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부산에서 개교한 육군사관학교는 생도들에게 4년간 정규 대학과정 교육을 시킨 뒤 학사학위를 수여하고, 1955년 생도들을 육군 소위로 임관시켰다. 6개월간 단기 교육을 받고 임관한 육사 1~10기 출신과 구별하는 차원에서 ‘정규 육사 1기’라고 했다. 1973년 윤필용 장군 사건 이후 ‘육사 11기’라고 불렀다. 육사 11기는 1966년 ‘하나회’라는 친목단체를 조직했다.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이 쿠데타 음모 모함을 받고 구속되자 ‘하나회’는 군내 정치 조직으로 변질됐다. 이후 대한민국 군을 주무르면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군에서 퇴출당했고, 1996년에는 법의 심판을 받으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육사 11기로 임관한 손영길, 정호용, 노정기 소위는 전방(강원 인제·화천) 지역 7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7사단장은 김익렬 장군이었다. 1957년, 6군단 부군단장이던 박정희 장군이 7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예전 5사단에서 같이 근무한 윤필용 중령을 군수참모, 차규헌 중령을 인사참모, 조천성 중령을 정보참모로 포진시켰다. 셋 다 육사 8기다. 박정희 사단장이 부임할 때 손영길 중위는 7사단 3연대 9중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에는 한 해 동안 1개 중대가 탈영 내지는 월북해 탈영병 문제로 전 부대가 골치를 앓았는데, 손영길의 9중대에선 탈영병이 한 명도 없어 박정희 사단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윤필용 장군은 비서실장, 손영길 대위는 전속부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그러나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 손영길 장군을 쿠데타 혐의로 구속한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군부 내에서 있을 수 없는 항명 사건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 ‘쿠데타 음모 사건’은 사건 발생 두 달도 못 돼 ‘모함’에 의한 것으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이 사건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조사·보고 부실로 보직 해임을 당했다. 42년이 지난 2015년 두 장군의 쿠데타 음모 혐의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는 1973년 4월 진종채 신임 수경사령관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윤필용 사건은 ‘모함에 의한 사건’임을 보고한 사실이 있다. 나는 이렇듯 지금까지 세상에 ‘잘못 알려진 사건’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 한다.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모함 사건’은 대한민국 50년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건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충신이 역적으로 몰린 사건이다. 30여 명의 우수한 장교가 퇴출되면서 1979년 10·26사건을 일으킨 김재규가 재등장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1979년 12·12사건과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원인(遠因)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전두환, 노태우 장군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2. 전두환의 전화
7사단장을 마친 박정희 장군은 1군 참모장, 관구사령관을 거쳐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손영길 대위는 7사단을 떠나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1960년 손 대위는 고향 울산으로 가던 길에 박정희 사령관을 찾아가 인사했는데 그 직후 군수사령부로 전입해 경비중대장을 지냈다. 그다음 해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정변 다음 날인 5월 17일, 손영길 대위는 서울에서 학군단 교관으로 근무하던 육사 동기생이자 절친한 친구 전두환 대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5·16 주체세력이 육군사관학교에 5·16 지지 시가행진을 요청했는데, 육사 교관들이 거절하는 바람에 모두 반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그러니 손 대위가 서울에 와서 박정희 장군께 말씀드려 오해를 풀어주고, 교관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손 대위는 밤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5월 18일 아침 서울역에서 전두환 대위를 만났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상황이 바뀌었다. 육사 생도들이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했고, 구속된 교관들도 모두 풀려났다는 것이다. 손 대위는 서울에 온 김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당시 의장은 장도영 장군)을 만나 인사하고는 서울에 온 경위를 보고했다. 대화를 마친 뒤 그가 “부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박정희 장군은 “가긴 어딜 가. 여기서 근무해”라며 주저앉혔다. 손 대위는 그때부터 박정희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3. “배신자는 자결” 하나회의 탄생
손영길 대위는 박정희 부의장에게 육사 11기 동기생과 후배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방첩부대 등 핵심 권력기관에 근무할 수 있도록 추천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 윤필용 대령에게 추천해 전두환 대위는 민원비서, 최성택 대위는 총무비서, 노정기 대위는 경호실에 근무하게 했다. 후배(13기)인 신재기 대위는 박정희에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 된 이주일 장군 전속부관으로 추천해 함께 근무한다. 육사 11기 중 손영길·전두환·김복동 대위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박 대통령 전속부관 손 대위가 막강한 파워를 갖고 친목 모임을 선도했다. 1964년 11월 손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해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는 30대대장에 보직된 데 이어 1966년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자타공인 정규 육사 출신의 상징이 됐다. 손 중령은 부대대장을 선발하면서 우수한 후배를 선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11기 동기생을 중심으로 후배 기수마다 10명 정도를 포함시킨 ‘우수 장교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66년 초 30대대장 손 중령이 전두환·김복동·노태우·정호용·권익현·박갑용·노정기·최성택·박병하(이상 11기), 박희도(12기), 배명국·이종구(14기), 김상구(15기), 김진영·허화평·허삼수(이상 17기)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은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하자.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정의로운 군인이 되자. 그리고 박 대통령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받들고 충성을 다하자”는 결의를 하고, 모임 명칭을 ‘하나회’로 정했다. 전두환 중령을 회장으로, 이종구 대위를 총무로 선출했다. ‘회원 간에는 의리를 지키고, 배반하는 자는 자결해야 한다. 조직은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는 행동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이를 철저히 지키기로 다짐했다. 기수별 모범 장교 10명 정도를 선발해 가입시켰고, 선후배 간 친목과 유대를 강화하자는 결의를 한 뒤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전두환, 손영길 소령(오른쪽 끝). 손 소령은 청와대 외곽경비를 책임지는 30대대장 후임에 전두환을 추천했다(1967년 8월 17일). 사진제공·김충립
하나회는 처음엔 친목 모임이었을 뿐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다. 1967년 손 중령은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공수부대에 근무하던 전두환 중령을 30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했다. 30대대장에 부임한 하나회 회장 전 중령은 이때부터 하나회를 비밀 사조직으로 키웠다. 하나회는 1972년 육사 24기까지 150명 정도가 가입한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1973년에는 육사 11기 장성 진급자 4명이 모두 하나회 출신이어서 최대 경사를 맞았다. 하지만 핵심 회원인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회원 간 선의의 경쟁과 대결이 시작되면서 과연 끝까지 의리를 지킬 수 있을지 이심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이 점을 염려한 후배 회원들은 1973년 1월 초 26사단 76연대장이던 권익현 대령의 숙소에서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 회원의 장군 진급 축하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후배 회원들은 손잡이 끝에 별을 부착한 단검을 축하 선물로 만들어 주면서 ‘하나회 회원 간 의리를 지키지 못할 경우 이 단검으로 자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이렇게 끈끈하던 의리는 정치적 욕망에 불타는 한 사람으로 인해 축하파티 후 두 달도 안돼 물거품이 된다. 하나회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군내 비밀 사조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음 보고된 것은 1973년 3월이다. 보고자는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철저히 조사해 뿌리를 뽑고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곧 영관급 장교 30여 명이 조사를 받은 후 강제전역 당했다. 보안사는 전두환 장군과 노태우, 정호용 대령도 조사하려 했으나 박종규 경호실장의 압력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4. 박정희와 하나회
1973년 1월 하나회 후배들이 육사 11기 장성 진급을 축하하며 선물한 단검. 사진제공·김충립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이 구속되자 이들과 가깝던 장교 30여 명이 군을 떠났고, 전두환·노태우 장군과 가까운 하나회 회원만 살아남았다. 이렇게 되자 모두 전두환 장군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하나회와 박 대통령은 밀접한 관계’라는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하나회를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막강한 조직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누군가 흘린 얘기였다. “하나회는 박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해 만들었다. 1963년 조직 당시 윤필용 방첩대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받았다.” “박 대통령이 육사 출신 중 경상도 출신 위주로 조직하라고 했다.” “박 대통령이 하나회 출신 장성들에게 ‘일심(一心)’이라고 새겨진 장검(長劍)을 하사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전 장군의 권위를 세우고 박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의 권위와 명예를 훼손했다. 더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은 한통속’이라는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현 박근혜 정부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동서화합과 국민대화합을 저해한다. 하나회 결성 시기가 1963년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모임에 참석했다는 육사 17기 김진영, 허화평, 허삼수 등은 당시 임관한 지 2년밖에 안 된 소위였다. 1963년 7·6쿠데타 음모 사건이 드러났을 때도 하나회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방첩부대장 윤필용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는 얘기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윤 장군은 1965년에 방첩부대장이 됐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전속부관이던 손영길 장군은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한다. 박 대통령이 경상도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하나회를 조직할 당시 육사 11기 노정기, 15기 고명승, 16기 장세동 등 호남 출신이 회원으로 가입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하나회 출신 장성들에게 ‘一心’을 각인한 장식용 장검을 하사한 일도 없다.
5. 19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1963년은 5·16혁명 주체세력이 대혼란을 겪는 시기였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이 창당되고 민정 이양을 준비하면서 군부로 되돌아갈 것인지, 민정에 참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혁명 주체세력 내 함경도 출신(정일권, 임동하, 박임항 등)과 평안도 출신(장도영), 경상도 출신(박정희)의 갈등이 표출된 해였다. 1963년 7월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이 역시 쿠데타 혐의로 구속되면서 경상도 출신 박정희 장군이 대세를 잡았다. 1963년 초 육사 5기 김재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 8기와 극심하게 대립할 때 육사 11기들이 김재춘 장군과 한 편이 돼 육사 8기들을 제거하려 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노태우 대위는 김재춘 중정부장의 전속부관으로, 전두환 소령은 인사과장으로 근무했다. 김재춘 부장은 부임하자마자 중정에 근무하던 육사 8기생들을 몰아내고, 육사 11기 출신을 영입하는 등 분위기를 일신하면서 조직을 강화했다. 1963년 3월경, 노태우 대위가 주동이 돼 전두환 소령과 육사 11기 출신 7~8명이 최성택 소령 집에 모였다. 이들은 당시 공화당 창당을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지목된 김종필 등 육사 8기생 40여 명을 제거하려는 쿠데타를 모의했다. 4대 의혹사건이란 1961년 9월 13일 서울 광장동 부지 18만 평을 확보한 후 1962년 12월 26일 워커힐호텔을 건축하면서 건축비를 횡령해 창당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1961년 11월 일본 닛산자동차를 들여와 고가로 판 새나라자동차 사건, 1962년 5월 증권파동 사건, 1962년 회전당구대 100대를 일본에서 수입해 33곳에 설치 운용하면서 거액을 만든 사건을 말한다. 11기들의 쿠데타 명분은 ‘정치군인 숙정’이었다. 김종필 등 육사 8기들이 중정을 창설하고 군으로 복귀하지 않은 채 장기 집권을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만들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 이들은 전방에 근무하던 후배 장교들에게도 가담을 종용했다. 이들은 1963년 7월 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쿠데타를 모의하던 중 방첩부대 요원에게 음모가 발각됐다. 이들은 방첩부대장 정승화 준장의 지시로 체포돼 구속 조사를 받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종규 경호실장의 보고로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여의도공항에서 청와대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박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청와대에 안 계시는 동안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육사 11기 출신 일부 영관, 위관 장교들이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 방첩부대에 적발돼 방첩부대장이 구속해 조사했습니다. 청와대에 도착하시면 보고하려고 방첩부대장이 대기 중입니다.” 박 대통령이 “어떤 장교들이야?” 하고 묻자 박 실장은 “정규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인데 전두환 소령, 정호용 대위 등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앞자리에 있던 대통령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 “각하, 이 사건은 음모입니다. 정규 육사 출신 11기들이 이제 겨우 대위, 소령입니다. 무슨 힘이 있다고 쿠데타를 모의했겠습니까. 전두환 소령은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에 근무한 장교입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손 소령이 이렇게 말하자 박 실장도 더 이상 보고하지 않았다. 손 소령은 나아가 “잘해보려다 오해를 받고 조사를 받게 됐으니 각하께서 이들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간청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도착하니 정승화 방첩부대장이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배석 하에 쿠데타 음모 사건을 보고하려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보고를 받기도 전에 “정규 육사 출신으로, 계급도 낮은 장교들이 무슨 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겠나. 이들을 잘 교육시키고 타일러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훈방하라”고 지시했다. 사건은 종결됐다. 그때 군 생활을 마감하고 처벌받았어야 할 전두환 소령, 노태우 대위 등은 동기생인 손영길 소령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쿠데타로 조사받은 기록은 기무사 존안기록에 분명 존재한다.
6. 전두환, 노태우를 살려준 후환
이 이야기는 53년 전인 1963년에 ‘쿠데타 음모’라는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숨은 이야기다. 이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소령이 30대대장, 제1공수여단장, 제1사단장을 거친 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한 후 1980년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인 노태우 대위는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 이 사건이 거론된 것은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75년에 출감한 손영길 전 장군이 자신의 집을 위로차 방문한 전두환, 노태우 장군에게 언급하면서다. 이 자리에서 손 전 장군이 “내가 쿠데타 음모를 한 사실이 있냐. 너희들은 1963년에 실제로 쿠데타 음모를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방첩대에 구속돼 조사받을 때 내가 대통령에게 간청해 살려내지 않았냐. 그러니 너희들도 내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지 않았다고 얘기해줬어야 하지 않냐”고 다그치자 두 사람은 아무 말 못하고 듣기만 했다. 손 전 장군은 “의리를 배반할 경우 자결하기로 맹세한 사이가 아니냐. 너희는 나에 대한 의리를 지켰어야 했다”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이 사건의 일부가 두 번째로 거론된 것은 2014년이다. 중정부장을 지낸 김재춘 장군이 2014년 세상을 떠나자 이 사건을 아는 육사 11기 중 한 명이 블로그에 추모글과 몇 장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내용은 이렇다. “1979년 10·26이 발생한 후 김재춘 장군은 친구인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만나 1963년 7·6 쿠데타 음모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으나 정 장군이 바쁘다며 시간을 내주지 않아 12·12 직전에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이때 김 장군은 정 참모총장에게 ‘7·6 쿠데타 사건을 조사한 후 이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를 처리하지 못하고 살려준 것은 잘못한 일이다. 지금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했으나, 정 총장은 ‘이번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말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은 결국 신군부에 의해 체포당했다. 결론적으로 1963년 7·6 쿠데타 음모 사건은 전두환 소령과 노태우 대위 등의 정치적 욕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대화하는 김종필, 박종규, 박정희(왼쪽부터). 동아일보
7. 하나회, 윤필용 사건 후 전두환 사조직으로
1973년 3월 윤필용, 손영길이 구속되고, 이 사건을 조사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음모 배경에 하나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거론하려 했다. 이때가 하나회라는 조직을 인정하고 처음 공개한 시점이다. 강 사령관은 하나회 회장인 전두환 장군을 조사하려 했다. 그러나 박종규 경호실장과 전두환 장군의 반발로 중단된다. 하나회는 손영길 장군이 구속된 1973년 이후 정치 지향 군인들에 의해 사조직으로 변질됐다. 1979년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되고 난 뒤 더욱 세(勢)를 확장해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핵심 세력이 됐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91년 9월과 10월, 나는 신동아에 ‘하나회 파워게임’을 연재하면서 하나회라는 조직이 군내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장군의 비위 사실을 적발한 적도 있다. 노 사령관이 9공수 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특전사 영관급 장교 조모 중령 등에게 현금봉투를 돌리는 것을 적발하고 보안사령부에 보고해 돈 봉투를 즉각 회수하도록 조치한 사건이다. 이때부터 하나회 조직은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냈고, 일반 장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하나회 회원이 아니면 우수한 장교라 할지라도 진급·보직에서 제외됐다. 하나회는 불평불만과 갈등의 요인이 돼 군의 단결과 사기를 떨어뜨렸다. 신동아 연재 이후 하나회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악화됐고 YS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 조직을 와해시켰다. 당시 나는 육군참모총장 김진영 대장을 위시해 하나회 회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쉬운 기무사령관·수도경비사령관·특전사령관 등 중요한 3개 대전복부대장을 장악한 사실에 경악했다. YS가 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처리한 게 아닌가 했다. 이들이 반기를 들지 않았기 망정이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YS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하나회를 제거함으로써 군부가 다시는 정권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회는 내가 만들었다”
손영길 前 수경사 참모장
하나회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說)이 분분하다. 대체로 육사 11기인 전두환, 노태우 등 영남 출신들이 주도한 군 사조직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명령에 복종하고,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하면 충성을 다하고,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걷고, 진급 및 보직에서 특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전두환이 만들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용도폐기했다는 주장도 있고(안병호),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이 대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김충립 씨의 증언은 다르다. 손영길이 1965년 30대대장이 되고 나서 이듬해에 ‘우수장교 친목모임’을 만든 것이 출발점이고, 1967년 전두환 중령이 30대대장이 된 이후 군내 비밀사조직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사 11기로 하나회 출신인 권익현(전 민주정의당 대표)은 2015년 12월 ‘월간조선’을 통해 “1963년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4대 의혹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 여론을 전달했다”고 회고한다. 당시 박정희 의장이 “너희(육사 11기)가 뭘 좀 만들어봐라”고 해서 박 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은 생각에 하나회를 만들었다는 부연이다. 그렇다면 1963년 당시 박정희 전속부관이던 손영길의 증언은 어떨까. 손씨는 12월 14일 신동아와의 전화통화에서 “권익현의 ‘월간조선’ 회고를 보고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해 ‘사실이 아니다’고 전했다. 우리가 함께 박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 전두환과 내가 함께 박 대통령 내외를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내가 전두환을 30경비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하면서다”고 주장했다. 그의 증언은 그가 소장한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손영길은 “하나회는 나라에 충성하는 능력 있는 군인 모임으로 내가 만들었고, 대통령을 경호하는 30대대장이 회장을 할 수 없으니 전두환에게 회장을, 이종구에게 총무를 맡겼던 것”이라고 했다.
“윤필용 사건은 박종규 작품”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대해서는 “2015년 모두 무죄를 받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옷을 벗은 억울한 후배 장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며 ‘통일정사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은 중앙정보부장을 노린 박종규와 신범식이 강창성과 함께 ‘짜고 친 고스톱’이라고 했다. ‘신동아’는 1963년 7·6쿠데타 음모와 관련, 전두환 전 대통령 측에 확인을 요청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손영길 씨는 “김충립은 기록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니 알 수 있겠지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며 “다만 당시 여의도공항에 막 도착해서 ‘각하’와 차를 탔는데, 박종규가 쿠데타 보고를 하기에 앞자리 조수석에서 몸을 돌려 ‘그 친구들이 그럴 일 없다’고 단언한 건 맞다”고 확인해줬다. 육사 11기인 노정기 전 필리핀 대사의 증언은 이렇다.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등은 예전부터 경쟁관계여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선 노코멘트하겠다. 확실한 것은 ‘하나회’라는 육사 11기 모임은 전두환이 주도한 ‘5성회’ ‘7성회’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모임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동기생 10여 명이 모여 친목 모임을 했는데, 이후 후배들을 모아 하나회를 조직한 것은 기억한다”고 했다.
입력 2016-01-05 18:26:47
“1963년 전두환·노태우 쿠데타 음모 옐로카드<신상카드> 기록하려다 무산”
25년 만에 ‘신동아’ 手記 연재 재개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 육사 11기들이 8기 40명 제거하려다 발각
● ‘윤필용 사건’ 본질은 파워게임
● 신군부, 1980년 1월부터 집권 시나리오 가동
● YS 하나회 해체 정보 샜으면 쿠데타 났을 것
● ‘신동아’에 하나회 처음 알리자 살해 협박
신동아 인터뷰에서 군내 음모와 암투에 대해 설명하는 김충립 전 수경사 보안반장. 지호영 기자
김충립(69) 전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은 격동의 시기에 ‘정보의 길목’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1968년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ROTC 6기로 임관해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당시 전두환 중령의 소개로 육군보안사령부에서 일했다. 1969년 11월부터 1980년 12월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수경사, 특전사 등 주요 부대의 보안부서에 근무하면서 권력 상층부의 파워게임과 이합집산 동향을 분석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힘 있는 놈이 음모를 꾸미기 전에 미리 잡아 서빙고 분실로 데려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15년 11월 ‘신동아’ 편집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25년 전 ‘신동아’에 수기를 연재하다 살해 협박을 당해 연재를 중단한 사람입니다. 이제 남은 수기를 완성했는데,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1993년 김영삼(YS)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전격적으로 군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했다. 그에 앞서 김충립 전 반장은 1991년 신동아 9, 10월호에 실린 ‘하나회 파워게임’이라는 기사를 통해 하나회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렸다. 정보를 분석해 보안사령관에게 요약 보고하는 그에게 하나회 동향 분석은 주요 업무였다. 하나회의 존재와 그들의 암투가 알려지자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군은 부인했고, 그와 가족은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주요 언론은 이 사건을 테러로 규정하고 연일 크게 보도했다. 25년 만에 신동아 편집실을 찾은 그를 만났다.
“김충립 목숨 거두겠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대 교수를 하다가 귀국해 2012년 총선 때 기독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이후 탈북자와 통일 관련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세간을 모두 정리해 미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1991년 신동아 10월호에 ‘언젠가 다시 수기를 연재하겠다’고 썼는데,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아 연락했다.” ▼ 신동아에 수기가 실린 후 어떤 협박을 당했나.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김충립의 목숨을 거두겠다’고 협박했다. 고교생 딸과 초등생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등 온갖 협박을 받았다. 아이들은 친척 집으로 피신시켰다. 공갈 협박한 무리 중에는 ROTC 출신도 있었는데, ‘너 때문에 우리 ROTC 출신 전체가 군에서 배신자로 찍혔다’고 하더라.” ▼ 어떻게 대응했나. “당시 대한민국 군인들에게 신동아는 필독서였다. 군에서도 (하나회의 존재가) 서서히 알려지게 되니 그해 12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방송국에 가서 기자회견을 했다. 공갈협박범의 음성 녹음을 들려주고, ‘비겁하게 협박하지 마라. 참모총장이 부인했으니 나를 법적으로 걸어라. 법정에서 밝히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녹음된 협박범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 당시 신동아 9, 10월호에 1, 2화가 실리고 연재가 중단됐는데. “군에 있어봐서 잘 안다. 결코 점잖게 대응할 사람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가족 살해 협박이 괴로웠다. 3회 원고를 탈고할 무렵 임재문 중장(1993~98년 기무부대장)이 찾아왔다. 그는 1975년 보안사 감찰실에서 1년간 감찰요원으로 함께 일한 ROTC 3기 선배다. 자신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 ‘김충립을 처벌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전 전 대통령이 ‘김충립의 말은 모두 옳다’며 ‘처벌해선 안 된다’ 했다고 전하더라. 3회 원고에서는 1973년 윤필용 사건을 다뤘는데, 신동아 편집실로 가서 게재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살해 협박에 너무 시달린 탓에 좀 쉬고 싶었다. 적절한 시기에 다시 수기를 연재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검찰 “하나회 진술해달라”
1991년 신동아 9월호에 실린 김충립의 수기(위)와 연재 이후 살해 협박 소식을 다룬 동아일보 9월 3일자 사회면. 지호영 기자
▼ 그 후 YS가 집권했고 하나회 척결이 이뤄졌다. “신동아 수기 연재가 하나회 척결 공론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YS 당선 후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검찰에서 전화가 왔다. ‘귀국해서 하나회와 관련된 진술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
▼ 어떻게 했나. “나는 ‘쓴 그대로다. 만약 (누군가가) 내 수기의 내용에 대해 부정하거나, 검찰이 조사하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나가겠다’고 했다. YS는 군을 잘 모르니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취임 열흘 남짓 지났을 때 (권영해) 국방장관을 불러 곧바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을 바꾸고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으니…. 이후 ‘5·24 숙군’이라고 불리는 군 고위직 인사를 통해 하나회 회원들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일부가 군복을 벗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나회 파워를 모르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아는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 왜 그렇게 보나. “나는 그들을 잘 안다. 부부동반 모임에도 매월 참석했을 만큼 가까웠다. 사전에 (하나회 척결 계획이) 알려졌다면 쿠데타가 났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나회 출신 인사에게서 직접 들었다. 수도경비사령관 등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대전복(對顚覆)부대 지휘관이 전부 하나회 핵심 인사였으니까.”
▼ 25년이 지나 다시 입을 여는 이유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벌어진 음모와 암투가 잘못 알려졌거나, 여전히 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하나회 세력은 왜곡되게 그려진다. 만추(晩秋)의 나이에 내가 아는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글이 동서화합과 화민일국(和民一國)의 밑거름이 되면 좋겠다.”
그가 작성한 수기는 A4 용지 200장 분량이다. 수기와 함께 건넨 서류봉투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써내려간 A4 50매 분량의 누렇게 해진 메모 기록, 사실 확인과 관련된 수천 통의 전화기록이 담겨 있었다. 편지지 위에 급하게 흘려쓴 메모도 눈에 띄었다. 그는 역사의 갈림길에 선 당시 상황을 기록에 남겼고, 이를 다시 확인하면서 수기를 썼다고 했다.
全 “왜 당신만 반대하나”
▼ 하나회가 어떻게 왜곡됐다는 건가. “5·18에 대해 군인이 폭동을 제압했다는 명분을 세우고, 군인으로 정당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5공 세력은 1980년 1월부터 집권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고 정국은 핵심세력이 기획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그런데 그들은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사안도 인정하지 않는다.”
▼ 시나리오에 의한 계획? “1979년 12·12 사건 이전까지는 신군부에 집권 의지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를 잡아들일 때만 해도 그저 사건을 매듭짓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때까진 정권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 1월이 되면서 전두환 소장을 대통령으로 만들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12·12를 수습한 뒤 이듬해 1월 보안사령부 내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나는 ‘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 같은 의견을 낸 보안부대원이 많았나. “며칠 후 보안사령관실로 불려갔다. 그 자리에서 전두환 사령관은 ‘모두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데, 당신만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지. 이유가 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순리대로 돌아가 국민이 원할 때 나서라’고 했다.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을 중심으로 합동수사본부와 하나회 회원들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합의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초단기 집권 시나리오였다. 2월에는 창당을 위한 정치자금 모금 지시를 받고 내가 직접 나서기도 했다. 3, 4월엔 전두환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직했다. 이후 이어진 언론 통폐합, 대장 승진, 대통령 취임 등은 모두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인가. 그는 1989년 ‘5공 청문회’에서 “당시에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아니다. 나는 수경사 보안반장, 특전사 보안반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정보보좌관으로 일했기에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계엄사 등 모든 정보기관 첩보를 받아 매일 정호용 사령관에게 요약 보고했다. 여러 곳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통해 전두환 소장을 옹립해 정권 창출에 나서리라는 걸 인지했다.”
“하나회 건드렸다 어쩌려고…”
김충립 씨가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해놓은 메모. 지호영 기자
김 전 반장은 1988년 11월 국회 문화공보위 언론 통폐합 청문회 증인 요청을 받자 급거 귀국해 언론 통폐합 상황을 국회에서 증언했다. 그가 “언론 통폐합은 허문도 씨가 주도했고, 정호용 장군은 반대했다”고 증언함으로써 1주일간 갑론을박하던 청문회는 종결됐다. 이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 신군부 등장 후 보안사가 언론인 강제 해직과 통폐합을 주도한 ‘언론반’을 설치했다는 근거 문서인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을 처음 확인했다. 언론인 회유공작 계획인 ‘케이(K)-공작’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시행됐다고 밝혔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이고, 수경사와 특전사의 보안반장은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자리였다. 모든 정보를 꿰고 있었기에 내게 ‘음모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2·12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김오랑 소령이 총탄에 쓰러진 것을 보고는 마음이 돌아섰다. 김 소령은 착하고 정직한 군인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김 소령 관련 일화도 수기에 쓸 것이다.”
▼ 보안반장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뭔가. “굵직한 사건 뒤에는 대부분 음모와 암투가 있었다. 1963년 ‘4대 의혹사건(김종필 등 육사 8기들이 공화당 창당 준비를 하면서 정치자금을 조성하려 벌인 사건, 자세한 내용은 수기 참조)’이 터지자 당시 노태우 대위, 전두환 소령 등 육사 11기들이 육사 8기생 40여 명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모의했다. 1963년 7월 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후배 장교들의 가담을 종용하던 중 음모가 발각돼 정승화 방첩부대장 지시로 구속 조사를 받았다.”
▼ 당시는 보안사에 근무하기 전인데. “1974~75년 청와대의 지시로 보안사 대전복계에서 대령급 이상 장교 800여 명의 신상카드인 일명 ‘옐로카드’를 작성했다. 장군 1명의 존안자료를 차곡차곡 쌓으면 높이 50cm가 넘었다. 그 기록을 대통령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한 장에 담는 작업이었다. 내가 주도해 직원 5명과 시작했다. 그때 모 장군의 존안자료에서 관련 기록을 찾았고, 쿠데타 음모 기록을 옐로카드에 쓰려 했지만 상관의 지시로 뺐다. 상관은 ‘훈방으로 끝난 사건이고, 하나회 회원을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만류했다. 쿠데타 음모 확인 작업도 했다. 지금도 내가 만든 ‘옐로카드’는 기무사령부에서 활용되는 것으로 안다. 사실, (전두환·노태우가) 대통령이 됐으니 유야무야 됐지, 쿠데타 음모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윤필용 사건도 중요하다. 젊고 유능한 장교 30여 명이 군에서 밀려났고, 중앙정보부에서도 30명의 우수한 공무원이 퇴직당했다. 그 공백을 김재규, 전두환 등이 메웠고, 결국 10·26과 신군부 등장으로 이어졌다.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1973년에 일어난 ‘윤필용 사건’은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물러나게 하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 게 쿠데타 음모설로 번져 윤 사령관과 손영길 준장 등 장교 30여 명이 횡령과 수뢰 혐의 등을 덮어쓰고 숙청된 사건이다.
윤필용과 김재규의 혈투
“나는 시간대별로 윤필용 사건을 기록해놓았다. 월남 맹호부대장을 마치고 귀국한 윤필용 장군이 1970년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하자 라이벌인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움직였다. 1971년 6월, 515통신보안부대 소속 통신보안 감청요원 2명을 수경사 보안반에 배치해 윤 사령관의 전화를 24시간 감청하게 했다. 녹음기를 연결한 후 녹취해 매일 보안사령부에 보고했는데, 이를 감지한 수경사 통신참모가 윤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탄로 났다. 밤새 보안부대원 2명이 헌병대에 구속됐고, 우리(보안반) 사무실은 폐쇄됐다. 그 정도로 파워게임이 치열했다. 이후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 윤필용 사건도 파워게임의 결과물? “그렇다. 윤필용 사건이 불거진 건 1972년 11월인데, 당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도 ‘와전된 것’으로 매듭짓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다 ‘통일정사 사건’과 맞물려 1973년 3월에 다시 불거졌다. 통일정사는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여기에 절을 지으면 박 대통령 임기 내에 통일이 된다”는 풍수쟁이의 얘기를 듣고 청와대 경내에 지었다는 절이다. 그런데 윤필용 사건이 터지자 ‘손영길 수경사 참모장이 이후락 중정부장을 대통령 만들려고 기도하는 절’이라는 보고가 올라갔다. 통일정사 공사기간은 1972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였는데, 시기가 참 묘했다. 이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손 참모장 구속을 엄명했다. 결과적으로 1972년 11월 이후 유야무야된 윤필용 사건이 통일정사 사건과 맞물려 1973년 3월에 드러난 것이다. 2015년, 이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났다. 나는 사건이 불거진 당시에도 윤필용 사건은 군에서 인정받던 장군을 쳐내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근거는 뭔가. “내가 윤필용 사령관의 일일동향을 시간대별로 보고하는 일을 4년 동안 했다. 다시 말해 윤 사령관의 쿠데타 기도 여부를 확인하는 게 임무였다. 몇 달 묵혀놨다가 상황을 엮어 선수를 친 거다. 앞으로 진실을 정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1973년 4월 28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오른쪽)과 장성들. 동아일보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