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yworld.com/eunayoon/3362238)
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대원군의 문상을 가지 않아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 윤치호 일기 1898년 2월 26일 -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왜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한 걸까?
대체 무엇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걸까?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은 아주 특별한 아들이었다.
열두살의 어린 고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있었다.
18세기 격랑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왕과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과연 고종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흥선대원군이 경기도 양주에 집곡산장으로 거처를 옮긴 1874년은 그의 삶에서 큰 시련기였다.
그의 나이 55, 정계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은 이 곳으로 내려왔다.
난초를 그렸지만 예전같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병풍을 찾을 수 있었다.
여섯 폭의 난초그림으로 만든 병풍인데 대원군의 호가 선명하게 적혀져있다.
양주 시절 그린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화폭의 윗면,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이 허공에 그려져있다.
1870년에 그린 부드러운 대원군의 난초 그림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뿌리를 드러낸 거친 필체의 노근란이 양주 시절에는 어김없이 그려져있다.
- 김정숙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세계 저자 -
화면 윗부분에 항상 노근란이 위치해있는데 노근란이라는 것은
땅을 표현하지않고 뿌리가 드러난채로 마치 공중에 떠있는 듯이 묘사된 난 그림을 말합니다.
여기서 뿌리내릴 땅을 잃었다는 의미는 직곡시절의 그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흥선대원군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한지 10년째 되던 해이다.
예상치못한 상소 한 통이 대원군의 정치적 뿌리를 뒤흔드는 파란을 몰고왔다.
전하께서는 친친의 지위를 높이고 녹을 많이 주되 국정에는 관여치 말도록 하소서
- 면암 최익현 -
면암 최익현이 고종에게 친정을 펼치라며
지난 10년 동안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의 탄핵을 요구한 것이다.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사실 대원군은 아무런 정치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10년동안 권력을 행사했으나 왕이 이제부터 내가 직접 하겠다라고 했을 때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10년동안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원군이 이용하던 궁궐 전용문이 폐쇄되었다.
대원군 탄핵 상소가 올라온 직후 고종이 직접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친정선포를 하면서 이루어진 조처였다.
영남 유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이 문서는
당시 대원군 지지세력이 조직적으로 반발한 움직임을 담고 있다.
영남 유생 만여명이 대원군의 정계 복귀를 촉구하기 위해 만든 만인소의 초안.
대원군이 정계에서 밀려나 직공으로 내려가자 집단 상소를 고종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전하께서 며칠 안으로 행차하셔서 빨리 환차하시길 청함으로써
위로는 독실히 봉양하는 뜻을 돈독히 하고 아래로는 간절히 바라는 여론의 기대에 부응하십시오
- 박원재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
아버지를 시골에 놔두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표면적 이유 밑에는
대원군의 정치적 역할을 그대로 복원시키라는 것이 깔려있는 것이죠.
공론정치를 중요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만여명의 유생이
연이어 올리는 만인소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보통 만인소의 길이는 약 100미터, 뜻을 같이하는 사람의 이름과 서명을 일렬로 기록했다.
영남 유생들은 이같은 만인소를 세차례나 올리며 고종의 불효를 질책했다.
유교국가에서 효를 내세운 논리 앞에서는 국왕이라고 해도 무작정 버티기 힘든 법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굴복하지 않았다.
죄가 크다, 복합상소를 올린 자들 모두 참형에 처하라
- 고종실록 1875년 6월 18일 -
주동자를 참형에 처하라는 지시까지 내리며 강력하게 나온다.
정계 복귀를 기다리며 양주에서 시위하며 머문지 2년,
끝내 아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정계복귀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종은 유생들의 봉헌요구에도 불구하고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대립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역정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고종을 낳았고 열 두살 어린 아들을 왕에 올리기위해 노력했다.
당시 왕실의 권위는 추락할 데로 추락했는데
순조때부터 시작된 60여년간의 세도정치로 조선의 국정은 곪을대로 곪아있었다.
이때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 손을 잡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오랜 병석에 누워있던 철종이 승하한 것은 1863년 12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용상을 이어받았다.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지만 그 뒤에는 대원군이 있었다.
대원군과 조정대신들이 만난 상견례 자리에서 대원군이 던진 일성은 대신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나는 천리를 끌어들여 지척으로 삼고자하며 태산을 깍아 평지를 만들고자 하며
남대문을 높여 삼척으로 만들고자 한다
태산처럼 비대해진 노론 정치를 청산하고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대원군은 가장 먼저 조선의 최대 권력 기구로 전락해버린 비변사를 폐지해버렸다.
- 연갑수 박사 |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 -
나중에는 국왕도 그 결과를 거스리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그런 상황이 오는
최대 권력 기구가 되었고 외척 세도 가문들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죠.
정치를 전면적으로 개편한다고 했을 때 최고의 핵심 기구인 비변사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정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동시에 북인과 남인 계열에 속한 인재들의 명단을 적은 북보와 남보를 만들었다.
세도정치 기간 정치에서 등한시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기로 한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또 다른 개혁정책이 상세하게 실려있다.
정조 임금도 손을 못 댄 서원의 횡포, 교육 기관이던 서원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구로 변질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지시했다.
유생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서원 철폐를 중단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맞선다.
대원군에게 분서갱요를 단행한 진시황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내 진실로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있다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 근세조선정감 -
이때까지만 해도 흥선대원군의 뜻이 고종의 뜻이었다.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하는 낡은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아버지의 정책은 그 자체로 국정의 스승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강상규 교수는 당시 기록들을 샅샅이 분석했다.
- 강상규 교수 | 방송통신대 -
1871년대에 신미양요가 나고난 직후까지도
고종의 생각이 변함이 없다라는 것을 홍순목과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양오랑캐가 우리를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일이다
만일 화친하려는 자가 있다면 나라를 팔았다는 법조문을 적용하여 처단할 것이다
- 고종실록 1871년 4월 25일 -
미국의 로저스 함대가 무력 공격을 개시하며 강화도에 상륙한 것은 1871년 4월.
흥선대원군은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조선군은 53명의 전사자를 내며 격전을 벌였고 고종도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했다.
서양오랑캐와 싸우지 않으면 화친한다는 것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운 대원군은 서양오랑캐와 싸우지 않으면 화친한다는 것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대원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유생들은 대원군에게 나라의 큰 어른이라는 대로라는 칭호를 올리자했고 고종은 승인했다.
- 강상규 교수 | 방송통신대 -
사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던 고종도 정설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죠.
이런 고종의 사고의 변화가 나타난 것은 미국과 전쟁이 나고 난 다음에
서서히 외부 정보들을 구체적으로 접하게되면서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신미양요가 일어난지 1년.
청나라에 다녀온 연행사의 보고를 받을 때 고종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 떠날 때 이미 언급한대로 상세히 살피고 왔는가?
- 장차 왜와 중국이 교역을 행하게된다고 하옵니다
- 그렇다면 장차 중국은 왜인들을 어떻게 대접하게 되는가?
- 일성록 1872년 4월 4일 -
청나라에 다녀온 연행사의 보고를 받을 때 고종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의례적인 질문을 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고종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기울였다.
- 왜는 중국의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는데 중국은 왜와의 교역을 반대하지 않는가?
- 장차 왜와 중국이 교역을 한다는데 그게 정말로 사실인가?
- 대국의 민심은 이전에 비하여 어떠한가?
- 봉친왕이 서양 오랑캐를 끌어들여 나라를 해치게 한다는데 신하와 백성들의 민심은 어떠한가?
고종은 그 해 말, 규수를 청나라에 파견했다.
박규수는 고종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고종은 박규수를 통해 중국이 더이상 세계 질서의 중심이 아니며
조선도 고립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을 키워갔다.
중국이 이제 마음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라고 하는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죠.
중국에 기대고 편승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때 조선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죠.
박규수의 귀국보고에 고종이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또 있다.
황제께서 총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친정을 하면서 백성들의 바람에 부흥하신다는데 과연 그러하신가?
청나라의 어린 황제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어느덧 고종의 나이 21살.
더이상 섭정할 명분이 없어진 나이였지만 대원군은 여전히 국정 운영권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급기야 탄핵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뜨기 시작한 고종은 친정 선포와 함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다른 생각은 끊임없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강화도 초지진은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서로 다른 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다.
초지진 소나무와 성벽에는 포탄 자국이 상흔처럼 남아있다.
당시 군함들이 대포로 공격한 흔적이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직후, 일본의 국교 제기 요구가 국정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국서를 접수해야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고종과 개화파의 주장은 대원군파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19세기 조선의 대외관계 주요기사를 수록해놓은 용호한록.
여기에 일본의 국서 접수 요구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입장도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대원군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요구를 받아주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정계 은퇴 후에도 대원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결국 박규수가 대원군을 설득하러 나섰다.
- 내 거듭 말하지만 일본이 정책을 수정하기 전까지는 서양과 한통속인 국서를 접수해서는 안될 것이오
- 만약 저들이 대포 소리를 내기에 이르면 그 이후에는 비록 국서를 받고자해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박규수도 대원군의 마음을 도려놓지 못했다.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외세가 무력을 앞세워서 들어오는데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우리가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서 불평등 조약이 아닌 우리의 주권을 존중받으면서
개방을 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 당시 상황인 것이죠.
1876년 2월 3일.
조선은 대원군이 포대를 설치한 강화도에서 무력을 앞세운 일본과 외교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고종은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화정책을 추진한다.
점점 대원군과는 멀어져갔지만 세계와 교류하며 근대화된 문물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이루어야한다고 판단했다.
통리기무아문은 그러한 고종의 구상을 실현할 국제 통상학 전문 기구였다.
실질을 중시하고 여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시급한 일이다
- 고종실록 21년 6월 15일 -
해외 시찰단을 파견할 때 고종은 개인 사재까지 내놓았다.
무기 제조기술을 배울 유학생들을 청나라에 천진기기국에 보내는 한편 별기군을 창설해 신식군대로 훈련시켰다.
고종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도 컸다.
유림들의 위정척사운동이 이어졌다.
그 무렵 고종을 제거하려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었다.
놀랍게도 역모사건의 주동자 이재선은 고종의 이복형이었다.
이른바 이재선 역모사건이다.
대원군 지지세력들이 유림과 손을 잡고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거사 직전에 체포된 것이다.
- 강상규 교수 | 방송통신대 -
개방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면 당시에 유교 지식인들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개방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원군이라는 존재의 주변으로 모일 수밖에 없죠.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버린 대원군과 고종.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추구한 부국강병의 길은 무엇일까?
군사장비를 기록해놓은 훈국신조군기도설.
서부 열강에 맞서 힘을 키우고자했던 대원군의 노력이 담겨져있다.
대원군 집권기에 개발된 신무기들도 실려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뢰포다.
수뢰포는 수중에 설치하여 적선을 폭파하는 무기이다.
설치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수뢰포 내부에 물이 차올라 수압에 의해 작동되는 수중 시한 폭탄이다.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자주적인 나라, 부강한 나라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다만 거기로 가는데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을 수 있죠.
대원군이 생각한 것은 느리고 더디게 간다하더라도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외세 침탈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죠.
목표는 같았지만 가는 길은 달랐다.
대원군은 먼저 우리 손으로 나라의 힘부터 키워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고종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에는 늘 흥선대원군이 있었다.
더구나 고종을 퇴위시키려는 역모사건까지 일어나자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정계에서 은퇴한지 9년째 되던 해, 대원군이 정계에 복귀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남대문 시장에 선혜청 표지석이 남아있다.
선혜청은 대동리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1882년 6월, 이곳에서 군인들에게 밀린 월급으로 지급하던 썩은 쌀이 도화선이 되었다.
별기군이 생긴 뒤로 푸대접을 받아온 구식 군인들의 분노는 폭동으로 발전했다.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까지 가세하면서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갔다.
이른바 임오군란이었다.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된 고종이 급기야 대원군을 부른 것이다.
6월 10일 아침,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고종과 마주했다.
9년만에 이루어진 부자간의 만남.
고종은 임오군란 사태를 부탁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겨준다.
내 능력이 모자라는 탓에 이처럼 전례없는 변란에까지 이르렀으니 누구의 탓으로 돌리겠느냐
지금부터 크고 작은 공무 일체를 대원군 앞으로 품결하라
- 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
- 연갑수 박사 |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 -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던 대안책은 흥선대원군밖에 없었기때문에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몰려갔었고 폭동이 일어난 직후에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자로서는
대원군밖에 없었겠죠.
대원군의 조치는 파격적이었다.
물가상승의 원인이 된 화폐발행을 중단시키는 등 먼저 불안한 민생경제부터 바로잡아나갔다.
하지만 대원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5군영과 3군부를 부활시키고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했다.
고종의 핵심 개화정책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모든 것을 옛 제도로 되돌려놓았다.
고종은 힘겹게 추진해온 개화정책을 부정하는 대원군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국 수습에 나선지 33일째되던 날 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었다.
대원군은 누구에게도 알리지못한채 중국의 천진으로 끌려갔다.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대원군이 그대로 권력을 잡았다가는 그동안의 개항 이후에 청나라와의 긴밀한 협조관계 속에서
문호개방을 하던 조선 정부의 정책이 다시 물거품이 되고 옛날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것이죠
천진으로 끌려간 대원군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자료가 남아있다.
3.5m 길이의 중국제 두루말이에 쓰여진 흥선대원군 체진 비망록.
이것은 흥선대원군이 천진에 체류되어 있을 때 친필로 쓴 원고이다.
대원군의 천진 억류 생활은 눈물로 시작되었다.
도착했을 때 배멀미로 나는 혀가 빠져나와 말려들고 힘이 없어 앉지도 먹지도 못했다
약은 고사하고 한모금 물을 주는 이가 없었다
서러워 흐느끼니 눈물이 쏟아졌다
- 흥선대원군 체진 비망록 -
비망록에는 위혹장이 대원군을 심문하는 과정도 적혀있었다.
- 6월 9일 저녁의 민란은 누가 일으켰습니까
- 백성들과 군인들이 일으킨 것 같소
- 민란의 우두머리는 누구입니까, 합하는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 10년간 물러나 산장에 있으면서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소
9일 저녁에 알았고 또 국왕이 급히 불러 입성했을 뿐이오
- 성대경 | 前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대원군이 중국에 가기 전에 먼저 간 사람이 있어요.
김윤식, 어윤중, 변영주라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먼저 이홍장을 찾아가서 대원군이 원인이니까 영구히 납치해두라고 합니다.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는 고종이 영선사로 파견했던 김윤식과 어윤중의 정보제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길로 대원군은 천진에 억류되었다.
그렇다면 대원군의 억류사실을 안 고종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청나라의 외교문서에는 고종이 대원군의 소환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여러번 보낸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사절단이 나눈 대화 문서에는 이상한 대목이 있다.
- 국왕이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했는데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 국왕께서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한 것은 실로 사사로운 정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 연갑수 박사 |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 -
대원군의 귀국은 고종에게 있어 또 다시 고종을 몰아낼 수도 있는 위협감을 느꼈을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대원군의 봉환에 대해서는 달갑지 않게 생각했을 겁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억류된지 23일째에 접어든 8월 5일.
이번에는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추진하던 정책과 제도를 폐지시킨다.
서울과 지방에 세운 척화비들을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 고종실록 1882년 8월 5일 -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상징하는 전국의 척화비를 모두 제거했다.
쇄국과 개혁의 갈림길에서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서로 다른 생각은 임오군란으로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났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오직 마음 붙일 사람이라고는 문 지키는 사병밖에 없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고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 체진비망록 -
청나라에 억류된 흥선대원군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청나라에 의해 손발이 묶인 흥선대원군은 이제 더이상 서슬퍼렇던 예전의 대원군이 아니었다.
단지 말이 통하는 내 나라, 내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과 청나라 등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자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관계도 외세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한다.
고종실록에는 임오군란 직후에 마련한 대원군을 받드는 특별 규정이 실려있다.
이른바 대원군 존봉의절 규정이다.
대원군이 타고 다닐 가마의 종류부터 흉배는거북의 무늬를 쓴다는 것
품대는 청색의 가죽에 수정을 박은 것을 쓴다는 것까지 너무나 사소해보이는 규정이다.
하지만 청나라에 억류되었던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으로 돌아온 1885년 8월 이후,
이 규정은 예상치 못한 위력을 발휘한다.
3년 1개월 만의 귀국, 흥선대원군은 예전과는 달라져있었다.
쇄국을 주장하던 그가 주한외교사절단을 연이어 초대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운현궁 대문을 밖에서 걸어잠그는 차단봉이 설치된다.
대원군 존봉의절 규정에 새로운 조항이 추가된 것이다.
대문 밖에는 관원을 배치시켜 고종의 허락없이는 외부인이 대원군을 만날 수 없도록 통제했다.
대원군이 귀국하자마자 이루어진 가택 연금.
사람들로 붐비던 운현궁은 인적이 끊겼다.
내천야록에는 이 시기 대원군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운현궁으로 침입하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폭발사고가 발생했다고 실려있다.
대체 무엇때문에 대원군은 그토록 가혹한 처지에 놓인걸까?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고종이 계속해서 청에 대해서 저항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고종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정치세력이 없는데 오직 하나 대원군만이 있습니다.
고종의 반청 움직임을 제약하겠다라는 시도로 대원군을 돌려보냈는데
대원군이 돌아온다는 것은 고종에게는 재앙이죠.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눈치 챈 청나라가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킨 것이다.
저들이 비록 우리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치자고 하지만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부국강병책을 시행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2월 17일 -
심지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원세개는 고종 폐위를 거론했다.
이홍장의 문집에 원세개가 이홍장에게 고종 폐위를 요청하며 보낸 편지 내용이 실려있다.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씨 주에서 현명한 사람을 왕으로 옹립했으면 합니다
이러한 취지를 이하응에게 전하고 서로 돕는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 이문충공전집 -
흥선대원군의 귀국과 함께 조선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았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대치한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친일개화파 정권을 수립하고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였다.
일본군이 조선의 심장을 점령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기막힌 만남.
이제부터 일체 모든 정사를 대원군에게 가서 품결토록 하라
- 고종실록 1894년 7월 24일 -
대체 무슨 생각으로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손을 잡고 친일개화파 내각에 참여한 걸까?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그가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이 주도하는 나라죠.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일본이 주도하는 나라도 아니에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다시 입궐해서 권력을 장악하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겠다, 일본에 의해서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 대해서 내가 맞설 건 맞설 수 있다라는 입장이죠.
당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대원군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낸 것이 실려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많은 원병을 보내시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일본에 붙어 매국하는 무리들을 제거해 주시기를 피눈물로 기원합니다
- 흥선대원군 친서 -
그 뿐만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에게도 밀서를 보낸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 왜구가 대궐에 침범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너희들이 만약 오지 않으면 이 재앙을 어찌 하겠느냐
대원군은 청나라 군대를 남하하게 하고 동학군을 북상시켜 경복궁을 점령시킨 일본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되찾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대원군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중앙에 대원군파는 친일내각인사들에 대한 암살에 나서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거사 계획은 일본군 축출에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역모사건 판결문에 이준용의 이름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왕위찬탈 음모로 기소된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손자다.
그렇다면 대원군은 고종을 끌어내리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일까?
- 주진오 교수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
그는 고종이야말로 그동안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고 보죠.
민씨 세력들도 정치에서 다 몰아내고 유배보내고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어요.
자신이 그동안 고종이 망쳐놓은 나라를 다시 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대원군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일본에 이용당함으로서 아들 고종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누명까지 쓴 채 운현궁에 유폐되었다.
이 시기 대원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뮈텔 주교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최근 대원군이 그의 아들인 국왕과 화해를 하기 위해
나에게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해왔으나 나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 뮈벨 주교 일기 1897년 3월 8일 -
뮈텔 주교의 일기에는 대원군이 얼마나 고종을 애타게 만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대원군이 또 미치광이 같은 짓을 했다
집 주위에 근무하던 포졸을 때려 포승에 묶여 끌려갔다
거기서 대원군은 대궐로 가서 왕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바랐던 전부였을 것이다
- 뮈벨 주교 일기 1897년 7월 그믐날 -
생애 마지막 순간 대원군은 고종과 화해하려 한 것일까?
1898년 2월 22일, 흥선대원군은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죽음 앞에서 아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부국강병의 꿈도 아들 고종도 잃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살다간 구한말은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도 같은 거대한 전환기였다.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아들 고종도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어내기위해 달렸다.
하지만 타협할 줄 몰랐던 흥선대원군은 결국 아들과 갈등하는 사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의 길을 놓치고 만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비극은 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한 아버지가
아들이 해야할 정치마저 대신하려 한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첫댓글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뭔가 특별한 사연을 기대해보았는데 반전은 없군요. ㅎㅎ 그나저나 순수승부사님은 국사관련 전공자신가요? 댓글이나 게시물 보면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거 같길래...
아니요.하도 대한민국 까는 사람이 많아서 관심이 생긴거에요.
좋은글 너무 잘보고감니다 ㅎ 감사함니다
일단 글 잘 읽었구요/ 좋은 마음에서 지적하나 하자면, 도입부에서 18세기 (1700~1799)라고 썼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19세기(1800~1899)입니다. 즉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시기는 19~20세기 초반 입니다.
임진난 이후 약화된 왕권과 세도정치의 문란으로 인해 조선후기는 썩을대로 썩었죠. 양반들의 백성에 대한 수탈과 핍박이 조선이란 문화 선진국을 패망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봅니다.
흥선대원군 만큼 과감하게 개혁주도를 한 인물도 조선 역사에는 드물죠.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공업화를 통한 발전을 바탕으로 생긴 국력이 몇백년간 썩어있던 조선과는 비교가 될수 없었고 중국또한 정복당했다는게 대원군이 파악하지 못했던 점들인것 같네요. 100년만 일찍 태어났었더라면 조선 역사가 달라질수 있었는데 말이죠...
흥선>>>>>>>>>>>>>..고종
고종이 병신임
윗글은 고종을 위해 은근히 변명해주는 글
음....전 홍선대원군이 경복궁 증건을 선택했을때부터 모든게 꼬였다고 보는데...ㅡㅡ;; 역시 사람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른듯
조선은 대원군과 명성황후 민씨 일파와의 권력 다툼때문에 더 빨리 몰락의 길을 가게 된거죠.. 대원군은 외세의 힘을 빌어 자존을 세우기 보다는 조선 스스로가 부강해져서 외세와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하길 원했고, 명성황후 민씨일파와 고종은 그건 너무 시간이 걸리니 외세를 잘 끌어들여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생각이었죠. 결과론적으로 명성황후쪽 세력이 외세를 끌어들였다가 쪽박을 차버린 형국이지만 힘도 없으면서 마냥 외세에 쇄국으로 저항하기도 힘들었을겁니다.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당한 사건은 명성황후의 공작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마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때마침 터진 동학혁명을 빌미로 명성황후는 일본군을 조선내부로 불러들여 자국의 백성들을 학살하게 만듭니다. 그후 일본군은 청나라군이 조선에서 안나가기 때문에 우리도 안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눌러 앉았고 이게 결국 청일전쟁.. 일본이 승리하고 .. 그다음 러일전쟁, 또 일본이 승리..그뒤 먹히는거죠.. 자국민의 시위를 진압하려고 일본군을 불러들인 명성황후를 저는 매우 안좋게 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을 내부로 불러들여 자국의 백성들을 학살하게 만든게 아니라.
일본이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침략의 구실로 삼은거죠.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선정부에서 청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이 텐진조약을 구실로 쳐 들어오니까
정부와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을 맺어서 마무리를 짓고 청군과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는데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궁정을 침입하여 민씨세력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한거죠.
명성황후가 일본군을 불러들여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것은 일본애들이 주로 하는 주장입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의 배후가 아니라는 것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 피란일기가 발견된 걸 보면 알 수 있죠.
임오군란 진압하러 온 청나라는 외교적 해결을 통해 조선에서의 입지도 다지고 일본과의 분쟁도 차단시킬려고 적극적인 중재를 했지만
대원군이 일본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력 대결까지 고려하니까 난처한 청나라가 납치를 해 명성황후세력을 재집권시키는 거죠..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없앨 기회가 여러번 있었음에도 시아버지라서 그러지 못했고 그게 고종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역할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