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수필 / 문학시대 / 류인혜의 책읽기 20 / 2022년
멀리 있는 길을 걷고 걸어서
- 이승수 지음 《거문고 줄 꽂아놓고》, 돌베개.
류인혜
이승수 작가의 《거문고 줄 꽂아놓고》라는 책 제목은 김창업의 시조에서 따왔다. 반가운 벗을 맞이하는 흥겨움이 돋는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 홀연히 잠에 든 제
시문견폐성(柴門犬吠聲)에 반가운 벗 오는고야
아희야 점심도 하려니와 탁주 먼저 내어라.
열두 편의 이야기가 실린 차례는 간단하다. 두 사람씩 모두 스물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각각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간지에 주인공의 간단한 약력이 실려 있다. 그들 중 자주 이름을 들어 친근해진 이도 있고, 역사를 배울 때나 책을 통해 관심을 가졌던 이도 있다.
<신륵사 뒤뜰 석종의 침묵> 나옹화상(1320~1376)과 이색(1328~1396)
<두 호걸 한 지점에 서다> 정몽주(1337~1392)와 정도전(1337~1398)
<떠도는 이들의 애틋한 마음> 김시습(1435~1493)과 남효온(1454~1492)
<속리산과 지리산의 대화> 성운(1497~1579)과 조식(1501~1572)
<도산서원에서의 이틀 밤>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
<도의로 따르는데 행적을 따질 건가> 양사언(1517~1584)과 휴정(1520~1604)
<국난 시의 어진 두 재상>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
<우리 사이가 맑은 까닭은> 허균(1569~1618)과 매창(1573~1610)
<심양 객관의 자욱한 담배 연기> 김상헌(1570~1652)과 최명길(1586~1647)
<호한과 녹림객의 산중 결교> 임경업(1594~1646)·이완(1602~1674)과 녹림객
<사제가 벗이 되는 이유> 이익(1681~1763)과 안정복(1712~1791)
<북경에서의 한 점 인연과 긴 여운> 나빙(1733~1799)과 박제가(1750~1805)
작가는 이들의 행적을 찾아간다. 긴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은 책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도착한 곳에는 그들의 살아온 흔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투명하지 않기에 막막한 슬픔이 배경으로 깔려 있어 읽어가면서 그 습기가 못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고, 며칠 동안 머나먼 길을 걷고 걸어서 당도하게 되는 거리도 무시하고, 십수 년, 혹은 수십 년의 나이 차이, 국적과 남녀의 구별도 뛰어넘는 아름다운 인연의 궁극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책에서는 이런 생각을 먼저 알아채고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했으며 자유롭게 했던 사이”라고 말한다. 특히 사람의 관계에서 ‘자유롭게’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음이 흥미롭다.
우정이란 성숙한 인격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들의 대화 또는 만남이라는 생각으로 지은이가 대상의 선정을 위해 세운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신분과 직업, 성별과 국적 등 외적인 조건의 차이에 바탕을 둔 관계. 둘째 순간의 신뢰와 합일. 셋째 서로의 사유와 삶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주려는 정신을 높이 산다는 것이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의 내용 중에서 임경업(1594~1646)·이완(1602~1674)이 주인공인 <호한과 녹림객의 산중 결교>는 사실이 아니라 19세기에 편집된 야담집에 실린 이야기라니 더욱 흥미롭다. 이들에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나머지 이야기 중에서 다섯 편을 소개한다.
<신륵사 뒤뜰 석종의 침묵> 나옹화상(1320~1376)과 이색(1328~1396)
첫 번째 이야기, 신륵사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나옹화상과 목은 이색, 두 사람의 인연은 특이하다. 살아있을 때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각별한 인연을 이룬다. 양주 화엄사의 주지였던 나옹은 어사대의 탄핵을 받고 밀양으로 가던 중 병이 든다. 신륵사에 도착하여 열흘쯤 요양하다가 입적했다.
우왕은 목은에게 나옹의 비문을 짓게 한다. 목은은 선왕(공민왕)의 신하로서 선왕의 스승을 위해 비문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며 기꺼이 응했다. 이후로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에 관한 글이라면 목은에게 부탁했고, 목은은 선선히 승낙했다. 신륵사에 사리 석종을 조성하면서도 목은에게 글을 부탁했다. 신륵사 뒤뜰에 나옹화상의 사리 부도와 목은의 글이 나란히 서서 있게 된 연유이다.
<두 호걸 한 지점에 서다> 정몽주(1337~1392)와 정도전(1337~1398)
고려의 정몽주와 조선의 정도전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던 거대한 흐름 속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다. 그들이 24세 때, 정몽주는 세 차례의 과거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며 출셋길에 오르자 정도전이 찾아갔다. 정몽주는 그를 평생의 벗으로 대해 주었다. 정도전이 부모의 상을 거푸 당해 5년간 경상도에 내려가 있을 때는 《맹자》를 보내었다. 정도전은 그 책을 조금씩 소중하게 읽었다. 얼마 뒤에 나란히 성균관 학관이 되었고, 1384년에는 정몽주가 성절사의 정사, 정도전이 서장관이 되어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책의 60쪽에서 두 사람이 가는 길의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정몽주로 인해 고려의 마지막은 일몰 직전 서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장엄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 숲처럼 비장하였다. 정도전으로 인하여 조선의 출발은 새벽 숲처럼 발랄하고 상쾌했다.” 내용에 상관없이 문장이 아름답다.
<속리산과 지리산의 대화> 성운(1497~1579)과 조식(1501~1572)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겨울 산의 이미지를 지닌 김시습을 심상이 가을 물인 남효온을 만나게 한다. 두 사람의 시린 처지에 공감하는 독자의 심사를 더욱 시리게 만든다. 성운과 조식은 각기 22세, 18세 때에 만나서 7~8년 청년기를 함께 보낸 후 각기 은거할 때, 속리산 품속에서 다시 만나 깊은 마음을 나누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운이 길어서 다른 수필에서 풀었기에 이 정도로 소개한다.
<도산서원에서의 이틀 밤>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첫 만남을 예문으로 읽는다. 이때, 율곡은 23세의 청년이었고, 막 벼슬에서 물러난 58세의 퇴계는 도산서당은 짓고 있었다.
도산은 예나 지금이나 깊은 산골에 있다. 퇴계는 산길을 물어물어 찾아온 율곡을 정중하게 맞이했고, 율곡은 제자의 예로 인사를 올렸다. - 104쪽
퇴계는 율곡이 무척 맘에 들었다. 이야말로 후생가외(後生可畏)이고, 먼 곳에서 때로 벗이 찾아와 또한 즐거운 형국이 아닌가! 마침 눈비가 섞여 내리고 있어 일기가 매우 불순했는데, 퇴계는 핑곗김에 율곡을 이틀이나 머물게 했다. 이 2박 3일은 도산이 가장 향기로웠던 시간이다. - 107쪽
1572년 퇴계의 2주기에 율곡은 “소자가 배움을 잃어 정신없이 헤맬 때, 사나운 말은 이리저리 치달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때 공께서 계발하여 삶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을 넣은 제문을 지어 보냈다. 퇴계는 율곡을 벗으로 대했지만, 율곡은 언제나 퇴계를 스승의 예로 대했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사후, 1574년 조성되었다.
<우리 사이가 맑은 까닭은> 허균(1569~1618)과 매창(1573~1610)
저자는 허균과 매창, 두 사람의 남녀를 맑은 사이로 짝은 지었다. 33세의 허균이 조운의 감독관으로 부안으로 갔을 때, 29세의 매창은 부안 기녀의 신분으로 고을에 행차한 지방관의 술자리에 시중을 들게 되었다. 마침 그날 비가 내려 일단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날 두 사람은 종일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으며 보냈다. 하지만 잠자리를 함께하지는 않았으니, 그때 매창은 이귀의 정인이었기 때문이다. 8년이 지난 1609년 9월, 허균은 매창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허균은 41세로 막 형조참의에 부임했고, 매창은 37세로 퇴기나 다름없을 때다.
봉래산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 싶은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허균)이 자연과의 굳센 약속을 저버렸다고 웃겠지요. -중략- 어느 때나 만나 하고픈 말을 다 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 155~156쪽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이 편지에 대해서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설명해 주는 부분을 독자들은 놓치지 말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녀 간의 우정에 대해서’에 귀를 기울인다. 그 우정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나는 마음과 분위기 모두 맑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철저하게 신뢰하여 함부로 다가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 사이든 동성 사이든, 우정은 마주 보는 두 산과 같은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산이 겹겹이 둘러싼 곳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듯 책을 덮은 마음에 평안을 준다.
지은이 이승수는 옛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느라 현실을 잊거나, 바람이 들려주는 공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걸음을 멈추어 설 때가 많은 경기도 광주 사람이다. 《산사에도 그리움이 있었네》,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 길을 가다》 등의 책을 펴냈다.
류인혜
1984년 『한국수필』 추천 완료. 한국수필작가회 제9대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자문위원, 한국여성문학인회 사무국장 역임
현)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계간문예 기획위원, 한국식물연구회 이사
작품집: 시집 『은총』,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 외 9권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펜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송헌수필문학상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