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모에 지역의 외부에 있는 블러드 무어 평원의 로그캠프에서는 이주를 위한 작업이 한창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달 전 어느 초라한 행색의 기사가 나타나서 로그 일족을 그녀들의 사원과 마을에서 쫓아내고 주살했던 안다리엘과 몬스터들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데브란트와 와리브의 상단이 떠날 때만 해도 캠프 곳곳에 세워져있던 천막들은 거의 다 철거된 상태였고 타워가드에도 더 이상 보초가 서있지 않았다.
캠프 곳곳을 누비며 바쁘게 일하는 로그들의 모습에는 하나같이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캠프 한 가운데에는 붉은 머리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를 가진 여자가 그런 로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 북쪽 방벽의 목책 해체는 어떻게 되고있나? 음... 그래? 좋아, 그쪽으로 자매 다섯을 더 보내겠다. 래리샤, 신전을 치우러 먼저 보낸 사제들은 도착했지? 그래, 알았어. "
바쁘게 로그들의 보고를 받으며 이쪽 저쪽으로 명령을 내리던 로그 일족의 리더 카샤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문득 캠프 오른쪽 한편에 임시사원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임시사원이 있던 장소도 대부분 이주를 하느라 황량하기 그지없었지만 작은 천막 하나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천막 앞에는 로그의 종교, 보이지 않는 눈의 자매교의 제사장 아카라가 늙은 몸을 이끌고 이주준비에 바쁜 로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샤는 그런 아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제사장인 그녀는 가장 먼저 신전의 정리와 제사준비를 하기 위해 벌써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아카라가 아직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고있는 이유를 카샤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침 고개를 돌린 아카라와 카샤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아카라에게 걸어갔다.
" 아카라, 몸은 괜찮으신 가요? "
세월의 흔적이 깃든 주름 그러나 여전히 심안의 눈으로 로그의 정신을 수호하는 제사장 아카라가 대답했다.
" 카샤, 시위에 걸린 바람의 수호자이자 가장 빠른 시위의 화살이여. 오늘같이 기쁜 날 그런 걱정은 말아요. "
카샤는 막상 더 할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아카라도 굳이 할말이 없는 건지 묵묵히 그런 카샤를 보고만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다른 로그들을 바라보던 카샤가 아카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 아카라, 그녀가... 그녀가 돌아올까요? "
그녀는 누구일까? 아카라는 카샤의 말에 반문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와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왜 그곳에 갔는지 아는 건 아카라 자신과 카샤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얼마전 신께서 우리들에게 아직 그 지팡이를 거두지 않았음을 깨닫게한 한가지 기적을 보았습니다. "
아카라의 늙고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하나의 기적을 믿는 사람은 또 다른 기적 또한 믿을 수 있지요. "
" 그러나, 아카라. 그녀가 간 곳은... 우리 또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실패했던 곳입니다. 주변의 몬스터 따위는 차라리 쉽지요. 그 주변의 마법장과 결계로 그곳은 있어도 있지 않은, 지도에는 나와 있어도 갈 수가 없는 그런 곳이 되 버렸단 말입니다. "
카샤가 갑자기 아카라에게 등을 휙 돌렸다.
" 아카라, 심안의 눈으로 빛이 되시는 로그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마음은, 아직 페... 페라포세가 살아있다고 믿는 당신의 마음은 잘 알지만 나는 나의 자매들을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죽으라고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이 진정으로 가장 빠른 시위의 화살이라고 해도. "
카샤가 고개를 돌려 아카라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물기가 어려 있었다.
" 이런 내가 한심한가요? 페라포세였더라면 안다리엘에게 밀려나 여기까지 쫓겨나지도 않았을 거고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떠나서 안다리엘을 죽인 기사에게 진작 도움을 줬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
아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카샤를 지켜보던 아카라는 천천히 카샤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카샤, 로그의 긍지인 나의 딸.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당신을 믿고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
카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아카라가 손을 내밀어 그런 카샤를 포옹하였다.
" 기다립시다. 내 심안의 눈이 미치지 않는 그곳에 찾아간 그녀가 소식을 가져올 때까지... 그녀는... "
제 3장. 소서리스
The Sorceress
대장로 쉐라캔이 물었다.
"그대는 영원히 잔 에수의
딸로서 살아갈 수 없으며
그대의 영혼 또한 존엄과
자비의 엘덴의 땅에 복속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가?"
"예."
"엘덴의 여식이 우리의
품을 떠나 이방인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 so be it..."
-잔 에수 제11차 프라임 미팅 회의록에서-
어둠.
인간의 지혜가 본격적으로 싹튼 것은 어둠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이후였다.
불로 빛을 만들어 내면서 비로소 인간은 해가 진 이후에의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점차 그 시간에 익숙해짐에 따라, 탐식과 주거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 자신과 남을 나누고 자신을 관찰하는 자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간을 현명하게 이용할 줄 아는 자들은 태초에 신으로부터 주어진 근본적인 힘, 무력의 범위를 넘어서 또 다른 힘의 근원을 발견했으니 그것이 곧 마법이었다.
인간의 마법이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이백여년 전 죄악의 전쟁 (Sin War) 이후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멸하고자 하는 마법사들이 만든 호라드림 (Horadrim)이 설립되었던 B.C. 1010 년경이었다.
지금은 역사서에서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마법사 뷔리엣 조단 (Vjieret Jordan)이나 탈 라샤 (Tal Rasha) 그리고 나의 선조 제라드 케인 (Jared Cain) 같은 사람들이 살아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들은 수많은 업적을 남기며 동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마나에 몸담고자 하는 현재의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목표가 되어 왔는데 이들이 남긴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당연히 지옥의 세 군주, 바알-메피스토-디아블로를 소울소톤 (Soul Stone)에 봉인한 것이다.
바알과 메피스토 그리고 디아블로는 대혼돈 (Great Conflict) 즉 '죄악의 전쟁' 이후 지옥에서의 위엄과 권위에 도전을 받게되어.....
그러므로 인간이 마법을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칸다루스와 웨스트마치 그리고 대륙 전체를 통틀어 마법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은 칸다루스의 극동에 위치한 잔 에수 (Zann Esu) 라는 것이 여러가지 근거에 의해 확실시 되고있다.
잔 에수의 여사제들은 존엄과 자비의 여신 엘덴 (El Den)을 그들의 수호신으로 신봉하는데 이들은 반드시 성스러운 처녀야만 하며.....
" 데카드 케인... 과연 현자 케인이란 말이 틀리지 않구나. "
긴 갈색머리를 머리 뒤로 늘어뜨린 여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읽고있던 데카드 케인이 저술한 책을 덮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주황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책을 덮자 곧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뽀얗게 피어오른 먼지도 곧 주변의 어둠에 묻혀 버렸다.
그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현자 케인의 책을 읽는 곳은 어느 허름한 마을의 다 쓰러져 가는 집안이었다.
마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황량한 그곳은 완전한 암흑 속에 덮여 있었고 그녀가 있는 집안에서만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 밖에는 과거에는 우물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음산하게만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었고 그 동쪽으로 무너져버린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어느새 집 밖으로 나온 그녀는 돌무더기를 지나쳐 폐허가 된 건물로 걸어갔다.
주변은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그녀가 손에 들고있는 램프의 불빛 외에는 칠흑 같은 암흑뿐이었다.
폐허 앞에 도착한 그녀는 몸을 숙여서 끝부분이 삼각으로 된 널찍한 목판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램프를 땅에 내려놓고 손으로 목판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자 끌로 새긴 자리에 불에 달군 쇠붙이로 지져서 쓴 듯한 글자가 보였다.
" 트리스트람 제일의 라이징 선 여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그덴 (Ogden)이라... 여기가 라이징 선 테번이었나 보구나. "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며 램프 안의 불꽃이 흔들거렸다.
흔들거리는 불빛 사이로 이제까지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마을 곳곳에 시나브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체를 띄고 있지만 군데군데 부패해서 뼈가 들여다보이고 썩은 내장을 질질 끌고있는 좀비와 아예 뼈만 남은 해골들이었다.
그것들은 죽어가는 인간의 신음소리 같은 묘한 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 그렇다면 길을 제대로 찾아왔구나. 이 앞길로 곧바로 가면 캐타콤 (Catacomb 지하묘당) 이 나오겠지. "
그녀는 그녀 뒤에서 다가오는 십여 개의 괴상한 형체를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좀비들과 해골들이 그녀를 둥그렇게 포위한 채 한발 두발 그녀에게 접근해 왔다.
" 이제 가볼까."
그녀는 손에 든 판자를 내려놓고 램프를 집어들었다.
" 우우우..."
좀비와 해골들이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프로스트 노바! (Frost Nova) "
그녀의 머리 위에서 하얀 기운이 생성되더니 그 기운은 온몸을 감싸면서 그녀의 발 밑에서부터 하얀빛과 바람이 되어 둥그렇게 퍼져 나갔다.
" 크아아아. "
하얀빛을 맞은 좀비들과 해골들이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펑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터져 버렸다.
유일하게 그중 덩치가 큰 좀비 하나가 얼어붙은 채로 비틀거리며 다가와 손에 쥐고있는 커다란 해머를 그녀에게 휘둘렀다.
" 텔레포트. (Teleport) "
그녀의 몸이 사라지더니 좀비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좀비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 좀비는 살아있을 적에는 제법 덩치가 좋았었는지 키가 크고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 빛은 아니었지만 두터운 팔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가 잠시 좀비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 대장장이의 해머로군요. 당신이 이 마을의 대장장이 그리스월드군요. "
좀비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님 들을 수 없었는지 여전히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그녀에게 가려고 했다.
" 뭐... 뭐냐? 너...너 이 녀석, 어서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 아니면 아까 그 팔라딘을 쫓아가던가. 난 네 녀석 동료였잖아? 귀신이 됐으면 착한 귀신이 되란 말야.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서 그 포션이나 한병 던져. "
이번에도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쿠오듀크는 료겐의 시체(?)가 있는 쪽을 쳐다보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 너... 언데드(Undead)가 된 거냐? "
료겐의 입안에서 우드득 이빨가는 소리가 났다.
" 내놔라. 포션. "
쿠오 듀크는 여전히 의심스런 표정으로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서 힐링포션 한병을 꺼내 료겐이 있는 쪽으로 던져 주었다.
료겐의 손이 뻗어 나와 포션의 뚜껑을 열고 몸 곳곳에 뿌리는걸 보자 쿠오 듀크는 그제서야 료겐이 살아 있는걸 알고 안도했다.
" 하하, 너도 꽤나 질긴 목숨이군. "
쿠오 듀크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도 힐링포션 한병을 열고 상처 주위에 뿌리고 남은 포션을 마셨다.
역시 남은 포션을 마셔버린 네크로맨서, 료겐도 천천히 일어나서 옷의 먼지를 털어 냈다.
료겐은 자신의 조끼 가슴부분과 옆구리 사이로 길게 찢어진 자국을 보며 말했다.
" 이게 살려줬지. "
료겐이 자신의 조끼 양끝을 잡고 양팔을 들어 올리자 가벼운 나무토막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하얀색의 작은 물체들이 료겐의 몸 주위를 돌고 있는 게 보였다.
쿠오 듀크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았다.
" 그 하얀 조각들... 그게 뭐지? 꼭 뼈같이 생겼는데. "
" 본 아머. (Bone Armor) 데미지를 어느 정도 흡수하는 일종의 방어기술이다. 녀석의 일격에 적중 당하기 전에 캐스팅 했지. "
아까의 데브란트와의 일전이 생각난 듯 료겐은 입술을 깨물었다.
쿠오 듀크는 꽤나 신기한 듯 가까이 다가오더니 료겐의 몸 주위를 돌고있는 뼈조각들을 만져 보려고 했으나 료겐이 눈쌀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머쓱해져서 뒤로 물러섰다.
" 흠흠, 근데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오늘은 너나 나나 움직이긴 힘들 테고. "
료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 루트 골레인으로 가자. "
" 뭐라고? 이봐, 타모에로 가서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로그들한테 사례비 좀 받아내는 게 우리의 동업계획이었잖아? 어째서 루트 골레인으로 가자는 거지? "
료겐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 그 녀석이 루트 골레인으로 갔다. "
" 뭐? 그 데브란트인가 하는 그 팔라딘이? "
" 그래, 내가 정신을 잃기 전 그 녀석이 중얼거리는걸 들었다. 더군다나 이 근처에 큰 도시는 거기 뿐이야. 상단이라면 반드시 거쳐갈 곳이지. "
" 흐음, 그런가. "
쿠오 듀크는 뭔가 찜찜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료겐이 비웃음을 띄며 그런 쿠오 듀크를 보고 말했다.
" 그 팔라딘과 다시 만나는 게 두려운가? "
" 뭐야? "
" 두렵냐고 했다. "
쿠오 듀크는 잠깐 료겐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 노려보더니 곧 표정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 불 카서스 (Bul-Kathos)의 후예들은 두려움이란 감정이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비기를 숨기고 있는 건 너 뿐만이 아니라고. "
"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
료겐의 반문에 쿠오 듀크가 인상을 찡그렸다.
" 뭐가 문제인지 몰라서 묻는 거냐? "
" 적이 두려운 게 아니라면 그 적을 쫓아가자는 데 뭐가 문제냐? "
쿠오 듀크가 일어나며 벌컥 화를 냈다.
" 야, 우리 꼴을 좀 보고 적을 쫓자는 소리를 해라! 너랑 나는 벌써 이주일째 매일 몬스터들의 얼굴이나 보고 어쩌다가 짐승고기나 뜯으며 차가운 맨바닥에서 자고 있다고. 오죽하면 우리가 산적질까지 했냐? 여기서 타모에까지는 하루거리고 거기에 가서 몬스터를 잡아주면 사례비 정도는 뜯어낼 수 있을 텐데 왜 더 먼 루트 골레인까지 생거지노릇을 하며 가자는거야? "
그간의 여행이 꽤나 고생스러웠는 듯 쿠오 듀크가 열변을 토하고 식식거렸다.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쿠오 듀크의 말을 듣고있던 료겐이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 말 다 한 거냐? "
" 그래, 다 했다! "
" 그럼 설명하지. 첫째, 아까 네가 공격한 여자들은 로그였다. 그들 중 누군가가 로그캠프로 돌아가서 너와 나에 대해 알려줬다면 어떻게 하지? "
" 뭐, 뭐? "
" 둘째, 우리는 타모에에 상당히 근접해 왔는데도 요 며칠동안은 몬스터들을 통 못 보고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
료겐은 쿠오 듀크의 멍한 시선을 '아니오'로 여기고 계속 말을 이었다.
" 그건 몬스터를 컨트롤하는 데몬 피어 (Demon Fear)가 없어졌거나 아님 몬스터들이 전멸되었단 얘기다. 그 팔라딘 녀석은 로그캠프에서 왔지? 아마 그 녀석이 안다리엘을 죽여서 데몬 피어가 사라졌기 때문에 너랑 나는 몬스터 구경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
" 따라서 안다리엘과 몬스터가 없어진 이상 로그캠프에 가더라도 너와 내가 사례금을 탈 조건이 없어졌다. 이제 이해되나? "
쿠오 듀크의 입이 또 다시 떡 벌어졌다.
" 그럼 그 팔라딘 녀석이 혼자서 안다리엘을...? "
" 녀석의 반쯤 죽은 듯한 꼬락서니와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실종, 결론은 그것뿐이지. "
쿠오 듀크는 자못 감탄했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 히야,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인데. 그런 줄 알았으면 아까 사정보지 않는 건데 말야. "
료겐이 팔짱을 끼고 쿠오 듀크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 따라서 네가 싫더라도 갈곳은 루트 골레인뿐이란 얘기다. "
쿠오 듀크가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젠장, 그렇군. 우라질, 또 생거지 노릇을 하며 거기까지 가야되나. "
마침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인상을 쓴 채로 둘러보던 료겐이 힐끗 쿠오 듀크를 보고 쏘아 붙였다.
" 흥, 누가 너더러 술집에서 돈을 탕진하라고 했냐? "
" 카악! 술 한잔도 못 마시는 너에게 그딴 소리를 들을 필요 없어! "
" 흥. "
료겐은 쿠오 듀크의 항의를 간단히 코웃음으로 묵살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 너 저쪽에 마차가 있던 데로 가봐라. 아까의 소동으로 뭔가 흘리고 간 게 있을 거다. "
쿠오듀크는 료겐의 말에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차가 있던 쪽으로 가려다말고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 그런데... 넌 뭐할 건데? "
" 난 불을 피우겠다. "
쿠오듀크가 알았다는 듯이 가려다가 다시 료겐을 돌아보더니 궁금한 기색으로 말했다.
" 이봐, 근데 그거 먹지는 못하는 거냐? "
료겐은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며 쿠오 듀크를 쳐다보았다.
쿠오 듀크의 손가락은 자신의 몸 주위를 빙빙 돌고있는 본 아머의 뼈조각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료겐이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이 간단히 손을 움직이자 본 아머가 사라졌다.
쿠오 듀크는 료겐의 말하지 않고도 강력하게 표현된 '못 먹어' 라는 대답에 얼굴이 벌개졌다.
" 어서 가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도 떨어져 있을 거다. "
음식이란 단어가 나오자 쿠오 듀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마차가 있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료겐은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섬주섬 모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리고 쿠오 듀크가 있는 쪽을 한번 살펴보더니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 엘덴의 이름으로 불꽃의 정화가 개화할지니... 파이어 볼. "
나뭇가지 더미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타다닥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료겐은 상념에 잠긴 표정이었다.
" 불꽃의 마법을 쓰는 네크로맨서라... 쿠쿠쿠, 재미있군... "
료겐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주와 죽음을 다루는 네크로맨서가 화염계열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료겐의 상념은 마차가 있던 곳에서 들려온 쿠오 듀크의 기쁨이 넘치는 큰 목소리에 깨져 버렸다.
" 이봐. 네 말이 맞았는데. 그 상단 녀석들 급하게 떠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이야. 여기 빵도 있고...어, 이건 와인인데! 크하하, 얼마만의 술이냐?! 하하하. "
료겐은 상념을 방해받아서인지 눈쌀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 얼른 가져오기나 해라. "
쿠오 듀크는 콧노래를 부르며 땅에 떨어진 음식물들과 다른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다가 문득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