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안도현시인이 쓴 글을 우연히 신문에서 보았다. 글 제목은 '문학동네’ 손 떼고 떠나는 강태형 대표.'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문학청년들에게 꿈의 과녁이다. 해마다 11월이면 펜 하나 달랑 들고 세계를 접수하는 꿈에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1981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신문사에서 당선 통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길에서 같은 대학
문학서클 선배를 만났다.
“형, 아직 연락받았다는 사람 없어요?” 선배가 무덤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당선소감까지 써서 벽에 턱 붙여 놓은
터였다. 그 선배와 내가 주축이 되어 만든 서클에서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에이스’였다. 나는 스무 살이었지만 한 해 전에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력이 있는 터라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습관처럼 술을 마셨다.“상금 받아서 외상 술값을 갚아야 하는데….” 그 선배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는 벌써 당선되었다는 전보를 받아 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선배가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되는 강태형이었다. 선배는 복학생이었지만 ‘에이스’에 대한 예의로 끝내 입을
다물었고, 그날 술값을 냈을 것이다.
"
난 솔직히 그 글을 괜히 봤다 싶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 라는 글집을 세종
교양도서 선정이란 경쟁속에 불쑥 들이밀었었다. 작년에 용케 신라 천년의 자취소리라는 글집이 세종도서로 선정되는 바람에 바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신라보다는 가뿐히 쓴 고구려 였기에 기대가 자못 컸다. 더욱이 초판 발행본이 동이 나는 쾌거를 이루었기에 안도현과도 같은 에이스
심정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아침 결과는 처참했다. 차라리 아주 통쾌하였다. 나의 불길한 예감을 통렬히 명중했으니
말이다. 프로필에 수필가라 한 함자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무슨 고대역사 학회라도 들어둘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순간 별 생각이 다
든다.
솔직히 애석하다. 그 글집 첫머리에 '많이 배웠고 많이 생각하여 너무 고맙다.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이다. ' 이 말은 순전히 거짓말인 셈이다. 하지만 이쯤으로 크게 낙심하지는 않을 테다. 요즘 3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는 나란 존재라는
생각을 갖곤 한다. 돌이켜보면 역사가 일깨운 것이 쏠쏠하다. 근무처 밥벌이(경주 양성자 가속기 사업) 로 파견을 나갔다가 거듬거듬하다보니 신라
글 집을 내게 됐고 더불어 바듯하게 꼬아진 함수풀이 같은 고구려를 자연 추적하게도 되었고 범죄망 좁히듯 그 고구려를 파헤치던 중에 나는 또
열하일기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 덕분으로 신열하일기라는 글구멍을 다 메꾸고 요동벌과 심양 나들이를 하였으며 '4박5일의 심양록' 이라는 기행집을
자매품 격으로 다 쓰고 나올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가. 물론 출간할 돈이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속에서 인문학 속에서의 인간의 겁 없고 겁 많은 숫한 존재를 보았고 그러면서 나란 존재를 새삼 또 느끼게도 되었다. 위험천만이 역사에서는 꽤 중요하지 싶다. 어떻든 역사를 배우는 예의로서 술값도
들일 필요없이 마냥 늘어나는 머릿속 상상인 바에야 이보다 더할 기쁨이 어디 있을까. 언제 내가 돈 벌자고 책을 썼더냐. 마음을 갈자고 글을
썼지. 열하책 교정을 다시 시작한다. '책 한 권 분량으로 600페이지를 넘기면 곤란합니다... '출판사 말대로 페이지를 제한할 수밖에는 없지만
넘치는 분량이란 유쾌한 비명이 아닌가. 고구려가 망한 것은 자중지란 때문이지 힘 때문이 아니다. 겁 없는 내 마음도
변함없이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꼭 에이스..화이팅이다.
** 최원현선생님 축하합니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