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무의식으로부터의 탈출
한강의 <채식주의자>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이 자신의 현존을 지우고 그보다 더 높은 존재성을 향하는 영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부터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은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린다.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이에 못마땅한 아버지가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영혜를 둘러싼 인물들의 욕망은 분출되고 반대로 영혜의 욕망은 자신에 의해 억압되면서 두 욕망이 충돌한다. 영혜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욕망을 버티는 게 힘에 부친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계점까지 억압되었던 심적 상태는 폭발하면서, 소설은 탐미주의를 넘어선다.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까지 세 편을 합해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되지만 <채식주의자> 한 편만으로도 작가의 생각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영혜는 조용한 성격으로 수수하고 특별한 특징이 없다. 특징 없는 성격과 외모가 마음에 들어 남편은 영혜와 결혼했다. 그런 모습은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게 매우 흡족했다. “주기적으로 바가지를 긁어 요란한 부부싸움을 벌이곤 한다는 아내들이 피곤하게 느껴지던 터였으므로 나는 감사히 여겼다.” 한 가지 영혜에게 남다른 점은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아예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다. 연애할 때나 결혼했던 때는 왜 영혜가 브래지어를 푸는지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영혜의 예기치 못한 행동은 결혼이 5년째로 접어들었을 때 일어났다. 어느 새벽 영혜는 잠옷바람으로 부엌에 서있었다. “아내는 꼼짝 않고 서서 냉장고를 마주보고 있었다.” 영혜는 말했다. “……꿈을 꿨어.” 며칠 뒤 영혜는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모든 고기들을 꺼내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영혜는 평상시와 똑같은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꿈을 꿨어.”
꿈을 꾸기 전날 아침, 영혜는 남편의 재촉으로 언 고기를 허둥대며 썰다가 도마가 앞으로 밀리면서 손가락을 베고 식칼의 이가 나갔다. 영혜는 벤 손가락을 입에 넣어 피를 빨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고 칼조각은 불고기에 들어갔다가 남편의 입안으로까지 들어갔다. 남편은 일그러진 얼굴로 영혜를 바라보았고 영혜는 그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영혜는 매우 침착해졌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다음날 새벽 영혜는 꿈을 꾸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족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단순하게 보면 첫 번 째 꿈은 전날 일어난 사건 때문처럼 보인다.
소설에는 영혜가 꾼 일곱 개의 꿈이 나온다. 두 번 째 꿈에서는 칼질이 무의식에서 살인으로 확대‧비화한다. 영혜가 남편을 죽였는지 남편이 영혜를 죽였는지도 분명치 않다.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그게 언니라 해도, 아니, 엄마라 해도.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밖엔.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굴곤 했지.……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만 남아 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세 번째 꿈에서는 살의가 더 강하게 등장한다. “꿈에 누군가의 목을 자를 때,……머리채를 잡고 마저 칼질을 할 때,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죽이고 싶어질 때, 오래 지켜보았던 이웃집 고양이를 목 조르고 싶을 때,” 정육점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네 번 째 꿈에서는 불면에 시달린다. 싸늘하게 엄습하는 정신의 공포에 집과 이불 밑까지 식어가 싸늘하다. “현관문이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 따위는 없어”
다섯 번 째 꿈에서는 불면이 더욱 깊어지고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이 덮쳐오면서,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확인하며 폭력에 대한 성찰은 더욱 세심해진다.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나는 괜찮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괜찮다.
영혜는 건강을 위해서나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꿈 때문에 고기를 거부한다.프로이트는 단언하기를 꿈의 동기는 소망이며 꿈의 내용은 소망충족이라고 한다. 꿈은 과거의 체험을 압축한다. 꿈은 왜곡되어 나타나며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꿈은 미래 아닌 과거를 알려주며 동시에 억눌린 소원의 성취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른다면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은 무언가가 왜곡된 것이고 상징이다. 고깃덩어리들은 미래를 예언하는 게 아니라 영혜의 과거 무의식의 세계를 알려준다. 영혜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을 방해하는, 과거에 영혜를 억누른 무엇이 있다. 영혜는 억눌린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데 그것이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고깃덩어리로 나타났다. 영혜는 그 꿈을 꾸고는 고기 먹기를 중단했다. 이것은 단순히 꿈에서 고기들의 흉측한 모습을 보았기에 고기 먹기를 중단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었다. 어릴 때 영혜는 개에게 물렸다. 아버지는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고 동네를 돌았고 개는 점점 지쳐갔다.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개는 일곱 바퀴째를 돌다가 죽었고 그날 저녁 시장 골목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개고기로 포식을 했다. 영혜도 국물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녀는 희생자였다. 그 개의 마지막을 보았고, 그것으로 만든 국밥을 먹었다. 이것을 야생의 개념으로서 말하면, 영혜는 처음에는 희생자였고 아버지 덕분에 포식자가 되었다. 그녀는 희생자이면서 포식자이다. 자신을 공격해 희생자로 만든 포식자에 대해 포식자가 되었다. 그 포식자는 아버지에 의해 희생자가 되었다. ‘포식자 개 : 희생자 영혜’로부터 ‘포식자 영혜 ; 희생자 개’의 관계로 역전되어 희생자이면서 포식자, 포식자이면서 희생자의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개를 죽이고 시장 사람들과 영혜에게 개고기를 선물한 아버지는 ‘아버지 : 개’와 ‘아버지 : 영혜’의 구도를 가져 어느 상황에서나 포식자이다.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아버지 : 영혜’의 구도이다. 아버지는 영혜의 보호자이지만 개 꼬리털을 태워 영혜의 종아리 상처에 붙이고 개를 잡아 만든 국밥을 영혜에게 먹인 구원자이다. 그러나 영혜가 아버지의 그런 행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아버지는 동시에 포식자이다. 영혜는 아버지에 의해 자신이 증오하는 포식자의 범주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영혜의 어릴 적 이 기억은 그녀의 무의식 속으로 침잠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포식자 되기를 거부하는 무의식을 갖고 살았다.
이런 장면은 소설의 서두 곳곳에 드러난다.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 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무난한 성격”,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은 드물었고” 등이 영혜의 모습이다. 이런 면면들은 희생자의 범주에 속한다. 야생에 비유하자면 육식동물이 아니라 초식동물인 것이다. 다만 “아침마다 여섯시에 일어나 밥과 국, 생선 한 토막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다른 포식자가 제공한 고기를 요리해서 남편에게 주는 것이 눈에 띠는 포식자의 모습이다.
동시에 “결혼 전부터 아내는 식성이 좋았고, 그 점이 특히 내 마음에 들었었다. 그녀는 불판에 얹힌 갈비를 익숙한 솜씨로 뒤집었고, 한손에 집게를, 다른 한손에 큰 가위를 들고 쓱쓱 잘라내는 폼이 듬직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튀긴 삼겹살, 샤브샤브용 쇠고기로 만든 특별식, 쇠고기가 들어간 콩나물비빔밥, 닭도리탕 등을 만들었으니 그녀는 무의식에서는 희생자가 의식에서는 포식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영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꿈으로써 설명하자면, 꿈은 의식되지 않은 것 또는 심층 의식의 욕구 충족이다. 의식되지 않은 또는 심층 의식은 과거 사건의 축적이다. 꿈의 작용 방식은 의식되지 않는 것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형식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 과정 또는 영혼 과정이 의식되지 않은 것, 의식되기 이전의 것, 의식된 것 등 세 가지 동적 요소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흔히 커다란 빙산 덩어리에 비유하는데, 물속에 잠긴 구십 퍼센트 쯤 되는 가장 큰 부분은 의식되지 않은 것이며, 물 위로 나올 듯 말듯 한 중간 부분은 의식되기 이전의 것이다. 물 위에 나온 극히 작은 부분은 의식된 것이다.
영혜에게 어린 시절의 희생자에서 포식자로 넘어가는 경험은 그 뒤 의식되지 않고 무의식의 세계에 숨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기 먹는 것을 거부하기 전까지의 영혜의 모습은 의식되기 이전의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포식자라고 하기에도 희생자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상태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것, 힘 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것 등이 그런 모습이다.
인류학적으로 우리가 고기를 먹는 행위는 사나이다움을 함축한다. 이것은 캐럴 아담스의 주장인데, 정치를 남성이 장악하는 현상은 정치를 육식과 동일시하는 것이고 육식은 사나이다움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가부장제에도 적용되는데 인간 대 동물의 구조가 가부장제에 대입되면 남자는 포식자 인간이 되고 여자는 희생자 동물이 된다. 이런 의식이 사회에서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와 좀 다른 동물의 세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사자의 무리를 보면 암사자가 무리를 지어 초식동물을 사냥하며 수사자는 위기가 아니라면 방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암사자 수사자를 구분할 것이 아니라 포식자로서의 사자 무리와 희생자로서의 초식동물의 구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육식을 한다는 것은 지배자로서의 남자의 지위를 확대 재생산하는 선입견의 과정이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같은 존재의 유에 두는 근원적 회귀이다.
영혜는 언 고기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었고 자신의 손가락을 습관적으로 입에 넣어 빨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첫 번 째 꿈을 꾸었다. 칼질은 그녀의 꿈에서 등장한다. 칼질이 두 번 째 꿈에서는 살인으로 비화하고 세 번 째 꿈에서는 더욱 격화된다. 네 번 째 꿈에서는 살의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풀린다.
그 꿈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 번째 꿈. 헛간 속의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을 처음 보았다.
두 번째 꿈. 영혜는 어릴 때부터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오히려 다정했다.
세 번째 꿈. 내 앞에 보이는 동물들을 죽이고 싶고, 정육점 앞을 지나갈 때는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네 번째 꿈. 정신의 공포에 시달리며 현관문이 덜컹거리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이 없다.
다섯 번째 꿈. 자신을 향한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동시에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둥근 젖가슴을 소중히 여겨서 살의를 성찰하고 그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영혜의 무의식에 자리한 것은 비단 유년 시절 개에게 물린 기억뿐만이 아니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 그는 목소리가 무척 크고. 그 목소리만큼 대가 센 사람이었다. 내가 월남에서 베트콩 일곱을…… 하고 시작되는 레퍼토리를 사위인 나도 두어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아내는 그 아버지에게 열여덟 살까지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월남에서 베트콩을 상대로 포식자였고 가정에서는 가족을 상대로 포식자이며 동시에 보호자였다. 사실 포식자가 아닌 자는 보호자도 하는 게 쉽지 않다. 인간 세상이나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 세상이나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은 같고 다만 인간은 온갖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는 것이 동물과 다를 뿐이다.
영혜 아버지의 성향은 영혜에게 하는 전화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흥분한 고함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새어나와 나에게도 들렸다. ‘뭐하는 짓이냐. 너는 그렇다 치고 한창 나이에 정서방은 어쩌란 말이냐?’” 이 말은 포식자 아버지가 희생자 딸에게 가하는 억압 이외에도 여성의 사회적·가정적 지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여성은 남성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의식이 그에게는 굳건히 있다. 그런 시스템에서 영혜의 어머니도 살았고 언니와 동생도 살았다. 다만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대로 영혜를 뺀 나머지 가족들은, 그보다 더 한 경험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개에게 물린 경험이 없을 뿐이다. 나머지 가족들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희생자이겠으나 영혜처럼 희생자이면서 바로 포식자의 지위를 얻은 경험이 없을 수도 있고 또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무의식에 담아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채식주의자>에서는 서술되지 않으나 후속편인 <몽고반점>에서는 서술되는데, 예술을 한답시고 경제력은 낙제점인 남편과 동생으로 인해 갈등을 겪으면서도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록 경제적 능력은 인혜가 갖고 있으나 포식자 남편이 인혜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남자에 대한 인혜의 수동적인 태도는 <채식주의자>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남편이 영혜를 범한 것을 알았을 때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은 아프리카의 초식동물을 연상케 한다. 참지 못하고 마침내 내뱉은 “나쁜 새끼.”는 포식자에게 저항하는 또는 극히 드물게 포식자를 공격하려는 희생자의 모습이다.
영혜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보다 못난 열등한 존재를 거느리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그저 그런 대학, 그저 그런 회사, 평범한 아내와 결혼을 하여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산다. <몽고반점>에서 인혜의 남편은 그를 두고 “유난히 이마가 좁고 하관이 빨라 강퍅해 보이는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의 소유자라고 묘사했다.
그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포식자이다. 다친 영혜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작은 칼날 조각이 고기 사이에 씹히자 자신이 죽을 뻔 했다고 불같이 화를 낸다. 영혜와 사장집을 방문했을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영혜를 변호하지 못하고 어뚱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근본적으로 아내엔 영혜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 영혜의 자해 이후, 정신 병동에 입원하여 지내는 동안, 기이한 행동으로 남들의 주목을 받는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보호해 주기는커녕, 군중 사이에 섞여 영혜를 관찰하는 방관자이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떠밀리듯 영혜의 앞으로 다가선 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였다. 그는 남의 안위나 감정에 무신경하고 타인에 비정상으로 비춰질까 지나치게 의식한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바닥 수준이다.
영혜는 “꿈을 꿨어”, “더워서”,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같은 말들을 자주 사용한다. 이 말들은 그녀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한다.
영혜는 평소에도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반복해서 한 말은 “꿈을 꿨어”이다. 그것은 그녀가 실제로 일련의 꿈을 꾸었기에 하는 말이겠으나 단순히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흰둥이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려는 고백 같은 것이다. 영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서 공감을 얻고 싶다. 그러나 남편은 비슷한 꿈들에 대해 피로감을 느낄 뿐 영혜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꿈을 꿨어”라는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독백이 되고 만다. 독백으로 끝나다보니 영혜에게는 더욱 두려움과 죄의식이 쌓인다.
“더워서”는 답답한 마음의 상태를 암시한다. 사람은 우울·불안·긴장·숨겨진 분노 등이 있고 답은 나오지 않으면 뇌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스트레스가 뇌와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뇌에 쌓인 과부하가 자율신경 과민반응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온몸의 신체증상을 촉발한다. 이때 가슴이 답답하고 옥죈다. 무언가 덩어리 같은 것이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고 심하면 흉통이나 가슴불쾌감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명치에 통증이 수반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화병이나 우울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영혜에게 찾아온 것은 우울증이다. 영혜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까닭도 가슴이 답답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며 정서적 우울증이 그녀를 외모를 평범하게 치장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보호색이다.
그녀가 답답한 까닭은 어릴 때 희생자이면서 그 포식자를 희생시켜 자신이 그것을 포식한 것이 무의식에 있어서 죄책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혜는 결혼하기 전에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는데 그것 역시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영혜는 뇌 속의 기억이 명치까지 이른, 덩어리진 목숨들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고자 속옷과 상의마저 벗지만 본질적으로 그녀의 죄책감이 씻어지지는 않는다.
기르던 개의 죽음을 자력으로 막지 못했던 때는 유년시절이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권위가 무척 강할 때였고 어린 영혜는 그것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그녀는 권위와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결심과 가치관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결심을 대변하는 말이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이다. 이 대사는 두 군데에 있다. 하나는 남편을 따라 남편회사 사장의 집에서 탕평채를 앞에 두고 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혜 집들이에서 아버지를 향해 두 차례 내뱉은 것이다. 두 상황 모두에서 영혜는 처음에는 강한 어조로 말하지 않고 그냥 고기에 손을 대지 않는다. 사장집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고기를 권하거나 인혜집 모임에서 부모와 언니, 남동생 등이 채근하자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비로소 강한 어조로 말한다.
영혜는 기르던 흰둥이가 자신을 물었을 때 그 죽음을 방조했다.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라고 했고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라고 당찬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꿈을 꾸기 시작한 뒤로는 권위와 폭력 앞에서 명확히 자신의 의사를 말하는 태도로바뀐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급기야는 파국으로 치닫는 계기가 된다.
포식자에 얹힌 포식자였으나 실제로는 늘 희생자였던 영혜는 소설의 결말에서 직접 포식자가 된다. 입술은 피에 젖었고 환자복은 벗었다. 영혜는 “더워서 벗은 것뿐이야”라고 했다. 본인은 더워서 벗은 것이라고 했으나 공공의 장소에서 덥다고 사람들이 무턱대고 옷을 벗지는 않는다. 영혜 역시 이전까지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생존의 투쟁을 벌이며 오늘날까지 왔다. 원시 시대 인류를 동물과 차별화하게끔 한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불과 옷, 사냥전략과 돌연장 같은 기술이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오직 인류만이 갖고 있다. 지금 영혜가 자신을 존재하는 것 일반으로 두기 위해 버릴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는 옷이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영혜는 동박새를 물어뜯었고 또 왼쪽 손목의 상처를 핥았다. 개의 습성을 모방한 것이다. 그녀 스스로 ‘죄’를 지어 흰둥이처럼 처벌을 받고 싶은 무의식이 드러난다. 그녀는 무고한 자신을 물어 죽임을 당했던 흰둥이를 생각하며 자신도 무고한 동박새를 물어뜯었고 옷을 벗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영혜가 자신의 손목을 그은 것과 동박새를 잡아서 물어뜯은 것은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다. 언뜻 생소한 행동이겠으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은 아니다. 대단히 남성적인 아버지의 독선을 보면서 자란 자녀들은 두 종류의 경향을 지닌다. 하나는 아버지처럼 독선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경우이다. 이것은 유전이라기보다는 삶의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영혜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흰둥이에게 물렸을 때 흰둥이에게 취한 태도는 폭력적이다. 이때는 포식자 아버지와 희생자 영혜가 포식자 흰둥이를 희생자로 함께 만든다. 그러나 영혜는 아버지에 대해 동시에 희생자이다.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며 성장했다. 영혜는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
자연의 포식자는 먹이 활동을 할 때만 포식자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앞날을 예측하고 저축을 하다 보니 시시때때로 포식자가 된다. 냉장고는 식량과 관련해 인간이 아무 때나 포식자가 될 수 있도록 한다. 흰둥이가 영혜를 문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개는 그저 충동으로써 인간을 물지 않는다. 그러나 흰둥이의 행위에 대해 아버지와 영혜는 이해하지 못했고 살해로써 보복했다. 영혜는 시간이 흐르면서 흰둥이에 대한 미안함을 보상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위해 흰둥이와 같은 행동을 한다. 희생자를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희생자를 먹이로 하지 않더라도 희생자를 공격할 수 있다. 영혜가 동박새를 물어뜯은 것에는 흰둥이에 대한 애도가 담겨 있다. 이 장면은 희생자 영혜가 다시 포식자로 전환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그녀가 포식자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흰둥이에 대한 단순한 애도이다.
동시에 자신을 때린 아버지에 대한 복수이다. 영혜는 아버지에 대해 직접 복수를 할 수 없다. 그녀는 손목을 그었고 병원에 입원했다.하지만 입원 중에도 어머니는 영혜에게 끊임없이 고기 먹이기를 시도했다. 이때 영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자신도 포식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포식자이다. 영혜는 포식자와 희생자 사이의 딜렘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처음 꾼 꿈에서 나타난 희생자인 얼굴로부터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얼굴이 누구인지 <채식주의자>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몽고반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영혜는 자신의 얼굴로부터 무의식적인 공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