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카치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역사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사에 등록되는 최초의 순간에 해당한다. 칸트의 철학을 부르조아지 철학으로 규정하면서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계급 대립의 장에서 읽어내는,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서의 시도는 이성, 합리성 등의 개념들 옆에 나란히 프롤레타리아, 사물화란 개념을 새겨 넣는다. 루카치의 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입구가 여러곳에 나 있다. 즉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하든 결국 동일한 하나의
논리 구조에 맞딱뜨리게 되는데, 손쉬운 대로 "자연" 개념을 입구삼아 들어가보자.
근대에 최초로 등장한 자연 개념은 "사건의 "합법칙성들의 총괄(Inbegirff der Gesetzmassigkeiten)""이었다. 즉 "장차 대두할,
그리고 전개되어 가는 부르조아사회의 형식적, 추상적, 계산가능적, '합법칙성' 존재양식이 봉건주의와 절대주의의 인위성, 자의,
무규칙성에 대비되어 자연으로 현상한다."(게오르크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옮김, 거름, 1986, 241쪽.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97년에 나온 개정 2판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오식과 맞춤법 상의 오류가 있다.) 부르조아적 근대성이 자연적
필연성으로 현상하면서 봉건성에 대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자연 개념이란 역사적 사건들, 역사적 우연성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이에 대립되는 두 번째
자연 개념이 등장한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모토에서 단적으로 표명된 자연 개념이 그것이다.
"자연은(......) 점증하는 기계화, 탈영혼화, 사물화 등에 반발하는 모든 내적 경향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저수지로 되어 버린다.
이 때 자연은 인간문명과 인위의 피조물에 대립하는 유기적 성장체라든가, 인간이 가공하지 않은 것이라는 등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241) 이 대립 구도는 순수이성에서는 물자체와 현상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합리주의적 형식화가 시도될 때 내용과 형식의 대립에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체계에 주어지는 "소여는 극복될 수 없는 '우연성'으로 존속"한다.(216) 주객의 대립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 이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칸트가 제시한 "실천이성" 영역 또한 변주된 동일한
방식의 대립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행위하는 주체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넘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거꾸로 "분열이 주체 안으로 떠밀려 들어"와 자유와 필연이라는 대립을 낳게 되는
것이다.(225) 이는 칸트의 형식윤리학(정언명법을 떠올려보라)이
가지는 무규정성으로 귀결된다. 즉 윤리학의 격률들은 현실에 적용될 때에는 아무런 지침을 제공해주지 못하며 따라서 윤리학과
그 적용 사이에는 명시되지 않은 제 2의 규칙들이 요구됨을, 따라서 윤리학의 격률들은 명시되지 않은 규칙들을 요구하는 우연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무력한 것이 된다. 물론 칸트가 순수이성에서
실천이성으로 나아갈 때 동일한 대립이 반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주객이분법을 넘어선 주객동일자에서 시작하려는 시도는 문제해결의 실마리이다. 단, 주체의 문제가 정관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용에 대한 형식의
무차별성을 지양"하기 위해서 제기될 때에만 문제는 올바르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루카치의 지적이다. 주객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서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행위하는 주체를 내세운다고 해도
"모든 내용적 규정성을 탈각한 순수성, 순수한 합리성"의 입장에
서 있는 한 자유/필연이라는 방식으로 문제는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상정한 뒤에야 발견되는 윤리적 영역의
자유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선택이 올바른가에 대한 정관적 판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다시 자연 개념으로 돌아가, 이 두 개의 자연에서부터 세 번째
자연 개념이 나온다. "이론과 실천, 이성과 감정, 형식과 질료 등등으로의 분열을 극복했거나 극복하고 있는, 자체 내에 완결된 총체성으로서의 인간(본성)이 그것이요, 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스스로에게 형식을 부여하는 경향이 모든 구체적 내용을 배척하는 추상적 합리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반대로 자유와 필연이 합치하게
되는 그러한 인간(본성)이 그것이다."(242) 앞서의 철학적 구도에
따르면 이 세 번째 자연(총체성으로서의 인간본성)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에 해당한다. 즉 18세기 미학,
예술론의 영역.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철학자들이 경배를 바치고 있는, 구체적 총체성을 산출해내는 예술의 역능이 이율배반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로 제시된다.(가령, 들뢰즈의 칸트 해석도
이런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숭고"에서 발견되는 능력들의 발생적 일치란 결국 주객이원론의 고전적 아포리아가
능력들의 일치라는 방식으로 제기된 것에 대한 답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답변 또한 역설과 우연성에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는, 아니 그런 역설과 우연성을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독일 관념철학의 구도를 넘어선 것도 아니다.) 이제 비로소 내용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출되는 것으로 대립의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예술에서만 이런 해결이 가능하다면, 비록 "여기에서부터 삶의 내용을 전부가 파악될 수도 있고, 이-그 범위야
어디까지 확장되던 간에 어떻든 미적 형식-속에서 사물화 기제의
살인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더라도, "삶의 내용들 전부는
미적으로 되는 한에서만 이 살인적 영향으로부터 구출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미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본래적 문제의 회피를 의미하거니와, 또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다시 순수 정관적 주체로 전환시켜서 '행사'를 무화시키는 꼴이 된다."(245-246. 강조는 저자에 의한 것.) 두 번째 자연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던 저 "정관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여기에서도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 철학은 세 개의 자연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
문제들의 뿌리는 첫 번째 자연 개념에서 나타나듯이 합리화, 계산가능성, 형식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자본주의화가
인간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노동 시간의 측정, 일률적인 상품화를 위한 척도들의 개발, 생산력 발전을 위한 기계, 기술의 연구, 합리적 경영을 위한 미래의 예측 따위의 사회적 활동들이 근대 관념 철학과 근대 과학의 특수한 태도(앞서 말한 합리화, 형식화 등)을 꼴지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를 비롯한 독일 관념 철학의 대가들은 그 태생부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셈이다. 부르조아지라는 존재론적 규정은 인식 능력의 탁월함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로 드러난다. 루카치는 이런 비판을 가능케하는 관점에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주객동일자, 행사의 주체, 발생의 '우리'를 자기 삶의 근거로부터,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258)에게 존재론적 우월성(앞서 말했듯이 철학적 문제는 인식론적 탁월함이 아니라 존재론적 우월함이 해결한다)을 부여하면서
"총체성"이라는 관념을 내세울 때 우리는 어렵잖게 헤겔 변증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루카치는 덜떨어진 변증법주의자에
불과하다. 프롤레타리아는 보편적 전체로서 제시되지 않으며 따라서 헤겔 변증법의 핵심인 순환적 동일성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가 변증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총체성에 입각해서이지만 그의 총체성은 헤겔의 총체성보다는 그 외연이 작다. 부르조아 관념 철학의
이분법적 대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 이분법적 대립은 철학
내부에서는 합리주의화, 형식화와 우연적 소여성, 우발적 내용성
사이의 대립이지만 그 진상은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대립이다. 그러므로 이 대립 속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즉자대자적 총체성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객동일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루카치의 말대로 총체성의 담지자라면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주객동일자인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주체일 뿐 헤겔적 의미에서의 총체성은 아닌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를 총체성으로 간주할 경우 루카치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부르조아와의 적대 문제는 이미 해소되어버린 것이 될 수밖에 없다(총체성의 외부는 없으므로 부르조아는 총체성인 프롤레타리아와 대립할 수 없다). 형식적으로 말해 루카치의
문제는 이원론과 일원론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문제이다. 계급 적대라는 이원론적 원동력을 프롤레타리아 일원론의 심장에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 이에 대한 루카치 자신의 해답은 1967년의 서문에서 주어져 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의 적대에서 부르조아의 어떤 측면들을 살려낸다. 루카치가 인용한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 점을 보여준다. "유로서의 인간의 능력들이 계발되는 것은 비록 이 계발이 일단은 인간 개체들의 다수 및 일정한 인간계급의 희생 위에서 수행되어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 이 적대관계를 꿰뚫고 솟구쳐 올라 개별적 인간개체의 계발과
합류할 것이며 따라서 인간개성의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은 오직
인간개체들이 희생되고 있는 하나의 역사과정을 통과해서만 획득된다." 이런 방식으로 지양된 부르조아가 프롤레타리아적 총체성에 포함되면서 그는 자신의 이전 주장이 여전히 "관념적"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자기 비판은 교조적 생산력주의로 빠져버릴 우려가 있다. 역사적 발전이 생산력 발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의 혁신에, 즉 "생산양식"의 이행에 의존한다면, 다양한 생산관계들을 관통하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단선적 역사관으로 획득된 총체성은 여전히 관념적이다. 결국 루카치는 변증법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헤겔의 변증법에
미달한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변증법, 다른 총체성은 가능하지
않은 걸까?
2. 헤겔
헤겔 주석가 알렉상드르 꼬제브의 변증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구체적> 현실이란 말을
통하여 드러난 현실이자 동시에 현실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알렉상드르 꼬제브,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옮김, 한벗, 1981, 192쪽) 이해를 위해 간단히 꼬제브의 해석을 요약하면;
변증법이란 철학적 방법이 아니다. 변증법적인 것은 오직 현실 뿐이며 따라서 철학은 오로지 변증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만 하면 되는데(이런 기술적 서술이 철학의 방법이다), 이 서술 자체가 또한 변증법적 현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순수 기술적 서술이 바로 구체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언표하는 진리의 말이며 동시에 이 서술은 역사가 운동을 그치고 완결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지표이기도 하다.(위의 책 4장 참조) 그러니까 여기에는 기묘한 모순이 있다. 철학자의 말은 총체적으로 현실을 반영할 뿐이지만 동시에 이런 말이 없이는 총체적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말은 전체를 기술하기 위해 전체를
전제해야 하지만 또한 전체는 전체이기 위해서 말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가령, "역사는 끝났다"라는 말은 역사가 실제로
끝났어야만, 따라서 역사의 실제적 종말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우리가 알 수 있으려면 역사의 실제적 종말 이전에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역사는 끝났다"라는 진술이 역사의 실제적 종말 이전에 가능해야 역사의 실제적 종말이 언표될 수 있다. 헤겔의 악명 높은 "순환"이 등장하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헤겔은 이 순환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이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의 순환적인 진술이야말로 역사가 실제적
종말을 맞이했으며 따라서 진리가 언표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제 헤겔적 서술이 지니고 있는 순환성이야말로 그러한 서술이
완전하며 따라서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한다."(위의 책, 212쪽) 그런데 헤겔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진리를 언표한 이 말이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순환"이 처음 제기되는
것은 문제로서, 즉 말이 먼저인가 총체적 현실이 먼저인가라는 선후 결정의 문제로서이다. 하지만 헤겔이 이 순환 자체를 해답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렇다면 순환이 무엇에 대한 해답이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순환은 선후 결정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말이
먼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주어진 바 없다) 순환은
말의 정당화에 대한 해답, 즉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현실 변증법을, 현실의 운동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라고, 시간적 순서에 따라 현실을 말로 재구성하고(기술하고) 따라서 현실과 말에
대한 선후 결정의 문제가 종국에는 제기되지만 실제로 그가 대답하도록 제기된 물음은 그렇게 현실 변증법을 전제하고 자신은 단지 서술했을 뿐이라는 그 주장의 진리성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헤겔이 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질문자는 헤겔 변증법의 외부에
있다. 헤겔의 논의에 따르면 말은 역사의 끝에서나 주어질 수 있다. 그래서 헤겔의 논의 내부에서는 선후 문제가 필연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헤겔의 논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헤겔의 말 자체가 정말 진리를 언표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순환은 전자에서는 문제였지만 후자에서는 해답이다. 헤겔의 이러한
이동 자체가 그 말이 틀렸음을 반증해준다. 정말 헤겔 자신의 말이 역사의 종말을 언표하는 진리라면 그는 그 진리에 대한 의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그가 그런 질문을 의식하고 대답한다는 것은, 진리를 언표한 말 자체는 자신의 진리성에 대한 또다른 기준(순환)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은 진리를 언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진리성에 대한 증거를 요청받는다. 헤겔에게 순환을 제시하게끔 하는 것은 선후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모순이다. 그리고 헤겔이 이 모순을 문제로 생각하는 순간(이 순간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는 무시하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여 고민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무너뜨려버린다) 그 자신 또한
진리를 언표한 말이 정말 진리를 언표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마는 것이다. 순환을 도입함으로써 헤겔은 진리를 언표한 말을 현실-말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처음에
그는 현실-말의 관계 속에서 말은 현실의 진리를 언표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 말이 정말 진리를 언표했는지 의심한다. 그리하여
현실-말의 관계에서 순환성(현실=진리가 말해지기 위해서는 현실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을 확인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말이
먼저 있어야 한다)을 발견한다. 최초에 일방적인 반영 관계였던
현실-말 관계는 다른 관계로 바뀌는데 바로 이 바뀜이 중요하다.
항들의 관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항 자체가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말의 관계가 아니라 "현실-말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말에 대응하는 또 다른 현실"의 관계가 문제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앞서 말한 대로 외부의 질문자가 있었다. 그는 헤겔의 말 자체(그러니까 현실-말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헤겔의 말 자체)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헤겔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로 지시대상을 가지는가? 그러므로 "순환"이라는
대답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진리를 언표하는 말이
아니라 이 말은 진리를 언표하고 있다는 말, 진리를 언표하는 말을 언표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변증법의 몇 가지 요소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바로 이 점에서 변증법은 방법이 아니라는 꼬제브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은 방법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약간 멋을 부리자면 이를 "변증법의 무의식으로서의 방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우선 표면에서 변증법 철학은 반복이다. 자신을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현실이 그 운동을 완전히 종료했을 때 철학은 언어로 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기술한다. 언어는
완전히 투명해서 거의 그 자신의 존재가 무화될 정도로 희박해진다. 언어는 총체적 현실의 충실한 반복으로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 반복에서 "전도"가 이루어진다.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래서 현실보다 뒤늦게 오는 것으로 보였던 언어는 현실보다 앞서면서 뒤서는, 즉 선후관계를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순환이 된다. 선후관계는 계속 뒤집히면서(전도) 순환한다. 그러나 반복이 순환을 불러오는 표면 밑의 심층에서는 특수한 조작이 이뤄진다(이 때문에 우리는 헤겔 변증법을 방법이라고 부른다). 선후관계를 순환으로 바꾸어서 문제를 해소시키는 조작. 선후를 순환으로 바꾸는 것은 1차원적 시간에 동시성을 도입하는 것과 같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무시간성을 도입할 때 헤겔은 사실 동시성 혹은 공간성을 도입하는 셈이다. 하지만 핵심은
동시성, 순환의 도입이라기 보다는 앞서 본 차이이다. 선후를 순환으로 보면서 문제로 제기하느냐(헤겔 내부에서 종말=동시성의
도입과 관련해서 발생한 문제) 순환의 도입 자체를 해답으로 제시하느냐(헤겔 외부에서 헤겔의 말 자체와 관련해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답)의 차이. 들어갈 때는 순환이 문제로 제기되지만 나올 때는 답으로 제시된다. 순환은 변증법의 표면과 심층 양쪽에 걸쳐
있는, 두 층의 접점인 것이다. 변증법이 이 특수한 조작-외부의
질문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모든 변증법의 결론은 주체(정신Geist)의 자기 인식이 된다. 타자에 대한 언술들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 언술하는 주체 자신에 대한 언술임이 드러나는데 이 깨달음을 위해선 외부의 환기자가 필수적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 외부 환기자의 존재를 은폐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순환과 총체성이 변증법의 핵심이라면. 그러므로 헤겔 변증법은 세계의 총체적 진리를 말하는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신의 철학이 바로 진리를 말하는 그 철학이었다는 순환, 내가 말하는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반전에서 클라이막스에 이르지만(이런
반전은 [식스센스]류의 아찔한 반전이기도 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주체와 대립하는 객체, 타자가 있음을 암암리에 전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헤겔 변증법은 총체성을 기술하는 방법이 아니라, 타자를 배제하는 총체적 환상을 축조하는 철학적 방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