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좀 설쳤지만 경주에서 부산까지는 먼 길이기에 아침 일찍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오니 바로 시작된 주인 아주머니의 잔소리(?)
"학생 잘 잤어?"
"예..(실제론 못 그랬지만)"
"이제 가려고?"
"예.."
"근데 왜 한증막 안들어가. 내가 어제도 봤는데 계속 안 들어가고 말이야.
우리 집 한증막 얼마나 좋은데."
"예 들어갈께요" 했더니 바로 날 잡아서 안에 밀어넣으셨다.
한증막을 싫어하는건 아닌데 너무 피곤할 때 들어가는것도 안 좋을듯 싶어,
안 가고 있었는데.. 들어와보니 이 작은 찜질방에서 제일 괜찮은게 여긴 듯 싶다.
더운 김에 땀이 주르륵.. 그래도 개운하긴 했다.
오래 안있으면 아주머니가 잔소리(?) 하실까봐 좀 앉아 있다가 씻고 나왔다.
그리고 입구에 세워둔 자전거를 보는데.. 이런~!
씌워둔 방수 커버가 들춰져 있었다. 이거 분명히 내가 어제 해놓은 대로가 아닌데..
느낌이 안 좋아서 서둘러 살펴보니, 보조 바구니 2개에 침낭은 그대로 있는데 가방이 하나 없었다.
자전거 용품을 넣어둔 가방..
자전거 오일, 라디오렌치, 육각렌치, 드라이버, 보조튜브, 펑크패치. 펌프... 몽땅 누가 가져갔네.
설마 했는데.. 그것도 입구에 세워두고 보이지 말라고 방수 커버까지 씌워놓은건데..휴..
마음이 털썩 무너져 내렸다.
어제 그냥 갖고 들어갈까 하다가,
가방에 기름때도 많이 묻고 워낙 지저분한 거라서 설마 했던게 진짜 없어질 줄 이야..ㅡ.ㅡ;
거기 뭐 아주 비싼 대단한것들은 없지만, 그게 없으면 당장 고장났을때 해결이 안되는데.
그냥 관두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우선 마음을 잡고 출발했다.
멍하니 시내를 향해 페달을 돌리다보니, 왼쪽에 자전거 가게가 보였다.
이제 막 문을 열길래, 안에 가득 쌓여있는 자전거를 다 밖으로 빼낼때까지 한참 기다렸다.
뭐가 필요하냐고 물으시는데.. 좀 멍하니 있다가
당장 부산 가는 길에 펑크나면 해결할 것들을 생각해보니,
예비튜브하고, 펌프, 렌치.. 펑크나면 땜질 안하고 튜브 갈면 되니까..
렌치는 없다고 하고.. 다른 부품 가격을 물으니 펌프는 만원 튜브는 만 이천원.
참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서울에서 내가 살때 거기꺼보다 더 좋은 펌프 9천원,
그리고 같은 상표인 흥아튜브 6천원 줬는데.. 너무 바가지다 싶었다.
그래서 항의했더니 서울이라면 모를까 여기선 들어오는 가격이 있어서 절대 그렇게 못준다고
튜브만 만원에 주시겠단다. 그래도 어떡해.. 없으면 당장 여행 진행이 안되는데..
두개 2만원에 사고..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철물점에서 라디오 렌치를 물으니,
국산 세신 제품이라 2만원 달라신다. 내가 서울에서 중국산으로 4천원 주고 산 렌치를..ㅡ.ㅡ;
그래서 크기 조절이 가능한 라디오 렌치 대신 자전거 바퀴 한 사이즈만 맞는 렌치를 물어보니
그건 싸단다.. 그래서 그것만 구입..
자전거 기름은 여행 끝날때까지 비만 안 맞으면 뭐 굳이 안칠해도 되니 넘기고,
자전거의 작은 부품들을 조여주는 육각렌치가 좀 걸리긴 했지만,
출발할 때 확실히 조여주고 왔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다른 공구들도 뭐..당장 없다고 여행 못할 정도 되는것들은 아니라 무시하고..
경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울산 시내를 거쳐 가는 7번 국도와
양산을 거쳐 부산까지 직선으로 난 35번 국도 두가지 루트가 있는데,
시간에 쫓겨 여행하는 데다가 울산엔 처음부터 들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35번 국도를 타기로 했다.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는 길을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마침 마라톤 행사가 있는지,
시내 곳곳에서 교통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리 멀리 돌아가는건 아니었지만,
좀 기다리기도 하고 살짝 돌아서 시내를 벗어났다.
(군데 군데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음..)
35번 국도를 탓는데, 시내 지역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작은 왕복 2차선 도로였다.
조금 가니 왼쪽에는 포석정도 보이고..
교과서에서 많이 보기도 했었고, 중학교때 경주로 수학여행와서 보기도 했었고..
한번 더 보고 갈까 싶기도 했는데, 마음도 그렇고 오늘 갈 길도 멀고해서,
잠깐 앞에서 쉬면서 음료수와 쵸코바로 허기만 달랬다.
옆에는 경주빵 가게도 보였는데, 서울로 택배도 해준댄다.
서울로 보내주면 친구들이 참 좋아할텐데.. 자전거 용품들 분실만 안했어도...쩝..
(35번국도를 타도 울산을 아예 지나가지 않는건 아니었다.
시가 워낙 크다보니, 시 외각을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동해 일주를 하면서 계속 느끼던 것이었지만, 바닷가에 가까운데다가 왕복 6~8차선 큰 국도들이
텅 비어있어서 그런지 역 바람이 심할때 페달을 돌리자면 체력이 쭉쭉 떨어진다.
그렇지만 오늘은 갑작스런 도난을 당해서였을까..
역바람이 심한편이긴 했지만, 몸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아직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싶어 점심 때에 맞춰 지나가던 길에 음식점에서
뜨끈한 국물의 육개장도 먹고 힘을 내어보려고 했는데,
자꾸 마음속에선 이제 그만하자는 울림이 계속되었다.
(ICE=Inter City Express가 아니랍니다.^^ 학부 티.. Information communication Engineering)
어쨌든 오늘은 부산 친척들하고 군대동기들에게 간다고 연락도 다 해놨고,
출발도 일찍 해서 아직 시간도 많으니 가야했다. 또 갈 수도 있을것 같은데..
그렇지만 몸이 어찌나 무거운지..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안 들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쉬고..조금 가다가 또 쉬고..
그러다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가다가 못가면 중간에 하루 쉬고 가면 되니까, 여유를 갖자고..
여행하면서 오늘처럼 많이 쉬어본 날이 없는것 같다.
비가 오거나 안 좋은 날씨때는 4시간씩도 연속해서 타기도 하고 했었는데..
물론 그건 자전거 의류나 비싼 안장 덕분이겠지만,
오늘은 한시간에 한번씩은 계속 쉬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마음을 비우니.. 쉬면서도 참 즐거울 수 있었다.
버스정류소 같은 곳에 앉아 주위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과 시원한 바람소리가 스쳐 지나가면서
쉬고 있는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니..
(양산시 초입에서.. 부산을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나가게 되는 도시.)
35번 국도는 이제 바닷가와 점점 멀어지는 길이라서, 주위엔 특별한 것 없는 재미없는 국도를
그렇게 몇시간 동안 달리다 보니.. 울산도 스쳐 지나가고 곧 양산에 이를 수 있었다.
중간 중간 많이 쉬면서 왔지만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아직 시간도 오후 2시정도..
거기다가 양산에서 부산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오른쪽에 휴계소가 보이길래 한번 더 쉬면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이제 많이 왔다는 안도감에서였을까, 빼빼로와 함께 오랜만에 원두커피를 맛보는데
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부산의 북쪽에 위치한 금정구에 있는 숙모집.
35번 국도를 계속 타면 부산의 영등포 같은 구포 쪽, 부산의 서쪽으로 빠지고,
7번 국도로 바꿔타면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맞물려 북쪽에 떨어진다.
그래서 양산을 벗어나면서 1077번 지방도를 이용 7번 국도쪽으로 건너왔다.
지방도라 그런지 35번 국도를 벗어나면서 처음엔 좀 괜찮더니
점차 부산에 가까워오면서 왕복 2차선으로 좁아지면서 작은 산을 하나 넘는데
길도 구불구불에 얼마나 울퉁불퉁한지, 산을 다 내려와서 보니 자전거 보조 바구니를 고정하는
나사들이 다 풀려서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바구니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내려와보니 눈에 익숙한 길, 그리고 지하철 범어사 역이 보였다.
숙모 집하고 지하철로 한 정거장거리.
부산 올때마다 왔던 곳이라 이곳 지리는 익숙한데. 양산에서 부산이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숙모 집에 도착하니 오후 3시도 안 되어 있었다.
숙모에게는 저녁 6시쯤 도착한다고 말씀드렸기에, 안계시면 어떡하나 했는데
전화 드리니까 다행이 집에 계시다고 어서 오라신다.
외가 친척들이 다 부산에 살고, 거의 대부분의 군대 동기들이 부산 출신이라서
항상 1년에 두번씩은 꼭 놀러가던 도시 부산이었는데, 올해 여름엔 유럽 가느라 1년만에 찾은 부산.
그래서인지 숙모가 오랜만이라고 더욱 반겨주셨다.
숙모도 여행을 좋아하시는 편이라서 씻고 나서 빨래도 해놓고,
숙모와 유럽여행 다녀왔던 얘기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래는 숙모와 저녁먹고 송도에 있는 군대 동기집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서운해 하시는 숙모를 두고 떠나기도 싫고, 컨디션도 최악이라서
부산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하고 쉬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곳에 있어서일까, 체력이 떨어져서 일까..
TV를 보는데 스르르 졸음이 몰려와서 일찍 잠이 들었다.
지출 비용 : 튜브 10000원 펌프 10000원 렌치 1800원 점심 4000원 간식 3100원 누적 290000원
이동거리 : 92km (경주 -> 울산 -> 양산 -> 부산) 누적 685.8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