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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교회/낮-20220220
평강의 주께서 친히
살후3:16
요즘에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도생. 스스로 제 갈 길을 찾는다. 이 단어가 요즘에 자주 떠오릅니다.
매일매일 코로나 7만명, 10만명 이상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부도 한계상황에 와 있고, 의학체계도 무너지고 있고. 그래서 코로나 걸리면 개인이 해결하고, 가정이 해결하고, 회사가 해결하고.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되는. 아주 절박한, 혼란한,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속에서 코로나 걸리면 어떡하나.’ 불안과 두려움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평강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어려울수록 주님과 더 가까이 하시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종말을 맞이하는. 재림을 기다리는 교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되 지금처럼 일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직장도 안 가고, 그냥 교회에 모여서 기도만 하고, 찬송만 하고, 주여 오시옵소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정상적으로 일하고, 학교도 가고, 직장생활도 하고, 가정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라.’ 그랬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종말을 바라보면서도 오늘 최선을 다하고, 해야할 일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종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살다가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거. 우리가 이 땅에서 수명을 다해서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 앞에 가는 거. 이것은 개인 종말이고,
또 언젠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거.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거. 이것은 역사적인 종말입니다. 개인적인 종말과 역사적인 종말. 어느 것이 먼저 올지 몰라도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종말이 먼저 온다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주님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험준비를 잘 한 학생은 언제 시험을 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미리 공부로 준비하지 않은 학생은 오늘 시험쳐도, 다음에 시험을 쳐도 언제나 두렵습니다.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 평강의 주님께서 친히 함께 하심으로, 오늘을 잘 참고 견디고, 재림을 잘 준비하는 지혜로운 우리 모든 성도들 되기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첫 번째 때마다 일마다 함께 하십니다
본문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요한복음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너무 은혜롭고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3장 16절. 근데 오늘 말씀은 3장16절인데. 데살로니가후서3장16절 말씀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평강의 주께서’. 다른 곳에서는 ‘평강의 하나님’. 평강의 주님, 평강의 하나님. 다 같은 얘깁니다. 그래서 평강이라고 하는 말. 히브리어로는 샬롬.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그렇게 얘기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사람에게,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이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평강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시거나 가끔 주시거나, 어떤 때는 주고 어떤 때는 안 주고. 어느 교회는 주고 어느 교회는 안 주고.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 말씀에 보면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는데 ‘때마다 일마다’. 시간,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매일매일 일마다. 이런 저런 일 있을 때마다. 그때마다 고귀한 평강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평강을 주시지 않을 때가 없고,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늘 불안하고, 언제든지 불안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도 불안합니다.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시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잘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고, 저도 설교를 할 수 없고, 이 힘들고 험한 세상 온전하게 정상적으로.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평강의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줄 믿습니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고 있는 80대의 할아버지가 가셨어요. 동네 아이들이 할아버지에게 옛날 이야기 좀 해달라고 졸랐어요. 옛날 이야기 좀 해 달라고.
이 할아버지가 별로 준비한 것도 없고 그래서. ‘옛날에. 한 남자가. 20대 남자가 한 여자를 너무너무 사랑했어. 그래서 너무너무 어렵게 나와 결혼해달라고 프로포즈를 했는데, 그 아가씨가 얘기하기를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가지고 오라. 그러면 결혼하겠다.’
그래서 이 20대의 청년이 열심히 열심히 일하고 일해서 돈을 모으고 모으고 했지만 돈이 모자라서 결국에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하지 못하고 50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단다. 그 남자는 아직까지도 그 여자만을 사랑하고 있지’ 그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꼬마 아이가 ‘그거 할아버지 얘기지요?’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하는 말은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가지고 오라’는 것은 ‘두말 말고 오소.’
말과 소를 사 가지고 오라는 얘기가 아니고, ‘두말 말고 오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오소. 그런 뜻인데 이 할아버지가 그 뜻을 잘못 해석했다고.
그 얘기를 듣고 보니까. 이 할아버지가 ‘아 그런 뜻이구나.’ 그 아이의 얘기를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80살이 되어서 깨달았다. 그런 얘깁니다.
깨닫기도 어렵고, 제 때(일이 있는 그 때. 정해 놓은 그 시각. 알맞은 때.)에 깨닫기도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 섬겨야 된다는 거.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 참고 참고 또 참아야 된다는 거. 알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내 인생 거의 끝나가는 순간에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아서 한탄하는. 마음 아파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세월은 참 빠르게,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시편90편 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칠십, 팔십. 금방입니다.
또 시편90편 4절에 보게 되면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순간 같다’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천년은 길지만, 주님에게는 천년이 어제 같고, 밤의 한 순간 같다.’ 그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아요. 주님은 영원하신, 한계가 없으신. 그러한 분이신데. 우리는 역사 속에 한 순간. 찰나. 한 순간 살다가 가는 거.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 순간을 신중하게 잘 판단하고 결정을 하고, 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러지고. 그러다보면 인생이 짧아지고, 그러다보면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간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코로나 시대에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너무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고, 평강의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때마다 일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한 순간도 판단을 잘못해서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러한 때에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때마다 일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며 당당하게 안전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평강을 주십니다
본문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선물 가운데 평강. 이것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떨고 있는 제자들. ‘다음 차례는 나 일지도 몰라. 내가 십자가에 죽을지도 몰라.’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20장19절에 그렇게 평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신약의 축도는 고린도후서13장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고, 구약의 축도는 민수기6장24절에서 26절에 하나님께서 세 가지의 복을 주시는 데 첫 번째는 지켜주시는 복. 두 번째는 은혜의 복. 세 번째는 평강의 복. 이 세 가지 복 가운데 하나가 평강의 복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 이것은 신약이나 구약이나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었어도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이건 불행이고 지옥입니다.
가정에 이런 거. 저런 거. 좋은 거 다 있어도. 가정에 평강이 없으면 그 가정은 지옥입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모든 시설이 최고로 잘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평강이 없으면 그 교회는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평강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 하나님 생각할 때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사람과의 평강. 가족들과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마음에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신에게 평강.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셔야 됩니다.
교회에 있을 때는 평강이 있는데 가정에 가면 평강이 없고. 혼자 있을 때는 평강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어렵고 힘들고 두렵고 평강이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평강. 사람들과의 평강. 개인의 평강. 이 세 가지 평강이 있을 때 온전한 평강인데. 여러분에게 이러한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생각을 하다가 그것을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근데 말은 상당히 위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언어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파괴적이든, 생산적이든. 말에는 상당한 능력. 파워(power)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다가 12명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와서 그 중에 10명이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아낙 자손, 네피림의 후손. 키가 크고 덩치도 크고.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입니다. 우리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들과 그 얘기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광야에서 다 죽었어요.
그러나 열 두명 가운데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좋은 땅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크기는 하지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입니다.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민수기14장28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 귀에 들린 대로 하리라’ 그랬어요. 들린 대로.
‘우리는 그 땅에 못 들어갑니다.’ 했던 사람들은 못 들어갔어요. 광야에서 다 죽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귀에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고, 우리의 먹거리입니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귀에 들린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ᅟᅡᆮ.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못 살겠다’하는 사람은 못 살아요. 어려워도 ‘잘 살겠다’ 하는 사람은 미래에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미래에 가정과 삶과 교회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평강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평강의 언어를 사용해야 됩니다. 평강의 언어를 사용할 때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그 틈을 타서 사탄이 그 사람 마음에, 그 사람 가정에, 그 교회에 들어가서 아주 혼란하게 하고, 어렵게 하고,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버립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생애. 우리 모두가 다 평강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강이 흘러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여러분 마음에, 여러분 가정에, 우리 교회에 왔다가 도망가는. 평강이 충만한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본문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마태복음1장23절. 마태복음28장20절에서 임마누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너 앞서 가고 너와 함께 하리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지금 읽은 후반절 말씀에 보면 ‘주께너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그랬어요. ‘모든 사람’.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는데. 어떤 특별한 사람. 또 특별한 때에. 신앙생활 아주 오래한 사람, 순종하는 사람, 경건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 모든 사람’에게 평강을 주시고, 평강의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 열심을 다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했지만. 그런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은 거역하고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그런 사람에게도 주님의 평강이 임하기를 원했습니다.
교회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젊은 분도 있고, 나이 드신 분도 계시고, 초신자도 계시고, 신앙생활 50년, 70년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성령과 믿음과 순종으로 충만한. 어떤 경우에도 은혜받는 성도들도 많이 있지만. 어떤 성도는 의심과 불신과 거역으로 충만한.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만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들려져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새롭게 하는 거.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은 선교적이 되어야 됩니다. 제한적이거나, 폐쇄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복음적인 것이 되어야 선교적 영향력이 있고, 선교의 열매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든지 포용적이고, 희망적이고. 복음은 언제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열려져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사랑에. 구원에. 예배에 제외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사람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모든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모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포용적인 사랑 속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제외하지 아니하시고 인정하시고 기다리시고,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임스 버릴 엔젤>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국의 미시간 대학의 총장을 몇 년 간 했나하면. 한 번 놀라운 표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총장은 4년인데. 한 번 총장하기도 어려운데.
이분은 미국 미시간 대학의 총장을 38년을 했어요. 1871년부터 1909년까지 38년간을 총장으로 있었습니다. 4년 하기도 힘든데, 38년을 하고 그만 둘 때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 줬어요.
‘아이구. 대단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국 역사에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 줬습니다. 그러면서 ‘4년하기도 어려운데 38년 동안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이 엔젤이라고 하는 총장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팔보다 안테나를 더 높이 세웠던 것이 비결입니다." 나팔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교훈하고, 지시하고, 야단치고. 나팔은 그냥 떠드는 거예요.
떠드는 나팔이 되기보다는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안테나는 듣는 것입니다.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학생들의 얘기도 듣고. 교수들의 얘기도 듣고. 직원들의 얘기도 듣고. 세상 얘기도 듣고. 각 기업의 얘기도 잘 들어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잘 들었습니다. 나는 나팔이기보다는 안테나였습니다.
나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열심히 경청했습니다. 경청이라는 말이 참 고급단어잖아요. 그 덕분으로 38년 동안 총장을 했고, 그의 아들도 예일대학의 총장을 했는데 아버지가 했던 것을 잘 본받아서 16년간 예일대학의 총장을 맡아 일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경청한다고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좋은 의견은 잘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서로 얘기하면서 조율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수용하면서, 조율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면 바른 판단을 하게 되고,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평강의 주님이 떠나면 좋은 거 다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평강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좋은 것들은 다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평강의 주님을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모심으로 주님의 평강이 충만하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어렵습니까?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이제는 코로나 얘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너무 많이 해서.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말 하는 것도 힘들어요.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함께 하시고,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어떤 사람도 제외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평강의 주님이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충만함으로 우리 마음속에 있던 코로나를 비롯해서 모든 두려움이 다 떠나고, 평강의 주님으로 충만한. 승리한. 행복한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치고 곤고한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해 주시고, 하늘 평안과 위로로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셔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 베풀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어렵고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여 주시며,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어 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보며 기뻐하게 하시고,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계심에 감사하게 하게 하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늘 주님이 피난처가 되시고, 든든한 바위가 되셔서 우리를 안위하게 하여 주시는 믿음이 변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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