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 선진지견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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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차 자료 - 두산백과
▷ 강화군 江華郡
요약
인천광역시 북서부에 있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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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위치인천광역시 북서부에 있는 군 지도
면적(㎢)411.3
행정구분1읍 12면
행정관청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394(관청리 163) 지도
꽃진달래
나무감나무
새저어새
홈페이지http://www.ganghwa.incheon.kr
인구(명)66,752(2013년)
본문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1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 경기도(북한) 개풍군과 황해도 연백군, 동쪽으로 경기도 김포시, 남쪽으로 옹진군·서구(西區)에 접하고, 서쪽으로 황해와 만난다.
서쪽과 남쪽은 경기만에 열려 있고, 북쪽으로는 한강 및 예성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북한 개풍군·연백군과 마주하며, 동쪽으로는 염하(鹽河)를 끼고 김포반도와 마주본다. 강화도는 본래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오랜 침식으로 평탄화된 후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떨어졌으며, 마리산(摩利山:467m)·혈구산(穴口山:466m)·고려산(高麗山:436m) 등의 잔구성 산지가 섬의 골격을 이룬다. 따라서 저위침식 평탄면이 비교적 넓게 분포하여 경지율이 높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연평균기온 10.9℃, 1월 평균기온 -3.9℃, 8월 평균기온 24.4℃(평년값 기준)로 온난한 편이며, 연교차도 크지 않다. 연평균강수량은 1,316.7mm 정도이다.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기후가 온난하다. 이러한 기후 때문에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난대식물이 분포하여 특이한 식물경관을 보인다.
여행정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인천 강화군.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해지는 참성단이 있다. 조선시대 서해안 수비 체제의 흔적인 초지진과 광성보를 통해 당시 신미양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봄이 되면 천년의 역사가 깃든 고려산에 진분홍빛 진달래로 수놓아져 꽃향기가 가득하다. 전국 새우젓의 70%를 생산하는 주산지로서 드넓은 갯벌에 10월이면 젓새우가 넘쳐나 김장철에 구매 물결이 일렁인다.
▷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133호
지정일1963년 06월 10일
소장강화군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북문길 42(강화읍 관청리 743-1) 지도
시대고려
종류/분류궁궐터
본문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강화 고려궁지 지도
강화 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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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大韓聖公會 江華聖堂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江華邑) 관청길에 있는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성당.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424호
지정일2001년 01월 04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관청길 22(강화읍 관청리 250-0) 지도
시대조선시대
종류/분류개화기건축
크기면적 6,452㎡, 정면 4칸, 측면 10칸
본문
1981년 7월 1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 제424호로 변경되었다. 보호면적은 6,452㎡이며, 성공회유지재단 등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이라고도 한다. 1896년(고종 33)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이곳 강화에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건립자는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C.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이다.
정면 4칸, 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목골조를 사용하고 벽돌을 쌓아올린 기와집이며, 2층은 바닥이 없는 통층구조이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본떠 지은 것으로, 외형상으로는 불교 사찰 분위기를 풍긴다.
한국에 서양건축이 도입되던 시기의 초기 건축으로,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물이면서 지붕과 내부구조는 한국적 건축양식을 많이 가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한국 토착화를 뚜렷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1910년대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지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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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흥궁 龍興宮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집.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인천유형문화재 제20호.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
지정종목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인천유형문화재 제20
지정일1995년 03월 01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동문안길21번길 16-1(강화읍 관청리 441-0) 지도
시대조선
종류/분류관아건축
크기1동 1,554㎡
본문
조선시대 왕의 장자인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인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인해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역에서 유래된 말이다.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의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에 은거하며 살았던 집을 후일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 보수하여 단장하고 그 이름을 궁이라고 고쳐부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다. 용흥궁도 원래는 보잘것 없는 초가였으나,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지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좁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이다. 비각은 정사각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거의 베어져 밑둥만 남아 있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용흥궁의 위치는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용흥궁 지도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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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사 普門寺
요약
인천 강화군 삼산면(三山面) 매음리(煤音里) 낙가산(洛伽山)에 있는 절.
보문사 맷돌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인천민속자료 제1호.
창건시기635년
창건자회정
소재지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낙가산
본문
635년(선덕여왕 4)에 회정(懷正)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649년(진덕여왕 3)에 어부들이 불상과 나한 ·천진석상 22구(軀)를 바다에서 건져내어 천연석굴 안에 봉안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설치하고 천연동굴 내에 반월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하였는데, 탱주 사이에 21개의 감실(龕室)이 있어 거기에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석실은 지방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1928년에는 절 뒤편 절벽에 높이 32척 너비 12척의 관음상을 새겼다. 이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은 지방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 민머루해수욕장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1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한국관광공사에서 생태관광지로 지정한 곳이다.
본문
강화도의 서편 바다 위에 길게 붙어 있는 작은 섬 석모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은 폭이 50m, 길이가 약 1km이며, 무엇보다도 바닷물이 빠지면 수십만 평의 갯벌이 나타나 학생들의 갯벌체험장으로 많이 이용되고, 대학생들의 MT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갯벌과 모래에는 미네랄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어 각종 부인병과 신경통, 여성들의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자연환경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특히 세계적인 희귀 새인 저어새의 서식지이다. 주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사진작가들의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해수욕장 부근의 어류정항, 장곳항 등에서는 바다낚시를 즐길 수도 있다.
▷ 전등사 傳燈寺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사찰.
전등사 대웅전
종파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381년
창건자아도
소재지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635)
본문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 분오리 돈대 分五里墩臺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
분오리 돈대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지형의 구조를 따라 돈대를 조성하여 모양이 반달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정종목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인천유형문화재 제36호
지정일1999년 03월 29일
소장국유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85-1외 4필지 지도
시대조선
종류/분류성지(성곽)
크기포대둘레 약 70m, 평균높이 2.62m(방형)
본문
1999년 3월 29일 인천시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강화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축조한 강화 54돈대 중의 하나이다. 강화도의 남쪽 해안 중앙, 현재의 동막해수욕장 동쪽 끝에 있다.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이다. 강화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6)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胄:1634~1684)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조하였다 한다. 실제로 축성을 지휘한 것은 당시의 강화유수(江華留守)였던 윤이제(尹以濟)이다. 강화돈대는 종래 53돈대로 알려졌으나, 1999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54돈대로 확인되었다.
분오리 돈은 부천(富川)과 초지(草芝)의 외곽포대로서 망월돈(望月墩)·계룡돈 (鷄龍墩)·굴암돈(堀岩墩)·송강돈(松剛墩)·송곶돈(松串墩)과 함께 영문(營門)에 소속되었던 돈대이다. 따라서 영문에서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수직하게 하였다.
뒷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되어 나온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하였는데, 좌우로 깊게 만곡(彎曲)된 갯벌을 이룬 포구를 끼고 있어 가시 범위가 매우 넓다. 동쪽으로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석축함으로써 절벽을 이루고, 지형에 맞추어 석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반월형을 하게 되었다. 포좌는 4문이고 치첩(雉堞)이 37개소이다.
기록에 의하면 방형(方形)으로 둘레 84보라 하였는데, 현재 문루 안 포대둘레는 약 70m이다. 홍예문을 이룬 출입구는 북쪽 반월형의 호와 선이 맞닿는 부분에 있고, 최고높이는 4m, 폭은 12.8m이며, 돈대의 평균높이는 2.62m이다. 구조는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내외를 석축한 협축의 석벽을 이룬다. 현재는 바다로 면한 포대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외벽의 30% 정도를 복원하였다.
* 2일차 자료 - 두산백과
▷ 강화 초지진 江華 草芝鎭
요약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225호
지정일1971년 12월 28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지도
시대조선(효종7)
종류/분류진(鎭)
크기면적 4,233㎡
본문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 강화 덕진진 江華 德津鎭
요약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226호
지정일1971년 12월 28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지도
시대조선
종류/분류요새
본문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227호
지정일1971년 12월 28일
소장강화군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지도
시대조선
종류/분류성
크기면적 61,000㎡
본문
사적 제 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 덕진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였다.
▷ 강화 갑곶돈 江華 甲串墩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국방유적.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306호
지정일1984년 08월 13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 외 지도
시대조선
종류/분류사적
본문
사적 제306호. 1679년(숙종 5) 축조하여 8문의 대포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한강의 길목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서, 1231년(고려 고종 18) 이후 수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이 건너지 못하고 발만 구르다 되돌아간 곳이다. 당시 몽골군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여 그 이름을 갑옷 갑(甲),꿸 곶(串) 자를 넣어 지었다고 전한다.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을 점령하였으며,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1970년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돈대 내에는 고려 때 몽골과 외교교섭을 벌였던 이섭정(利涉亭)이 있고 조선시대의 대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 강화전쟁박물관
江華戰爭博物館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돈 내에 있는 공립 전쟁 박물관.
분류박물관
설립일2015년 4월 17일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 18(갑곳리 1040)
규모건축 총면적 993㎡, 부지면적 3,475㎡
관람시간오전 9시~오후 6시
주요소장품전쟁유물
휴관일연중무휴
본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유물을 전시,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2015년 4월 17일 개관하였다. 사적 제306호 강화 갑곶돈(甲串墩) 내에 있으며, 기존의 강화역사관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건축 총면적 993㎡, 부지면적 3,475㎡의 규모로, 300점 이상의 전쟁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시설
주요 전시실로는 1층의 제1~2전시실, 2층의 제3~4전시실이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의 전쟁사 관련 유물을 시대순으로 볼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제1전시실은 영상을 통해 강화의 전쟁 및 호국 역사를 주제별로 다루며, 각종 무기를 전시해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강화의 전쟁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제2전시실은 강화 천도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제3전시실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조선시대, 제4전시실은 의병전쟁, 6·25전쟁을 포함, 조선시대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전쟁사를 모형과 유물을 통해 소개한다. 제4전시실 끝에는 조선 말에 개발된 최초의 방탄조끼인 면갑을 입어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전시과 로비를 활용하여 강화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 및 사진을 다루는 기획 전시를 진행하기도 한다.
주요 소장품
주요 전시품으로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수비대장이었던 순무중군(巡撫中軍) 어재연이 사용했던 군기(軍旗)인 수자기(帥字旗)가 있다. 당시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보관하던 것을 2007년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하여 보관 중이다.
부대시설
박물관이 위치한 강화 갑곶돈에는 박물관 외에도 각종 비석과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있으며, 박물관 야외에 활쏘기 체험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 강화역사박물관
江華歷史博物館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박물관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박물관이다.
본문
2010년 10월 23일에 개관하였으며,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근 현대까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시·보존·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총 사업비 140억원이 투입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고인돌공원내 1만5천여㎡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축면적 4천200㎡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고려. 조선시대 등 근 현대의 강화 유물과 민속사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 있으며, 2층에는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상설 유물전시장과 체험관이 있고, 지하 1층은 수장고로 쓰인다. 그밖에 다양한 기획전시 및 교육,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부근리)에 있다.
▷ 강화 부근리 지석묘
江華 富近里 支石墓
요약
인천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부근리(富近里)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북방식 지석묘.
지정종목사적
지정번호사적 제137호
지정일1964년 07월 11일
소장강화군
소재지인천광역시 하점면 부근리 317 지도
시대청동기 시대
종류/분류고인돌
크기뚜껑돌[蓋石]은 길이 710cm, 너비 550cm, 지상 높이는 260cm
본문
강화도에는 이 고인돌 외에도 송해면(松海面)과 하점면에 걸쳐 고인돌군[支石墓群]이 있는데, 고려산(高麗山) 북쪽 경사면의 높은 능선 위에서 그 기슭의 평탄한 대지에 이르는 지점에 약 20∼30기(基)의 북방식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인돌은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밭 가운데에 1기가 독립해 있는 것으로,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卓子式)으로서, 뚜껑돌[蓋石]은 길이 710cm, 너비 550cm나 되는 거석이고, 그 밑에 2매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방식 고인돌의 구조는 4매의 굄돌로 직사각형 돌방[石室]을 구축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어 놓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 고인돌은 돌방의 짧은 변을 이루는 2매의 굄돌이 없다. 이것은 과거에 파괴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체의 지상 높이는 260cm이며, 긴 축은 남북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 강화도제적봉 평화전망대
분류인문(문화/예술/역사) > 역사관광지 > 안보관광
위치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양사면)
개요
강화평화전망대는 2006년 말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타 지역에선 전망하기 힘든 이북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며,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통일염원소,휴게실 등이,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이,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북한땅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2층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 볼 수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 및 그 이후 생애 잊지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상황 등을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북한땅 조망실에서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역사 문화의 고장 강화는 곳곳에 산재한 역사· 문화 유적 등과 일일 관광 테마 코스로 연계하여 타 지역 안보 관광지와 차별화된 관광코스로 개발 다시오고 싶은 관광시설 개발은 물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 규모 : 부지면적 9,975㎡, 연면적 2,277㎡ (지하1층, 지상4층)
※ 민간인 통제구역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민간인출입통제선이라고도 부른다.
1953년 이후 남북 군대의 군사분계선으로 해 양쪽이 뒤로 2km씩 물러난 그곳을 DMZ으로 정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첫댓글 잘봤습니다. 수고 많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