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김홍정(112)
제1장 아버지의 황혼
아버지의 비밀(10)
아버지에게 비밀은 없다/ 그러나 속내를 알 수 없다/ 알 길 없는 아버지의 침묵/ 어깨에 걸린 무게만 보아도/ 하루가 빛난다/ 온몸에 두통이 숨어 있어도/ 집으로 돌아올 때는 가볍다/ 습관적인 출근과 퇴근은/ 거룩한 사랑이다
연인의 사진(12)
아버지에게 연인이 있다/ 오랫동안 품속에 넣고 다니는 사진/ 학사모를 쓴 대학 졸업사진이다/ 아버지를 닮은 콧날이/ 흑백 사진 속에 살아있다/ 아버지는 사진을 꺼내어/ 니 삼춘인디 법대 나왔어/ 지금은 뭔 소용이여/ 가고 없는디/ 아버지의 콧날과/ 내 콧날이 시큰해진다
고독한 주인공(14)
아버지는 언제나/ 빛나는 조연이었다/ 용감하게 맞서야 할 때는/ 고독한 주인공이었지만/ 선장이 바다를 바라보듯/ 거인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쓸쓸한 눈빛이/ 당당한 운명을 지키고 있듯이/ 아버지는 우리 앞에서/ 거룩한 주인공이었다
용서를 배울 시간(16)
용서를 배울 시간에/ 나는 집을 떠났다/ 껍질도 벗지 못하고/ 도시에서 혼자가 되었다/ 새벽에 국밥을 먹으며/ 찬바람에 꽁꽁 언 손이/ 용서되지 않았고/ 시골에 혼자 남은 어머니와/ 일찍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용서를 배울 즈음/ 내 자식이/ 나를 떠나고 있었다
아버지와 별(18)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사는 길은/ 별이 되는 것이라고/ 어릴 때/ 아버지가 일러주시더니/ 당신이 먼저 별이 되었다/ 이제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멀리서 빛으로 오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속마음(20)
아버지와 내가 호수를 끼고/ 함께 걸었다/ 비와 바람이 불규칙적으로 교대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닌데/ 아버지와 나의 발걸음이/ 저절로 규칙적인 호흡이 되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리듬으로/ 호숫가를 몇 바퀴 돌았지만/ 아버지의 속마음은/ 알아내지 못했다/ 잔잔한 그 물결 위에/ 아버지와 내 사랑이/ 저녁 늦도록 교차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핏줄(22)
내 핏줄이 하나 있다고/ 뜬구름이 아니라고/ 소주 한 잔 마시면 말문을 연다/ 이렇게 사랑을 묻어둔 아버지는/ 내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삶의 고단함을 보상받는다/ 사나운 세상을 억세게 살아왔어도/ 핏줄 때문에/ 아버지는 찬란하다
아버지의 울음(24)
도장을 잘못 찍어/ 어둠 속에서 꽃들이 뚝뚝 떨어지고/ 다시는 이 집에 올 수 없다고 해도/ 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지구가 두 쪽이 나도/ 내 자식만은 안 된다고/ 울부짖던 아버지는/ 그날 밤은 온몸을 뒤척이며/ 못난 애비라고 핏물처럼 울었다
용서의 기도(26)
동생 아벨의 육신을 추억하며/ 겸손한 짐승이 되기를 기도한다/ 육체를 위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도살장의 피냄새가 없어지고/ 용서의 빛이 기도가 될 때/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 짓고/ 헌신을 바치는 가인/ 이제야 아버지가 받으실/ 거룩한 제사가 되었다
아버지의 침묵(28)
아버지는 사랑이니 뭐니/ 알지 못했다/ 그러 오래오래 눈빛을 주었다/ 아무리 컴컴해도/ 제 자식은 알아내고/ 손목 한 번 만지고 간다/ 신성한 음성으로 말하지 않지만/ 침묵으로 보듬어 주는 묵직한 어깨/ 울컥 눈물이 나는 사랑이다
필통 사랑(30)
초등학교 어린 시절/ 문화 연필 열 자루를 면도칼로 깎아/ 필통에 가지런히 넣어두던 아버지/ 학교에 달려가서/ 습관처럼 필통을 열면/ 기계로 깎은 연필보다/ 반짝이는 얼굴들의 행렬/ 내 나이 육십인데/ 필통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정답게 누워있다/ 아버지는 지금도/ 하얗게 늙지 않는다
들키고 싶은 진실(32)
당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까마득한 벼랑 끝이거나/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거나/ 당신에게만은 들키고 싶었다/ 못자국을 넘어선 아픔/ 피 흘리는 그 자리에서/ 기어코 일으켜 세우시는 아버지/ 지금도/ 당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눈치채지 못했다(34)
채송화가 낮게 피고/ 불광천 둑을 따라/ 코스모스가 한두 송이/ 피기 시작했는데/ 가을이 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꽃이 진 뒤에야/ 가을이 가고 있다고 알았지만/ 거기에 아버지의 크신 마음이/ 숨어 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황혼(36)
시원한 바람 안고 가을이 오면/ 일몰과 같은 무게로 물드는/ 아버지의 황혼/ 가슴 뛰던 삶과 방황이/ 서서히 걷히고/ 응어리를 씻어주는 바람을 만나/ 화려한 꿈을/ 버리고 있었다/ 퍼올리지 못한 아버지의 꿈은/ 이제 우리의 꿈이 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38)
소금의 고향은 바다인데/ 되돌아가면 죽는다/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한 줌의 흰 소금으로 남아야 한다/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고비마다 온유한 마음을 꺼내야 하고/ 짠 눈물은 절대 흘리지 않는다/ 적당히 간을 맞추는 것이/ 생의 철학인데/ 아직도 아버지의 소망은/ 바다에 가 죽는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바다였다
아픈 손가락(40)
우리는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기타를 치며 생긴 아버지의 굳은살/ 우리는 기타의 여섯 줄이었다/ 굴곡진 마디마다/ 굳은살이 될 때까지 얼마나 움직였으면/ 저토록 슬픈 노래가 만들어졌을까/ 수만 번 움직인 아버지의 손길/ 아픈 손가락은 천륜이다
아버지의 마른 손(42)
아버지의 삼백 예순 날 속에는/ 무수한 굴곡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돌아서다가 무릎 꿇던 굴곡/ 배신의 넝쿨에 걸려/ 넘어졌던 위기의 순간/ 삶의 고비마다/ 해 저무는 들녘에 서서/ 망연히 바라보던 하늘/ 아버지의 마른 손은/ 갈퀴보다 거칠었다
나비의 미학(44)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나비/ 안으로만 의지를 직시한다/ 조용히 내려앉아/ 비정의 함묵으로/ 꽃을 지킨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버지는 나비였다/ 그 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내려앉는 나비였다
아버지의 노래(46)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 음표도 쉼표도 없는 악보에/ 한 옥타브가 낮은/ 아버지의 노래/ 계속 따라오는 낯익은 목소리/ 아버지의 노래는/ 노화 증상이 없다/ 수백 번 들어도/ 갱년기나 우울증이 없는 노래/ 아버지의 노래는/ 내 유년 시절 함께 부르던/ 동요였다
아버지의 노안(48)
백발과 탈모는/ 노화의 또 다른 삶/ 노안(老眼)이/ 노인의 시작이다/ 싱싱했던 꽃잎을 지나/ 뿌리에 집착하는 시기에/ 아버지의 노안이 시작되고/ 마침내 희뿌연 세상 속으로/ 아버지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눈물의 비밀(50)
아버지에게 배웠다/ 눈이 내리는 것은/ 눈물이 되기 위해서이고/ 눈물은 본래 눈(雪)이었다고/ 나는 그때 알았다/ 눈물의 아버지는/ 눈이라는 것/ 그래서 눈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
별은 떨지 않는다(52)
별은 대낮에/ 움직이지 않는다/ 낮달이 희미한 날에도/ 별은 보이지 않는다/ 밝음과 교대하는 별/ 우리를 다 재워놓고/ 어둠 속에 맞선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어둠 속에도 떨지 않는다/ 그래서 별은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의 유산(54)
아픈 무릎을 만지시던 아버지/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가끔 술에 취해 들어와/ 관절이 쑤시는 밤이면/ 아버지의 무릎이 내려와/ 내 무릎이 되었다/ 나는 커서야 알았다/ 아버지도 나처럼/ 무릎 관절염이 있었다는 것을/ 빈방에 누워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이었다
굽은 등이 슬프다(56)
담 밑에 잔설이/ 슬픔처럼 남아있는 밤/ 불빛이 희미한 창가에/ 아버지는 굽을 등을 기대고/ 오지 않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이 굽어서 슬픈 아버지
아버지의 발자국(58)
햇빛이 지나간 자리에/ 아버지의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돌아보니/ 무수히 찍힌 발자국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숨죽이며/ 따라오던 발자국이/ 마침내/ 내 발자국과 겹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도장(60)
그 누구도 쫓아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집/ 마을 한 구석에 대못처럼 박혀 있던 집/ 막내아들처럼 끌어안고 온 질기디질긴 집이/ 도장 한 방에 사라졌다/ 버린 자식보다 아픈 아버지의 집은/ 이제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제2장 아버지의 강물
슬픈 궤도(64)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슬픈 궤도를 돌며/ 오열하는 목소리/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혈육/ 애타게 부르는 이름 뒤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만/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계(66)
살다가 지치면/ 아버지의 시계를 꺼내본다/ 아버지의 시간이/ 시계 속에서 걸어 나와/ 내가 나 된 것을 알 수 없을 때/ 시간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계 속으로 들어간다/ 아버지의 시계는 나무 그늘이었다/ 아버지의 시계는 나무 그늘이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계절이 지나가지 않는/ 영혼의 그늘이었다/ 내 휴식의 그늘이었다
아버지의 가방(68)
ㅇ아버지의 가방을 갖고 싶다/ 누가 나에게 가방을 사준다면/ 손바닥만한 심장을 꺼낼 수 있는/ 아버지의 가방이었으면 좋겠다/ 가방을 열면/ 그 속에서 센베이 과자가 나오고/ 붕어빵, 호떡, 호빵이 나오는 가방/ 그때 가방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붉은 심장인 줄 모르고/ 내 유년 시절/ 나는 귀가하는 아버지보다/ 아버지의 가방을 더 기다렸다
아버지의 나이(70)
나는/ 아버지의 나이를 알게 되면서/ 철들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예순의 나이에/ 섬이 되었다/ 섬들이 물에 젖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바다에 내려앉아/ 섬이 되듯이/ 아버지는 삶의 바닥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섬이 되었다
아버지의 꿈(72)
깊은 밤 외롭게 깨어/ 꿈을 손바닥에 담아/ 하늘에 들어 올리던 아버지/ 아버지의 꿈은 하늘이었다/ 하늘을 그리워하다가/ 별이 된 아버지/ 기도하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선물(74)
누군가 나 대신 죽을 수는 없는데/ 그럴 수만 있다면 최고의 선물이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나와/ 죽어야 부활한다는 아버지의 사랑/ 그 사이 어디쯤에 우리는 머물러 있는가
아버지의 이름(76)
나의 상처 끝에는/ 늘 아버지의 이름이 있었다/ 내 잔등을 쓰다듬어주고/ 아껴온 기억들을 다독여주는/ 아버지의 이름/ 그 이름으로 아픔을 싸매면/ 통증이 가라앉는 순간/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나하나 흔적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강물(78)
빛이 쌓이고 쌓여 강물이 되었다/ 그래서 햇빛이 강물에 나오면/ 제 안에 빛을 견디지 못해/ 한꺼번에 와~ 하고 일어선다/ 아버지의 강물이 그렇다/ 아버지는 원래 빛으로 오셔서/ 강물로 다스리신 우주의 빛이다
아버지의 신발(80)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어와도/ 신발 속에 남아있는/ 헌 양말 냄새/ 걸어온 하루를 메아리로 담아둔 채/ 가난을 버리지 못해/ 또 다시 슬퍼지는 신발/ 오늘도 습관처럼/ 눈부신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시집을 뒤적이는 아버지(82)
일년에 한두 번/ 어쩌다 만나는 아버지/ 할 말이 없어도/ 내 눈과 같은 빛깔/ 내 손과 같은 모양/ 나와 콧날이 같은/ 아버지는/ 자식이 시인이라고/ 늘 시집을 뒤적였다
내 등 뒤에(84)
내 등 뒤에 서 있는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있기를/ 내 등 뒤에서/ 그림자가 되시는 아버지/ 아무 일 없는 듯/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쓸쓸한 습관
해송(海松)(86)
당신보다/ 더 나이 든 사람은 없다던 아버지가/ 정겨운 눈빛으로/ 세상을 뜨셨다/ 지금은/ 당신보다 더 나이 든 해송만/ 이 세상 바람을 맞고 있다
어린 것들을 생각하며(88)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돌아섰지만/ 언제라도 유예될 수 있는/ 시간으로 믿었다/ 가적 없이는 살 수 없는 날에도/ 양지바른 곳에 심은/ 씨앗을 보며/ 아버지는/ 어린 것들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쓰신 시(90)
자식이 시인이라고/ 아버지도 시를 쓰신다/ 마음 속으로 썼다는 시/ 수줍게 내미는 한 편의 시/ 시인보다 더 큰 아픔이/ 아버지 가슴에 있었네/ 지상의 모든 무게가/ 거기에 담기고/ 사뿐히 들어앉은/ 외로운 서정
아버지의 시간(92)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힘든 산맥을 넘어야 하는 시간/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다/ 눈꺼풀이 내려앉고 다리가 풀려도/ 아픈 일생은 아물지 않았다/ 여윈 팔목 같은 술병만/ 아버지의 시간 앞에/ 뒹굴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94)
아버지가 내려놓은 그늘/ 어디에도 아픈 흔적은 없다/ 따스한 그늘이다/ 하루를 열었다가/ 저녁에 닫히는 그늘/ 열림과 닫힘의/ 그늘 아래/ 아버지가 서 있다
무지개 꿈(96)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이제는 없다/ 무지개를 만지는 꿈을 주고/ 별빛 사랑을 연주해주던 아버지/ 흔적만 잠시 감추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눈물 속에 숨었다가/ 눈물이 된 사람/ 아버지는 오늘도/ 내 눈물 속에 있다
고독한 아들(98)
아버지보다/ 더 고독한 아들이 있었다/ 운명적인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던 아들/ 바람을 맞아 차갑게/ 식어가는 시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이요/ 가장 큰 보석이었다
아버지의 입원(100)
가난과 갈증의 시간에도/ 수척해진 세월과 함께/ 스스로 걸어온 하나뿐인 길/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가는 거라고/ 아버지는 담담하게 입원하셨다/ 그것이 유언이 될 줄이야/ 진눈깨비 내리치는 밤길을 걷다가/ 왈칵 쏟아지는 눈물
세상의 아버지(102)
왜 세상의 아버지는/ 허공에서 나서 허공에서 죽어가는/ 진눈깨비를 닮았을까/ 더러는 물이고 더러는 얼음인 눈/ 바람에 몸서리치는 눈으로/ 허공을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물이 되는 눈/ 아버지는 화려한 눈꽃이 아니었다/ 진눈깨비였다
힘없는 아버지(104)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다리뿐/ 후딱 10년이 지나고/ 또 휙 10년이 지나면서/ 등뼈가 휘어진 아버지/ 바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몸속의 나이테만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병원 밖에는/ 햇살이 비치고 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106)
아버지처럼/ 싱거운 사람이 좋다/ 괜히 싱겁게 잘 웃는 사람이 좋다/ 잘난 모습을 자랑하지 않아도/ 초라하지 않은 아버지처럼/ 어진 마음을 펼치며/ 누군가의 등 뒤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눈길(108)
눈으로 뒤덮인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한참 걷다가/ 아버지를 올려다보니/ 빙그레 웃으시며/ 내 손을 더 꼬옥 잡아주셨다/ 이토록 따뜻한 손이 또 있을까/ 지금도 눈길을 걸으면/ 일곱 살 때 아버지의 온기가/ 내 손에 남아있다
바다에 가면(110)
다시 돌아올 수는 없지만/ 아주 날아가 버린 것은 아니다/ 사라진 것들이 모두 바다에 모였다/ 저 너머 바다가 있는 것이 다행이다/ 바다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 꽃들이 새들이 별과 나비가/ 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귀도 물속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