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의학적으로 전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
" 이내지 삼주 정도로 봅니다만 장담하긴 어려워요. 여러가지 합병증세로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치명적인 것은 뇌혈관인데 젊은 사람이라면 수술이 어렵지 않으나 , 어르신 연세에 수술은 무리입니다. 연세가 있으시니
자연스런 노화로 받아들이시고 댁에서 모시기를 권합니다. "
병원에서 가까운 큰누나 집으로 모시자고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모두들 체념하고 받아들이는데, 어찌하여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 더 살고 싶어. ' 목에 겨우 붙은 숨에 실려 나온 노인의 쇳소리가 내 목을 메이게 하누나.
참 모진 목숨이다. 여든 해 동안 무슨 영화를 누리고 살아 왔다고, 무슨 영화를 더 보겠다고 아직도 삶에 미련이 남았을까.
아니면 반백의 자식이 아직도 미욱하여 차마 아직은 자식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그도 아니면 자식에게 회한이 남지 않도록
반포보은의 시간을 더 주려 함인가.
거센 풍파와 질곡의 세월을 지나며 꽃답던 홍안은 주름잡힌 거친 살가죽만 남고, 총기로 빛나던 눈동자는 이미 힘을 잃었는데....
세파에 맞서 육남매를 지켜내는 대가로 여인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불하고, 악다구니와 외고집마저 잃은 끝에 마침내는
이리도 작고 볼품없는 노인으로 누웠는데..... 노추와 미망밖에 남지 않은 육신에 흉한 자국을 더하는게 과연 옳은 일일까......
" 수술합시다. 절차를 알려 주세요. "
나의 단호함에 의사도 간호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런 반전에 누나들과 동생들도 할 말을 잃고 잠시 침묵했다.
" 니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
큰누나도 결심을 보탰다. 형제들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으나 불안한 기색을 떨치진 못해 보였다.
어차피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까지 고통의 나날이 될 터, 불같은 노인의 성격상 차라리 당장 숨이 끊어지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런들 저런들 회한이야 남겠지만, 내 스스로 위안삼을 구실이라도 마련코자 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 무엇보다 미뤄두고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다. 너무나 긴 세월을 이런 저런 핑계로 그냥 흘려보내 마침내는 이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십팔년 전 아버지를 떠나 보낸 후, 나는 나와 어머니의 운명을 얼마간 예견하고 있었다. 속모르는 어머니는 결혼을 재촉
했지만, 내게 있어서 결혼이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실연의 빌미였다. 그 빌미는 내 자신이 스스로 생산하고 제공했었다.
천륜과 인륜을 들먹이면서 모친 봉양은 내게 결혼의 유일한 전제요 조건이었다. 결혼후 내 예견은 너무 빨리 현실화 되었고 ,
쉽게 봉합될 수 없는 고부갈등의 해결책으로 나는 분가를 선택했다. 작지 않은 소동 끝에 일년 간의 분가후 합가를 약속
하였으나 ,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동생들 마저 둥지를 떠난 뒤 홀로된 노인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지만,
온갖 핑계와 아내의 완강한 저항이 늘 노인을 실망시켰다. 혈액형 마저 똑같은 쥐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각각 당신들의
자식에 대한 맹목적적인 사랑 마저도 약속이라도 한 듯 닮아 있었고, 오로지 자식외에는 한 치 건너 두 치 이상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식마저 같았다. 이로 인한 충돌에 양보와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집착이 또다른 사랑에 대립하면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은 전도되고 배타적 증오로 남는 법.....
가치관이 너무나 똑같은, 그래서 이율배반적인 입장의 두 여인은 애시당초 양립과 공존이 불가능한 만남이었을까.
돌같이 단단하던 노인에게 노화의 정도는 급작스레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인슐린 주사액 구입 횟수가 늘어 갔고 ,심허혈증에
고질적인 관절염이 노인을 괴롭혔다. 수화기를 통하여 노인의 가뿐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야 했고 ,
종종 급한 회사일로 곤란한 처지에 빠지곤 했다. 회사내 동년배 간부사원 몇몇이 가족 동반 모임을 수년간 유지해 왔었다.
그 중 한 친구의 말이 우리 부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 사정이야 다 있겠지만 병든 부모 봉양치 않는 장남은 인간도 아냐. 나는 그런 놈들은 친구로 두지 않아. "
그 친구가 우리집의 사정을 알거나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분명히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친구를 내 편에서
피하게 되었다. 노인의 고집을 무시하고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나의 자존심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막내 동생을 불렀다.
" 미안하다. 이렇게 까지 돼서 면목없구나. 네 처라면 잘 모실거다. 노인네는 내가 설득하마. "
동생 내외는 내게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받아 들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큰오빠 그늘에서
성장한 내 처와는 달리, 대가족 가운데서 성장한 제수는 노인을 달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유산이라고 기대할만한 것 없이
병마만 지고 사는 노인을 동생내외는 불평없이 정성으로 모셨다. 가끔 동생집을 찾을 때면 넉살좋은 제수는 불평이라 할 것도
못되는 푸념을 늘어 놓곤 했는데 , 노인의 마음은 늘 큰아들을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은행원인 동생은 부천에서 춘천으로,
다시 대전으로 임지가 바뀔 때마다 이사하면서 노인의 병 수발과 병원 출입을 내색없이 감당해내고 있었다.그렇게 칠팔년이
지나도록 나는 바위덩이 같은 부채를 가슴에 안고 겉으론 평온을 가장하며 지냈다. 종종 모두의 평온은 누군가의 살신성인에
바탕하지만, 그 평온을 깨는 것은 순수성이 훼손된 작은 욕심에서 비롯된다.
아내는 공인 중개사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서둘러 개업했지만,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생내외의
섭섭해 함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내의 제안으로 노인을 모시기로 했다. 노인은 동생내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짐보따리를
꾸려 득달같이 상경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 몇 개와 미리 마련해둔 수의를 담은 가방이었다. 나는 애초부터 노인을 위해
비워 두었던 방에 옷장이며 TV등 가재도구를 새로 장만하였고, 노인은 어린애처럼 들떠 보였다. 참 알 수없는 노인의 속내다.
평생 누려보지 못한 평온을 근래 칠팔년간 잘 누려왔건만 , 어찌하여 뻔한 갈등과 불화의 앞날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 내가 큰아들 옆에서 죽어야 남들 앞에서 자식의 면도 서는 거지...."
노인의 입버릇에 장단 맞춰서 아내는 편히 모시겠다고 약속했고 고부간에 언제 갈등이 있었던가 싶었으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늘 불안이 잉태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단은 항상 티끌처럼 사소한 것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등산길에 내가 사온 향깊은 더덕이 문제의 티끌이었다. 노인이 애비 몫이라고 따로 담아 두었던 것을 아내가 아이들의 채근에
못이겨 내놓았던 것이다. 서로 섭섭함을 토로하던 두 여인은 지난 일까지 들먹이며 섭섭함의 강도를 더해갔고, 이야기의 꼬리는
오년전 십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면서 서로 격해지고 있었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여자들의 상대에 대한 서운한 기억은 때로는 한으로 비화되기도 하여, 아마도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기 전에는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시시콜콜한 숨어있던 이야기들에 나는 시시비비를 분별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두 여인은 내가 끼어들
눈꼽 만큼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고 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원망의 대상이 필요할 때만이 내 존재의 의미가 있는
듯 했다. 냉랭한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노인은 오간단 말도 없이 짐보따리와 수의 가방을 챙겨 떠났다. 노인의 행방을 쫒아
여기 저기 수소문 하였으나 헛된 노력일 뿐이었다. 한 식경 넘어 애태우게 하더니 노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뜻밖에도 성남
셋째 누나 집이었다. 자존심 강한 노인은 대전 막내네로 되돌아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맏아들을 욕보이기 싫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필.....
저마다 제잘난 줄 아는 자식들을 마다하고,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된 모지랭이 자식에게 향한데에는 육신의 호사보다는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선택하고 싶었을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으랴. 못났다 구박하고 키운 자식,
기구한 팔자의 의지가지없는 자식에게 애틋함이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맏아들로 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등걸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더니.... 나는 처참한 심정이었으나, 핑계거리를 자가발전시키며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의 고집은 완강했고,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번갈아 들락이며 수발들고 불편을 살피는
것이었다. 노인의 심사는 차라리 평온을 찾아 갔으나, 당뇨가 심해지고 기력이 많이 쇠하고 있었다. 병원 출입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셋째누나에 대한 형제들의 원망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웃 주민과의 마찰로 말썽이
빚어졌다. 이번에는 여동생이 모시겠다고 나섰고 , 나는 또 죄인 된 심정으로 그러려므나 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회사는 부도를 맞았고 나는 갑작스레 직장을 잃었다. 차라리 잘됐다며 대학 후배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거대 규모의 기획제안형 복합단지 개발 프로젝트로 그야말로 나의 전문분야였다. 우리측에서 제공한 초기 기획안은
유관기관을 충분히 만족시켰고,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다. 남은 인생의 승부처라 여기고, 그렇게 일년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공모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며 상대가 누구라도 우리의 적수는 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세상사를 인간의 눈으로 모두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프리드만의 말이던가? 우리가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뿐이라고. 하늘은 우리의 희망을 저버렸다. 뜻하지 않게 다른 프로젝트와
관련한 유관기관의 부정 사건이 터졌고, 대대적인 사정이 이어졌다. 불똥은 우리 프로젝트에 튀었고 심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경제적 궁핍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고 있었다.
깊은 절망감 속에서 낭인처럼 방황하는 동안, 당뇨 증세가 나타났고 치아는 성한 게 없을 지경이 되었다. 몸무게가 갑작스레
현저히 줄면서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나는 재기를 모색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간 몇군데 회사로 부터의 스카웃
제안을 모두 거절했던 터였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무엇보다 노인의 걱정어린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대기업의 임원 자리와 지방회사의 서울지사장 제의가 들어왔다. 월급쟁이로 되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자존심을 지킬
만큼 한가로운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지사장 자리를 선택했지만 이번에도 나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때마침 지금의
회사로 부터 제의를 받고 석달만에 사직했다. 노인은 신통력이라도 있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주말이면 노인은 거실에 나와
현관 문쪽을 향해 앉아 나를 기다렸다. 일주일 내내 집안에 갇혀 갑갑해 하던 노인에게 내 차를 타고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것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내 차를 처분하고 회사로 부터 차량을 제공받아 사용하던 나는 사직과 함께 차량을 반납한 상태였다.
노인은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 한번 줬으면 그만이지 도로 뺏아가는 법이 어딨냐고 억지를 부리며 분해 했다.
다음 주에 새 차를 갖고 오겠노라며 달랬지만 , 차 살 돈이 어딨냐며 걱정부터 앞섰다. 열흘 후에 새 직장으로 출근한다는
말에도 거짓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 그리 늙었냐며 탄식했다. 어려워도 세끼 밥은 챙겨 먹고 다니라는 둥 노인에게
나는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였다. 제발, 이젠 그만 둘 때도 됐잖아. 나는 노인의 집착이 원망스러웠다. 노인은 이불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만원 짜리 지폐로 팔십만 원이었다. 아마도 노인이 가진 전부일 것이다. 나는 참았던
울분이 폭발하여 봉투를 내동댕이 쳤다.
" 도대체 얼마나 날 더 괴롭힐거유? 이까짓 거 하루 저녘 술값도 안돼. 제발 좀 그만해. 이제 놔 줄 때도 됐잖아. "
그렇게 내가 노인에게 패악질을 해댄 며칠 후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인이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 대기중이라고 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반신 반쪽 마비가 후유증으로 남았지만 이 또한 응당의 대가 지불일 것이다.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지만 노인의 집착과 억척스러운 삶의 궤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큰누나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염치없지만 어쩌랴. 노인은 원망스런 눈빛이지만 그리 될 수밖에 없음을 모를리 없으니 체념할
것이다. 노인의 마지막 염원을 애써 외면해야 하는 내 처지가 처량하다. 맏자식에 대한 집착이 집요할수록 , 당신과 자식의
삶을 속박하고 불행을 배태해왔음을 삶의 끝자락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하니 딱하기 그지없다.
정년퇴직을 앞둔 매형과 큰누나 내외가 전에 살던 아파트의 재건축으로 인해 임시 거처로 이사한 직후였다.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킨 후 적적하던 내외는, 역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셋째 딸네가 재건축 기간동안 생활비를 아낄 요량으로 처가살이를
자청하자 기꺼워했다. 주말이면 맏 딸과 둘째 딸 식구들까지 합세하여 집안은 아이들로 가득찼고 잔치집처럼 시끌벅적했다.
목회자와 권사 집안답게 찬양과 기도가 함께했다. 그런 조카 딸들과 사위들의 한결같은 효심과 우애가 대견하여 흐믓했다.
나의 발길이 큰누나네로 잦아졌다. 노인은 퇴원후 수술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치매증상을 보이더니 곧 안정을 되찾았다.
대신 하반신 마비로 앉은뱅이가 되었고, 큰 딸과 셋째 외손녀의 수발은 정성스러웠으나 노인은 미안한 마음에 부담스러워 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발음이 어눌해져서인지 노인은 말수가 현저히 줄었지만, 내가 들를 때마다 노인의 눈은 반짝였고 닫혀있던
말문을 틔웠다.
그 날도 노인은 거실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눈을 반짝였다. 셋째 조카딸이 내가 소파에 앉기도 전에
불평을 늘어 놓았다 .
" 말씀만 하시면 될 걸 왜 자꾸 힘들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집안에 냄새가 진동하잖아요. "
노인을 남겨두고 잠깐 외출한 사이 노인은 배변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럽혀진 바지와 기저귀를 처리하려고 노인은
앉은뱅이 걸음으로 욕실까지 혼자 힘겹게 움직였을테고 , 그럴수록 거실 바닥을 더럽히고 역한 냄새를 온 집안에 퍼지게
했을 것이다.
' 오늘은 네가 경망스럽기 짝이 없구나. 네가 네 공을 스스로 깎으려느냐. 그런 일은 따로 조용히 얘기해도 되잖아.'
노인은 민망한 시선을 어찌하지 못하고 내게 바짝 옆에 앉기를 청했다. 내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 챙피해 죽겠어. 나 좀 데리구 가. "
" 자식 손주들 앞에서 뭐가 챙피해 ? 그래두 여긴 돌봐줄 사람이 많잖아. "
" 그래두 싫어. 외손주 사위들이야 남이나 마찬가진데 챙피하잖아. 진작 그냥 죽었어야 했는데...."
내 처지가 어떠하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 노인이 오죽 자존심이 상했으면 저리 할까. 하지만 노인을 달래는 수밖에....
무거운 마음을 쉬 떨쳐버리지 못한 채 며칠이 흘렀다. 뜻밖에도 맏이로부터 걸려온 전화 목소리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 삼촌, 할머니 모셔 가세요. 우리 엄마도 쓰러져 병원에 계세요. 왜 우리 엄마가 , 환갑 노인네가 이래야 해요? 자식이
몇 씩이나 되면서? 삼촌이 정 못 모시면 시설에 위탁하면 되잖아요. 월 이백만원이면 좋은데 많아요. 삼촌 혼자 부담되면
형제들끼리 분담하면 되잖아요 "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무엇보다 노인이 옆에서 듣고 있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분노가 치밀었으나 애써 눌러 참았다.
' 네가 지금 나를 얼마나 능멸하고 있는지 아느냐? 너는 누구의 딸이며, 네 어미는 누구의 딸이더냐? 네 짧은 효심이 네 어미를
얼마나 욕보이는지, 욕보일지 모른단 말이냐? 너도 자식을 둘 씩이나 두고서? 네 자식이 네 어미에게 할 짓을, 네가 지금 하고
있구나. 효심 깊은 딸아, 부디 네 어미를 시설에 보낼지언정 내겐 권유하지도 강요하지도 말아라. 네가 외람되이 안다고 나설
일이 아니다. 네가 아느냐? 네가 아직 갓난애일 때 고등학생이던 삼촌이, 첫 조카가 너무 반가워서 너무 예뻐서 너를 업고
청주 시내로 친구들에게 자랑하러 나갔단다. 이제는 너를 예뻐할 일도 가르칠 일도 없을 것이다. 맹세코 없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깨닫게 되리니. 그러나 , 내가 내 어머니를 아는 이상으로 너 또한 네 어머니를
똑바로 알고 효를 행하라 하는 것이 마지막 가르침이었으면 싶구나. '
' 오늘의 네가 어찌 있느냐. 피붙이들을 다 먹여살리며 떵떵거리고 살던 서울 중림동 많은 재산을, 피땀으로 일군 모든 것을 ,
인민재판에서 반동분자로 몰린 지아비의 목숨과 바꾼 냉철한 판단과 두뇌를 타고난 여인이니라. 진저리처지는 서울을
도망쳐 나와 고향으로 향한 굶주린 피난길에서, 길 옆 밭에 버려진 참외 한 덩이 조차 주인이 따로 있을 것이라 하여 차마
손대지 못했던 지고지순의 여인이었니라. 산통중에도 , 거르는 일없이 따뜻한 밥을 아랫목 이불속에 묻어놓고, 언제 올지
기약없는 산판으로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던 지어미였니라. 손수 불 때서 방 덥히고 물 데운 후 자리에 누워, 당신 손으로
탯줄을 잘라 핏덩이를 받아냈던 모성이었니라. 세상에서 제일 잘난 어린 아들이 홍역중에 매정히도 모정을 뿌리칠 때,
마지막 순간까지 손가락 깨물어 어린 것의 입안으로 선혈과 눈물을 함께 쏟아 붓던 한많은 모성이니라. 뒤늦게 다시 얻은
귀한 아들, 혹여 또 역신이라도 눈치챌까 두려워 두 돌이 지나기 전엔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던 속깊은 어머니였니라. '
' 땅 한 뙤기 없는 고향 떠나 낯설고 물선 타향 청주에서, 억세게 한 푼 두 푼 모은 목돈을 피붙이 같이 믿었던 계주에게
두 번이나 떼이고 눈물을 흘리며, 선한 의지에 등돌리는 인간의 배신에 치를 떨면서 강해질 수 밖에 없었던 본디 여린
여인이었니라. 유난히 춥고 메말랐던 1964년의 혹독한 겨울, 청주 서문시장 대화재때 그나마 가진 모든 것을 잃고 하늘의
무심함에 통곡하면서도, 청주 시내를 관통하던 철길에 나가서 죽자던 아버지의 좌절에 , 온몸으로 맞서 육남매를 지켜낸
이미 강해진 어머니였니라. 여인의 몸으로 방방곡곡 오일장을 떠돌며 세파에 거칠게 부딪히고 풍찬노숙의 세월을 보낸지
몇 해인지 아느냐?
인간의 배신에도 하늘의 무심함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네 어미로 부터 막내 까지 어느 자식도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지켜낸
한없이 넓은 품을 가진 어머니니라. 안락하고 편하다한들 네가 어찌 감히 시설운운하느냐. 시설이 자식들에게 또 너희에게
편할지언정, 노인의 마음에도 편타 할쏘냐. 너희가 나를 원망할지언정 어찌 할머니를 핍박하느냐. '
' 네가 네 할머니의 강퍅함을 탓하고 원망하였느냐? 너 또한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을 모르느냐? 네가 네 어머니에 대한 작은
사랑에 눈멀어 , 네 어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외면하는구나. 궁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궁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신 마태복음의 말씀을 나보다는 네가 더 열심히 더 독송할 것이다만,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네가 진정으로
구하고자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부디 부지불식간이라도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닮지는 말아라.'
노인은 여동생네로 되돌아갔다. 여동생은 다시 노인을 위해 열심히 성당에 나가 기도하고, 기회있을 때마다 멀리 나주까지
가서 성수를 길어와 노인이 음용하고 몸을 정히 하도록 하였다. 나는 성수의 효험은 믿지 않았으나, 여동생의 그러한
지극정성의 효험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넉넉치 못한 여동생네 형편이었건만 ,성긴 밥상이나마 늘 정성과 기도가 함께한
때문인지 노인의 심사는 평온을 되찾았고 건강상태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게 호전되었다. 옛적의 예지는 이미 잃었으나
눈동자는 어린애처럼 순수해졌고 . 수술후 길게는 반년의 여생을 예상했던 나의 생각을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노인은 이년 반
넘게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았다. 노인은 여동생이 집을 잠시라도 비우면 틈을 놓치지 않고 내게 전화했는데, 통화의 내용은
늘상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 똑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언제 올래? 몇 시에 올래? 언제 온다구? 몇 시에 온다구? 그래, 꼭 와라.
그러한 전화는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때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는데 ,종종 회의중의 갑작스런 수신은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매주 주말이면 토요일과 일요일중 하루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인에겐 내게 전화하는 것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요 즐거움이었을 터였다. 노인은 늘 일찌감치 현관쪽을 향해 앉아 기다리다가 내가 들어서면 눈을 반짝이며
손을 잡아 끌었다. 한참동안 어린애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 손을 번갈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나선 어김없이 차를 타고
나들이 하기를 재촉했는데, 뒷 트렁크에 휠체어를 싣고 나면 습관처럼 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시냐 물었고 노인은 아무데나라고
습관으로 답했다. 나는 주차가 불편하지 않고 휠체어를 움직이기 편하며 사람들로 크게 붐비지 않는 남한산성, 올림픽 공원이나
탄천변을 자주 찾았다.
남한산성 유원지의 이곳 저곳을 천천히 둘러보던 우리는 산성 카톨릭 성당에 이르렀다. 노인은 삼십여년간의 기독교인에서
여동생의 인도로 카톨릭으로 개종한 직후였다. 내가 노인을 찾을 때마다 노인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 제발 교회 좀 나가라. 왜 맘이 변했니, 전에는 열심히 다니더니.... 니가 교회나가는거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 "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은 너무 바빠서 어렵지만 나중에 그러겠다고 얼버부리며 순간을 벗어나곤 했다. 어린 시절 ,우리집에선
철마다 무당 주문 소리와 꽹과리소리가 밤 늦도록 울렸었고 , 나는 창피한 생각에 집밖에서 배회하며 끝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다가 어느 무렵인지 노인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부터, 더 이상 창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뻤었다. 샤머니즘이든
기독교든 카톨릭이든 어차피 노인에겐 기복 신앙의 다른 형태일테지만 , 노인에게 그나마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신앙에 대한 철학이나 성경교리의 이해가 다 무슨 소용인가 .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라 하지 않던가.
아직도 사바에서 세속에서 방황하는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가. 번뇌와 방황을 인간의 의지로
끊으려는 몸부림은 얼마나 부질없고 가련한 것인가. 나는 노인을 위해 헌금하고 촛불을 밝힌 후, 감히 고개들어 바라볼
수 없는 절대자를 향한 어색한 기도를 올렸다.
" 고맙구나. 고맙다. "
노인은 참으로 감격한 듯했다. 노인으로 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은 평생 처음인 듯하다.
" 어젯밤 꿈에 니 아부지가 거지행색으로, 산판에서 돌아오던 그 모습으로 나타나선 배고파! 배고파! 하잖아. 너무 늦게 믿어서
천국에 못갔나?.... "
" 꿈은 반대라잖아. 성경에도 너희중에 누구라도 나종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종되리라 하셨잖아. 아버지 진심으로
회개하고 가셨어......이미 주님 영접하고 천국을 알고 가셨는데 뭐......아버지 보고싶으셔? "
" 곧 만날텐데 뭐...... 거기서도 따뜻한 밥 해줄 수 있을까 ? "
살아 생전 그닥 금슬이 좋았다 할 수는 없으련만 , 인연의 끈은 도대체 무슨 실로 짜여져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이어가도록
질긴 것인가.
" 수의가 곰팡이 슬지 않았나 모르겠다......"
" 십년 넘었나 ?..... 좋은 걸로 새 옷 해드릴테니 걱정마셔. "
며칠째 한의원 출입을 하며 물리치료를 한 때문인지 한결 나아지긴 했으나, 나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허리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신장기능의 저하가 원인으로 한약 복용과 병행 치료중이었다. 어금니 하나가 덜렁거려서 음식 저작에 심한 불편을
호소하던 노인과 치과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토요일의 진료 마감시간에 쫒기듯 겨우 치과에 도착한 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치과는 건물의 이층에 있었고 나는 노인을 안고 올라가야 했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노인을 안고 오르던 나는
계단 중간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여동생의 도움으로 겨우 이층에 올랐을 때, 애써 고통을 숨기려던 나를 지켜보던 노인이
혀를 끌끌찼다.
" 어쩌다 뼈만 남은 지 에미를 번쩍 들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냐, 벌써 ? "
이런 모습은 보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노인은 돌아오는 내내 걱정스런 눈빛이었고 나는 괜시리 화가 치밀었다.
" 니 나이가 몇이지 ? 많이 늙었다..... 하긴 니 아부지가 쉰 일곱에 가셨으니......나이들면서 어찌 그리 니 아부지와 똑같냐,
얼굴도 목소리도.... "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내겐 엄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부자간에 살가운 대화의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우등상장이나 백일장 대회에서 상장을 타왔을 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충북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을 때, 동네 어른들을
다 불러 놓곤 내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었다. 동네가 떠나가도록 쩡쩡거리는 목소리로 웃으며 호기를 부리다가 가끔은
알 수없는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 조차 낯설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었다. 아버지를 닮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내가 아버지의 고독과 고뇌를 이해하게된 것은 정작 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새 나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 회사일이 힘드냐 ? 집짓는 회사냐 ? "
" 큰 건물도 짓고 공장도 짓고 도로도 내고 그래. "
" 그런 공사 일은 힘들잖아. 나이들어가면서...... "
" 나는 회사에서 아주 높은 사람이라 그런 힘든 일은 안 해. 사무실에서 직원들한테 시키기만 하면 돼. "
" 거짓말 마, 그런게 어딨어....... 월급 많이 받니 ? 오백만원 받니 ? "
" 높은 사람이라 아주 많이 받아. "
" 거짓말. 근데 왜 집 팔았어 ? "
" 새 집 샀잖아. 더 큰 집으로. "
" 거짓말 마.......방이 몇갠데 ? "
" 전에 살던 아파트하고 똑같이 네 개지만 훨씬 넓다니까. "
" 거짓말.......데려가서 보여줘. "
" 인테리어 공사 끝나면 보여줄께. "
노인은 연신 거짓말이라 하며 믿지않는 듯 하면서도 입가에 흐믓한 미소를 띄어갔다. 도대체 언제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으려나. 가이없이 이는 연민이 울컥하게 했다.
코발트빛 하늘엔 옅은 새털구름이 간간이 드리우고 태양은 끝없이 높았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의 흰머리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탄천을 따라 살랑이는 바람이 무르익은 봄의 내음을 실어다 주고 있었다. 얕은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잉어 무리들이 다투듯이 튀어 올랐다간 힘찬 자맥질을 하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잘 조성된 화단으론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떨어진 꽃잎들이 살랑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놀러나온 아이들과 젊은 부모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흩어지는 허공에는 생명의 역동이 넘치고 있었다. 천천히 휠체어를 미는 나는 그러나 왠지 서글퍼졌다.
햇빛에 눈이 시리더니 목이 메어왔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 이런 날 가면 얼마나 좋을까....꽃 피고 새 울고 화창한 날에.....자식들한테도 좋고....."
노인의 혼잣말이 한 숨에 섞여 나왔을 때, 끝내 시야가 흐려졌다.
" 애비야, 정아한테 따뜻하게 해줘라..... 내가 모진 짓을 많이 했다...... 부모 일찍 여의고 부모의 정이 뭔지도 모르고
자란 걸 두고.......불쌍하잖아....."
나는 잊고 있던 뜻밖의 이름을 듣고 또 한번 울컥했다. 결혼 즈음에 촌스럽다고 아내가 바꿔 부르게된 이름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노인이 그렇게 부르는 의미는 무엇일까. 노인의 생각은 처음 며느리를 만나던 때로 돌아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 가실 때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드셔? 왜 진작 그러지 못하고....."
정말 이제라도, 남은 시간 동안에라도 해원할 수 있다면....... 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큰누나가 노인을 찾는 발길이 끊어진지 몇 달이 흘렀다. 여동생 집으로 노인을 찾았던 큰누나가 사소한 일로 여동생과 충돌이
빚어졌고 , 노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는 내 집 발걸음을 하지말라는 여동생의 악다구니를 들은 후 부터였다.
" 가는 길에 큰누나 집에 들를까? 본지 오래돼서 보고싶어 할텐데..."
" 싫어. 애들 잔뜩 와 있을텐데....."
가슴이 저렸으나 노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유월 들어 궂은 날이 잦아졌다. 몇 주 째 바깥 나들이를 못한 노인에게 날 좋을 때 꼭 모시겠노라 약속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오빠, 엄마가 쓰러졌어요. 드신 걸 다 토하구....이번에는.... "
여동생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래, 이번에는 힘들겠지. 마지막이겠지.
병상의 노인은 가뿐 숨을 몰아 쉬며 힘겹게 눈의 촛점을 모아 나를 올려다 보더니 내 손을 청했다. 허망한 눈빛,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손. 이제는 이렇게 밖에는 대화할 수가 없겠지. 제발 고통없이 주무시기를....그렇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궂은 수발은 간병인에게 맡겼으나 우리 형제들은 번갈아 들락이며 병상을 지켰고 , 나는 매일 이른 퇴근으로 병원으로 직행했다.
새벽에 출근 준비하러 갈 때까지 나는 간병인과 교대로 병상을 지키며 , 잠깐씩 차에서 눈을 붙이곤 했다.
노인은 열흘 넘게 모진 숨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나 숨소리는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나는 고향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친과 합장 계획을 밝히고 동네 인심을 잃지 않도록 모든 것을 넉넉히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에게 수능모의고사를
앞둔 아들을 급히 데려오도록 이르고, 이모와 외가에도 임종전 인사를 청했다. 큰누나네 대가족이 함께 왔다.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는 노인을 붙잡고 큰누나는 서운하고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 엄마, 나 보기 싫어? 왜 외면해 ? "
" 뭐 하는 짓이야? 의식없는 노인을 붙잡고...."
나와 둘째 누나가 큰누나를 떼어냈다. 막내 동생네가 대전에서 급히 상경했다. 오늘 밤 늦게나 내일 이른 새벽이겠지.
지친 듯한 내가 안스러웠는지 큰누나가 집에 가서 잠깐만이라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오자 청했다. 일 치르자면 그러는게
좋겠지. 여동생네와 막 상경한 막내네를 남기고 모두 큰누나네 집으로 향했다. 늦은 저녘을 먹고 샤워를 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가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여동생은 높고 빠른 목소리로 기도하고 있었고 제수는 내게 자리를 내주며
울먹였다.
" 가셨어요. 방금 전에...."
큰누나는 오열하며 무너졌다.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삼십분을 못 참다니...임종하는 자식은 따로 있다더니, 그래야만 했나?
잘 가소서. 원, 한, 자식 걱정일랑 모두 내려 놓고 편히 가소서.
남안성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진천쪽으로 접어들자 도로변 벚꽃은 절정을 지나 바람에 떨어진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고, 길옆
과수원엔 미백의 꽃들이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멀리 또 가까이 파스텔톤 산들이 나란히 앉은 위로 새털 구름이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 낯익은 풍경 , 뒤에서 경적을 울리거나 말거나 나는 속력을 늦추고 천천히 쏟아지는 햇빛속에서 환청을 듣고 있었다.
' 꽃 피고 새 울고 화창한 날에........ 이런 날 가면 얼마나 좋을까. '
그런 날 다 지나고 장마지던 날 가신 노인이 남긴 작은 손가방속에, 끝까지 남아 있던 쓰지 않은 여권. 유효기간이 훨씬 지나
십칠년이나 된 여권을 노인은 끝까지 지니고 있었어. 말레이지아로 부임하며 살 집 구하고 자리 잡히는 대로 해외여행 하자며
미리 만들어 주었던 것이 , 중도 귀국으로 끝내 빈 약속이 되어 버렸지. 빈 약속이 어디 그 뿐이랴. 새 집 보여 준다던 약속,
교회 나간다던 약속, 아내에게 따뜻한 모습 보여주겠다던 약속........
남겨진 여권처럼 끝까지, 끝까지 붙잡고 기다렸을테지..... 하염없이.
가슴속에 서늘한 바람이 일더니 , 속절없이 꽃잎을 떨구며, 세월을 떨구며 의지 가지를 흔드누나, 늘 늦어버린 채로.....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樹欲靜而 風不止 )
자식이 봉양코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子欲養而 親不待 )
흘러가고 나면 쫒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往而 不可追者 年也 )
나가시면 뵙지 못하는 이 부모라네 (去而 不見者 親也 )
부디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 후기 ) ; 글을 쓰면서,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중단편집 '남도사람'의 첫머리에 실렸던 '새가 운들 '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노인이라 부르는 그의 냉정한 시선을 닮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몇 번인가 목이 메어 와 냉정을 되찾기 까지
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차라리 그 처럼 삼인칭 화자로 돌아설까도 생각했으나, 남이 아닌 내 목소리여야 한다는 생각에
일인칭을 고수하기로 했다. 보다 진솔한 고백을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더 용기를 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새가 운들 '에 이어 연작 ' 눈길 '이 나왔듯 , 나도 몇 편의 연작글을 졸필이나마 더 써야 할 것 같다.
< 벽암 >
첫댓글 눈시울이 뜨끈 뜨끈 해지네,,~~돌아가신 울엄마가 불현듯 마구마구 보고싶네....
누구에게나 사모곡은 애절한 것인지..? 그 애절함은 글로 옮겨 보는이의 눈물을 자아내는 홍묵이의 능력에 경탄!!
'모두의 평온은 누군가의 살신성인에 바탕을 둔다.. ' 큰며느리로 살아온 제게 가슴 쿵하는 부분의 글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줄 알았고,어느샌가 글속의 노인네를 닮아버린 어머님을 보면서 마음편치 않은 요즈음이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놓을 수 없습니다. 어미가 자식에 대한 집착은 곧 삶의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는 청주에 내려가서 어머님과 목욕하러 가야 겠습니다.
깜짝 ! 수열이 영부인 신원장님이시군요. 지극히 사적인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람있는 어버이날 보내세요.
홍묵아! 이제야 네가쓴글을 읽는구나...어찌 그리 절절한지...7남매의 장남인 나인데...1977 년 여름 새벽 교회에서 기도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워 지는구나...
바삐 지내는가 보구나. 사업 번창 기원하지만 이제 너무 욕심부리지는 말어라. 건강 챙기고.....미국 가 본지 오래돼서 너 보러라도 한번 구실을 만들어야 할텐데....
친구야,욕심은 내려놓은지 오래일세..네가 온다면 만사 제쳐놓고 몇일 쉬지뭐...지나온 얘기 오래도록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