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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문예창작강의Ⅱ
제23강
2023년 신춘문예 당선수필 분석
유한근
1. 수필의 진실과 깨달음의 미학
“수필은 삶의 경지이고 깨달음에 닿아있기에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수필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피워내는 작업이고, 삶의 경지와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심사위원 정목일의 ‘2023 전북일보 심사평에서) 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수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문학 장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수필은 작가의 외면적인 삶의 형태와 내적 면모를 어느 장르의 작가보다도 명증하게 보여주는 장르이기 때문에 이 말의 딱 들어맞는 듯하지만 다른 문학장르의 경우에도 이 말에서은 적용된다. 시는 이미지와 음율이라는 표현구조를 통해, 소설은 스토리는 서사구조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필은 작가의 상상력과 사유를 통해 인간의 명증한 삶의 진실과 깨달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 수필과 타 문학의 장르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수필의 영역이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신인新人들에 의해 얼마나 넓혀줄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신인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기성세대와는 달리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 수필문학과 우리 문학의 미래 전망을 예측해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글의 서두에 수필의 진실과 깨달음의 미학을 환기해준 정목일 수필가가 뽑은 전북일보 당선 수필인 지영미의 <골죽>을 먼저 보자. 이 수필에 대해서 심사위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골죽>은 골이 깊어진 대나무, 위로 자라는 대신 속을 채우는 대나무를 말한다. 골죽이 불기운과 물과 철심으로 다듬어져 대금으로 탄생한다. 오랜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취구에 입김이 닿으면 중모리, 자진모리, 진양조장단의 가락으로 심금을 울리는 악기로 재탄생한다. 인간의 자각은 삶의 발견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일 것이다. ‘골죽’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골죽>은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다.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수직으로 곧게 빠르게 자라는 대나무의 속성과 바람이 불자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는 대나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그래서 그 다음 단락에서 이 부분을 보완 설명한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고 대나무 마디의 상처에 대해서 그리고 고통의 소리를 참는 속성에 대해서 그리고 “모두가 속을 비우는 대숲에서 내면을 옹골지게 키우며 자신을 지”킨다는 나름의 인식을 서술한다.
그리고 대나무의 일반적 쓰임새에 대해서 서술한다. 무용수 손에 들리는 대나무 합죽선, 명필의 붓대, 죽부인, 소박한 국숫집 채반 등 대나무로 만들어 지는 민속품에 대한 언급을 한 뒤 비로소 ‘골죽’ 이야기를 시작한다. 명기名器를 만들기 위해 공죽을 찾아다니는 노인의 이야기로 통해 다시 태어나는 병골죽이야기를 디테일하게 서술한다. “명인의 날숨을 마신 대금이 첫울음을 토해낸다. 숱한 기다림과 번민의 시간이 진양조장단으로 흘러나온다. 속울음이 심금을 흔든다. (…) 혀를 굴리다가 튕기고 막았다가 떼고 들숨과 날숨의 어우러짐이 절창絶唱에 이른다. 명인의 기교에 음정은 자진모리장단으로 거듭난다”가 그것이다.
청의 떨림에 바람이 지나가고 달빛이 아른거린다. (…) 골마다 묻어 두었던 통한과 비명이 파문을 일으킨다. 불의 다스림을 무수히 견딘 고통의 비틀림이 신비로운 가락으로 풀려난다. 떨고 흘리고 꺾고, 다시 혀를 치는 모든 기교에, 억눌렸던 고통이 대금의 골을 타고 승화한다.
소리 내어 우는 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 정한情恨을 품었기 때문이다. 가락도 외침도 하물며 비명까지, 맺힌 것이 있어야 밖으로 새어 나온다. 무른 나무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나무라야 딴딴한 소리가 난다. 숱한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울음이 영혼을 울리듯, 울 줄 아는 나무 한 그루가 대신 울어주는 악기가 된다.
깊은 한이 담긴 저릿한 소리는 문득 슬퍼지기도, 이내 비장해지기도 한다. 너울거리는 선율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밑바닥을 훑는다. 깊은 골짜기 눈 쌓인 언덕, 사람 발길이 뜸한 산자락까지 휘감아 돈다. 침묵이 필생의 업인 바위, 태풍에 가지가 부러진 나무, 아파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미물들을 쓰다듬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가슴에 구멍이 뚫려, 공허에 빠져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울줄 안다. 심연深淵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절절함으로 삼라만상의 아픈 것들을 보듬는다.
다시 맑고 청아한 음색이 울린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사뭇 비장하다. 교교한 달빛이 만상萬象에 내린다.
-지영미의 <골죽> 결말부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골죽으로 만든 대금의 청아한 소리를 통한과 비명의 신비로운 가락이라는 인식은 어쩌면 상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문에서의 “숱한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울음이 영혼을 울리듯, 울 줄 아는 나무 한 그루가 대신 울어주는 악기” 라는 인식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가슴에 구멍이 뚫려, 공허에 빠져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울줄 안다. 심연深淵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절절함으로 삼라만상의 아픈 것들을 보듬는다”는 인식은 깊은 사유를 통해서 얻어낸 새로운 인식이라는 점에서 당선될 만한 작품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모티프가 좋은 작품의 재료라는 점에서 혹은 수작 가능성의 50%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수필경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동안 이러한 민속학적인 모티프가 문학상을 비롯해서 신인작품상을 받는 글감으로 많이 차용되어왔다. 하나의 트렌드처럼 이 글감은 성공을 보증 받아왔다. 큰 상금을 받는데 보증수표처럼 차용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이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인 다양한 소재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위축시켰다는 점에서이다.
2. 문제적 수필 면모
이에 비해 조남숙의 <몇 초의 포옹>(경남일보 신춘 당선수필)은 비수필적 모티프를 수필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된다. 글감이 새롭다고 좋은 수필이 될 수는 없다.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지녀야 하며 수필의 면모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 이 수필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먼저 보자. “몇몇 작품들은 오랜 시간과 경험에서 축적된 자기성찰과 반성이 인생의 향기를 더하기도 했고, 개인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꿈과 좌절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시대적 고뇌 같은 것도 담겨 있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몇 초의 포옹>은 문장과 감성과 사유가 안정돼 있었다. 특히 ‘계단’을 제재로 선택한 점도 눈에 띄었다”라고 주목한 것은 글감의 특이성에 주목한 것이다. “자신의 삶과 사유를 압축할 수 있는 고유한 표상은 누구나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 고유한 표상은 ‘자연’의 영역일 경우가 많다. 가령, 산이나 물, 바다, 길 등과 같이 원형에 가까운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낡고 진부한 제재라고 해서 그것을 담아내는 생의 굴곡과 시간적 체험이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폐허와 공간에 대한 사유를 ‘계단’으로 대치하는 과정이나 그 ‘계단’을 통해 슬픔과 기쁨, 미움과 사랑, 아픔과 평온, 단순과 복잡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공존의 가치를 발견해 내는 사유는 독특하고 개성적이다”라는 평가가 이 작품을 좋게 본 이유이다. “(…)그의 글에는 삶의 넋두리나 섣부른 초월이 아니라 사유의 깊이가 있고 존재의 고뇌가 있다. 열려 있기에 채워지고 비워진다는 사유에서 비롯되는 감각은 ‘잠깐의 포옹’만으로도 모든 불협화음을 평안한 숨결로 바꾸는 힘을 느끼게 한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균질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심사위원 황광지·강동우) 는 평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조남숙의 <몇 초의 포옹>을 읽어보자. “‘폐허는 사람이 없어야 폐허가 된다. 역사의 한 부분을 떠들썩하게 채워 넣던 도읍지였을망정 인걸이 간데없어지면 폐허가 된다’(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 서현 지음 / 효형출판, 2014)는 문장에서 폐허를 생각한다”는 서두의 문장은 전적典籍의 타인의 문장을 인용해왔다는 점에서 일단 이 부분은 감점이다. 그리고 “사람은 공간에 에너지를 채워 넣는 중요한 유기체다. 유기체는 공간에 모여 구분 불가능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공간 속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사람의 힘은 달콤하면서 힘이 있다. 사람 구경 할 수 있는 시장이나 백화점, 극장이나 공연장, 그 어떤 장소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다. 그중에서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곳이 계단이다”라는 지적인 문장은 정적인 문장과 함께 문장의 스타일이니까 감점될 이유가 없다. “나에게 세종문화회관은 정신세계의 중심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세종문화회관과 계단에 대한 고찰은 무거운 수필 즉 에세이라는 점에서도 큰 문제가 없다. 그보다는 이 수필은 먼저 누구나 다룰 수 없는 글감을 선택해서 수필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계단에 대한 체험을 일반 수필처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낯설지는 않다, “계단에 앉아서 친구가 타고 올 버스를 기다렸고 흔들리는 거리의 소음을 즐겼다. 계단에 오르며 누군가를 찾는 사람의 얼굴에서 설렘을 보았고 앞에 앉은 사람 뒷모습에서 기다리던 이에게 손을 흔들며 알은체하는 반가움을 느꼈다. 특히 어스름 저녁노을이 번지는 시간이 되면 울렁대는 감성들이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세종로에 있는 모든 생태계의 심상이 공기의 파동과 춤을 추었다. 그러다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단속적인 말들은 소음과 섞여 즐거운 탄성이 되곤 했다. 마음속에 간직한 신뢰나 의심, 성취감이나 미숙함까지도 의식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라는 체험을 통한 사유는 호감이 간다. 그러나 다음의 문장인 “공간의 생태는 개인의 경험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로 순환하며 섞인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사회 구성원은 종종 누군가의 배경이 된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경험들은 새로운 낱말을 배열하며 가치 있는 문구를 창조한다. 창조된 문구로 이어진 이야기는 쉼표와 마침표로 예기치 않은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체험담 서술 중간에 끼워 놓은 문장들은 독자의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작가가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감점될 수 있다.
계단에서 생각한다. 계단에 번호표 없는 좌석이 얼마든지 있으니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옛 도읍지의 인걸이 되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열린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이 장소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역사성을 지니듯 앞으로도 개인의 일상으로 이곳은 채워지고 비워질 것이다. 각각의 장면이 역사의 무리를 이루며 이 시대를 만질 것이다. 코로나로 애석했었던 현실도, 무겁고 구부러진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일들도, 역사 속으로 흘러갈 것이다.
도심의 새로운 건축물이 자본의 산물이라면 역사성을 지닌 오래된 건축물은 정신의 산물이다. 자본의 정신이 어디선가 뚝, 떨어진 가치가 아니듯이 전통을 느끼는 일도 마찬가지다. 옛 도읍지에서 많은 사람은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타인을 향한다. 그리고 포옹한다. 시대 감각을 느끼면서 미래로 향한다. 전통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한 역사 공간에서 과거의 빛을 본다. 그 빛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의 우리들은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어깨를 어루만지며 삶의 역동성을 교환한다. 잠깐의 포옹으로 숨결을 나눈다. 편안한 숨결이 삶의 위로가 된다.
인적이 간데없는 옛 도읍, 계단에서 기다린다. ‘코로나’라는 낱말이 추억이 되는 날을, 몇 초의 포옹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기를. 사람의 숨결이 폐허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음을 기다린다. 그리고 숨결도 문양이 되어 공존의 그림자를 만들기를….
-조남숙의 <몇 초의 포옹>결말부분(경남일보 당선작)
위의 인용문은 ‘몇 초의 포옹’이라는 이 수필의 제목인 키워드인 “잠깐의 포옹”이라는 언어가 내재한 이 수필의 결말부분이다. 그리고 계단이라는 이 수필의 모티프를 직접적으로 서술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인용문의 앞에서 작가는 이 수필의 글감에 대해서 언급한다. “새로움을 탐하는 모습은 신선하고 풍요로우며 사실적이다. 세월이 지났건만 세종문화회관의 계단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 장소를 채우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해도 계단은 그 자체로 성실하게 품위를 지닌다. 모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존의 장소로 말이다. 안과 밖을 나누는 문이 없으니 모든 이의 입장이 가능한 곳,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 존재한다”며 세종문화회관의 열린 계단에 대해서 찬미하고,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공존하는 세상은 어디로 흐를지 모를 바람 같다. 때로는 바람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듯이 개인의 속성으로 이루어지는 무리는 생존의 예술이다”라고 공동체 생존예술미학을 환기한다. 그리고 위에서 세종문화회관의 계단은 “계단에 번호표 없는 좌석이 얼마든지 있으니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며, “이 장소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역사성을 지니듯 앞으로도 개인의 일상으로 이곳은 채워지고 비워질 것이”고, “옛 도읍지에서 많은 사람은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타인을 향한다. 그리고 포옹한다. 시대감각을 느끼면서 미래로 향한다. 전통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한 역사 공간에서 과거의 빛을 본다. 그 빛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의 우리들은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어깨를 어루만지며 삶의 역동성을 교환한다. 잠깐의 포옹으로 숨결을 나눈다. 편안한 숨결이 삶의 위로가 된다”고 “인적이 간데없는 옛 도읍, 계단에서 기다린다”고 토로하는 것으로 이 수필을 마무리한다. 몇 초의 포옹으로 편안한 숨결을 나누면 아무리 어려운 사대라 해도 삶의 위로가 된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이렇게 조야하나마 조남숙의 <몇 초의 포옹>을 살펴본 이 수필의 문체와 사유는 로고스적인 문체이지만 정적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l는 다분히 파토스적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강동우의 <종種을 사랑하는 법>(매일신문 당선수필)은 제목부터 관념적이다. 그러나 이 수필의 모티프는 ‘종種’이다. ‘종種’의 사전적 의미는 ➀사물의 부문을 나누는 갈래, ②식물에서 나온 씨 또는 씨앗을 의미한다.
이 수필은 “늙은 강아지가 좋다”하는 첫 단락에서는 반려견 똘똘이를 글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직장을 다니다가 백수가 된 이른 바 ‘젊은 독수리‘와 똘똘이와의 단편적인 삶을, 그리고 그 다음은 젊은 시절 식객으로 초대되어 2년 3개월 지냈던 체험을, 그다음다음은 경기도 광주에 마련한 신혼집의 아파트에서의 박새 체험과 살충제의 체험을, 그리고 이를 통한 사유를 이렇게 서술한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지만 바람은 그치지 않고, 박새를 사랑하고자 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랑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천칭 한쪽에 똘똘이를, 다른 한쪽에 박새를 매달면 정확히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자못 다르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개체이고 추억 속에서 항상 마주할 수 있는 똘똘이. 셀 수 없이 많은 개체이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박새. 사랑법은 다르다./동물 한 마리를 사랑해본 사람은 많아도, 하나의 종種 자체를 사랑해본 사람은 드물다. 종種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북극성만 관찰하던 사람이 은하수를 발견하는 것이다. 종種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편리함에 길들여져 잠깐 잊고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생명을 사랑하고 환경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 단 한 마리의 동물이라도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그 마음을 더 수월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DDT를 비롯한 맹독성 살충제를 '침묵의 살인자'라 부른다”라고 살충제의 치명성을 언급한다. 이 또한 수필의 창작성과는 거리가 먼 표현이기 때문에 감점 요인이 된다. 그런 뒤 이 수필의 결말에 이르러서 이렇게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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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種을 사랑하는 마음이 발견이라면, 사랑하는 방법은 발명이다. 박새를 사랑하는 마음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을 발명하고 싶다. 쉬이 곁을 내어주지 않는 박새를 위해 그들의 터전인 쪽빛 하늘과 숲을 되돌려주려 한다. 번거로워도 카페에 텀블러를 가져가면 플라스틱 공장은 더 느리게 돌아간다. 두 번 움직여도 이면지를 쓰면 나무를 덜 베어낸다.
나의 소박한 사랑법이 잿빛 하늘에 갇힌 박새에게 당장은 작은 빛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도 깜깜한 바다에서 작은 빛을 향해 노를 젓듯이 꾸준히 실천할 것이다. 작은 빛이 점점 큰 빛이 되듯 다른 방법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 빛이 점점 다가와 태양처럼 커지는 날을 상상하며 지구를 비춰본다. 지구를 둘러보니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 참으로 가득하다.
-강동우의 <종(種)을 사랑하는 법>결말 부분(매일신문 당선수필)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 수필의 문장이나 전개 방식이 특이하다. 수필의 모티프에 대한 사유과정 또한 특이하다. 그래서 조금은 낯설다. 새로워서 낯선 것 보다는 자연스럽지 못해서 낯설다. 그러나 심사평은 이렇다.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메시지가 분명하고 문장 전개가 자연스럽다. 타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나만 생각하는 탐욕의 시대에 생명을 사랑하고 환경을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점층적으로 서술하여 감동을 더하였다”(장호병 허창옥) 라고 호평을 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전언은 이 지적이 타당하다. 자연 친화 혹은 생태주의적인 작가의 메시지는 맞다. 그러나 우선 거슬리는 것은 제목 <종種을 사랑하는 법>에서 ‘종種’의 의미이다. 앞서 개념을 정리했지만 ‘종種’은 씨앗이다. 생물을 분류하는 단위는 계문강목과속종이다. ‘종(Species)’은 생물의 마지막 단위이다. 생명과학에서는 생물의 '종'은 그것이 자연계 속에 실재하는지에 관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종'은 생명체의 단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수필에서 글감으로 차용한 뱐려견, 독수리, 박새 등등이 ‘종’이다. 그 ‘종’을 사랑하는 법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발명”이다. 발명의 사전적 의미는 ➀ “아직까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하여 만들어 냄”. 그리고 ②는“경서의 뜻 따위를 스스로 깨달아서 밝힘”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사랑하는 방법은 발명이다”에서의 ‘발명’은 ②에 해당되는 의미로 다소 그 명증성이 떨어진다. 적확한 언어 사용의식이 부족하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의 마지막 종결 문단인 “나의 소박한 사랑법이 잿빛 하늘에 갇힌 박새에게 당장은 작은 빛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도 깜깜한 바다에서 작은 빛을 향해 노를 젓듯이 꾸준히 실천할 것이다. 작은 빛이 점점 큰 빛이 되듯 다른 방법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 빛이 점점 다가와 태양처럼 커지는 날을 상상하며 지구를 비춰본다. 지구를 둘러보니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 참으로 가득하다”는 문장은 감성적인 문체가 독자의 감흥에 주목된다.
3. 원 소스 멀티-유스의 가능 문제
마지막으로 일별할 서은영의 <슬로우슬로우 퀵퀵>(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수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할 때, 사교춤 배울 때 사용하는 구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수필에서 “‘슬로우슬로우 퀵퀵’ 휘파람 불 듯 발음해야 하는 이 말을 내가 맨 처음 들었던 때는 골목이란 골목을 죄다 이어 나만의 세상을 만들던 어린 날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바다에서 불어와 골목을 휩쓸다가 숲을 타고 산등선 너머로 사라지던 바람을 뒤쫓는 일이 당시 아이들의 놀이였다”고 토로한다. 이 놀이가 아이들의 어떤 놀이인지 짐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더 읽으면 밝혀진다. “방물장수의 가벼운 입처럼 소문들이 넘쳐났고 소문의 주인공 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족을 건사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였을까. 겨우 장만한 단층집이 당신을 안심시켜서일까. 들리는 소문에 아버지가 춤바람이 났다는 것이었다.”가 그것이다. 춤바람이 난 아버지를 작가는 이렇게 이해한다. “지쳤던 삶에 처음으로 불어온 산들바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한창 뛰어다닐 자식들이 주인집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생의 한겨울을 잘 넘긴 스스로에게 선물하듯 사교춤을 배우신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듣는 어른들의 이야기란 아무리 가까이에서 들어도 꿈속의 일인가 싶게 아득했다. 들어서는 도통 모를 사교춤이라니, 실눈을 뜨고 봐야 겨우 보이는 아지랑이처럼 실체를 알 수 없었다”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필의 모티프는 ‘아버지의 춤바람’일까? 이 작품을 뽑으면서 심사위원은 이렇게 평가한다. “<슬로우슬로우 퀵퀵>은 도입의 첫 어휘를 부사어로 차용하여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제와의 연계를 암유하고 있어서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춤바람’이라는 부정적 소재를 삶의 이야기로 승화시킴으로써 좋은 것만을 써야 한다는 수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춤바람에 따른 어머니의 한이 감정의 절제미를 거쳐 중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춤바람은 골목을 찾아드는 바람 같은 것이고 그것은 지구별을 움직이는 시원으로 기능하면서 지금을 있게 한 운율이기도 하다는 확장 또한 무난하였다. 더하여, 70년대 산업화 초기 중동 근로자 가족사가 고명처럼 적절히 이미지화 된 장면이라든가, TV앞에 앉아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는 늙은 아버지 현상 이면에 적층된 인생무상에 대한 사유가 글의 깊이를 더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설명과 지나친 관념은 옥에 티라 하겠다”(배귀선)가 그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가치를 가장 짧게 적절하게 서술한 심사평이다. 그리고 심사의 고뇌를 이야기 하면서 “수필문학의 확장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서은영의 <슬로우슬로우 퀵퀵>을 당선작으로 선했다”고 토로하는데 여기에서의 수필문학의 확장과 가능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이 수필의 첫 문장은 “하물며, 골목 바람도 리듬을 탄다”고로, 부사어 ‘하물며’를 첫문장에 앞서 배치하여 가능한 한 부사어를 쓰지 말라는 문장쓰기 문법을 깬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를 통한 신성함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리고 ‘골목바람’이라는 은유어로 아버지의 춤바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바람을 “느긋한 바람이 강아지풀을 쓰다듬으며 살랑거리다가도 남쪽 동백꽃 내음을 골목으로 부려 놓을 만큼 세차게 불기도 한다. 빨랫줄에 널려있는 시래기가 왜바람 따라 바스락거린다. 거칠어진 바람에 돌쩌귀 빠진 철대문이 덜커덩덜커덩 녹을 닦는다. 바람의 장단에 골목은 부풀었다가도 이내 고요한 풍경이 된다. 사람이 만드는 바깥바람에도 골목은 술렁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진다. 후미진 골목의 리듬이다”라고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점을 심사위원은 높게 평가한 것이다.
서은영의 <슬로우슬로우 퀵퀵>은 남편들이 “돈벌이를 좇아 사철 내내 여름이라는 사우디로 날아가서 아낙네 몇은 과부 아닌 생과부의 날들을 보냈” 던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걸핏하면 끊기는 수돗물과 시간제 급수로 집집마다 두었던 대형 고무통을 매일 아침 장독인 양 행주로 훔치던” 그 시절. “그녀가 가장 먼저 부엌문을 박찼다. 바지런한 손은 얼굴 치장으로 더욱 바빠졌고, 반찬거리였던 오이를 잘라 얼굴에 빼곡히 붙였다. 먹기에도 아까운 것을 얼굴에 쳐바른다고 엄마는 혼잣말로 흉을 봤”던 그 시절 아버지는 “그녀 등에 손을 얹고 밀다가 허리춤을 잡아채 당기기도 하면서 가뜩이나 좁은 안방을 돌고는 했다. 서툰 발놀림에 발등이 밟혀도 웃으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너그럽던 아버지. 그럴 동안에도 엄마는 방구석이나 부엌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도라지 껍질을 도루코 면도날로 까는 부업에 여념이 없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작가는 소환하여 이이러니하게 들려 준다.
그리고 그 때의 리듬인 ‘슬로우슬로우 퀵퀵’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본능적이고 완벽한 리듬이라고 사교춤 예찬론자는 말하지만 이 리듬이야말로 카오스 이후의 지구를 여전히 푸른 지구로 유지하는 자연의 운영체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숱한 생명이 어울려 사는 질서의 운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아버지의 춤 상대녀였던 그녀를 이렇게 이해하기도 한다.
아마 그때 깜상 아줌마가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살면서 중심을 잃거나 자기 자신의 리듬에서 낙오했을지도 모른다. 느리거나 빠른 인생의 동선에서 그때 그녀는 어떤 흐름을 탔던 걸까. 이제 아버지는 겨울바람도 일지 않는 안방에서 리모컨을 오르락내리락 돌리며 얼마 남지 않을 여생의 슬로우 기간을 보내는 중이다.
결국 ‘슬로우슬로우 퀵퀵’의 리드미컬함이 나를 지금에 다다르게 한 주역이다. 먼 우주로 빠져나가 바라보면 이 지구는 탄생과 소멸의 길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까. 어제와 오늘을 닫고 연 공전과 자전, 밀물과 썰물, 눈앞에서 펼쳐지는 밤과 새벽과 한낮을 우리는 느긋함과 단호함, 부드러움과 박력으로 살아낸다. 오늘도 나의 발걸음은 슬로우슬로우 퀵퀵이 펼쳐낼 리듬을 따라 내딛는다.
-서은영의 <슬로우슬로우 퀵퀵> 결말 부분(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당선작)
“그때 깜상 아줌마가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살면서 중심을 잃거나 자기 자신의 리듬에서 낙오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지금의 아버지는 슬로우 기간이지만, 그 때의 아버지는 퀵퀵의 리듬을 타던 기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슬로우슬로우 퀵퀵’의 리듬을 작가는 위의 인용문에 앞서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다. “꽃이 피고 씨앗을 바람에 실려 보내거나, 열매를 맺는 일은 아름다운 여정이자 춤이랄 수 있”는데 “봄이면 목련 나무는 묵은 가지마다 솜털 껍질에 싸인 봉오리를 맺는다. 그 봉오리 속에 겹겹이 들어앉아 있는 하얀 꽃잎은 겨울부터 뿌리가 천천히 밀어 올린 슬로우슬로우의 결실이다. 등불 켜듯 환하게 피었다가 철퍼덕 바닥으로 꼬꾸라지는 화장花葬은 순식간에 퀵퀵 이뤄진다. 일생이 슬로우인 꽃나무는 숱한 퀵들로 이어져 땅에서의 한살이를 다음 계절로 순환한다. 어떻게 보아도 ‘슬로우슬로우 퀵퀵’ 아닌가”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결국 ‘슬로우슬로우 퀵퀵’의 리드미컬함이 나를 지금에 다다르게 한 주역이다“라고 회상하며, ”먼 우주로 빠져나가 바라보면 이 지구는 탄생과 소멸의 길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까. 어제와 오늘을 닫고 연 공전과 자전, 밀물과 썰물, 눈앞에서 펼쳐지는 밤과 새벽과 한낮을 우리는 느긋함과 단호함, 부드러움과 박력으로 살아낸다. 오늘도 나의 발걸음은 슬로우슬로우 퀵퀵이 펼쳐낼 리듬을 따라 내딛는다.“고 아버지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 자아성찰을 한다.
이 수필의 특성은 80년대 남편은 중동 노무자로 파견되어 돈 벌러 간 사이, 한국에 남은 아낙네들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회문제를 이이러니 서사구조로 형상화해 긍정적이고 바라보고 있다는 점. 또한 그 당대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긍정적인 것은 크로스 오버시대에 있어서 수필의 원 소스 멀티-유스의 역할, 그 가능성을 이 짧은 산문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짤막한 수필의 에피소드가 한편의 단편소설을 서사를 대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슬로우슬로우 퀵퀵’이라는 이 수필의 키워드에 대한 긍정적인 사유를 통해서 언어인식에 대한 새 해석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필을 간과할 수 없게 된다. (* 이 원고는 발표한 글을 수정하여 본지에 맞게 재발표합니다)
유한근.......................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원 소스 멀티-유스, 문학이야기> <인간, 불교, 문학>, <한국수필의 전망과 지표>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등.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동국대, 명지대, 출강,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교무처장 등 역임, ⟪인간과문학⟫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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