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나시오산체스메히아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받힘과 죽음
오후 다섯 시.
정확히 오후 다섯 시였다.
한 소년이 하얀 시트를 가져왔다.
오후 다섯 시에.
석회 바구니가 준비되었다.
오후 다섯 시에.
나머지는 죽음, 죽음뿐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바람은 면화(綿花)를 앗아갔다.
오후 다섯 시에.
그리고 산화물은 수정과 니켈을 소산시켰다.
오후 다섯 시에.
비둘기와 표범이 싸운다
오후 다섯 시에.
그리고 황폐한 뿔과 싸운 넓적다리
오후 다섯 시에.
저음의 현(絃)이 울렸다.
우호 다섯 시에.
비소(砒素)의 종(鍾)과 연기
오후 다섯 시에.
모둥이 마다 침묵의 무리들
오후 다섯 시에.
그리고 투우만이 기가 나서
오후 다섯 시에.
고체 무수탄소(無水炭素)의 땀이 나고 있었을 때
오후 다섯 시에.
투우장이 옥소(沃素)로 뒤덮여 있었을 때
오후 다섯 시에.
죽음이 상처에 알을 낳았다
오후 다섯 시에.
오후 다섯 시.
정확히 오후 다섯 시에.
바퀴 위의 관이 그의 침상이다.
오후 다섯 시.
딱딱이와 플루트 소리가 그의 귀에서 울린다.
오후 다섯 시에.
바야흐로 투우는 그의 이마를 관통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방은 고통으로 찬란했다.
오후 다섯 시에.
멀리서 이제 괴저(壞疽)가 오고 있다.
오후 다섯 시에.
초록 살에 백합의 돌출.
오후 다섯 시에.
상처는 태양처럼 불타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그리고 군중은 창문들을 부수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오후 다섯 시.
아, 운명의 오후 다섯 시 !
모든 시계가 오후 다섯 시였다!
오후의 그늘이 다섯 시였다!
장석주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 중 019
북오션 출판
[작가소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Federico Garcia Lorca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는 20세기 스페인이 낳은 가장 사랑받은 시인. 초등학교 여교사인 어머니와 부자 농군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라나다 대학 문과를 다니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고, 동시에 음악가 마누엘 데 파야에게 기타와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나 곧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리고 시에 전념하게 되었다. 스무 살인 1918년 시적인 산문집인 『풍경과 인상들』을 출간하고 마드리드에서 대학 공부를 계속했다. 이때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시인 에밀리오 프라도스, 호세 모레노 비야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1920년 최초의 극작품 「나비의 저주」를 무대에 올리고 실패를 맛 본 뒤, 1921년 첫 시집 『시 모음』을 출간했다. 1928년 『집시 이야기 민요집』으로 스페인 국가 문학상을 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29년의 미국 여행 체험은 시집 『뉴욕에 온 시인』의 집필로 이어졌다. 스페인 공화국이 수립되자 로르카는 자신의 극단을 조직하고 전국을 순회했다. 연극은 그의 시들 못지않게 대성공을 거두었다. 로르카 자신은 이데올로기를 의식하지 않았고 작품에 특별한 정치색을 입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 몇 명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우익 민병대에 대한 조롱은 내전으로 치닫는 스페인 정세에서 그의 목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36년 위험을 느낀 로르카는 마드리드를 떠나 고향 그라나다로 내려갔다가, 내전 발발과 함께 체포된 뒤 총살되었다. “소련의 스파이”라는 죄목이었다. 로르카는 이상하리만큼 인기가 있었다. 특히 그가 『집시 이야기 민요집』을 내고 스페인 국가 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 인기가 대폭발하였다. 로르카의 비극적 죽음은 그의 시를 미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의 위치로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막상 로르카의 좋은 시들은 시인의 설명처럼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Garcia Lorca] (해외저자사전, 201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