기 때문이다.
수안보에서 살미를 거쳐 충주시내 방향으로 진행되는 3번 국도를 타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수안보 온천타운 기준으로 3km 남짓한 지점 왼쪽에 마당바위쉼터가 나오는데 쉼터가 보이자마자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빠져나와야 한다. 나는 한 번 이 길을 놓치는 바람에 더 어려운 답사가 되었다. 마당바위 뒤쪽(동쪽)으로는 하수종말처리장이 있는데 이곳이 내비에 검색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길로 빠져나오자마자 차를 세우면 사진에 보이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왼쪽에는 문화생태탐방로 설명문이, 오른쪽 기둥에는 [마당바위]라는 장소명과 함께 좌측으로는 수회마을, 우측으로는 양문휴게소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어쩌면 수회초등학교를 검색하고 가다보면 더 쉽게 이 장소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회마을의 북단에는 경찰종합학교가 위치한다.(공식 경찰교육원은 충남 아산에 있는 듯하니 이 경찰종합학교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표지판 오른쪽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선택하면 된다.
그리곤 2~3분 정도 걸으면 우측을 중심으로 바위들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약간 왼쪽으로 가는 길이 더 길 같아 보이는데 이 길로 가면 안 되고, 앞으로 난 길을 택해야 한다. 나는 사실 이 길에서 왼쪽을 택하는 바람에 야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바람에 푸른바다님께 다시 전화를 드리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앞서 말한 직진길을 택하면 곧 아래쪽으로 마당바위 쉼터와 하수종말처리장 등이 보인다. 사진의 앞쪽이 마당바위쉼터이고 뒤 왼쪽이 하수종말처리장의 일부다.
이 길은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인데 조금만 더 가면 따로 떨어진 바위가 보인다. 바로 이 바위 앞면에 길이 73~132㎝, 너비 99~142㎝ 크기의 자연석 한 면을 깎아 평평하게 한 후 높이 100㎝, 너비 31.5~37.5㎝ 크기의 장방형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비문은 9×9㎝ 크기의 단정한 해서체로 ‘현감서공유돈선정불망비(縣監徐公有惇善政不忘碑)’라 음각되어 있다.
이제 북으로 올라간다. 살미면 용천리 428-1, 국도변에 자리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 최함월고택(崔涵月古宅) 앞에 차를 세운다.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문장가인 최응성이 살던 옛집이다. 서재로 사용하였다는 염선재(念善齋)와 함월정이라는 정자가 남아있다. 고종 11년(1874)에 후손들이 무릉사를 지어 권상하와 최응성을 제사하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 조금은 겁을 주는 문구가 붙어 있고, 고택 내부를 세세히 살펴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강 찍고 물러났다.
고택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뒤로 정자가 한 채 있다. 1720년경 집 앞에 정자를 지었는데, 제자인 권상하가 최응성의 호를 따서 [문화재청의 자료를 그대로 옮겼는데 아래 플로우님의 지적에 다라 오류임을 알았다. 권상하[1641년(인조 19)∼1721년(경종 1)]는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나중에 스승과 갈라선 윤증을 강하게 비판하는 등 우암의 대표적인 제자라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또 권상하의 생몰년을 최응성과 비교해보기만 해도 최응성이 권상하의 스승일 수가 없으니 조금만 더 확인해봐도 오류를 피할 수 있었으니 게으름이 빚은 오류라 하겠다.] 정자이름을 ‘함월정(涵月亭)’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고택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은 것이라고 한다.
살미면 세성리 150, 임경업 사우(林慶業 祠宇)를 찾는다. 조선 현종(顯宗) 9년(1668)에 창건(創建)되었고, 1984년에 다시 중건(重建)된 사당(祠堂)으로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의 영정(影幀)을 배향(配享)하며 향사(享祠)하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인 충민공임경업영정(忠愍公林慶業影幀)이 사당 안에 있는지 사우 앞에 설명판이 서 있지만 정작 사당은 잠겨 있었다.
사우 옆에는 정려가 한 채 있는데 임경업장군 부인의 충렬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한다. 현장의 설명문은 꽤 잘못된 듯하다. 정문을 내린 연도, 임장군의 부인만인가, 부부 함께인가가 문제다. [디지털 충주문화대전]에는 ‘임경업(林慶業) 장군 별묘 옆에 세워진 건물로, 충민공 임경업과 부인 전주이씨의 충렬 정려각(旌閭閣)이다.’라고 해놓고, 나중에는 ‘충민공 임경업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의 무고에 몰려 처형된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서거 100일 만에 할복자살한 정경부인 전주이씨의 충렬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고 쓰고 있다.
정려각 내의 현판에는 붉은 판 위에 흰색 글씨로 ‘유명총병조선국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시충민공임경업 증정경부인 전주이씨충렬쌍성지려(有明總兵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愍公林慶業贈貞敬夫人全州李氏忠烈雙成之閭)’라 기록되어 있고, 뒤편 검은 판 위에 흰색 글씨로 정려 전교(傳敎)를 써서 걸어두었다. 이 내용 중 ‘雙成’이 현지 설명문대로 지명인지, 아니면 임경업의 충(忠)과 부인의 열(烈)을 아울러 이루었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뒤의 의미로 보았다.
향토대전에 따르면 시기의 경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충주시지』의 임경업 충렬문 내용에 의거하면 1848년(헌종 14)에 명정된 정려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현지의 안내판에는 1668년(숭정기원후 상지 12년) 11월 15일 건립되었다고 적혀 있다. 임경업이 복관(復官)된 것이 1697년(숙종 23)이라고 했을 때 현지의 안내판이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임경업 장군 별묘가 1697년 건립된 것과 비교하여도 1848년 이후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정려 자체에도 연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위에 인용한 글귀 뒤에 ‘崇禎三戊申’이라 되어 있으니 있는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무신년이라는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1848년이 맞을 것 같다. 설명판은 종중에서 세운 것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낡기도 많이 낡았으니 고증을 거쳐 정확한 내용으로 바꿔주면 좋겠다.
살미면에서 나와 이류면 팔봉서원지로 향하는 중 수주팔봉을 본다. 수주팔봉은 서쪽 이류면 문주리 팔봉마을에서 달천 건너 동쪽의 산을 바라볼 때, 정상에서 강기슭까지 달천 위에 여덟 개의 봉우리가 떠오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달천의 뒤쪽(동쪽)에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다리 건너 달천을 앞에 두고 봐도 정확히 어떤 봉우리가 8봉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수주팔봉 앞에 잠시 멈춰선 뒤 충청북도 기념물 제129호 충주팔봉서원지(忠州八峰書院址)에 잠시 들렀다. 충주 팔봉서원은 조선시대 명현(名賢)인 이자·이연경·김세필·노수신 등 4현을 모신 서원으로 후세교육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팔봉서원은 조선 선조 15년(1582)에 건립되었고, 현종 13년(1672)에 나라에서 ‘팔봉서원(八峰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다가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8년 전통양식으로 복원하였다.
문주리에 들어온 것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8호 충주문주리석불좌상(忠州文周里石佛坐像)을 보기 위함이었다. 문주리 사지는 고려시대 건립된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가정집 같은 작은 절이 세워져 있다. 석탑과 석불 주변에서 다량의 기와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창건시 전각(殿閣)이 건립되어 사찰로서 신앙과 예불 등 종교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석불은 남아 있지만 오층석탑은 최근에 반출되었다고 한다.
보호각 안에 모셔진 불상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표현되지 않았다. 얼굴에 비해 코는 크고 입은 작으며 눈은 반개한 모습이다. 두 귀는 짧고 어깨는 다소 약간 위로 치켜진 모습이며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수인은 항마인을 결하고 있다. 대좌는 8각의 하대석과 중대석만 남아 있으며 불상 근처에 광배가 놓여 있다.
불상 앞에는 누군가 훔쳐가 버린 문주리 오층석탑(文周里 五層石塔)의 잔해가 쓸쓸히 뒹굴고 있다. 탑은 일부 부재가 결실되고 파손되기는 했지만 단층 기단에 5층의 탑신부로 구성된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훔쳐간 문화재들을 얼마나 받고 어디에 넘기는지, 그렇게 훔쳐온 문화재를 사는 사람은 누구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문화재 설명문 인용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충주디지털문화대전]
첫댓글 저는 봉불사 약사여래를 답사 동선에 포함시키고도 그냥 돌아왔지요.
ㅋ 가끔은 리스트에 넣어 두고도 깜빡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없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핑계로 다음에 한 번 더 갈 수도 있지요~~~
이류는 외할머니 친정이라 젊을 때 가보았죠...능골이라는 곳,,산도라지가 지천였었는데....
외할머니 친정이면 진외가인가요? 전 할머니 외할머니 친정은 가 본 기억도 없습니다. 그립습니다, 유년 시절이...
외외가라고 하죠...진외가는 할머니 친정....
할머니 친정은 청원군 옥산면 소로라는 곳 바로 근처 국사봉 아래 강감찬 장군이 계신답니다....
아, 그렇군요. 중요한 거 한 가지 배웠습니다. 저는 둘 다 진외가라고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권상하는 최응성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