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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1911~1953), <짝사랑> & <번지 없는 주막>
박영호
작사가(1911~1953), 강원도 통천 출신, <짝사랑> <오빠는 풍각쟁이> <번지 없는 주막>
2021. 12. 23. 20:07
박영호(朴英鎬, 1911~1953)
강원도 통천(通川)
필명은 ‘처녀림’, ‘불사조’ 등
해방 이듬해 부인과 함께 고향이 있는 북으로 갔다가 한국전쟁 종군작가로 참전해 휴전을 앞두고 죽었다.
극작가 출신인 박영호의 대표작,
1932년 「세기말의 노래」
'아 글쎄 어쩌면(노래 이난영)' '봄신문(노래 박향림)' '직녀성(노래 백난아)' '청춘 번지(노래 나화랑)' '인민의 노래(일명 '사대문을 열어라')' '청춘 번지' '꽃 같은 순정' '눈물의 시집' '흘겨본 타국 땅' '번지 없는 주막'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등
번지없는 주막 - 백년설 / (1939) (가사)
https://www.youtube.com/watch?v=0bllyX329s4
[기고] 강원도 통천사람 박영호를 아십니까?
(출처 : 춘천사람들 2018.8.30.)
김진묵 (음악평론가)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메입니다~” 손목인 곡·고복수 노래의 <짝사랑>(1936)이다. 노랫말에는 우리 언어로만 가능한 아름다움이 있다. 노랫말을 쓴 김능인은 <타향>, <바다의 교향시>도 썼다. 일제에 신음하던 민족을 달래준 작사가로 평가된다.
창살에 기대어 우는 여인, 귀밑머리 쓰다듬으며 이별을 달래는 남자, 능수버들이 비바람에 창문을 태질한다.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이재호 곡 1940)이다. 가난을 피해 왔던가,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던가. 궂은비 내리는 밤, 아주까리 초롱불 아래서 이별주를 나누는 광경은 지난 세기 우리 반도에서만 가능한 이미지다. 노랫말을 쓴 추미림은 <소양강처녀>를 쓴 반야월의 또 다른 예명. 그러나 정작 <짝사랑>과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박영호(朴英鎬, 1911~1953)다. 어째서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북에 살거나(在北), 북으로 갔거나(越北), 끌려갔거나(拉北),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갔거나(歸北), 행방불명 된 사람들의 작품을 금지했다. 많은 작품이 무더기로 하관(下棺)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정부에 의한 반국가적 사건 혹은 반민족행위로로 판단한다. 살아남은 곡들도 있다. <짝사랑>과 <번지 없는 주막> 외에 <고향초>, <꿈꾸는 백마강>, <목포는 항구다> 등이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둔갑되어 살생부에서 지워진 것. 사라질 뻔했던 근대문화유산이 이렇게 지켜졌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되었다. 많은 작품이 제 자리를 찾았다.
금강산 북쪽, 동해에 접한 지역이 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통천(通川)이다.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랫말을 쓴 박영호도 통천 출신이다. 원산 광명보통학교 졸업, 와세다 대학 교재로 대학과정을 터득하고 1930년대 대표적 극작가가 된다. 연극이론 정립에도 앞장섰다. 1932년부터 작사가로 인기를 얻었다. 태평레코드와 시에론 레코드의 문예부장을 지냈다. <오빠는 풍각쟁이>, <연락선은 떠난다> 등 120여 곡이 그의 펜에서 흘러나왔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였다. 필명은 ‘처녀림’, ‘불사조’ 등.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희곡과 군국가요 가사를 썼다. 해방 이듬해 부인과 함께 고향이 있는 북으로 갔다가 한국전쟁 종군작가로 참전해 휴전을 앞두고 죽었다.
누군가 ‘남과 북이 형제’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남과 북을 어찌 형제라고 하십니까? 오른 눈, 왼눈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기 직전, 유구국(流球國)은 일본에 병탄되어 오키나와가 되었다. 최근 여론조사에는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비율이 높게 나온다. 우리 젊은이도 통일을 원치 않는 비중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이들은 ‘통일비용’을 이야기한다. 통일비용은 ‘분단비용’에 비하면 크지 않다. 더구나 분단비용은 지속되는 소모비용이다. 통일은 ‘크게 남는’ 장사다.
나라를 잃고, 오른 눈과 왼눈 이 전쟁을 한 ‘바보 같은’ 선조들이지만 그들은 남과 북을 나누어 생각지는 않았다. 분단된 강원도 단일화 작업에서 스포츠 교류는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기고 진다. 노래는 화합과 조화가 본질이다.
<짝사랑>이나 <번지 없는 주막>은 북이나 남이나 ‘우리 노래’다. 강원도가 중심이 된 <박영호 가요제>를 제안한다.
김진묵 (음악평론가)
'번지 없는 주막' 작사가 박영호 노래집 나온다 (연합뉴스 2013.1.17.)
가요 연구 모임 '유정천리' 기획..상반기 출간 예정 1930년대 '디바' 강석연 대표곡 선집도 발매 예정
(서울=연합뉴스) 이연정 기자 = '번지 없는 주막'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등으로 유명한 작사가 박영호(朴英鎬, 1911-1952)의 노래집이 나온다.
가요 연구 모임 유정천리(회장 이동순 영남대 교수)는 박영호가 쓴 노랫말 330여 편을 정리한 전집을 올 상반기 중 출간할 계획이라고 17일 밝혔다.
박영호는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을 작사한 조명암(본명 조영출, 1913-1993)과 함께 일제강점기 가요계를 이끈 양대 작사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극작가로도 유명한 그는 당대 최고의 음반사 중 하나인 태평레코드의 문예부장(오늘날의 콘텐츠 총괄 기획자)으로 일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내 사랑받았지만, 일제 말기에는 일제에 협조적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유정천리의 총무를 맡고 있는 이준희 성공회대 교수는 "박영호는 이북(함경남도 원산) 출신인데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월북해 연구 자료가 많지 않다"면서 "당대 최고의 작사가인 박영호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전집 발간을 추진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시인으로도 이름을 떨친 조명암이 섬세한 표현으로 유명했다면, 극작가 출신인 박영호의 노랫말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극적 요소가 강하다"면서 "당대를 빛낸 두 천재의 노랫말을 대비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집에는 '번지 없는 주막' '연락선은 떠난다' 등 박영호의 대표작 외에도 '아 글쎄 어쩌면(노래 이난영)' '봄신문(노래 박향림)' '직녀성(노래 백난아)' '청춘 번지(노래 나화랑)' '인민의 노래(일명 '사대문을 열어라')' 등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곡도 다수 수록됐다.
이 가운데 '청춘 번지'는 '열아홉 순정' '청포도 사랑'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나화랑의 가수 데뷔곡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표적인 '해방 가요(광복의 기쁨을 담은 노래)' 중 하나인 '인민의 노래' 가사 전체를 발굴해 낸 것도 큰 성과 중 하나다.
1945년 광복 직후 발표된 이 노래는 당초 1절만 알려졌었다.
이준희 교수는 "'이 곡은 고려성이라는 작사가가 노랫말을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통해 작사가가 박영호이며 노래 제목도 '사대문을 열어라'가 아닌 '인민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전집에는 박영호가 '김다인'이란 예명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자료도 실렸다. '김다인'이란 이름은 그간 조명암의 예명으로 알려졌지만, 박영호 역시 같은 예명을 썼을 거라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발굴된 것.
이 교수는 "박영호가 작사한 노래 중 '꽃 같은 순정' '눈물의 시집' '흘겨본 타국 땅' 등을 보면 음반 재킷과 광고지 등에 있는 작사가 이름이 다르다. 음반 재킷에는 박영호로, 광고지에는 김다인으로 표기돼 있는 식"이라면서 박영호 역시 김다인이란 예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영호의 부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최초의 여류 작사가 이선희의 작품도 전집에 수록됐다.
이 교수는 "지난해 타계한 작사가 반야월의 회고록을 보면 박영호의 부인은 이화여전 출신의 이선희 씨로, 박영호와 마찬가지로 글을 썼다는 구절이 있는데 실제로 1930년대에 활동한 여류 작사가 중 이선희란 이름이 있다. 한자와 학력도 일치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이선희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유선형 만세' '생초목 사랑' '미운 사랑 고운 사랑' '눈물의 탄원서' 등인데, 이 가운데 '유선형 만세'를 제외한 세 곡을 전집에 담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유정천리는 오는 4월 말까지 원고 작업을 마무리해 6월 중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전집 출간에 앞서 오는 4월 말에는 이애리수(1910-2009)와 함께 1930년대를 풍미한 여가수 강석연(1914-2001)의 대표곡 선집도 발표할 예정이다.
강석연은 '방랑가' '오동나무' '강남제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당대 최고의 '디바'이자 배우다.
이 교수는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120여 곡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음원 발굴이 미비해 자료는 많지 않다"면서 "현재까지 발굴한 음원 30-40곡과 함께 아들인 방열 건동대 총장이 제공한 사진 자료를 수록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음원 중에는 '남대문 타령' '방아 타령(민요가 아닌 동명의 영화 주제가)' 등 민족주의적 색채가 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 판정을 받은 곡과 1950년대 라디오 방송 출연 녹음분 등 희귀 자료도 있다고 이 교수는 덧붙였다.
rainmaker@yna.co.kr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최백호가 사랑한, 최고의 가사 고복수의 ‘짝사랑’ [Ⅵ-2]
[한국뉴스 2020.10.3.]
최백호의 작사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 속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 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시적인 목소리를 선택했다.
최백호는 “내가 대중가요 가사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곡은,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선생이 부르신 [짝사랑] 중,
지나친 그 세월이 /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 이즈러진 조각달 /
- 이 부분이에요”
고(故) 고복수 선생이 1936년에 35살의 나이로, 오케 레코드사 전속가수였을 때 녹음한 [짝사랑]은 한국 대중가요 중에서, 시적 구성이 매우 뛰어난 가사이므로 전체 가사를 지면에 옮겨본다.
1.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 목이 맵니다.
2. 아~ 아~ 뜸북새 슬피 우니 / 가을인가요.
잃어진(잊혀진) 그 사랑이 /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서있는) /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 맴을 돕니다.
3. 아~ 아~ 단풍이 흩날리니 /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매이는 / 서리 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 한숨 집니다.
짝사랑 - 고복수
1936
작사 : 박영호 / 작곡 : 손목인
https://www.youtube.com/watch?v=CXVPPeD03Hg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의 전체 가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날 / 서리 맞은 짝사랑에 / 무너진 젊은 날을 슬퍼하는 나’이다.
그런데 가사 전체를 불러 보면 알 수 있듯이, 짝사랑의 슬픈 정서와, 가을날의 쓸쓸한 정취가 댓구를 이루며 절묘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필자가 어린 꼬맹이 시절이었던 1970년대에도,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은 인기 있는 노래여서, 동네 꼬맹이들도 가을이 되면, ‘아~아 으악새~’하면서, 뜻도 모르는 으악새를 찾곤 했었다.
으악새의 뜻과 관련해서는, ‘억새다’ 아니다, ‘왜가리를 지칭한다’라고, 의견이 나눠지기도 했지만, 왁새(왜가리)가 으악새로 변형되었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짝사랑]의 작곡가 ‘손목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2013년에 [손목인의 가요인생]이라는 책이 발간됐는 데, 손목인 선생이 작사가 박영호에게, ‘으악새’가 무슨 새냐고 물었다.
박영호는 “고향 뒷산에 오르면 ‘으악, 으악’하고 우는, 새 울음소리가 들려서 그냥 ‘으악새’로 했노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로써 ‘으악새가 억새’라는 설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된다.
고복수는 일제 강점기 치하인 1931년에, 국내 최초로 열린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타향’이라는 노래로 3위로 입상했는데, 이 노래가 훗날 ‘타향살이’로 제목을 변경하게 된다.
고복수는 집에서 60원을 들고 가출해서, 가수의 길을 걸었고, 1935년 잡지 [삼천리]에서 발표한, 최고의 인기 남성가수 3위에 오르기도 했었다.
피터팬 PD와 동년배인, 오십 초반의 남자들이나, 그 이상이 세월을 산, 인생 선배님들은,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으악새’를 외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40~50년 전에 동네 골목의 꼬맹이였을 때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로 시작하는 가사가, 그저 재밌어서 따라 불렀지만,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사나이 슬픈 짝사랑이, 으악새의 슬픈 울음으로, 가슴속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백호에게 이 가사를, ‘최고의 가사로 꼽은 이유’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세월의 흐름을 ‘지나쳤다’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표현한 것과 여울에 비친 달을 이즈러졌다고 표현한, 예리한 관찰력이 현대가요의 감성을 훨씬 뛰어넘은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백호가 [짝사랑]의 시적 표현에 매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25 전쟁 중에 월북을 했기 때문에, 김능인이라는 가명으로 표기되기도 했던, 박영호가 작사한 [짝사랑]을 두고, 일제 강점기 하의 한 많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노래라는 해석도 많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슬픈 짝사랑에 빠져 어찌하지 못하는 사내의 통곡과도 같은 노래라고 해석해도 무리 없다는 생각이다.
특히 최백호가 말한 대로 ‘지나친 그 세월이 / 나를 울립니다’이라는 가사는, 그 어떤 다른 표현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무심하기 때문에 더욱 가슴을 울리는 보석 같은 가사이다.
또한 [짝사랑]에는, 최백호가 최고라고 꼽은, ‘이즈러진 조각달’ 외에도 ‘임자 없는 들국화, 서리 맞은 짝사랑’등, 화자의 심정을 가을날의 정취에 투영한, 아름다운 표현이 빛을 내고 있다.
최백호에게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에 접속곡으로 이어서 들으면 어울릴, 본인의 노래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한국 대중가요의 빛나는 별 [낭만에 대하여]를 추천했다.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이 끝나고 저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가 이어진다면, 이 가을이 더욱 로맨틱해지지 않을까요?”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이다.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취해서 /
짝사랑에 대하여 /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낭만에 대하여 /
목이 매도록 울어볼 일이다.
-음악 PD, 피터팬 -
박영호(朴英鎬)
출생일 1911년 , 사망일 1953년
저작 : 팔배호 갑판상, 십년 전후, 산돼지, 짝사랑, 오빠는 풍각쟁이, 번지 없는 주막, 불청물장수 등
경력: 북조선연극동맹 초대 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팔백호 갑판상」·「십년 전후」·「출옥하던 날 밤」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작사가·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했다. 학력은 불명확하나 강원도 원산의 광명보통학교를 마쳤으며, 와세다[早稻田]대학 문과 강의록으로 대학 과정을 터득했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관계하며 원산의 극단 조선연극공장 문예부원으로 「눈먼 동생」·「낙화」 등을 시작으로 다수의 희곡을 발표했다.
1930년 발표한 「과도기」와 「하차」는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구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1931년 「팔백호 갑판상」·「십년 전후」·「출옥하던 날 밤」, 1932년 극단 신무대, 대중극단 연극시장과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를 통해서 「지옥」·「너는 사공의 딸」·「낙동강 야화」·「방향 전환」·「무덤을 파는 작가」·「피묻은 삼색기·「개화전야」 등을 발표했다.
1933년 황금좌(黃金座)의 창립공연에 「비극폐업」으로 참여했고 「원앙선」·「기계와 목가」 등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거룩한 손님」(극단 신무대) 등을 발표하는 등 1930년대 상반기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의 한사람으로평가되었다.
희곡 창작 이외에도 「무대희곡 창작의 실제」(『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1.18~23), 「조선성을 복습하고 - 희곡창작의 재출발(상)」(『조선일보(朝鮮日報)』 1934.6.15) 등의 글을 통해 창작방법론을 모색하고 조선연극의 정체성 확립을 역설하는 등 희곡의 이론적 정립에도 노력했다.
1937년에는 대중극단의 지나친 상업성 문제를 제기하며 본격연극과 대중연극의 경향을 조화롭게 담은 '중간극'을 표방하며 송영(宋影)·맹만식(孟晩植) 등과 극단 중앙무대를 창단하고 새로운 연극운동을 도모했다.
한편 희곡 외에도 1932년 「세기말의 노래」를 시작으로 「짝사랑」·「번지 없는 주막」·「오빠는 풍각쟁이」·「북청물장수」 등 대중가요 120여 곡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방호과(防護科)와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의 후원으로 에토 기키노스케[衛藤吉之助]의 원작을 각색하여 방공(防空)훈련의 생활화를 내용으로 하는 1막짜리 「가두(街頭)」를 공연했다. 1942년 '내선일체 강화, 일본정신 함양, 전쟁의식 고무에 필요한 연극문화 앙양'을 목표로 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발표한 '노자일체(勞資一體)'의 협동정신을 강조한 「산돼지」에서는 '전쟁물자 공출' 참여를 역설함으로써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해 '국민극(國民劇)의 제2년'이라는 주제로 열린 매일신보사 주최의 연극인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이태준(李泰俊) 원작의 「왕자 호동」을 각색하여 극단 아랑에 제공했고, 조선인 징병제가 허용된 것을 기념하는 내용인 「조선」(극단 아랑), 기독교·선교사 문제를 소재로 '미영 배격과 일본의 전쟁 승리'를 내용으로 하는 「좁은 문」(일명 사랑과 신곡(神曲), 극단 전진좌) 등을 공연했다.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는 일본군 지원과 미영 격멸을 내용으로 하는 「물새」(극단 아랑)을 발표했다. 또한 5월에는 연출가 안영일(安英一)을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연극인들과 함께 '성지참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1944년 극단 황금좌(黃金座)에서 공연된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지지하는 내용의 「촛불」과 육군기념일에 상연할 목적으로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위촉한 「혈서」를 비롯하여 「농병(農兵)」·「천조(千鳥)」·「흑공주」 등의 작품을 썼다. 1945년 2월 제3회 연극경연대회에 지원병 출정, 창씨개명, 내선(內鮮)결혼 등을 주제로 '신체제(新體制)'를 선전한 「별의 합창」을 출품했다. 같은해 전쟁에 참여한 군인 가족의 원호사상을 강조한 「청실 홍실」과 신경균(申敬均) 감독의 영화 「우리들의 전장」의 원작인 「피와 땀[血と汗]」을 썼다.
해방 이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여 「겨레」·「민족반역자」 등을 발표했고, 1946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홍수」·「번지없는 부락」 등을 발표했다. 6·25전쟁 중에는 인민군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3년 사망했다.
박영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1∼55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한겨레음악인대사전』(송방송,보고사,201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2009)
『해방 전(1940~1945) 공연희곡집』(이재명 외,평민사,2004)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최창호,일월서작,2000)
『한국근대희곡사』(서연호,고려대학교 출판부,1994)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민족정경문화연구소,1948)
집필자
집필 (1995년)
유민영
개정 (2016년)
심재욱(동국대학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영호(朴英鎬))]
출처 : 재봉틀의 국어방님 네이버 블로그
박영호(朴英鎬.1911∼1953)
극작가ㆍ작사가. 강원도 통천 출생. 1930년대 초에 연극시장, 이동식 소형극장 등 프롤레타리아극단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극작가로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지옥> <너는 사공의 딸이다> <낙동강 야화> <전주곡>등 이데올로기와 관계없는 대중적인 희곡을 여러 극단에 제공하여 상업주의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뒤 <8백호 갑판상> <10년 전후> <출옥하던 날 밤> <흘러가는 무리들> <북관야화> <태양가> <인생 ABC> <문제의 초상화> <그 여자>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이상의 작품들은 모두가 1930년대 상반기에 공연을 위해 쓴 극본들로서,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대중성이 강한 멜로드라마이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는 동양극장 전속극작가로서 극본을 쓰는 한편, 여러 월간지에도 희곡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인 <인간 1번지> <등잔불> <만뢰> <이차돈> <정어리> 등은 박영호가 사회의식이 강한 대중작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정어리>와 <등잔불>이 그러한 표본적 작품이 될 듯싶다.
그는 동시대의 리얼리즘 작가들처럼 식민지시대의 궁핍과 고통스러운 생활의 단면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어용극작가로 전신하여 일제의 분촌정책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게 된다. ‘국민극이야말로 최고의 연극적 일원’이라고 주장했던 그는 <등잔불> 같은 어두운 작품에서도 마지막에는 교묘하게 식민통치를 긍정하고 있다.
광복이 되자 갑자기 극좌적인 프롤레타리아 극작가로 변신하여 <겨레> <민족반역자> 같은 친일파 고발의 작품을 쓰면서 좌익극(左翼劇)을 주도하였는데, 즉 <겨레>에서의 주인공은 혁명가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광복 직후 프로연극동맹을 주도하던 그는 1946년에 갑자기 극좌연극인들을 데리고 월북하여 평양에서 북조선연극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직을 맡아 북한 연극의 밑받침을 닦는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열성적으로 연극을 통해 정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그도 6ㆍ25전쟁 후에 비참하게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작가ㆍ대중가요 작사가. 강원도 통천 출생. 필명은 처녀림(處女林), 불사조(不死鳥). 원산부에서 학교를 다니며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대 초 프롤레타리아 극단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극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원산 청년아마추어극단에서 공연했던 <과도기>와 <하차>의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원산경찰서에 구속된 적도 있었다. 이후 그는 원산의 조선연극공장에서 활동했다. 조선연극공장은 일제강점기 지방에 기반을 둔 프로 연극단체로서, 주로 박영호 작품인 <10년 전후> <출옥하던 날 밤> <흘러가는 무리들> 등을 공연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동양극장 전속극작가로 활동하며 <인간 1번지>, <이차돈>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극단 [고협(高協)]과 [아랑(阿娘)]에서 활동하며 대중적인 작품을 썼는데, 1939년에는 극단 고협이 공연한 <정어리>가 호평을 받았다. <정어리> 공연을 계기로 [고협]은 [아랑]과 함께 연극계의 대표적인 대중극 공연 단체로 자리잡았다.
1940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강요로 조선연극협회에 가입한 고협은 그 해 연극보국주간에 박영호의 작품인 <정어리>를 공연하였으며, 다음해에도 그의 작품인 <등잔불>을 가지고 참가하였다. 당시 <등잔불>은 <쾌걸 윙> <순정기> <춘향전> <주부경제학> <무영탑> 등과 함께 공연되어 10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하였다.
1942년 박영호는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산돼지>, 이듬해의 제2회 대회에는 <물새>, 1945년 열린 제3회 대회에는 <별의 합창>을 출품하였다. 이 가운데 어촌을 배경으로 지원병제를 홍보하는 내용의 <물새>는 연출상, 장치상, 남녀 연기상을 휩쓸었다.
그는 또 1932년부터 [태평레코드]와 [시에론레코드]의 문예부장을 지내면서 작사가로서도 높은 인기를 얻었다. 광복 후 박영호는 극좌적인 프롤레타리아 극작가로 변신하여 <겨레> <민족반역자> 같은 친일파를 고발하는 작품을 쓰면서 좌익극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했다가 1946년 2번째 부인인 작가 이선희와 함께 월북한 뒤 평양에서 북조선연극인동맹을 조직하고 초대 위원장을 지내며 북한 연극의 밑받침을 닦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인민군 종군작가로 참전하였다가 휴전을 앞두고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1944년 [조광]에 발표한 희곡 <김옥균의 사> 등 총 10편의 친일 저작물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극본】
<지옥> <너는 사공의 딸이다> <낙동강 야화> <전주곡> <8백호 갑판상> <10년 전후> <출옥하던 날 밤> <흘러가는 무리들> <인간 1번지> <이차돈> <정어리> <등잔불> <산돼지> <물새> <별의 합창> <북관야화> <태양가> <인생 ABC> <문제의 초상화> <그 여자> <만뢰> <겨레> <민족반역자>
【노래가사】
<짝사랑> <오빠는 풍각쟁이> <물방아 사랑> <망향초 사랑> <연락선은 떠난다> <울어라 문풍지> <번지 없는 주막> <민초 합창> <천리 전장(戰場)> <달 있는 모항(母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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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작품 목록>
1940. 2 잔등불(희곡)(문장)
1941. 2 수류(문장)
1942. 2 갱생일가(희곡)(국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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