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주니어·소녀시대…팀으로, 솔로로 '자유자재'
예능 프로도 집단 MC 체제 팀과 개인별 캐릭터 조화로 다채로운 대중 입맛 맞춰
기업 '협업과 분업' 시사점 커
2009년 대한민국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문화 콘텐츠를 원하는 방식으로 누릴 수 있는 미디어 환경 구축에 성공해 가고 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대중을 까다로운 미식가(美食家)로 만들었다. 이런 대중의 사랑을 확보하기 위해 일정한 방향으로 진화된 대중문화의 기획 방향은 대중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최근 대중음악 시장에서는 아이돌 그룹이 대세다. 그룹은 셋에서, 넷으로, 다섯으로, 열셋으로 멤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떼샷'으로 등장한 아이돌 그룹에 환호하고 있다. '떼샷'은 '그룹 샷(group shot)'을 뜻하는 촬영 현장 용어로 하나의 화면 안에 4~5명 또는 그 이상의 인물을 넣어 집단 촬영하는 것을 말한다.
- ▲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소녀시대’(위쪽)와 ‘슈퍼주니어’. 요즘 대중음악 시장의 아이돌그룹은 이전보다 멤버 수가 크게 늘어나고, 그룹 내에서 팀을 나누어 서로 다른 무대에서 전혀 다른 색깔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유닛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이돌 그룹과 오락프로그램의 사회자에 나타난 떼샷 현상은 정확하게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의미 있다는 전제하에 이 두 가지 현상이 가리키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이돌 그룹
아이돌 그룹을 정의하면 '10대들의 우상이 되기 위해 음악 콘텐츠를 활용하여 이미지화에 성공한 그룹'이다. 정확한 목적을 갖고 전략적으로 짜인 문화 상품이다.
"미국에서 청소년들이 MTV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마이클 잭슨이나 듀란듀란처럼 예쁘장한 얼굴에 춤 잘 추는 가수에게 열광하는 걸 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저렇게 비주얼한 가수가 성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국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다가 MTV 출범을 체험한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의 인터뷰 내용이다. 미국에서 매체와 대중이 요구하는 스타의 방향을 확인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예쁘장한 얼굴에 춤 잘 추는 가수'를 육성, 1996년 H.O.T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는다. 기획자에 의해 발탁되고 트레이닝을 받고 기획자가 정한 콘셉트에 맞춰 세상에 나온 그룹의 탄생이었다.
이후 아이돌 그룹은 카리스마(젝스키스, OPPA, 태사자)와 깜찍함, 귀여움(핑클, SES), 친근함 등 각자의 개성적인 이미지를 만들며 나타났다.
아이돌 그룹의 평균적인 수명은 5년 정도다. 오래 못 가고 해체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기의 불균형에서 시작되는 멤버 간 불화다.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는 멤버는 단독 활동을 원하게 되고, 나머지 멤버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아이돌 그룹 가운데 한 멤버가 개인 활동을 시작하면 그것은 팀 해체의 전조였다.
이러한 '아이돌 그룹의 공식'을 깨트리며 등장한 것이 13명으로 구성된 슈퍼주니어이다. 슈퍼주니어는 처음부터 개별 활동을 염두에 둔 것은 물론이고, 팀을 나누어 다른 무대에서 전혀 다른 색깔의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유닛 구성'이라는 독특한 전략을 취했다.
발라드만 부르던 솔로가수가 느닷없이 댄스곡을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음악적으로도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가수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에도 크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한 분업(分業)을 목적으로 모인 아이돌 그룹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 ▲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MC의 수가 늘어나 출연자 전원이 MC 역할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그림은 ‘무한도전’ 출연자의 캐리커처. / 올댓스토리 제공
버라이어티 쇼는 약 2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식과 성격으로 발전, 최근에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무한도전, 1박2일 등)'라는 콘셉트로 정착되었다. 큰 포맷만 정한 채 그 내용은 전적으로 출연자들이 꾸며야 하는 것이 리얼 버라이어티 쇼이다.
이는 IMF 이후에 등장한, '신장개업' 같은 문제 해결형 버라이어티쇼나 월드컵 무렵 나타난 선남선녀의 짝짓기 프로그램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당초 이들 프로그램의 MC는 한 명이었다. 그런데 다수의 출연자가 대본이 없는 상태에서 각자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예상 밖의 돌발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 단 한 명의 MC가 대처하면서 이끌어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자연스럽게 그룹 MC 체제가 등장하게 됐다.
최근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전반적인 진행을 이끄는 메인 캐릭터가 있지만, 출연자 전원이 함께 진행을 하고, 매회 같은 멤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MC이고 모두가 출연자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처럼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해서는 다른 출연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진행을 하면서 자신도 모든 게임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진행자와 플레이어 역할을 바쁘게 오가야 한다.
이렇게 고도로 진화된 환경에서 빛을 발한 것은 오랫동안 2인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던 유재석이었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원조 격인 '무한도전'을 통해 유재석은 국민 MC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 라는 콘셉트로 출발했다. 도무지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들, 지식과 지능, 재능 어느 면에서도 평균과 상식 이하로 보이는 출연자들을 이끌고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은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무한도전이다. 유재석은 출연자들로부터 재미를 이끌어 냈고, 나아가 감동적인 프로그램이라는 칭찬을 받아냈다.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무한도전에서만큼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이 '팀'으로 기억되고 그 팀이 만들어내는 재미로 대중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과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 나타난 '떼샷' 현상은 이웃나라 일본의 영향도 작용한 듯하다. 일본의 경우 우리보다 5~10년쯤 앞서 '떼샷' 현상이 나타나 구성원 수가 108명에 이르는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고, 그룹 MC 체제가 일반화됐다.
■기업 경영도 팀플레이
기업의 CEO, CFO, COO까지는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CTO, CSO, CMO를 지나 CDO를 이야기하면 갸웃거리며 그 역할을 되묻곤 한다. 기업이 활동하는 사회 환경이 급변하고, 모든 일에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기업의 각 분야에 저마다 최고 책임자를 두게 된 것이다. 당연한 진화의 방향이다.
아이돌 스타들이 그룹으로 활동하고, 하나의 프로그램이 다중MC 체제를 갖추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같은 'C자' 경영진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춤을 추며, 개별 플레이를 하면 팀이 해체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의 그룹인지, 아니면 '따로 또 같이'라는 행동 양식을 조화롭게 수행하고 있는 그룹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은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를 영입하여 C로 시작되는 최고책임자 자리를 주지만, 실제 마지막 결정은 오직 한 사람에 집중되는 아이러니한 조직 구조로 돼있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이미 C자로 대변되는 최고 책임자가 아니다.
국내 기업의 초기 성장기는 버라이어티 쇼가 태동하던 시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이때 MC는 카리스마를 갖고 쇼 전체를 진두지휘할 수 있어야 했다. 출연자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등장하고 퇴장했다. 대중은 그의 일사불란한 지휘 속에 매끄럽게 진행되는 쇼를 그저 바라보면 그만이었다. 경영1세대라 불리던 분들의 놀라운 지도력이 추앙받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임원진이 구성되고, 중간 간부도 있고, 말단 직원도 있지만,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춤을 추는 아이돌 그룹처럼 리더를 따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대중은 모든 일에 다양성과 순발력과 친근감을 요구한다. 모든 일에 개입하기 원하고, 일방적인 수용을 거부한다. 한 가지 이미지에 고착된 것에 쉽게 싫증 내고 외면한다.
이러한 요구 조건을 맞추기 위해 팀플레이는 필연적 선택이다. 쉴 새 없이 발생하는 일에 전문적이며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최고책임자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훌륭한 조종자가 있어 충돌이 생기는 부분을 매끄럽게 조율하면 된다. 필요하다면 개인 플레이를 해야 하고, 각자의 재능과 개성이 한껏 발휘되어야 한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가운데 시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놓인 기업의 CEO는 돌발 상황에 놓인 리얼 프로그램의 MC와 유사하다. 순발력 있게 방향을 결정해야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독으로 할 수 없다.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물러나야 한다. 리더의 역할에 따라 개인이 자기 능력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도 있고, 팀으로 기억되는 성과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중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대중보다 빠르고 영리하고 순수하며 고집스럽다. 이런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대중문화는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2009년까지의 진화 결과는 '팀플레이와 뛰어난 사회 지능을 가진 리더'라고 정리된다.
세분화하여 감정이입의 대상을 넓히고, 각 분야의 책임자가 전문적으로 활동하게 놓아두라고 대중은 요구한다. 필요할 때 리더가 등장하여 이들 사이의 역할을 조정하되 겸손한 태도로, 친근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기업도 정부기관도 스포츠팀도 사회단체도 이 대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들과 함께 가야 하고 이들을 향해 있어야 하며 이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아주 뛰어난 한 사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한 대중 앞에 홀로 서는 것은 대중을 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부족한 사람들을 조화시켜 뛰어난 팀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할 때 리더와 팀 모두에게 갈채를 보내겠다고 대중은 말하고 있다. '떼샷의 비밀'은 그러한 대중의 목소리를 담고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