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김종필 안토니오 51세, 마산교구 하대성당
한 없이 부족한 저의 변화된 삶의 증언을 허락하여 주신
사랑하는 아버지께 내맡겨드립니다.
부족한 저의 증언을 통하여 당신 마음껏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저는 4남 3녀중 5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17살,15살 차이의 형님 두분과
6살,3살 차이나는 누님 두분은 서울에서 태어나셨고, 저와 2살터울 남동생,
3살터울 여동생은 부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꽤 잘 되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탕한 일탈로 인하여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원 한푼 없이 서울 변두리인 공항 옆 부천으로 야반도주하듯 무일푼으로
그렇게 부천 단칸방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유년기는 암울하고 꿈도, 자존감도 없는 시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함과 음주로 인한 폭력으로 가정과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태어나서도 막내 동생들이 어머니의 모유를 먹다보니 자연스레 저는
어머니의 품이 아닌 분유로 먹어야만 했으며, 그조차도 온전한 어머니의 손길이
아닌 옆집 누나의 품에서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는동안 아버지의 주취로 인한 폭력으로 눈 앞에 보이는
연장들이나, 부지깽이, 맨주먹등 폭력이 시작되면 저와 동생들은 맞다가
도망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옆집으로 피신하여 잠잠해질때까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정은 매일 부모님의 싸움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입학과 졸업식에 부모님이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막내 동생들의 입학과 졸업식에는 어머니께서는 꼭 참석을 하셨지요.
이런 저를 챙겨 주시는 분은 친구 부모님이나, 학교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를 측은하게 바라보시면서요.
한번은 5학년때 같은 동네에 살던 목사집 아들이 제 친구였었는데
제가 점심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가는걸 유심히 본 모양입니다.
점심시간때만 되면 저는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안되니깐 운동장 수돗가에서
맹물을 먹곤 했는데 그 친구가 안 것입니다.
하루는 나가려는 저를 붙잡고 자기 도시락을 건네 주면서 자기는 오늘
내것까지 싸왔다고 부끄럽고 미안해하지 말고 같이 먹자고 하더군요.
고맙기도 하고 부끄러웠지만 친구의 사랑의 호의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겠더군요.
그 후로 그 친구 어머니께서 저를 집으로 부르시더니 매일 아침에
친구하고 등교를 같이 했으면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수줍게 “예”라고
대답하고 다음날 아침에 친구집에 가보니 아침상을 차려 주시면서
친구와 같이 먹고 등교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집 사정을 아신 친구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참 눈물이 많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6학년때에는 학교에서 하루 졸업 여행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제가 참가 신청하지 않으신 걸 안 담임 선생님께서 물으시길래
매번 그랬던 것처럼 아프다고 말씀드리니 집안 형편 때문에 거짓말 하신 것을 아시곤
방과 후 저희집에 같이 가시어 부모님께 간곡히 요청드렸으나,
어머니는 안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지요.
담임 선생님께서 6학년때까지 소풍이나, 수학 여행도 한번도 보내시지 않으신
저희 어머니에게 화가 나셨는지 모든 비용과 동생들의 비용까지 책임지겠노라며
그렇게 말씀하시곤 다음날 저를 데리고 오셨으며 단체 여행이란 것을 처음 하게되었습니다.
그것이 학창 시절 유일한 단체 여행의 경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참석을 못했지요.
어머니의 사랑을 오롯이 받은 형제는 막내 남동생이었습니다.
입학,졸업,소풍 등 열정적으로 참가하셨고, 지원도 하셨지요.
부럽기도하고 얄밉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어린 저에게는 큰 상처였으며,
나에게 있어 꿈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린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꿈도 희망도 없는 그저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한다는 막연함이엇습니다.
그러나,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의 실력보다는 뒤쳐진 출발점에서 뛰는
저에게 있어서 한발 더 악착같이 노력해야했습니다.
그나마, 성적은 중상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쯤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갈등이 생겼으나, 가정 형편상
인문계를 가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이공계로 가기로 어렵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께서 저의 가정 형편을 아시면서도 제 성적이면
상위 인문계 지원도 괜찮다고 이공계 가기에는 아깝다고 다시 생각해보라 하셨지만,
저는 결국 시험을 보고 입학을 했습니다.
성적 우수생으로 입학이 되어 근로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할때까지
저는 수업료 및 육성회비가 면제되어 가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습니다.
졸업전 현장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선취업)이 있는데
선택이 없던 저는 지원하여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생활이란 첫발을 그렇게 처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 사회 생활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의 험한 쌍욕과
이공계 출신이라고 학력의 무시와 차별속에서도 꿋꿋히 견디어야만 했습니다.
객지에서 고생하시는 큰형님과 두 누님의 짐을 덜어야 했으며 두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으니까요.
가혹한 현실을 맞이하였던 어린 저는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견디며,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군대를 갈 시기가 다가오자 저는 군대를 가는 대신 방산품을 만드는 산업체에서
3년간 근무하면 면제가 되는 산업특례를 신청하게 됐습니다.
오직 돈을 벌어 희망 없는 가정과 미래의 저를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3년동안 근무하면서 가정에 경제적 보탬을 주면서
야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꿈을 키워나가고 있을때즘 저에게 첫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성인이 되고 발급받은 신용 카드들을 작은 형님이 필요하다고 간곡히 부탁하길래
다짐받고 빌려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형님이 제 카드로 대출을 많이 받고 제때에 갚지를 못하여서 제 앞으로
급여 차압이 들어온다는 문서를 받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형님께 물어보니 미안하다고만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특례업체에서 마지막 3년차 근무중이라 문제가 불거지면
병무청에 신고가 되어 다시 군대에 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일단 수습은 해야하였기에 회사에 양해를 구해서
퇴직금 중간 정산금과 야간 대학에 합격이 되어 입학때 쓰려고 모은 금액 등
총1000만원으로 급한 불들을 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로 사람을 너무 잘 믿는 저에게 있어서는 큰 시련이자,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대학 진학의 꿈도 가족간의 사랑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를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병역특례 3년간의 복무가 끝나갈때쯤,
가정 형편상 이공계를 선택하여 현장직으로 근무하다보니
제 적성과는 맞지 않다는 회의감이 들던 차에, 저희 큰형님으로부터
대기업에 다니는 인사팀장과 인연이 있다고 저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비록 정식 직원이 아닌 계약직이지만 그래도 저는 처음으로 대기업에
다닐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응답하였고, 바로 입사와 동시에 해외 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그곳의 대기업의 입사 문화는 해외 근무 고과가 높아
대부분의 신입 사원들은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으며, 저는 인맥에 의한 낙하산인 관계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선택이었지요.
대기업 입사가 쉬운 것은 아니었고, 또한 그당시 복지라든지 보수가
국내 근무처보다 높았으며. 제 상황에서 대기업에 근무하는 것은 생각
조차 못한 것이었기에 부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렇게 희망에 부풀었던 기대와 다름을 도착하고 3개월 후 바로 알겠더군요.
낮에는 45도를 넘나드는 작열하는 태양과 수시로 부는 모래바람,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등 척박한 근무 환경과 학연,지연 등의
끼리끼리 문화가 팽배했던 그당시 저는 낙하산으로 입사하였으니
주변에서 그리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변의 상황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학력의 차이가 나지 않도록 꾸준히 매우며 익혀으며,
남들 운동할때나 술자석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뿐 또 다시 사막 한 가운데 방향 잃은 양처럼
혼자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루고자 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제가 덜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2년이 지나갈 무렵 멸시와 무시말고 더 큰 시련이 왔습니다.
바로 향수병이었습니다. 향수병으로 방황할 때, 가깝게 지내온 한 형님이
성당에 가보자고 권유하더군요.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저는 하느님보다 제 자신외에는 믿지 않는 무교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참 오만과 교만함의 극치였던 같습니다.
몇 번 고사하던 중 어느날 신부님이 저제가 근무하는 캠프에 차량 정비 관련하여
협조차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부님을 보고 당황했었습니다.
신부님이라하면 의례 나이 지긋한 백발의 신부님인줄 알았는데
그 당시 제 또래쯤 되는 신부님이셨습니다.
로마 파견 유학중에 발령받아 오셨다고 기억합니다.
그동안 제가 상상하고 알고 있었던 신부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젊으시고 사고도 비슷하였으며, 무엇보다 틀에 박힌 사제가 아닌듯 했습니다.
그렇게 자주 뵙다보니 자연스레 대화도 많이하게 되었으며
신부님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고 권유하시더군요.
저는 성경교리도 해보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얘기드리니
그것은 차후 문제이고 우선 하느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해주겠노라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고 몇달 후 그렇게 하겠노라 얘기드린 후 2000년 1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나서 주일마다 시내에 있는 현지 성당에서 미사 참례도 하고,
신자수가 많지 않아 대사관저의 직원 자녀들과 복사등을 했습니다.
맨처음 모르고 시작한 종교적 일상의 기간이 지날수록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던중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IMF사태로 큰 회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총괄 책임자의 추천으로 정직원으로 되는 길도,
대기업에 다닐 수 있다는 희망도 산산이 부서지며 해외 근무 4년만에
허무하게 귀국함과 동시에 저의 종교 생활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저는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업무 처리 능력을 인정 받게 될 무렵부터 회사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부에 문제가 생기고 창업 멤버 대부분이 퇴사하면서
졸지에 제가 경영총대리인 즉, 회사를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겨우 26살때였습니다.
처음엔 낯설고 아무것도 모르는것 투성이었습니다.
대관,회계,통관,조직관리, 접대 등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나름 공부도 했지요.
어느 정도 안목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할쯤
저의 교만 마귀가 본격적으로 저를 온전히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배운 것이 전부인양 위아래 없이 저보다 모른 것 같다 싶으면
신랄한 비판과 멸시, 모욕, 무시 등의 서슴없는 언행을 자행했었습니다.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에게 심하게 대했었습니다.
회사에서 제 능력이 좋게 보였으면 하는 보상 심리도 한 몫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가정내에서 점차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한 순간 음주와 금연을 하셨지만, 지병으로 왼다리 무릎까지
절지하셨다가 결국 합병증으로 왼다리 전체를 절지하였음에도
수술 후 1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전까지 어머니는 그간의 설움을 씻어내려는 듯이 아버지를 핍박 하셨지요.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의 돈 씀슴이가 커져만 갔습니다.
생활비와 용돈을 드려도 1주일도 안되서 또다시 돈을 요구하셨지요.
처음엔 그러다 마시겠지 하는 생각과 그동안 어렵게 사셨으니
풍족은 못해도 그래도 필요하신 것은 해드려야지 했던 생각들을
여지없이 산산히 물거품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교만 마귀의 지배를 받더 저는 근 9년간 잘 다니고 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조그마한 선술집 가게를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제가 가게를 경영하면 바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처음엔 손님이 많아 잘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다 차츰 3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사스에다 메르스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경영에 타격이 가해지더군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는 말들을 들으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해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1여년간 운영하던 가게를 접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칩거의 시간이 길어지며 대인 공포증까지 오게되던군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머니의 금전을 요구하는 횟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고
원하시는 만큼 받지 못하시면 외출할때나 집에 귀가할때에도
계속 금전을 요구하시니 용도를 물어보면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쌍욕을 하셨습니다.
결국엔 제가 도대체 왜그러시냐고 모진 말로 연유를 물어보니
자식들은 어머니의 보험이라고 하더군요.
낳아준 부모이니 모든 것이 당연히 어머니가 우선이라고 하시며
돈을 버는것도, 먹는것도 입는 것 등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당신 우선이며 자식들의 의무이며 보살펴 주어야 하는 책임이라고 말씀하시니
그때 세상 살기 싫음과 저의 존재 자체가 비참해지더군요.
그야말로 저에게 집은 생지옥 그자체였습니다.
결국 작은 형님께서 참기 어려웠는지 아예 집을 나가버리셨습니다.
단순한 집나감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아예 저희 가족과의 연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후로 제가 백방으로 형님의 행방을 알기 위해 경찰서며 관공서로
찾아가 알아봤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3년전 드디어 거주지를 알아내고 찾아가 어렵게 상봉하였지만
그 후로 또다시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 또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영육이 피폐해질즘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한줄기 탈출구로 여겼습니다.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큰형님에게 인계하듯이 하며
아내가 있는 지방으로 생활 터전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39여년동안 살아온 고향에서 쌓아 놓았던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상실감과 좌절감보다,
다시 시작해야하는 두려움보다 휠씬 좋았었습니다.
그때의 심경은 해방감이 컸으니까요.
전 다시 시작했습니다. 연고가 없는 저는 더 열심히 몸을 부딪치고,
발로 뛰고, 외지인을 배척하는 토착인의 냉대에도 정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저의 아내는 열심한 신자였습니다. 아내의 적극적 설득으로
저도 냉담을 풀고 아내와 함께 성당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3살 무렵쯤 아내가 부산에서 하는 기도 모임에 가야하는데
야간 운전이 힘드니 봉사해달고 해서 궁시렁 궁시렁거리며 운전대를 잡고
부산 기도 모임에 간 것이 제가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란 것을 알게된
시발점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반겨주며, 집에서 먹던 것처럼
꾸밈없는 음식 나눔과 수수한 친절함에 흠칫 놀라우면서도 저의 에고 한편으로는
성경 내용도, 교회에서 쓰는 용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무늬만 신자인 무지한 저를
있는 그대로 대하시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경계심도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산이며, 서울이며, 지리산등 내맡김을 하는 곳들을 몇 번 참석하다보니
부지불식간에 제 삶이 점차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며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무지한 저에게는 매우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첫번째로 본당 미사참례나 성지 순례, 본당 봉사 활동을 제가 먼저 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이런 저런 핑계로 회피하기 일쑤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제가 아내보다 더 챙기게 되더군요.
그러다보니 성당에서는 레지오 활동이며, ME, 아버지학교 등의 신앙 교육등을
마다하지 않고 순명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제가 일을 할 때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계획적이며 열정적으로 하는 편입니다.
제가 정한 가이드 라인에 의해 일을 해야만 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정한 것에 대한 결과가 좋으면 다 내가 잘 해서고이고
성과가 좋지 않을 때는 주님탓, 남탓, 여건탓이라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버리는 교만하고 어리석음의 자체였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내영의 삶으로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섭리임을 것을 깨닫고 있으며 잘하던 못하던 다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게 되니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적 신부님께서 잘하시는 "아님 말구요"가 절로 나오게 되더군요
마지막으로는 저는 출퇴근이나, 직업상 출장등으로 운전하는 것이 잦은 편인데
그럴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최신 가요나 팝송만 들어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리산 내맡김 모임 이후 화살 기도와 성가만 듣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가요등이 이제는 소음으로 들리며,
화살기도나 성가를 들을 때면 심신의 안정과 왠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문득 제가 생각하여도 견고한 성과 같다고 느낀 질긴 저의 에고가
거룩한 내맡김으로 한 줌 모래성처럼 바람에 흩날리듯 깨지고 부서지는
놀라운 변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음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 갈라2,20
<나의 삶에서 하느님이 한없이 커지셔야 하며
나는 한없이 작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 삶에서 하느님 뜻이 크게 드러나야 하며
내 뜻은 사라져야 한다.
아니, 내가 없어져야 한다.
'無我'가 되어야 한다.
無我가 되는 길은,
즉 '無我之境' 에 이르는 일은 道를 닦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無我之境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방법이다. > - 지도사제 2011.11.20. ▣ 주일강론
‘사랑’의 ‘사’ 자도 모르던, 무지하고 부족한 이 죄인이
나날이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알아가고 만나고 체험하며 사랑해 가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 끊임없는 기도 > 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바로 < 늘 깨어 있음 > 을 말하는 것입니다.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 > 입니다.] - 지도사제 13.02.28. 09:29
이제는 무늬만 종교인이었던 부족한 저는 에고의 틀에서 벗어나 나를 버리고
아버지와 공명하는 참 신앙인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오니 이 부족하고 무지한 이 죄인은
그저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기도가 삶이 되고, 삶이 기도가 되는, 생활이 곧 기도인 삶으로
깨어 있도록 하며, 겸손한 삶, 나와 타인에게도 사랑할 줄 아는 삶,
내가 아닌 아버지가 제 삶의 중심이란 것을 알고 행동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실것임을
저는 확신하기에 지금 이순간에도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겠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 많고 실수투성이지만, 열정과 열의로 가득찬 매의 눈으로
지도해주시는 신부님과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선배님들과 식구님들께
온 마음으로 감사와 사랑을 드리오며 늘 아버지 참 뜻안에서 순명하며 겸손으로
부족한 저의 모든것을 내맡기고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와 거내영과 <딸랑2>의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음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
아멘 아멘 ~~!!
사랑하는 무구님,
지나온 시간들을 담담하게 적어준 글을 읽으며
두어번 뵌적은 있지만
이런 여러가지 일들이 있으셨군요.
하지만 아내를 통해 알게된 거내영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참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이젠 진짜 진복자가 맞네요.
제가 처음 가입했을 때
축하한다며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딸바보*란 닉네임이
무구님이셨네요.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무구와 <딸랑 2증언>의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문득 제가 생각하여도 견고한 성과 같다고 느낀 질긴 저의 에고가
거룩한 내맡김으로 한 줌 모래성처럼 바람에 흩날리듯 깨지고 부서지는
놀라운 변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음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
아멘!!!
아멘!!!
사랑하는 무구님,
오랜 시간 겪어왔던 아픈 삶을
귀한 증언으로 풀어내주셔서 감사립니다.
온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한 사람은 한 우주라는 싯구처럼
님의 증언글을 통해서도 참으로 대단한 우주적인 삶,
외롭고 고단하고 성실했던 삶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참으로 장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 큰 그릇을
아버지께서 어떻게 쓰실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거룩한 내맡김을 통해 에고가 깨지고 부서지며
새로 돋아난 아버지 사랑이 모든 것의 열쇠임을 발견하셨으니
아버지만을 죽기까지 뜨겁게 사랑하며
이 복된 길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함께 가십시다.
사랑하는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구와 < 딸랑2 증언 >의 모든 것을 통해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문득 제가 생각하여도 견고한 성과 같다고 느낀 질긴 저의 에고가
거룩한 내맡김으로 한 줌 모래성처럼 바람에 흩날리듯 깨지고 부서지는
놀라운 변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음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아멘!!! 아멘!!!
사랑하는 무구님,
참으로 지금여기를 사시도록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 찬미드립니다.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의 놀라우신 은총에 참으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토록 오랜세월 고통속에서도
잘살아오신 님의 마음속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순명하시어 거내영으로 이끄심에 온전히 내맡겨 드리며 살아가시니
더욱 큰 박수로 응원합니다.
저또한 어린시절의 상처를 하나씩 치유해주시는 나의 사랑하는 치유자이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에 내맡겨 드리고 살아가니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더욱더 아버지를 찬미하며 창조주이신 아버지만을
죽기까지 사랑하며 아버지와 함께 지금여기를 살게하신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드리고 찬미드리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함께 동행하는 거내영의 길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겸손한 당당함으로 살아갑니다.
어릴적 상처의 완고한 에고의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새하늘 새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으로 선택받은 자녀들임을 다시한번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함께 무형의성전에서 철부지 무뇌아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만으로 참행복을 살아가는
무구와 내맡김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녀들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 갈라2,20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귀중한 증언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내가 아닌 아버지가 제 삶의 중심이란 것을 알고
행동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실것임을
저는 확신하기에
지금 이순간에도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무구님,
그 역경들을 딪고 그리고 그 고난의 순간마다
아버지와 함께였던 사랑 고백이 진한 공감으로
제 맘을 울립니다. 아멘! 아멘!
하느님을 만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여기 거내영에 모인 우리 가족들이
너무 고맙고
사랑하는 맘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빠,
무구의 그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아버지를 찾는 한줄기 빛 비춰주심에
깊히 감사드리며 무구와 <딸랑2증언>을 통하여
무한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