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대학 부모박복과 출신이라서 십대를 매우 험하게 보냈다. 어려서부터 세상살이가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몸으로 겪다 보면 적응을 하던지 못하던지 하게 된다. 대부분은 적응을 하면 악바리가 되는 것이고 부적응하면 소년원으로 가게 된다. 후자의 대표적 경우가 '지존파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 전자도 후자도 아닌 제 3의 길도 있다. 즉 메시아 컴플렉스에 빠지는 길이다. 이 병은 순수한 십 대에 감염되기 쉬운 병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증세가 나타나는 병이다. 이런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스님, 수도자, 목사들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증상인 것이다.
가정 생활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만 돌았지만 세상에 대한 좌절과 반항심이 다행히도 파괴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신앙 때문에 잠복 되었었다. 현실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으니까 오히려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화스럽지 못한 집안 환경이 오히려 나를 피안의 세계로 떠밀어 수도자가 되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한창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 청소년기에도 친구들이 팝송을 들으며 가사를 옮겨 적고 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수도사가 되기로 해서 성인전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팝송의 내용들이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일찍 허무주의에 빠져서 한 방에 인생을 끝내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짧게는 ‘화끈하게 살다 죽는 것’이고 길게는 수도사가 되는 것인 셈이었다.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내 문제를 부모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학생의 처지이면서도 생각은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이다.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향해서 “이 사람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원래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화끈하게 죽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주로 영화 속에서는 깽, 흑인들이 화끈하게 죽는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성질은 더러워도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양처럼 순해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잃어버릴 것이 없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절망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한다면 그 시절 나는 그런 용기로 무장하고 있을 때이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도 없었다. 그래서 주로 팔레스타인이나 무슬림 세계에 벌어지는 자살 테러 사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남다르다. 실제로 하루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화끈하게’ 살다가 죽는 자살 테러를 지원한다. 사회가 위험해지는 것은 핵무기 때문이 아니고 절망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이다.
인간이 이상을 품는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과 괴리가 심할수록 결과는 참담하다. 더욱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미숙한 시각의 결과는 참담했다
1985 년도에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해서 생계가 보장되어 있는 기성교회를 떠나서 뜻이 맞는다고 생각했던 또래의 병원원장 부부와 함께 석관동에서 생활교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3 년을 사귀어 뜻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지만 원장부부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그들의 탓이 아니었고 내 자신이 목표에 대한 설익은 열정 탓이었다.
물론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교회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같이 모델이 될만한 작은 교회도 방문해 보기도 해서 그들도 이해를 잘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막상 교회를 시작하고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해서 신앙의 내용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소위 은혜스러운 교회, 즉 기복적, 주술적, 신비주의적인 교회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다.
직원들의 월급은 한 번도 정한 날짜에 주지 못하면서 부부가 서로 생일을 축하한다고 몇 백 만 원짜리 시계나 반지를 선물을 했다. 목사로서 가까이서 그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기회를 맞게 되었다. 원장 부인은 그 해 고 3이었던 아들 때문에 밤마다 삼각산에 올라가서 울부짖으면서 철야 기도를 했다. 나로서는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몇 번 쫓아가서 기도를 한 다음에 물었다.
“집사님! 아들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요. 인간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내년 입시만 하나님께 맡길 것이 아닌데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랬더니 원장 부인이 눈물을 지으면서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모르셔서 그래요, 우리 애에게 한 달 학비가 300만원 들어요.”
나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1 기분에 6 만원 할 때이니 보통학생 150명의 학비를 쓰는 셈이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목사의 양심으로 이것은 꼭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돈을 가지고 자식 교육을 위해서 얼마를 쓰던지 잘못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도 등록금이 없어서 못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데 150명 학비를 혼자서 쓴다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아무 소리 없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예배를 보러 다녔다.
그들에게는 내가 부담스럽고 거북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병원의 원목의 역할도 겸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병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 그들이 나의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것을 뻔히 알고 나 또한 마음속 밑바닥에는 그들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지만 목회자의 자존심 때문에 조금도 표현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예배를 인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마츄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형벌일 수 있다. 그러나 소외는 타인과 다른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될 수도 있고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는데 나는 전자 편이었다.
원장 부부와의 결별은 실제적으로 교단과도 결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주가 떠나버린 생활교회는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결국은 8개월 동안 집세를 못 내고 우리 네 식구의 생존조차 위태롭게 되었다. 수입이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급기야는 살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팔 수 밖에 없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우리 집 안에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딱 한 가지 팔 수 있는 것을 찾았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누가 기념품으로 해 준 한 돈짜리 금 십자가였다. 아무리 금이라고 하더라도 목사가 십자가를 판다는 것이 좀 켕기는 일이기는 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는 수 없이 팔아서 몇 일을 살았다. 아마 십자가가 구리나 나무로 되었다면 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금으로 되어 있으면 십자가뿐 아니라 예수도 교회도 하나님도 팔 수 있다는 귀한 교훈을 배웠다.
병원 옆에 붙어있는 건물에 세를 들어 있는 교회 안에 칸을 막아서 살고 있는 우리 집에서는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오죽하면 우리 처지를 아는 병원 직원이 라면 박스를 사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한 마디 원망이나 불평이나 혹은 약한 소리를 하지 않고 15 개월을 견뎠다. 1 년이 지난 후 자기들도 괴로웠던지 천만 원짜리 어음을 끊어 줄 터이니 교회를 옮겨보라고 했다. 그러나 수 십 군데나 물색했지만 어음으로 건물을 얻을 수는 없어서 결국 그들과 전혀 관계없이 순전히 내 힘으로 갈 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피아노까지 팔아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은 돈 4 백만 원, 그것을 가지고 옮겨 갈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10개월 동안 수도권 일대에 다 찾아 다녔지만 교회는커녕 우리 네 식구가 들어가 살 만한 집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집을 찾아 복덕방 영감님을 따라 빈민촌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전파상의 라디오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나 될 수가 있네..........아/ 아/ 대한민국” 하는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내가 갈 곳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거리의 목사가 되는 길이었다.
광명시 하안동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이사를 간다고 할 때 원장 부부는 1.000 만원 대신 병원 직원을 시켜서 병원 식당에서 쌀 반 가마니를 보내왔다. 자존심이 상해서 돌려 보내고 싶었지만 좋은 관계로 끝내기 위해서 참고 받았다.
막상 철거민촌으로 들어갔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대책이 전혀 없어 망막 했다. 이해를 해줄 수 있는 사람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길이 없었다. 교단이나 교회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교단 목사들과는 달리 보수 교단 출신인 나는 후원은커녕 의심과 비난만 받았다. 마치 망망대해의 외딴 섬에 갇혀서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난파선 같은 처지이었다. 밖으로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모진 비바람을 맞아가며 사는 삶, 항상 형사들에게 감시를 당하고 안으로는 무지몽매한 주민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일들, 인간 사회의 가장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잡스런 사건들에 부딪치면서 사는 것은 힘에 겨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당장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원래 편지 한 장 쓰기를 어려워했었다. 그 까닭은 문장력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써놓은 글씨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추상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립무원의 시간을 보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에 처박혀 글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분이 마침 쓰지 않고 있는 공병우 타자기를 빌려 주어서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책만 보는 것처럼 두문불출하고 타자연습을 했다. 워낙 손놀림이 둔한 사람이지만 한 달이 지나니까 타자기로 글을 쓸 만할 정도가 되어 그 때부터 논두렁에게 물고가 터지듯이 미친 듯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매주 주변사람들에게 우편으로 보내기 시작해서 주보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20 쪽짜리로 묶어서 ‘빈들의 소리’라는 소책자로 발행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새로운 성서해석, 교회개혁, 빈민운동, 민주화운동, 지역운동, 시민운동 등등의 글을 2,000 페이지 정도 썼다.
이렇게 ‘빈들의 소리’는 나의 칼이요 방패이자 올무가 되었다. '빈들의 소리'는 뉴스가 빈곤했던 시대에 주류 언론에서 접할 수 없었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불온문서인 샘이어서 지하 유통망(?)을 통해서 퍼져나갔다. 그 때 때로는 희망이 없을 때 오히려 영혼이 맑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는 단순히 한 가지 원인만 있는 법은 없다.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함수 작용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미숙함이다. 초보운전자의 운전미숙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되듯이 인생에서도 미숙함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50 년 동안 전쟁터에서부터 교도소까지 온갖 곳에 가서 설교를 해보았지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순복음 교회에서의 설교였다. 손님으로 간 사람이 남의 영업(?)을 방해하면 안되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설교를 했다. 헛소리만 잔뜩 하고 내려 왔더니 속이 허했다.
내가 해온 설교 중에 가장 긴장된 설교는 교도소 설교이었다. 국방부 호텔 밥은 먹어보았지만 법무부 호텔 밥은 먹어 본 일이 없지만 영등포 교도소에서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세상에서 교도소의 드려지는 예배나 법회보다 분위기가 경건하고 진지한 곳은 없을 것이다. 교도소에서는 예배를 볼 때 모든 찬송은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힘차게 행진곡풍으로 부르고 기독교에서 오면 구호를 외치듯이 '아~멘!' 소리가 우렁차게 강당을 진동한다. 아마도 스님이 오면 '나무아미타불' 소리가 진동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 물정 모르는 목사들이 교도소에 설교를 하게 되면 수인들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은 줄 알고 분위기에 도취되어 열심히 "여러분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새 출발을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것이고 어쩌구..." 하고 열심히 설교를 한다. 그 설교를 듣는 재소자들은 한 마디로 'X까지 마라'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서.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고 빽이 없어서 교도소에 안에 있고 진짜 도둑놈들은 모두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찰, 검사, 변호사, 판사들의 놀이에 자기들이 장기판에 장기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교도소를 나가면 얼마나 찬바람이 부는지도 잘 알고 있고 나가서 한탕 멋지게 할 생각만 하고 있다. 이런 재소자들의 심리가 비뚤어지고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현실이 어느 정도 그런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교도소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탓에 "도둑놈 여러분!"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단 위에 앉아 있던 교도소 간부들이나 아래 앉아 있는 재소자들이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하고 모두들 깜짝 놀라서 웅성웅성 대기 시작했다. .
"당신들이 있는 감방 안에서 힘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경제사범으로 들어온 범털은 대우하고 개털은 무시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바깥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웃기는 짓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지금 현재 있는 좁은 감방 안을 지옥을 만들 수도 천국을 만들 수도 있는 거다. 거기서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한다면 교도소를 나가도 또다시 들어오게 된다. 이게 바로 예수님 말씀이다." 그날 설교 후 기도가 끝나고 아멘 소리가 우렁차지는 않았다. 재소자들이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