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명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1. 선주지 교회
나는, 기독교 신앙을 누대로 지켜온 가문에서 전주 이씨 완풍대군(이원계, 태조 이성계의 맏 형) 제20대 후손으로 경기도 부천시 계양면 선주지리 52번지에서 1952년 12월에 태어났다.
나는, 출생 시부터 유년기를 집에서 80m 안에 터 잡은 선주지 교회 출석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음으로써, 자신감 속에 원대한 기도의 괘도를 축성해 나갔다.
선주지 교회는 1896년 1월 20일 제물포지방 감리사 존스 선교사(1867.8.14.-1919.5.11)와 그의 아내가 선교에 전념함에 따른, 인천 선교의 내륙 쪽으로의 진행인 부평 근처 굴재 교회의 창립을 기점으로 출발한 교회이다.
나는,
① 성전에 거하며 기도하는 돈독(敦篤)한 삶에 장래가 선명하다.
② 인간혁명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③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바다로 가야 한다.
④ 금강석도 인군(仁君)을 만나 갈고 닦아야 빛이 난다.
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 등이 긍지와 초석(礎石)이 되어 왔다.
나는 소년기에, 특히 부친 이의석(李義錫) 장로(長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① 자유 민주주의 수호.
② 하나님 경외와 교회 사랑.
③ 정직과 정의 실천.
④ 가문의 명예 유지.(일성 이준 열사 흠모)
⑤ 화평한 삶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대농(大農)의 관리와 운영에 뛰어난 지도력과, 교회 봉사와 헌신의 선봉(재정관리 및 치리), 새벽 일찍 기상하여 2시간 이상, 성경 통독과 통성기도와 찬송, 투철한 정의감에서 나오는 정리,정돈의 사역은 그 누구도 부친(父親)을 앞설 수 없었다.
부농(富農)의 경영을 완벽하게 내조하면서도 수십 년 동안 교회 새벽종을 치며, 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루를 깨우는 일과 애경사 일체에 솔선이 되는 등, 청지기직 완수에 힘쓴 모친(母親), 전양금(全良金) 권사(勸士)의 모범은 누구도 넘기 어려운 분투였다.
2. 계양산과 선주지리
선주지리(仙住地里)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인천의 민속촌으로 불리운다. 지형적으로 1km 이내에 인천의 주산(主山) 계양산(桂陽山/ 395m)은 한남정맥(漢南正脈)에 속하며, 북동쪽을 향해 새끼를 안는 모습의 평온해진 매가 날개를 정연히 편 자태로 병풍하고 있다.
북쪽에서 보면 참신한 여신자가 관상기도를 하는 상(像)이다. 고운 세 봉우리 산꼭대기에 오르면 거칠 것이 없다. 북서쪽엔 장릉(章陵)이 계양산의 안산으로 북돋고 있다.
계양산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격동 지가 되었다. 이후, 계양 땅은 고려 시대엔 개성과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중심지로, 조선 시대에는 건국 후보지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서울 근처에서 계양산을 바라보면 해지는 곳을 미리 가리우나 황혼이 수놓아주는 노을은 한 폭의 자하를 이루게 한다. 김포공항 서편 반경 5km 선주지 뜰(계양 평야)은 연마의 큰 마당이 되며 여기 노루 형국, 터 높은 민첩한 반석에 동리 명, 한자 그대로 신선(神仙)이 머물러 사는 곳이라 적합한즉,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선주지라 하겠다.
선주지리는 인천시 계양구 극북(極北)에 가까이 위치한 도시 근접, 농촌 전원마을로 선주지 뜰의 망대가 되는 조산(造山)과 같은 전경(前景)에, 4만 1천여 평 안에 90여 호가, 선주지 교회를 동서(東西)로 거주했다.
선주지동 43-2(3) 지점에서 양 눈으로 동북향과 남동쪽을 직시하면, 백두산 정기가 한강 동북의 웅비찬 삼각산(북한산)으로 모아, 호연(浩然) 가득 한 서울의 진산(鎭山) 북악산(北岳山)에 숨겨져 갔고, 백두산 정기가 한강 남쪽에 이어졌다는 관악산(冠岳山)의 제련이 신선하게 꽉 차게 만들고 있다.
선주지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한강 가에 있던 포구로 배가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한강에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을 구하기 위하여 배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여 선주지(船駐地)라고 불렀던 것이 지금은 배 대신에, 신선(神仙)이 머물렀던 곳((仙住地)이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3. 계양초등학교
나는, 1932년 설립된 계양초등학교에서 1959년부터 6년을 학습연마의 장소로 유용하였다.
교표는 희망, 진취, 기상이며 교목은 백합(인내)이며 교화는 장미(밝음)이다.
* 교장 김용선 선생의 일관된 훈시(訓示)는, “인내하는 사람이 성공한다”였다.
* 곽윤호 선생(박촌리 거주)은 민족의 숙원(남북통일)을 구현키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도덕성 함양, 국방력 강화임을 강조했다.
6학년 때 담임인 박종호 선생(풍무리 거주)은 실력을 갖춘 자가 승리하는데, 지식과 건강과 기술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땀을 바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달 속의 계수(桂樹) 승리자의 것이며, 계양의 어린 싹들아, 앞날의 새 희망 우리가 찾자”는 열창(熱唱)을 늘 심장(心臟)에 간직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나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몰락, 1960년 4.19 학생 혁명과 1961년 5.16 군사 혁명의 경위를 요약하는 등 정세 수집력도 있었지만, 사방 2Km를 넘어가 본 일이 거의 없어 견식(見識)이 좁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정와/井蛙)였다.
4. 인우학사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서울로 진학하는 데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상인천중학교에 낙방함에 따라, 자존심과 예견성이 깊은 부친은 어머니와 박기석 목사와 상의한 후,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나의 서울 입경(入京)을 결심하시고 전부터 교분이 깊은, 균명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차조웅 선생을 찾아가 의논한 끝에 입학원서를 갖고 내려오셨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좋은 기회가 왔다고 확신하고 단단한 결의를 다졌다. 시험 응시 결과는 합격이었다. 하나님의 전폭적인 이끄심이었다.
나는, 1965년 2월 28일(주일) 선주지 교회에서 박기석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다. 기도 내용은, 복 있는 학생이 될 것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할 것과, 원수(怨讐)의 목전에서도 결실의 잔이 넘칠 것을 충심으로 기원해 주셨다.
3월 1일(월) 조반 식사 시, 아버지 이의석 장로의 간곡한 기도를 받았다. 기도 내용은, “아들의 창창(蒼蒼)한 장래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항상 계실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용감한 행위가 축적되는 아들로 삼아달라는 간청”이었다. 나는 감복하면서 <아멘>으로 응수(應手)했다.
나는, 어머니 전양금 권사가 준 말씀에도 힘 있는 목소리로 <아멘> 이라고 화답했다. “너는, 어디를 가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큰 은총에 힘입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1965년 3월 1일(월) 아침 나는, 아버지의 인도에 따라 고향을 떠나 장기리 버스 정거장을 거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47번지 금화산(金華山) 기슭에 있는, 인우학사(仁友學舍)에 정착하는 행복을 맛보았다.
사감은 박신오 목사였으며, 입사하도록 박기석 목사의 안내가 컸다.
인우학사 입사 후 첫 기도는 아래와 같다.
① 주 예수를 깊이 알게 해 주세요.
② 진리로 무장케 해 주세요.
③ 성령을 힘입어 쓰임 받게 해 주세요.
④ 경의선 철도가 복원돼 서울에서 신의주를 왕래케 해 주세요.
⑤ 제 임무를 완수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아멘>
5. 균명중학교(환일중학교)
1965년 3월 3일(수) 서울시 서대문구 만리동 2가 218번지 균명중학교(均明中學校)에 첫 등교 하는 입학식 날이다.
균명중학교는 1947년 6월 24일 설립된 미션 사립중학교로 경천(敬天), 애국(愛國), 애인(愛人)을 교훈으로 삼고 있었다.
과연,
“고은 꿈 피어나는 봉학산(鳳鶴山) 마루”에 있었다.
“미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랑으로 어둔 땅에 횃불을 들” 장소였다.
“누리 위에 비치는 일꾼이 될” 장소였고, “온 누리를 굽어보는 높은 집”이었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갈 수 있다.”
“바라뵈는 한강 물도 바다로 간다.”
6. 확신
하나님께서 감사할 일과, 감동할 사건과, 흥분할 기적을, 또렷하게 보여 주실 것이다.
7. 출발
임마누엘!
하나님을 굳게 믿고 첫 걸음을 내 딛었다.
이제 앞으로 나간다.
균명중학교 1학년 2반 50번 이주익
- 1965년 3월 균명중학교 입학식 당시를 회고하면서, 2021년 3월 1일(월) 작성하였다.
* 1974년 3월 2일 균명중학교에서 환일중학교(桓一中學校)로 교명(校名)을 변경하였다.
* 선주지리는 1995년 신설된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편입되어 계양구 선주지동으로 불린다.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