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 1968년 전주 출생.
* 1993년 전태일 문학상에 시 「지리산에서」 외 9편 당선.
* 시집 :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정오가 온다』, 『호랑나비』
<<황규관 시인>>
싸움의 끝/황규관
내게 싸움 중의 싸움이라면
하굣길 동네 여자애들 괴롭힌다고, 아랫마을 형에게
겁 없이 대든 일이다
구석에 몰려 되게 맞았고, 나는 그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코피를 흘리며
동네 뒷산을 혼자 넘어와서
강줄기를 바라봤었다
지금도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소한 싸움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게 맞다
모든 일에 이해관계가 생기고
힘의 우열을 남몰래 재보게 되고
하물며 아내하고 싸울 때도
작은 방에 처박혀 책을 읽는 척하는
새끼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래서는 어떤 싸움도 더러워진다
전리품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자리를 바꿔 앉기 위해 싸우고
싸움 이후를 먼저 생각하며 싸우는 일은
그래서 역겨운 것이다
기쁨도 설움도 내 것으로 하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싸움을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싸움 자체가 두려워졌다 싸움 이후에
열세 살 적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의 변주곡/황규관
지금껏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빚더미 가득한 집 싱크대는 아직도 줄줄 샌다
나는 그 원인을, 막힌
배수구에 버린 물이 역류하는 것이라
추측은 하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역류하는 건 고작 구정물뿐일 테니까
가난에도 문양이 있는 법이다
지금 겪는 이 시간은
어두컴컴하게 막힌 배수구와도 닮았지만
내 심장은 꺼지지 않은 사랑이
아직 움켜쥐고 있다
가지 못한 길이 남아 있는 오늘 밤에도
꽃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번민은 목마른 가뭄에도 우북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쁨이 내게는 있다
아침마다 꿈에서 울고 가는 새여
떠나버린 음악이 남긴 상흔에 드는 비용을
나는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가난한 걸음으로 강가를 걷기로 했다
혼자만 듣는 신음을 더 앓기로 했다
죽이지 못해서 죽었다/황규관
죽을 만큼 아파봤지만
죽지는 않았다, 죽음은
언제나 다른 이의 몫이었다
아파도 죽지 않은 죄가 깊었다
타락과 착취와 무능은 죽지 않고
꽃잎 같은 웃음이 죽었다
4월의 찬 바다에서
대신 죽었다
아프면 죽었어야 했다
아프면 죽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 시푸른 목숨들이 죽었다
아픈데 죽지는 못해서
앳된 손가락들이 꺾였다
국가의 냉담한 눈동자 앞에서
철철 울면서 죽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죽을 만큼 아파봤지만
죽지는 못했다, 죽음을
떠넘겼다 죽음을
방관했다 죽임을
살려뒀다
그래서 죽었다
죽이지 못해서 죽었다
죽임을 죽이지 못해서 죽었다
다림질/황규관
일요일 밤마다 다림질을 하는 건
순전히 다음날 출근을 위한 일이지만
그래도 더러는 지겨워서 게으름도 피우지만
바지나 셔츠의 구김은
아내가 세탁기로 빨래를 한 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밥 버는 일, 새처럼 쓰린 걸 물고 와서
아이들 앞에 달게 내놓는 일이 결국은
계통 없는 구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요일 밤마다 쭈그려앉아 하는 다림질은
지난 시간의 굴욕을 황급히 손사래치며
반듯하게, 아무렇지 않게 펴는 일이다
물을 뿌리고 안감이 접히지 않도록
뜨거운 다리미를 지그시 눌러 미는 일은
또 한주일 동안 접혀질 구김을 미리 길들이기 위해
남몰래 치르는 비겁한 의식인 것이다
구김을 품는 만큼 들리는 물소리를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 구김 사이, 먼저 것과 최근 것 사이
만난 사람과 만날 사람 사이
우글대는 거짓과 번민에 뜨거워지지도 못하면서
옷이 싸구려라 다림질이 힘들다고 짜증만 낸다
일요일 밤에 나는 그렇게 타락해간다
아무도 모르게 작아져간다
겨울강/황규관
바다에 가까이 와서야 허락된 게...
바람에 몸을 맡긴 영혼이라니
믿을 수 없는 건
차라리 버리지 못한 내 신념이다
새떼들 상류 쪽으로 까마득히 날아가고
강안은 또 부서지느라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을 허락하고 말았지만
흐름을 멈춘 듯한 세상에도
견딜 수 없는 심연은 있는 것,
나는 눈앞의 격량을 너무 오래 바라며 살았다
그러나 겨울 강은 바다에 가까울수록
침묵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 위로 많이 가난해진 저녁놀이
먹먹하게 내려앉고, 드디어 압전!
그러므로 사랑을 잃은 노래여
기억이 아득해져버린 겨울 강에서
뜨거운 숨을 쉬어라
어제보다 깊은 수심(水深)을 가져라
겨울강은 모든 목적을 버리고
경계없는 바다가 되어가고 있다
새로움이 우리를 가두었다/황규관
새로움이, 새로움이
우리를 가두었다
촛불이 우리를 가두었다
미래가 우리를 가두었다
언어는
파도의 끝자락을 모르는 모래가 되었고
당신의 긴 머릿단은
내 뺨을 떠나
광고판 안에서 혼자 출렁이고 있다
사막처럼 웃고만 있다
노래가 우리를
폴리스라인 안으로 몰아내었다
우리의 질주를
우리의 광기를 막아버렸다
새로움이
평화가
첨단이 우리를, 피의 색깔을, 옹이 닮은 눈빛을, 하현 같은 손가락을
가두어버렸다
우리 안에 우리를 가두어버렸다
꽃잎으로부터
강기슭으로부터
황야로보터
폭풍우로부터
개기일식으로부터
품어야 산다/황규관
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주듯
품어야 산다
폐지 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 온 느티나무 그늘이
품어주고,
아기가 퉁퉁 분 어머니 젖가슴을
이빨 없는 입으로 힘차게 빨아대듯
물새의 부르튼 발이
휘도는 물살을 살며시 밀어주듯
품어야 산다
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 배달하는 여자의 입김으로
동이 트듯
품는 힘으로
안겨야 산다
탄생/황규관
강물 앞에 서면 물결이 되고
숲에 들면 나무가 되는 순간이 있다
어깨를 들썩이며
모든 시간이 울먹이고 꽃잎이
바람이 되는
어찌할 수 없는 노래가 있다
멍든 가슴이 깨질 때 목마른
짐승이 밖으로 뛰쳐나와 들판을 달릴 때
언어가 조각나는
여리디여린 몸뚱이가 있다
절정은 사막인데
사막이 피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싸움과 변명과
누적된 신음이 켜질 때
사랑과 믿음과 고독에
모두를 맡길 때
미지의 심연이 반짝이는
찰나가 있다
어두운 물질에
웃음이 번지는 기적이 있다
오어사/황규관
가버린 건 시간이었고
계곡에서 흘러오는 것도 시간이다
대웅전 옆 배롱나무 꽃빛 따라
건너야 할 물길 앞에서도
나는 자꾸 후미였다
망설이며 외로웠다
가버린 건 사랑이었고
먹구름처럼 다가오는 것도 사랑이다
욕망이란 한낱 부유하는 풍문이라는 듯
몸부림을 치고 난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언제나
지나간 사랑과 다시 오는 사랑 사이였다
가버린 건 꿈이었고
아직도 물가를 서성이는 그리움이 찾아왔다
꺼지지 않은 마음 위로
늙은 잉어가 입을 벙긋거릴 때
깨달음은 게으른 중의 장삼 자락이었다
오류가 내 생활이었다
이십 년 동안
오어사,
변하지 않은 건 물빛만이 아니었다
변해버린 건 단청만이 아니었다
아픔이 부쩍 는 고독 또한 빛나고 있었다
밥/황규관
이게 다 밥 때문이다.
이런 핑계는 우리가 왜소해졌기 때문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참 맑은 하늘을 보며
해방이란 폭발인지 초월인지, 아니면 망각인지
내가 내 맥을 짚어보았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그리운 동무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우리를 영영 떠날지도 모르지만
아들아, 밥은 그냥 뜨거운 거다
더럽거나 존엄하거나, 유상이든 무상이든
밥을 뜰 때 다른 시간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
정신도 영혼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게 다 밥 때문이다
더 먹어라, 벌써 비운 그릇에
한 숟가락 덜어주는 건
연민이나 희생이 아니다
밥은 사유재산이 아니니
내 몸을 푹 떠서 네 앞에 놓을 뿐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나무 아래서 걸어 나오니
아직도 지평선이 붉게 젖어 있다
패배는 나의 힘/황규관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아픈 세상/황규관
없는 사람에게는 늘 아픔이 있다
먹구름 잔뜩 품은 하늘이
언제나 천둥을 만들어내듯
지상의 눈동자에 휘두를 번개를 깊이 품고 있듯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랑도
아픔이거나 깊은 흉터다
허리에 침을 꽂고 엎드려 있는데
먹고살기도 힘든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중년 여자의 서글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픔을 낫겠다고 약도 먹고
침도 맞는 거겠지만
아픔은 항상 어디선가 샘솟는다
아니, 아파서 산다
청춘을 불로 지진 사랑이
식지 않은 분화구가 되어
더러는 아픔을 빛나게 증명하듯
사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프고 아파서 아픔이 웃을 때까지
천천히 가는 길이다
공장 밖이 위험하다/황규관
공장 밖이 위험하다
시너와 휘발유가 가득 쌓인 공장보다
웃음과 활기가 넘치는 공장 밖이
늙으신 어머니가 보내준 택배 수화물이
기다리는 공장 밖이 더 위험하다
차별과 주야 맞교대와
푼돈 같은 급여와 늘 실적을 을러대는
멈추지 않는 라인 앞에 서면
차라리 고통을 잊을 수 있는데
공장 밖만 생각하면 식은 땀 나는 악몽이다
이게 임금노예가 되어 버린 징표라고
명징한 언어를 내 심장에 쏟아붓지 마라
공장 밖은 욕망이 매매되고
거듭되는 실패와 그 다음의 구걸과
폐수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포클레인이 지나갈 재개발과
협잡과 투기와 탐욕이 넘쳐나고 있지만
시너와 휘발유는 공장 안에 있다
지게차와 공구상자도 공장 안에 있다
오랜 교대근무로 빚깔이 변한
몸뚱이들도 공장 안에 있다
그리고 참을 만큼 참은 개새끼도 있다
지금 공장 밖이 위험하다
움켜쥘 게 아무것도 없는
저 공장 밖이 더 위험하다
버려지면 곧바로 잊혀지는
저 공장 밖이
배경에 대하여/황규관
한계령 고갯마루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
내 배경은 흐릿한 원거리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돌아보면 소용돌이 같은 낭떠러지,
그게 애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안착하는 걸 방해하는 것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다
빛나는 내일이 가지고 싶던 때도
꿈틀대는 건 어두운 배경이었을 뿐
웃었으나 울었고
사랑했으나 미워했다
모든 게 다시 배경이 되었다
단지 적막만 취하고
망각의 강 앞에 혼자 서고 싶다
이제 믿는 건 내 배경밖에 없으므로
마침표 하나/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금강경을 옮겨적다/황규관
결국 직장에서 팽개쳐지고
밤마다 금강경을 옮겨적는다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은밀한 생각을 갖기 위해서라면
너무 늦은 일일까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지금껏 내가 보아온 게 모두 허상임을 안다면
다른 세상을 살 수 있다는데
아침에 일어나 다시 뒷산을 걸어도
떡갈나무야, 나는 아직 아는 바가 없구나
분노보다도 슬픔에 익숙해진 이후라야
혼자 길을 갈 수 있을까
가난, 사랑, 바람, 잎사귀, 자벌레
이런 뭉게구름 같은 말들에 마음이 닿는지
옮겨적은 말씀이 가벼웁다
미워하되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일
아직 아득하고 괴로운 일이니
오늘 밤에는 한 줄 더 옮겨적자
아침 똥/황규관
아침에 싸는 똥은
어젯밤의 내 내력이다
그러니까 몸뚱이의 무늬다
무얼 먹었는지
무슨 맘을 가졌는지
싸웠는지 하하 즐거웠는지
남김없이 보여준다
사랑과 폐허, 그리고 원망과 주저 등을
몸은 끙, 한 마디로 말한다
쌓아두지 않는 건 몸의 운명인데
내가 지금껏 한 고백들, 선언들, 다짐들은
모두 무언가에 짓눌려 뱉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 업이 되어버렸다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똥은
아무 형식도 없이 쏟아진다
어젯밤에 술 취해 고성을 질렀던
핏대도 아프게 쏟아진다
귀 기울여보면
대체 무엇이 이보다 더 냄새나는 말인가
이 세상에
햇빛이 가닿은 우주 안에
선데이 서울/황규관
어둠의 색깔은 총천연색이다
나는 너무 빨리 까졌다.
여섯 살 때 좀도둑질을 해봤고
전주 남부시장통 지하 다방 레지 누나의 종아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그때 미취학 아동이었다.
바른생활 책이나 월말고사 우등상보다
현란한 싸구려 화보가 나를 성장시켰음을 고백한다.
부르는 소리도 없었는데
나는 왜 접근금지인 세상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깊은 구멍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
왜 내 生을 상기시켰을까.
선데이 서울,
내 生에 총천연색 욕망을 칠해놓고
그것이 어둠임을 가르쳐주었다.
한때 내 經이었던
세상은 나무가 바꾼다/황규관
이 세상은 나무의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아름답지 못할 때
숲에 들면
나무는 얼마나 많은 목숨을 살리는지
내 뼈마디가 다 꺾인다
햇빛을 향해 속살 말랑말랑한 가지는
휘어지고 문득 방향을 틀었지만
그건 억지도 도식도 아니다
햇빛도 나무 때문에 지구에 온다
나무는 햇빛의 속마음을 제 잎사귀에 적어두고
나머지는 온갖 꽃이나 벌레들의 색깔과
뭇 짐승의 체온으로 돌려준다
그래서 만산홍엽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무엇 하나 하는 일이 없는데
나무는 제 일이 세상 일이고
세상 일이 제 일이다
지난여름 그 무서운 태풍과 겨뤄본 듯
내 허벅지만한 나무 한 그루,
입동 가까운 세상에게 제 몸을 말려 건네주고 있다
이 세상은 나무가 바꾼다
경계/황규관
국가와 국가 사이에 시푸른 바다가 있다
넘실대는 물결을 태양이 바라보고 있다
물길을 가르며 정어리 떼가 태평양으로 가고 있다
정어리 떼를 천천히 뜯어 먹으려
상어가 이빨을 빛내고 있다
조국은 숱한 장벽으로 나뉘어졌고
유배지는 통째로 절벽인데
버림받음과 버림받음 사이에 바다가 있다
바다는 폭발점을 품은 채
적도 쪽으로 흐르고 있다
국가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념보다 깊은 곳에
이름을 가지지 않은 심해가 있다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황규관
천길 벼랑 같은 사랑을 꿈꿀 나이도 지난 것 같은데
이 한여름에 목마름의 깊이가 아득타
영등포역 맞은편 사창가 골목에서 눈이
마주친 여인의 웃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종말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새로운 시간은
갈라터진 목마름을 넘어
텅 빈 몸뚱이가 될 때라 읽었는데
아직 태풍이 오지 않는다
거센 바람과 빗줄기가
허공을 힘차게 가른 다음에야
얹힌 슬픔은 북받치는 울음이 되겠지만
어지러운 인간의 길은
범람한 강물이 투명하게 지우겠지만
태풍은 지금 적도 부근에서 끓고 있는가
짓밟힌 골짜기에서 이제 몸 일으키고 있는가
차마 절망하지 못해서
아주 아프게 그러나 빗물에 씻긴 무화과나무 잎처럼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가
목마름을 태울 새로운 목마름은
오늘을 절멸시킬 새로운 오늘은
탄생/황규관
강물 앞에 서면 물결이 되고
숲에 들면 나무가 되는 순간이 있다
어깨를 들썩이며
모든 시간이 울먹이고 꽃잎이
바람이 되는
어찌할 수 없는 노래가 있다
멍든 가슴이 깨질 때 목마른
짐승이 밖으로 뛰쳐나와 들판을 달릴 때
언어가 조각나는
여리디여린 몸뚱이가 있다
절정은 사막인데
사막이 피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싸움과 변명과
누적된 신음이 켜질 때
사랑과 믿음과 고독에
모두를 맡길 때
미지의 심연이 반짝이는
찰나가 있다
어두운 물질에
웃음이 번지는 기적이 있다
심장의 빛깔/황규관
심장이 붉다라는 말은
이제는 한갓 농담이거나 낭만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심장은 분명 푸르스름한 병색이고
또 어떤 심장은, 시커멓게 탄 솥 바닥이다
제 심장을 밖으로 내보이지 못한대서
심장의 빛깔은 모두 붉은 거라
말하는 자는 몽매하거나 아니면
정신이 컴컴한 자가 분명하다
한 편의 희극만도 못한 조소다
다른 데는 잘 몰라도
병든 심장들이 주위에 지천이다
나는 그들과 악수를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고 한탄도 한다
상해버린 심장을 서로 맞대어본다
겨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조금이나 덜어보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발겋던 심장을 망쳐놓은 원인이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지만
우선 제 심장에 남은 마지막 안간힘을
한 번 더 확인해보는 것이다
예감/황규관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제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
자전거/황규관
아파트 복도에 자전거가 기대 서 있다
큰애가 내리자 작은애가 한때 즐겁게 달렸던 낡은 자전거
중학교 삼년, 자전거만 타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주 체인이 벗겨지고 벨은 망가졌어도
달리는 일 장딴지의 힘을 더 키우고 싶었던 게
가슴에서 요동치는 멍 때문이었음을
훗날 멈추고 나서 알았다
자전거는 무엇을 태우는 일에 골몰하느라
아예 먼지덩어리가 됐을까
귓바퀴에 씽씽 바람 불도록 달리다보면
닿는 곳은 자갈투성이 학교 진입로였다
내지 못한 수업료에 자전거는 절룩거리는데
나는 아이들이 버린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 내 장딴지는 자라서
나는 아이들이 버린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 내 장딴지는 자라서
나는 정말 자전거가 되었다
바람에 몸부림치는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바퀴가 타도록 달리는 자전거
다시 달리는 꿈을 꾸는 버려진 자전거
아름다운 꽃밭/황규관
-강정마을
가장 거대한 언어가 침묵이듯
가장 깊은 노래는,
구럼비 바위를 쉬지 않고 흔드는
바다의 영원한 혼잣말이네
그 의미 없는 몸짓 속에서
붉은발말똥게는 입술에 파도를 물고
따개비는 마을의 불빛을 켠다네
바람은 오름을 돌아 구름이 된다네
우리가 심해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대지가 펄떡이고 원통한 죽임을 당하고
그러나 물질을 멈추지 않는 동안
수평선은 언제나 격랑이었네
맑은 슬픔이 지상의 모든 소음을 지우고
끝내 출렁이는 바다가 된다는 믿음을
오직 저 구럼비 바위가 증명하듯
오늘도 바다는 뜻 모를 혼잣말이네
아물지 않은 아픔에 부는 숨결이네
그걸 들을 수 있는 영혼들만이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네
아픔을 넘어 피는 물결이 된다네
우체국을 가며/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마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혀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끊는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면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항공고 졸업 1991년 육군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