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꽃에 관한 시모음 4)
이팝나무 꽃 /조남명
오월 푸른 나무에
하얀 쌀밥 뿌려놓았다
이리 지천인 것
어려웠던 시절이 걸린다
산들바람에
뭉실 거리는 백발의 나무
향기만 있었다면
보릿고개 시절
이 때엔 딸네집도 안가고
쳐다만 봤다
늦은 봄날
흰 눈 뒤덮은 거리
유성온천 온기로 녹아내린다.
*이팝나무의 '이팝'은 이밥 즉 흰밥을 이르는 말임.
이팝나무 꽃 /박인걸
이팝나무 꽃잎이 눈처럼 쌓였다.
어떤 사람이 꽃잎을 보며 쌀밥 같다고 한다.
그 시절 명절에야 겨우 이밥 먹던 기억에
내 가슴이 먹먹하며 감정이 굴절된다.
장마 비처럼 쏟아진 가난에
굶은 아이들 얼굴마다 찔레꽃 버짐이 번지던
유독 눈이 퀭한 소녀 얼굴이 떠오른다.
배고픔에 지친 소년이 먼지 뽀얀 신작로를
휘청거리며 걸을 때면
길가에 핀 노란 꽃들이 과자로 다가왔다.
찔레 순 꺾어 먹으며 친하게 어울리던 애들은
쌀밥을 실컷 먹으며 지금은 뭘 생각할까.
저토록 고운 꽃송이를 보며 아직도 나는
어두운 과거를 꽃잎처럼 털어버리지 못할까.
영혼에 달라붙은 뼈아픈 기억은
눈에 박힌 아름다운 추억을 추월하나보다.
조금 전에 뛰어나온 아침 햇살이
새하얀 꽃송이에 황금 가루를 뿌린다.
순간 꽃잎은 수만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고
삽시간에 도시공원은 천상의 정원이 된다.
공원길 걷는 내 어깨에 꽃잎이 내린다.
쌀밥 지천인 세상이 행복하다.
이팝나무 /이승복
신록의 푸른 숨결이
오월의 눈꽃 속에
그리움이 여물즈음
살폿한 자태 뒤에 오는
공복(空腹)의 욕구
봄의 싱싱바람이
가슴 파고든 손놀림
간지럼입힌 미소는
사랑, 그 고운 사랑이
만개한 순결의 몸짓
추억을 화관 만들어
흰 눈처럼 머리에 얹고
붉게 익은 겨울 사랑을
회상하는 입하목으로
오래 사랑하자던 님
여망의 날들 위해
젖어오던 눈물 흔적
흐드러진 이팝꽃 위에
오월 나비는 얼굴맞대
입맞춤으로 달랜다.
*입하목-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에 꽃이핀다하여 이팝나무를 지칭함
이팝나무 꽃 /초월 윤갑수
<부제: 울 엄니>
우리 엄니
쌀밥 지으셨나.
쪽진 머리에도
순백의 꽃 피었네.
아들 위해 지으신
쌀밥처럼
기다리는
엄니의 눈가에도
하얗게 내려앉아
세월의 꽃
흰 꽃이 피었네.
위양못 이팝나무꽃 /손병흥
여름이 시작될 무렵인 입하에 꽃이 피어나고
꽃이 필 때에 나무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여
마치 쌀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입하목(立夏木)
그해 농사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피는 것으로써
풍년과 흉년 점칠 수 있다는 입하나무 이팝나무
이른 봄에 피었다가 서둘러 낙화하는 꽃보다도
보름이 지나도록 꽃을 나무 전체에 달고 있어서
마을 주변 개울가 공원이나 길가에 많이 심어진
힘든 노동으로 모내기 하던 시절 허기에 지칠 때
이제나저제나 아낙이 새참을 이고 오길 기다리던
농부의 눈에 희디흰 그 꽃이 고봉밥처럼 보였다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못 완재정 옆의 쌀밥나무
이팝나무의 독백 /심마니시인 서대범
바람에 밀려온 향기가
오월인 줄 알았네
그리움에 묻혀있던
이팝나무 푸른 생각
하얀 이 드러낸 그대 미소
바람의 흔적 따라
저만치 온 여왕
다 내줄 것 같은 님이어서
소리가 들린다
사랑해
사랑하는 이 있는데
수줍게 하얀 이(齒) 활짝 웃어
가슴 깊이 안길 님 있는데
이 오월은
검정 마스크에 싸여
백치녀의 독백만 슬프다
그래도 여왕의 묵언(默言)
사/랑/해
이팝 꽃길 /안영준
그토록
변덕스러운 꽃샘도
볕이 두터워지니
서서히 꼬리 감추고
뵈지 않는다
물오른 나무는
연초록 치장하고
백설 흐드러진 가지는
무척이나 즐거운 듯
얼싸안고 춤춘다
꿈길을 걷는 듯
한껏 설레는 봄날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에 만취된 몸
포로 되었다
이밥 꽃 /유영서
아가야
배고프지
이밥 꽃 팡팡 터지던 날
왜 그리 보고프지
어머니가
보릿고개 힘들게 넘던
어린 시절
복 자가 선명하게 찍힌
사기그릇에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꾹꾹 담아 주시며
많이 먹으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시던 어머니
그때 고향길 언덕에도
이밥 꽃 하얗게 피었을까
이제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
이밥 꽃 하얗게 핀
나무 그늘에서
수자가 새겨진 사기그릇에
이밥 꽃 수북이 담아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고봉 한 사발 차려 드리고 싶다
이팝나무 /석옥자
해마다 5월이 되면 하얀 이팝나무 꽃이
탐스럽게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보릿고개 시절 쌀밥이 귀할 때
보리밥 사이사이 하얗게 보이던 고봉밥
가는 곳마다 이밥이 매달렸다.
지는 꽃송이는 노릿한 누룽지 닮은
꼽꼽하게 뭉친 고소한 누룽지
이팝나무 아래 소복이 쌓였네.
가로수 모퉁이 길에 어린 소녀가
이팝나무 아래서 둘둘 말린 밥풀떼기
눈으로 뜯으며 사랑가를 부른다.
이팝나무꽃 /손병규
눈부신 하얀 꽃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눈물겹던 보릿고개
하얀 이팝나무꽃 눈에 담고
연신 입맛을 다시곤 했는데
풍년 들면 쌀밥 먹여 주겠다며
웃어 주시던 당신의 하얀 미소는
이팝나무꽃 보다 더 예쁘시더니
하얀 미소는 시들어 가고
이팝나무꽃 한 아름
눈부시게 피고 있다.
이팝나무 /김국현
이팝나무 꽃 필 때쯤
그대가 생각납니다
그 길에서
그대의 뽀얀 향기와
숨죽이며 바람에 날리는 미소와
만지면 터질듯한
우윳빛 얼굴까지
꽃처럼 하얀
그리움으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팝나무 /정태중
누가 저리도 많은 밥을 나무에 걸어 두었을까
시렁 한 줄에 매달린 찬밥
보리밭 누렇게 익기도 하는 생각
활짝 핀 이팝나무 사이로
커 버린 얘들 유년이 스쳐 간다
오뉴월 땡볕에 익은 것이 한둘일까
엄마 얼굴이 익고
추억이 익었던 들판
찬물에 찬밥 한덩이 말아
속내 열기 게워내던 저녁쯤
어릴 적 이팝나무 꽃
시렁에 가득 피었으면 배고프지 않았을 텐데
고슬한 밥물 같은 향기와 또 스쳐 가는 향수와.
이팝나무 /시앓이(김정석)
얼쑤 어깨 춤을 추네
지화자 좋다 노래하네
새하얀 옷을 입고 춤을 추네
새하얀 웃음을 날리며 춤을 추네
새하얗게 흩느러진 고움으로
미소짓네
얼씨구 좋다 어깨 춤을 추네.
이팝나무 길 위의 마지막 퇴근길 /정민기
푸른 기와집에서 오 년 동안 국민과 소통해 온
그가 이팝나무 길 위에서 마지막 퇴근길을 걷는다
가로등처럼 서서 우윳빛 불 켜고
존경스러운 듯
이팝나무는 퇴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무겁다면 무겁고 가볍다면 가벼운 구름
두둥실 떠다니기도 했었다
가지에 쌀밥처럼 달라붙은 이팝나무의 꽃
푸른 기와집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오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국민의 아버지가 되었었다
도보 여행하듯 봄이 가는 오월,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 견고하게 찍힌 발자국 화석처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래오래 기억되어 남을 것이다
고향 바다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국민의 편에서 국민을 위해 일해 왔기에
오오, 이제 그 누구보다도 눈부신 퇴임이어라
봄은 또 찾아오지만
이 꿈만 같은 봄날은 다시 오지 않으리니
이팝나무 꽃 /정현아
잠든 크루소 씨의 눈꺼풀 밖으로 비어져 나온 이팝나무 꽃잎들을 시궁쥐가 먹어치우고 있다
나비야, 너에게 이름을 준 이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와서 좀 보렴 그는 이팝나무 꽃잎들로 고치를 짓고 있구나 그 고치가 그의 안전가옥이구나
아름다움으로는 허기가 사라지지 않는구나
이팝나무 아래에서 /허정인
가정의달 오월에
이팝나무 아래에서
영영 하지 못할
효를 생각합니다
저 하얀 쌀을 씻어
굴비를 굽고
손수 지은
한끼 식사라도
부모님께
차려 드렸으면
그럴 수만 있다면
딱 한 번만 이라도
이 몸 늙어 아파보니
따뜻한 한 끼가
얼마나 고마운
손길인지를 알게 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