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에 의한 정조를 위한 정조의 길, 그 역사를 되새기며 걷다
'정조의 도시' 수원에 걷기길인 역사탐방로가 생겼다. 영조(재위 1724~1776년 52년간)와 정조(재위 1776~1800년 24년간) 시대는 조선 600여 년 역사 중 가장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즉위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행궁을 만들고 화성 성곽을 축성한 뒤 건설한 도시가 수원 화성이다. 상업시장인 시전과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농업기반시설인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했다. 요즘 말로 신도시를 건설해서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수원 화성은 정조에 의해서, 정조를 위해 만든, 즉 '정조의 도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死後) 수원 화성은 다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다.
수원 화성의 화서문은 채재공이 직접 쓴 편액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곽둘레길을 걷기 코스로 이용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 즉 융릉을 건설하면서 한양으로 돌아갈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지지대(遲遲臺)가 있다. 그 지지대가 수원역사탐방로의 시·종점이다.
지지대에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한 비(碑), 즉 지지대비가 세워져 있다. 정조 사후인 순조 7년(1807)에 건립됐고,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조선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 능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화산의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해졌다고 해서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개를 붙여 지지대라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원역사탐방로의 지지대비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습지 같은 아름다운 연못이 나온다. 연못을 뒤덮은 연꽃이 더욱 싱그럽게 보인다.
수원 화성에는 두 개의 옛길이 있다. 능행차로와 경기 삼남대로가 그것이다. 능행차로는 정조가 수원 화성을 건립한 뒤 화산(花山)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찾아 온 길이다.
지지대비에서 융·건릉까지 18.7㎞에 이른다. 경기 삼남대로는 지지대비에서 오산시 경계까지 약 45㎞에 이르는 길로, 삼남대로의 원래 구간인 땅끝마을 해남에서 한양까지를 경기지역만 따로 떼어내서 복원한 것이다. 충청·호남·영남의 삼남지방에서 풍부한 물산과 사람이 오가던 길이다. 두 길 모두 옛길이나, 조성 시기로 볼 때 1800년대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러 온 능행차로는 당시 성곽과 행궁 등을 새로 조성하면서 만든 길이라 반듯하게 잘 닦았다. 그 길이 지금은 더 확장되어 대부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도보길은 우회로를 만든다든지, 여의치 않으면 도로 옆 인도를 그대로 이용하게 되어 도보객들에게는 조금 불편을 준다. 반면 과거(科擧)를 보러가던 선비나 보부상, 유배지로 가던 관리들이 다녔던 길인 삼남대로는 아직 숲길이 그대로 보존된 구간이 많다.
지지대비
지지대비가 수원역사탐방로 시·종점
두 길의 출발점인 지지대비에서 자연생태가 잘 보존돼 있는 경기 삼남대로로 가다가 정조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융·건릉까지 16.9㎞를 소개하기로 한다. 아름다운도보여행 채화석씨가 길 안내를 맡았고, 경기도청 문화예술과 조태훈 사무관과 경기문화재단 강진갑 박사가 동행했다.
지지대비는 정조의 비극에 한국사의 비극까지 더해서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6·25전쟁 때 격전을 치른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바로 옆은 1번국도로, 차들이 쌩쌩 달린다.
서호 주변의 가마우지와 백로 서식지. 비가 내릴 때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관을 이룬다.
길은 숲속으로 연결된다. 한여름에도 햇빛을 가려줄 정도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정조가 지지대에서 사도세자의 묘지 방향으로 약 5㎞에 소나무 500그루를 심었다고 전한다. 특히 지지대 주변엔 아직 노송의 흔적을 볼 수 있어, 노송지대라 부른다.
주변엔 벤치와 쉼터도 조성돼 있다. 도보객들이 쉬어가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그 10m 앞에 습지 같은 연못이 나온다. 연못을 뒤덮은 연꽃은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다.
이윽고 지지대쉼터다. 1번국도를 오가는 차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지지대쉼터 주인은 "여기도 걷기길이 생기느냐"면서 반색하며,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건네준다. 손님이 늘어나는 데 대한 기대로 미리 선심을 베풀고 있다. 덕분에 더운 날씨에 걷느라 열이 났던 몸이 시원하게 식는다.
축만제 비석
1번국도를 사이에 두고 경기 삼남대로와 정조 능행차로가 마주보고 있다. 숲길 보존이 잘된 경기 삼남대로가 걷기엔 훨씬 좋다. 햇빛도 가려줄 숲이 있고, 쉬어갈 지지대쉼터도 있다. 하지만 맞은편엔 능행차로와 '춘향전'의 이몽룡이 지났던 길로 알려진 미륵당이 있다. 아쉽지만 맞은편에서 쳐다보고 지나야만 한다.
세계 최초 변기 모양 전시관 '해우재' 지나
숲길을 따라 발길을 옮긴다. 지지대쉼터에서 1.4㎞쯤 지나면 해우재가 있다. 해우재는 우리나라 화장실문화를 선도한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뜻을 기려 건립한 세계 최초의 변기 모양 전시관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변기 모양을 조각화해서 전시해 놓았다. 즉 변기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심재덕 전 시장의 업적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서호 주변의 둔덕은 수원 시민들의 좋은 걷기길로 이용되고 있다. 노송과 어울린 둔덕이 매우 아름답다.
해우재에서 나오면 걷는 길은 서호천으로 연결된다. 둑 위로도 길이 있고, 하천 바로 옆으로도 걸을 수 있다. 서호천 바로 아래 다리가 이목교다. 원래 이 동네 이름인 배나무골을 한자로 이목(梨木)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곳은 서호천 상류인 셈이다. 서호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서친정(西親亭)이란 정자가 나온다. 소공원으로 주민들이나 도보객들이 쉬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서호 바로 옆에 백로·가마우지 서식지
한적한 하천이다. 백로 한 마리가 물속을 향해 쪼는 짓을 계속하는 장면이 보인다. 조심조심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다. 이윽고 부리에 꿈틀거리는 뭔가를 물었다. 이어 여러 차례 삼키기를 시도한다. 유심히 보니 미꾸라지가 백로의 부리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백로는 감쪽같이 삼켰다. 백로와 미꾸라지가 공존하는, 약육강식의 생태계 원리가 작용하는 그런 하천이다. 지금은 어느 도시를 가든 서울의 양재천과 청계천을 시작으로 도심의 하천이 매우 깨끗해졌다. 아울러 그 하천 길로 걷는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되고 있는 형국이다.
수원 화성의 화서문과 공심돈(성곽 왼쪽) 모습이 보인다.
곧 이어 오리 새끼들이 어미 주변에서 날갯짓을 하며 노는 장면도 보인다. 새끼들이 인기척에 놀라 꼬리를 이쪽저쪽으로 흔들며 몸을 옮기는 동작이 귀엽기 그지없다. 정말 한가로운 장면이다. 경기도청 조태훈 사무관은 "서호천 주변은 자연친화적으로 개발한 구간"이라며 "그래서 생태가 그대로 살아 있다"고 강조했다.
서호천이 모이는 서호저수지 직전에 여기산이 있다. 산은 야트막하지만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나무 위에 조그마한 흰 새들이 큰 날개를 펼치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새들이 모여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백로 서식지다. 이런 곳에 백로 서식지가 있다니, 놀랄 일이다. 마침 비가 조금 내려 수백 마리의 백로들이 보금자리에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정말 눈을 크게 뜨고 볼 일이다. 셔터를 연방 누르면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바로 옆에는 가마우지 서식지도 있다. 흰 백로와 검은 가마우지가 공존한다.
백로와 가마우지들은 서호천의 물이 모이는 서호에서 먹이를 구한다. 서호천은 정조가 화성의 자립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다. 정조는 화성의 농업생산시설로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3개의 저수지를 조성했다. 그중 서쪽에 있는 저수지, 서호를 축만제(祝萬堤)라 불렀다. 서호천은 서쪽 호수로 흐르는 하천의 개념인 것이다. 정조시대에 조성된 저수지 중 가장 보존이 잘돼 있다.
서호, 즉 축만제는 정조 23년(1799)에 화성 서쪽 여기산 아래에 흐르는 하천을 막아 만든 저수지로 2개의 수문을 가지고 있다. 화성 주변의 저수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석거·만년제와 함께 천년만년 만석(萬石)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축만제 끝지점에 항미정(杭眉亭)이란 아름다운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의 미목 같다'고 읊은 데서 이름을 따왔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서호는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으며, 이러한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명물이 항미정이다. 서호낙조는 물론 수원 8경 중 하나다.
서호천에서 서호까지 걷는 길은 5㎞ 남짓 된다. 그 길은 백로와 가마우지, 하천의 미꾸라지, 오리, 하천 생태 등 모든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소동파가 '항주의 미목 같다'는 항미정까지. 때로는 오리들이 하천을 올라와 뒤뚱뒤뚱 걷는 모습도 즐길 수 있다.
수원역사탐방로를 아름다운도보여행 채화석씨, 경기문화재단 강진갑 박사, 경기도청 조태훈 사무관 등이 일렬로 걷고 있다.
서호를 지난 서호천은 수원비행장까지 계속된다. 수원비행장이 보일 즈음 우리 철도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협궤철로가 있다. 지금 사용하는 철로보다 훨씬 폭이 좁다. 1936년 일제 말기 수탈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듯하다. 그 철로가 밀레니엄 직전까지 사용됐는데 지금은 폐쇄됐다. 방치된 철로 주변엔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정조의 효심 깃든 융릉
수원비행장 벽을 끼고 돌다 끝날 즈음에 저만치 융·건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조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지다. 1970년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곳이다. 정조가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에서 왕릉으로 격상시켜 융릉(隆陵)으로 했고, 자신이 죽은 뒤 효의왕후와 함께 아버지 옆에 안치되면서 건릉으로 조성됐다. 융·건릉은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조성한 묘지인 것이다.
서호천 양쪽으로 수원역사탐방로가 나 있으며,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융릉, 왼쪽은 건릉으로 향하는 길이다. 봄이면 길 양쪽으로 붉은 진달래가 만개해 방문객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까지 신도(神道)와 어도(御道)가 이어져 있다. 왼편의 신도는 홍살문을 통과한 영혼이 걸어 들어오는 길이고, 신도보다 조금 낮게 만들어진 오른편의 어도는 임금이나 세자가 다니는 길이다. 신도와 어도를 따라 올라가면 정자각을 만나게 된다.
정조는 부친에 대한 사모의 정을 표하기 위해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해 가능한 한 화려하게 꾸미려 했던 것으로 전한다. 융릉으로 격상되기 전 현륭원 조성 당시 정조는 화려한 석물 배치와 함께 주변 조경과 식수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아 이장 후 몇 년에 걸쳐 조경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지금도 수목원을 연상시킬 정도의 정연한 소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당시 원행에 나섰던 정조가 현륭원 주변에 송충이가 번식해 소나무를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고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아 씹었다는 이야기는 정조가 얼마만큼 현륭원 주변의 조경에 신경을 썼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반면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은 조금 썰렁한 편이다. 정조의 효심이 깃들어 있는 융릉은 사시사철 새 옷을 갈아입은 듯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특히 겨울철 노송 위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은 융건백설(隆乾白雪)이라 하여, 화성팔경 중의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
향미정
능행차로와 경기 삼남대로 길은 계속되지만 정조의 흔적이 가장 뚜렷한 지지대비에서 융·건릉까지 16.9㎞를 6시간 남짓 걸려 걸었다. 역시 수원은 어디를 가든 정조에 의한, 정조를 위한, 정조의 역사가 서린 곳이었다.
수원 성곽길
'정조의 성' 화성 성곽둘레길은 5.7km, 약 2시간 걸려
왕이 나들이 때 머물던 궁을 행궁이라 한다. 행궁은 평화로울 때는 왕의 휴식처나 능원 참배로 사용됐지만 혼란스러울 때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외침 등으로 왕이 왕궁을 비우고 휴식 또는 피신해 있었거나 피신할 목적으로 행궁을 건립했던 성으로는 남한산성, 강화산성, 진도 용장산성, 북한산성, 수원 화성 등이 있다. 여러 개의 성 중에서 남한에 지금 원형대로 보존된 행궁은 없다. 그나마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수원 화성이다.
해우소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1793년(정조 17) 1월 12일에 수원 팔달산에 올라 팔달산 아래의 신도시를 '화성'이라 명명한 데서 유래했다. 화(華)자는 현륭원 뒤편에 있는 화산(花山)의 화(花)자를 따서 한자를 바꾼 것이라고 전한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서울에 버금가는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 뒤,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과학적·실용적으로 쌓은 대규모 성이다.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했다. 성곽의 둘레는 약 5.7㎞이며, 성인 걸음으로 한 바퀴 걷는 데 2시간가량 소요된다. 성벽의 높이는 4~6m에 달한다. 실학자인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맡았고, 거중기 등을 이용해 쌓았다.
성 안팎으로의 출입은 4대문과 암문 다섯 곳을 통해 이뤄진다. 창룡·장안·화서·팔달문 4대문과 북암문·동암문·서암문·서남암문· 남암문이다. 수원 화성이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문인 장안문이 사실상 정문이다. 장안(長安)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뜻이다. 이 문은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크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농업용수를 조달하기 위해 건립한 서호에서 백로와 가마우지들이 어울려 놀고 있다.
창룡(蒼龍)은 청룡과 같은 뜻으로 동쪽을 의미한다.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쪽 문으로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왔다. 서쪽 대문은 화서문으로,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이 썼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된 문이다.
화성의 특징적인 시설로는 성곽 주위와 비상시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공심돈(空心墩)을 건립했다. 공심돈은 화성에서 처음 설계된 것이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동북공심돈· 남공심돈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북· 동북공심돈만 남아 있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비상시 군사들이 이 안에 들어가서 작은 구멍으로 총을 쏘고 큰 구멍으로는 불랑기포를 쏘면서 방어할 목적이었다.
그외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교통
지하철 1호선이 서울에서 수원까지 오전 5시41분부터 10~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수원역에서 화성행궁 앞 종로사거리로 가는 버스는 11번·13번·36번·39번이 있다. 잠실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1007번 좌석버스가 오전 5시부터 8~12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수원역-화서문-경기경찰청-수서역-잠실역-석촌역-가락시장 등을 거친다. 강남역이나 양재역에서는 3000번 좌석버스가 오전 6시부터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수원역-팔달문-장안문-한일타운-파장동-양재역 앞-강남역 등에 정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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