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 연극을 친구와 보고 그 따뜻한 결말이 기억에 남아 다시한번 동아리에서 보러가게 되었다. 처음의 큰 감동은 없었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세상의 찌든 때를 세탁기를 통해 벗겨낼 때, 그간 더러워졌던 내 마음의 때도 함께 벗겨지기를 잠시나마 희망할 수 있었기에, 11월 9일 저녁 2시간은 가치있었다.
며칠전 승배형과 같이 이불 빨래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직접 손으로 빤 건 아니고, 가까운 '24시 코인 빨래방'이라는 곳에서 세탁기를 이용해 빨래한 것이다. 그곳은 지금까지 내가 본 세탁소하고는 전혀 달랐다. 아주 깨끗한 인테리어에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었고, 주인이 없었기 때문에 별 부담없이 내맘대로 빨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연극속의 오아시스 세탁소처럼 비록 더럽고 어수선하지만 사람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가 새벽에 갔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낮에 사람이 많을 때도 서로 대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마 말한마디 없는 그런 삭막한 곳일 것이다.
"기계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지"
세탁소 아줌마가 세탁 편의점을 내고 편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아저씨가 대답했던 대사이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어차피 빨래는 세탁기가 다 빠는데 무슨 소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빨래를 빨때는 빨래의 때만 빼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의 주인의 때도 빼는 것이라 했다. 즉, 빨래라는 행동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하는 일중에 인간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 그러하고, 사람이 입는 옷을 만드는 일이 그러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러한가? 음식은 거대한 컨베이어 기계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내고, 옷은 거대한 방적기가 대신 찍어낸다. 요새는 교육도 사람이 아닌 컴퓨터가 그 일을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점점 편해진다며 좋아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몸속에 점점 짙어지는 때는 막을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연극 속에서는 아저씨가 할머니의 거대한 재산에 눈이 먼 인간들을 세탁기를 통해 정화하여 행복한 결말을 짓는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결말이 나에겐 더욱 슬프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사회 각 분야가 기계화되고 첨단화되는 이 시대에, 오아시스 세탁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데, 억척스럽게 빌딩숲에서 남아있는 오아시스 세탁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슬퍼보이는 건 아닐까?
첫댓글 글 쓰느라 수고했다. 사실 두 번 씩이나 볼 만큼 그리 깊이있는, 감동적인 연극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지하철1호선>을 보러가도록 하자.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쾌하고 기분 나쁜 추억이 얽혀있는 연극이긴하다만...분명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