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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2013.8.21.) 이승희 목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10~13 수요기도회 / 에베소서 강해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형식에 맞는(formal) ‘수사학적인 개요(rhetorical outline)’를 따르지 않지만, 6:10~20은 ‘페로라티오(peroratio)’의 역할을 한다. 고대의 수사학적 구분에 의하면, 연설의 결론을 내리면서 청중의 감성을 북돋아 절정으로 이끌고 가는 것을 ‘페로라티오’라고 한다.
당시 헬라철학자들은 악한 생각을 떨쳐 버리거나 자신들이 겪고 있는 내부적인 갈등을 묘사할 때 ‘운동시합’이나 ‘전쟁 scene’으로 묘사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the new self)으로 재창조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답게 살 뿐만 아니라 영적 싸움(spiritual warfare)을 통해 새 사람의 정체성(identification)을 계속해서 지켜가길 원하신다. 새 사람의 싸움은 승리를 쟁취하고 단판을 짓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미 승리는 십자가에서 결정되었다. 이제 우리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이미 얻은 것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것이나 죄를 이긴 것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얻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싸워야 하는 영적 싸움이다. 십자가로 이긴 싸움이 얼마나 탁월한 가를 대적들에게 보여주는 싸움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영적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전신갑주(the full armor of God)로 전신무장, 중무장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날마다 입고 싸워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가 입어야 할 그리스도의 옷의 다른 이름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4:12, 16에서 강조한 교회의 내적 성장과 세우는 것에 대조하여 외적 행위로 그리스도의 전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불가피하게 악과 조우해야 할 것을 대비하여 연합해야 하고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 모든 그리스천들은 각자 싸울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 10 절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1. 주님 안에서 강하라
‘강하게 하라(안두나모오, ejndunamovw)’는 동사는 ‘be strong’하는 명령형이며 현재 수동태이다. 이 동사는 칠십인역(LXX)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거나 감동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라바쉬(vb'l;, 옷을 입다, 무장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왕이 되시며, 목자가 되시는 것 그 자체가 힘이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가 되실 때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하였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을 노래하였다(시 23편).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힘의(나의 힘, 마오즈: z/[m;) 근원으로 삼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탕자처럼 재물(맘몬)의 풍부함을 의지하게 되며 자신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시 52:7).
바울이 에베소교회와 주변 교회를 향한 마지막 권면은 고린도전 16:13의 말씀과 비슷하다. 한글성경이 헬라어 원문에 있는 명령형 동사 4를 충분히 전달을 하지 못하기에 NIV 영어성경을 인용한다. “Be on your guard; stand firm in the faith; be men of courage; be strong.” 원문 역시 4개의 명령형으로 이루어져 있다(Grhgorei'te, sthvkete, ajndrivzesqe, krataiou'sqe). 그중의 마지막에 있는 ‘강해야 한다(크라타이오오, krataiovw)’는 본문의 ‘강건하여지라(안두나모오, ejndunamovw)’와 같은 의미의 유사 동사이다.
이미 바울은 디모데후서 2:1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be strong in the grace)고, 에베소서 3:16에서 ‘성령으로 속 사람을 강건하라’고, 골로새서 1:11에서는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는 ‘힘(powers)’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강건하여 지고 강해지는 것은 우리들의 자생능력이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전동자동차가 전기선을 따라 운행할 뿐만 아니라 전기선에서 계속해서 전류가 흐르고 충전을 받아야 달릴 수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힘으로 강건하여 질 수 있고, 마귀를 대적할 힘을 공급받을 수 있다. 만일 주 안에서 강해지는 길을 버리고 스스로 강해지고, 자생하려면 오래 못가 아담과 탕자처럼 결핍과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죽음을 맞게 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비유에서 포도나무인 자신을 떠나서는 제자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5:1~5).
2. 주님의 능력으로 강하라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모든 그리스도인 용사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resources)은 어디서 공급되는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유일한 자원이다. 바울은 1:19에서 믿는 우리에게 공급하는 지극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됨을 알기를 구하였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메시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동일하게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크신 능력이다. 1:19에 능력(power)과 유사한 네 개의 동의어 가운데 세 개가 다시 6:10절에 등장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즉 ‘그리스도의 중재사역을 통하여’ 위로부터 자원이 공급된다고 하였다. 때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공급하는 능력이 12년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던 것처럼 힘을 공급받아 병을 이기고 죄를 이길 수 있게 된다.
LXX 구약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안두나모오(ejndunamovw)’의 역어인 ‘아자즈(zz"[;)’라는 동사를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많으심을 인정하고(시 89:13) 그 힘을 적들을 대항하여 힘을 보여주기기를 간구한다. “주의 팔에 능력이(타오즈, z[oT;)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퀴리오스의 팔에 능력이 있다. 바울은 구약의 여호와의 팔이 주의 팔, 즉 그리스도의 팔로 바뀐다. 퀴리오스의 능력이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로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긴다.
제 11 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1. 하나님의 전신갑주
NIV에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Put on the full armor of God)’라는 명령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목적절이 뒤따라온다(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전신갑주는 ‘파노플리아(panopliva)’이다. 신약성경에서 누가복음 1번(눅 11:22, 더 강한 자가 강한 자의 파노플리아를 빼앗는다)과 에베소서 2번 나온다(6:11, 13). 강한 자, 즉 마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무력화시키고 결박하게 하는 것은 강한 자에게 그동안 붙잡혀 살았던 죄의 종들이 아니다. 죄의 종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거짓의 아비 마귀를 결박시키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다. 마귀의 머리를 부수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것은 우리들의 투쟁과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마지막까지 피를 흘리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마귀의 최후 몸부름치며 달려드는 것을 잘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전쟁 무기’에 대한 언어를 빌려오긴 했지만, 본문에 나오는 개념은 독자들이 익숙한 로마군사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전쟁준비가 되어 있는 병사들에게 지휘관이 훈시와 같다. 에베소서를 기록한 시기는 로마에 1차 감옥생활(가택연금)을 할 때이다(행 28:16, 30, 31).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무장한 여러 로마 장교와 사병들을 접촉했을 것이다(빌 1:13). 감옥에서 경험한 로마군인들의 전투복장을 유심히 관찰하였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되살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전투를 위한 복장에 적용한 것이다.
2. 마귀의 간계를 대적
앞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강해야 하고, 그의 힘으로 강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게 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지를 11절에서 말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고 견고하게 된다. 개정한글성경에서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NIV에서는 6:11과 13절에 계속해서 나오는 ‘서다(stand)’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NIV 영어성경에서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라고 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군수물자로 전신갑주, 즉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궤계를 대항하여 설 수 있다(take your stand, 13, 14). 13절과 14절은 ‘서다’라는 의미를 충분히 번역한 반면에 11절에서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이 제공하는 전신갑주를 입게 되면 승리를 빼앗길 일도 없고, 아군의 깃발을 내놓을 리가 없기에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며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제 12 절 영적전쟁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1. 씨름의 성격
그리스도인의 ‘씨름(팔레, pavlh)’은 어떤 종류의 씨름인가? 명사 팔레는 신약성경에서 에베소서 6:12에만 한번 사용된다.
첫째, 전투(warfare)인가? 하나님의 이미지가 이사야 11:5과 59:17에서 ‘전사’의 모습이다.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하는 바울이 종종 접하였던 로마 군인들의 무장한 모습을 떠 올릴 때 ‘하나님의 전신갑주(파노플리아, panopliva)’는 전쟁이미지와 연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의 씨름은 피와 육으로 하지 않는다고 할 때 로마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과 같은 상반된 것이다. 전쟁은 피범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에는 피흘림이 아니다. 전쟁터는 공격과 방어가 교차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가만히 보면 공격보다 방어위주이다.
둘째, 투기장(wrestling match)인가? 팔레(pavlh)의 의미는 전투라는 의미보다 ‘몸싸움()’이 더 강하다. 야곱은 야복나루에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과 씨름(아바크, qb'a;)을 한다(창 32:24). 물론 우리가 마귀와 삽바를 붙잡고 씨름을 한다는 개념은 다소 먼 듯 하다. 하지만 팔레의 의미가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보다 투기장에서 공격보다 방어에 가까운 분위기를 읽게 된다. 방어운전이 최선의 운전방법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씨름 역시 방어적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잘 싸우기보다 잘 견뎌야 한다(6:11, 13, 14. 세 번이나 ‘서기 위함(stand), 히스테미: i{sthmi,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를 머리를 상하도록 공격을 하였으며,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공격의 효력을 톡톡히 나타냈다(4:8).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와 함께 하늘의 보좌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2:6). 6:10~17에 빈번히 묘사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용어와 세부적인 묘사가 로마의 전투군인의 이미지를 떠 올리기 안성맞춤일지라도 실제 그리스도인들의 씨름은 전투라기보다 몸싸움의 이미지가 더 가깝다고 사료된다. 몸싸움하는 데 무슨 중무장을 하느냐? 신자들은 경기장에 자기보다 강한 상대와 맞서 자신을 계속 방어하다 죽기도 했던 투기장을 떠 올리면 그리스도인의 팔레, 즉 몸싸움을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용 무기이지만 말씀으로 마귀를 쳐서 제거하기보다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지 않았는가?
기도 제목
하나님, 우리를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혀 주셔서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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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 우리를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혀 주셔서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하소서.
이 죄인의 원함이 주님의 원함 이신줄 믿으며
감사함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