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2
식물인간
김호성
전기 충격을 가하는 순간 줄기에서 늑대의 얼굴이 피어납니다 역류하는 침이 콧속에 고일 때 코털은 이파리가 되죠 다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수액을 빨아들이고 있으니 이제 인간의 목을 물 수 없습니다 아래로만 자라나던 시퍼런 손가락은 발기하고 침대를 울창하게 움켜쥡니다
입 벌린 줄기가 간호사의 치마 속으로 들어갑니다 시들어 가던 척추가 갓 태어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죠 식물에게는 벌렁거리는 구멍들이 필요합니다 줄기 끝이 갈라지지 않기 위해 구멍으로 꽉 조여 줘야 하죠
여러 명의 간호사와 동시에 플레이하는 것이 나의 생존 능력 그녀들의 몸에 줄기를 심을 때마다 배 속은 늑대와 식물이 공존하는 정글이 됩니다 우리는 침대를 둘러싸고 광합성을 시작해요 광합성은 몸속의 늑대를 쫓아내는 의식입니다
잘린 손가락 마디마디를 모아서 수십 개의 주먹을 빚습니다 아랫배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겁니다 툭 튀어나온 배꼽을 꼭지로 착각하는 나는 혀를 내밀어요 혀가 갈라지고 힘줄과 핏줄이 뒤섞이죠 몸 안에 자라나는 열매를 따서 줄게요
우리는 뿌리에서 해방된 최초의 인간입니다 새롭게 맞이한 이 생태계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계간《파란》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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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 / 1988년 서울 출생. 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2015년 상반기《현대시》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3
구겨지고 나서야
유병록
바람에 떠밀려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선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때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글자가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뜨리던 완력이 기억났을까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한 지금은 안에서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까 안쪽에 이런 문장이 구겨져 있을지 모른다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면 시간을 거슬를 수 있지만 어둠은 시간의 죽음, 그 부피를 측량하면 시간을 지울 수 있을 것......
문장을 완성한 후에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종이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내 눈동자에서 어떤 적의를 발견한 듯이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품 안에서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아 달라는 듯이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2014
유병록
1982년 충북 옥천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사짓고 소 키우는 집에서 여러 동물과 어울려서 자랐다. 읍내로 이사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고향과 소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경기도 일산에서 글을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동안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산문집 『안간힘』을 냈다. 김준성문학상, 내일의 한국작가상을 받았다.
4.
타일들
여성민
가지런하고 타일은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황홀하거나 타일의 방에서 만나요
슬픈 발로 서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오, 판결문처럼, 규칙과 반복
하얀 타일을 들고
엄숙하게 선서해요 고요한 정사를 위해 타일들과 결혼해요
타일을 신고 걸으면 나는 두 발이 빛나는 사람
당신의 가슴은 달고 사과처럼 차가워요
따뜻한 물로 발을 씻고 두 발을 앞으로 내밀어요 발톱을 가진
심장이 됩니다,
더 슬픈 발로 서 있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들은 괜찮습니까
타일 하나가 깨지는 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 하고
발은 유죄를 선고 받지만
타일을 타인처럼 사랑하면 돼요 타일과 걸어요
슬픈 발과 슬픈
발을 동시에 내밀면 심장으로 걸을 수 있고
타일은 소리를 갖게 됩니다
양말을 벗고 타일 앞에서 만나요 박동 소리를 들어요
발이 타일을 깨고 나가는 소리를
아픈 발의 증언을
― 『시와 세계』, 2014년, 봄호.
여성민 시인
2010년 『세계의 문학』 소설 신인상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에로틱한 찰리』, 소설집 『부드러움과 해변의 신』, 시소설(공저) 『뜻밖의 의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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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찾아서
구애영
마침내 양은 사라졌다
한 의식을 잃고서 나는 은주발에 담긴 눈*이 되고 싶었다
갈피가 다 바랜 경전 속에 없던 신이
밑창 닳아 낮아진 가죽신 아래에서 흘렀다
눈 내리는 게르 뒤란에서 그 의식은 치러졌지
양 한 마리는 선택되었고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걸음걸이
죽음으로 걸어갈 때 누구라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볼 것이다
단도가 양의 숨길을 통과하는 직전 그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어지고
목자(牧者)는 숨 털 한 올을 뽑아 속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한다
산자에게 건너간 울음소리, 가슴에서 질척이고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
양떼구름이 언덕 위로 무리 지어 지나갈 때
두루마리 편지처럼 자꾸 도사리는 중얼거림 들
대신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
만나고 싶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침상 캐시미어에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천년을 흐르는 구름도 있었다
양은 어디에 있을까
* 벽암록 제13칙 파릉(巴陵)은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차용.
ㅡ2016,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나의 첫 사과나무에 대한 사과』(고요아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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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애영 : 2010년 《시조시학》,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경기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석사. 시집 『모서리 이미지』『호루라기 둥근 소리』. 제4회 김상옥백자예술상, 제5회 백수문학상 신인상 수상.
10장
2
아홉 살
임솔아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트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두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하여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는 도시를 망가뜨렸다.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더 오래 게임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나의 시민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아무래도
미안하지 않다.
약간의 사고와 불행은 나의 시민들을 더 성실하게 했다.
- 『시로 여는 세상』 2015 가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pp.41~43.
임솔아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 2015년 문학동네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장편소설 『최선의 삶』,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3
나쁜 일
-김 지 녀
불을 끄고 있으니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꿈에서 나쁜 일이 잘 보인다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 묻는다
어젯밤 꿈에 내가 나왔다고
내 꿈에도 없는 내가 친구 꿈속에 갇혀 있는 꼴이라니
우습다, 불을 끄고 있으니
엄마가 울기 시작한다
꿈에서 엄마 모가지를 잡고 뒤흔드는 사람은
더 떨어질 것도 없는데 손을 바꿔 가며 엄마를 뒤흔든다
나무 기둥처럼 누워서 엄마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누가 알겠어 내가 엄마 모가지를 꽉 잡고 놓지 않는 건지
보고 있으니
엄마 얼굴이 객관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꿈속을 걸어 다니면서
늙지 않고 산다는 게
힘이 세진다는 게, 나를 증명한다
새파란 하늘에서 눈과 비가 쏟아진다 불을 끄고 있으니
나는 젖어 가는 꿈속이다
나쁜 일처럼 당신들에게 번지기 시작한다
-『시로 여는 세상』 2013 겨울호
김지녀
2007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시소의 감정』, 『양들의 사회학』이 있다.
4.
태양물고기
하린
우주를 향해 낚싯대를 던져라
미끼는 팔딱거리는 상상력
직녀와 견우가 사라진 은하수 안에
유행 지난 서편제를 밑밥으로 풀어 넣어라
너에겐 세월을 납득시키는 그리움이 있다
묵직한 입질이 온다
뜨거운 파도가 일고
팽팽한 줄이 블랙홀 쪽으로 쏠린다
애인을 보낼 때처럼 줄을 풀어라
목젖이 걸린 태양이 요동친다
배고픈 건 거짓사랑을 이해시키는 집착
줄을 당겨라
태양물고기를 얇게 썰어 한바탕 잔치를 벌이자
월급처럼 어분을 받아먹던 사육의 시간
바늘에 꿰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굴욕의 시간
모두 태우는 화형식을 치르자
이젠 더 이상 쓸쓸한 배후로만 남지 말고
상처뿐인 사랑 안에 폭탄을 투하하자
삶을 길들이는 건 오직 태양의 결론
지느러미를 자르자
우리의 정착지는 태양의 뒤편
빙점
-하린
겨울의 심장은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한다
지루한 하늘엔 제트기가 날고
멍든 정신은 녹조현상으로 숨이 막히다
저수지의 심장에 구멍을 뚫고
야광찌가 되어 깜박인다
당신과 나의 서로 다른 빙점을 실감한다
파닥거리는 당신의 사상이
나의 빙점 아래에서 춤출 때
차가운 악담이 당신의 노래를 감싼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묻는다
오지를 떠돌다 생을 마감한
지구의 마지막 종(種)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메시지를 보내지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수신을 차단한다 그러나
당신을 향한 집착은 우주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결국엔 그리움의 가장자리부터 봄은 온다
세상의 모든 귀들이 녹아내리고
불감증 걸린 발바닥이 당신의 소멸을 더듬는다
쩌억쩍
쩌어쩍
환청처럼 전설의 물고기가
요염한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오는 소릴 듣는다
길고 긴 빙하기를 통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