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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공주에게 장가드는 예법을 중시하여 부마(駙馬) 되는 이의 작위를 높여 주고 그 집안을 넉넉하게 해 주었으니, 이를 일러 ‘이름을 드날리고 살림을 풍족하게 해 준다.〔顯名厚實〕’라고 한다. 그런데 수양을 제대로 못하여 권세만 믿고 교만과 사치를 일삼아 담당 관리들이 감히 힐난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 왔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매사에 검소하고 집안 내외를 질서 있게 잘 다스려 양반으로서의 풍모를 잃지 않은 분으로는 오직 순의대부(順義大夫) 진안위(晉安尉)의 작위를 받고 사후에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추증된, 휘가 적(頔)이고 자가 군미(君美)인 유공(柳公)이 이에 해당된다.
공은 진주(晉州)의 대성으로, 시조 정(挺)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을 지냈으며, 후손 가운데 추밀사(樞密使) 홍림(洪林)과 판민부(判民部)를 지내고 시호가 양화(良和)인 욱(栯)이 가장 잘 알려진 분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공조 참판을 지낸 종식(宗植)에서 시작하여 예빈시 별제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潤), 진사 출신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된 영문(榮門),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격(格)을 거쳐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시행(時行)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비(妣)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목은(牧隱) 선생의 후손인 군수 대화(大禾)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 7월 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소리를 들었으며, 11세에 부마로 선정되었다. 선조(宣祖)가 고대의 역사를 가지고 시험하니 공의 대답이 물어본 취지에 딱 들어맞았고 행동거지와 말씨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선조가 감탄해 마지않아 관작을 하사하니, 그때 부친 판서공이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아깝도다. 우리 아이는 진정 학자의 재목인 것을.” 하였다.
이듬해 병오년(1606, 선조39)에 판서공이 돌아가셨다. 공이 의젓하게 상을 치르자 선조가 더욱 불쌍히 여겨 장지(葬地)로 쓸 땅을 특별히 하사하고 꽂고 있던 금권자(金圈子) 한 개를 풀어 정빈(貞嬪)에게 맡기며 “초상이 끝나는 대로 그에게 주라.” 하였다.
무신년(1608)에 선조가 승하하시고 3년이 지난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비로소 혼인의 예를 거행하였다. 공이 왕실에 적을 둔 후로는 더욱 조심하여 거처와 수레와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갖추도록 노력하여 마치 가난한 선비처럼 썰렁하게 지냈다. 이때 광해군이 폭정을 하고 있을 때라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린 신하들이 모후(母后)를 폐위하자는 주장을 내세우며 백관들을 위협하여 조정에서 주청하도록 하니, 그 위세가 세상을 뒤흔들 정도였다. 공이 이를 보고 “인륜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공에게 정청(庭請) 참여 여부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분연히 “우리는 대대로 녹을 받아 온 세신(世臣)이다. 비록 국법 때문에 감히 지위를 벗어나 국사를 논할 수는 없지만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병을 핑계로 문을 닫아걸고 정청의 반열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대간(臺諫)의 비판이 벌 떼같이 일어나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하라는 명으로 그쳤다. 공이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함께 대명(待命)하면서 지은 창화시(唱和詩)가 있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가을 8월 1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향년 25세였다. 묘소는 선영인 안산(安山)의 읍치(邑治) 남쪽 묘좌(卯坐)의 언덕에 있다. 5년이 지난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공이 정도(正道)를 지킨 점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벼슬을 추증하여 그 공을 기렸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한번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곧바로 외웠으며 성장할수록 행동을 조심하여 본분에 맞게 처신하였다. 겉으로는 화려한 지위에 올랐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몸소 예법을 실천하여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부모를 모실 때는 부모의 안색을 살펴서 봉양하였고 상을 치를 때는 슬픔을 다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독실하여 아우를 가르칠 때는 엄한 스승처럼 대하였으며, 바깥에서 벗을 사귈 때는 전아(典雅)한 인물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다. 시주(詩酒)를 즐기면서도 여색이나 화려한 것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 사건이 먼저 그 아들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온 조정이 놀라 두려움에 떨었고 왕실의 친척에게까지 그 화가 닥쳐올 기세였다. 공이 그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뜻이 고매하여 의연하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명예와 절개를 온전히 세웠으니, 군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부인 정정옹주(貞正翁主)는 선조(宣祖) 소경왕(昭敬王)의 열여덟 번째 따님이다. 모친 정빈(貞嬪) 홍씨(洪氏)는 현감 홍여겸(洪汝謙)의 따님이다. 옹주는 만력 을미년(1595, 선조28) 봄 1월 17일에 해주(海州)의 행궁(行宮)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선조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여 《효경(孝經)》과 《내칙(內則)》을 내려 주었다. 성장해서는 단정하고 차분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예의범절에 맞게 행동하였다. 무신년(1608)에 선조가 승하하자 삼년상을 마치고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부모님을 효성을 다해 섬겼으며 시댁 사람들에게 교만한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의 변란으로 모후(母后)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옹주가 근심과 분노로 음식을 끊고 그에 대한 말이 나오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으며 철마다 끊이지 않고 문후를 올렸다. 도위공을 귀양 보내라는 계사가 대각에서 강하게 올라오자, 옹주가 도위공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당신의 일에 힘쓰세요. 내가 비녀와 귀고리라도 팔겠어요.”라고 하며, 공을 따라 머나먼 영해(領海) 밖에까지 다니면서 공만이라도 근심 걱정하지 않게 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에 알현하는 일을 끊고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도위공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옹주가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였으나 모친 정빈 홍씨가 밤낮으로 열심히 지키는 바람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 시어머니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시동생 응교공이 그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으므로 옹주가 정성을 다해 장례와 제사를 부족한 감이 없이 치러 주었다.
계해년에 반정이 성공한 후, 인조는 옹주가 자신의 존속이라 하여 평소에 만날 때 가족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옹주는 광해군 때에 시집간 까닭에 살림살이와 저택이 다른 옹주들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다. 인조가 사저에 있을 때 자주 찾아가 뵈었는데, 담장 밖에 민가들이 너무 가까이 있어 마음이 상했던 터라 왕위에 오르자 그 집들을 옹주에게 넘겨주었다. 인조가 궁전의 뜰에서 선비들을 모아 놓고 과거 시험을 보이면서 옛 관례에 따라 옹주를 초청하여 참관하게 하였다. 옹주가 일찍 돌아가겠다고 청하기에 인조가 그 까닭을 묻자 “시댁의 가세가 몹시 쇠락한데 시동생 아무개가 이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므로 돌아가 그 결과를 기다리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응교공이 과연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옹주가 대궐에 들어가 인조를 알현하니, 인조가 옹주를 맞이하며 “옹주의 시동생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축하드립니다.” 하였다.
응교공이 아들을 낳자 옹주가 곧장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병자호란으로 조정이 강도(江都)로 피난을 가게 되어 종묘와 사직, 종실과 왕의 친척, 왕비와 공주들을 먼저 들여보내게 하였는데, 강도는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였다. 귀척(貴戚)들이 지정된 시간에 늦을까 서두르고 있었으나, 응교공이 영동(嶺東)의 간성(杆城)에 재임하고 있었으므로 옹주가 말하기를 “여자란 남편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야 한다. 남편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리해야 하는 법이니, 기필코 남편의 가족들과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어머니 정빈 홍씨 또한 옹주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인조가 누차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으나 “양자로 들인 아들이 아직 어리고 아비도 없어 맹세코 본생(本生)의 부모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정해진 법도가 있으니 도리로 보더라도 함께 따라가는 것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인조가 어쩔 수 없이 액례(掖隷)들을 시켜 그들이 도성을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게 하였다. 도성을 벗어나지 못할 뻔하였으나 결국에는 정빈 홍씨와 함께 고개를 넘어 험난한 여정 끝에 간성에 도착하였다. 그 후 강도가 함락되자 모두가 옹주의 고명한 행동과 식견을 칭송하였으며, 하늘의 도움으로 옹주는 늙을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3)에 양자로 들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비 잃은 어린 손자가 있어 옹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성인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였다. 병오년(1666) 가을 9월 16일에 경성(京城)의 명례방(明禮坊) 사택(賜宅)에서 향년 72세로 세상을 마쳤다. 부음이 전해지자 현종이 대비, 중전과 함께 슬퍼하고 조회를 중단하였으며, 부의를 후하게 내렸다. 유사(有司)들이 초상에 필요한 물품을 대어 주고 환관들이 장례를 돌보아 주었으며, 마침내 도위공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옹주는 화락하고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왕왕 이치를 아는 군자들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궁궐에서 생장하였으나 세상의 물정을 잘 알았고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훌륭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 새벽녘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종족들이 흐뭇한 마음으로 탄복하였다. 한번은 거처하던 집의 담장이 무너져 수리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 일은 이웃집과 분담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옹주는 “내가 우리 집 담장을 수리하는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웃집은 나보다도 더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 정승(李政丞)이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옹주의 어진 성품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응교공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들이 가난하게 지내자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하루는 임금이 사사로운 일로 안부를 묻자 옹주가 대답하기를 “늙은 몸이 의식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애비 없는 조카들 가운데 기이한 질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도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감동하여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주라고 명하였다.
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왕실에서 태어나서 / 篤生王室
타고난 성품 온순하고 / 稟質溫恭
스승의 말씀 한결같이 지켜서 / 一遵姆訓
부드러운 행실과 아름다운 용모 갖추었네 / 柔嘉德容
부왕인 선조대왕께서 / 粤惟宣廟
특별히 사랑을 베푸시어 / 特垂恩慈
명가를 골라 시집보내니 / 揀歸名家
왕녀다운 훌륭한 풍모 갖추었네 / 肅雍壼儀
하였으니, 이는 옹주의 일생을 통틀어서 칭송한 것이다.
양자로 들인 아들 명전(命全)은 승문원 정자를 지냈다. 정자는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재관(栽官)은 교리를 지냈고 딸은 오시원(吳始元)에게 시집갔다. 교리는 아들 셋에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은 경윤(慶胤), 경홍(慶弘), 경장(慶章)이고, 딸은 참봉 권경(權䪫), 진사 이학휴(李學休), 권세보(權世普)에게 시집갔다. 오시원은 양자 상휴(尙休)를 두었다.
경윤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정륙(鄭稑)에게 시집갔다. 경홍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묵(默)이고, 딸은 이광환(李匡煥)에게 시집갔다. 권경은 아들 하나에 딸 넷을 두었다. 아들은 권변(權忭)이고, 딸은 유수 오광운(吳光運), 정덕휘(鄭德輝), 심달관(沈達觀), 신달(申澾)에게 시집갔다. 권세보는 아들 권상원(權尙元)을 두었는데 진사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나라에 세덕의 집안이 있어 / 國有世德
법도에 맞게 신중하니 / 厥範欽欽
이러한 분이야말로 / 有若人斯
부귀해도 방탕하지 않고 / 貴不能淫
반듯한 마음씨와 걸음걸이 / 矩心彠步
한가할 때도 여전하네 / 燕肆亦臨
입시해서 임금 총애 받고도 / 入侍寵靈
돌아와 더욱 겸손하며 / 歸駕益俯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 克勤以儉
누가 봐도 가난한 선비 / 十目寒素
세상이 망극하게 변하여 / 時變罔極
인륜이 무너지니 / 倫敗彝斁
사람들 모두 겁을 먹어 / 人皆劫劫
그 누가 소리치며 나서리오 / 疇喝余起
목숨을 내놓기로 마음먹고 / 捨命旣判
문을 걸고 탄식하며 / 杜戶興喟
교외에 자취를 감추니 / 息迹郊坰
나라와 인물 모두 없어졌네 / 邦瘁人亡
새로운 세상에 새 임금 등극하니 / 天開日昇
추증된 높은 벼슬 더욱 빛나고 / 榮贈彌章
후진들이 공의 행적을 살펴보니 / 來許夷考
처음부터 끝까지 존경스럽네 / 始卒尊光
그 배필은 임금의 따님 / 有配貴主
단정한 옹주라네 / 貴主克莊
임금의 가르침 따라 / 王于敎誨
어린 딸이 힘을 쓰니 / 季女伊蘉
부덕(婦德)을 갖추고서 / 曷不肅雝
공에게 시집왔네 / 來婦承筐
갑작스레 오랑캐 쳐들어와 / 寇亂倉卒
도망치기 바쁜 때에 / 人覬逃便
삼종지도 큰 도리라 / 三從義大
시가댁이 먼저일세 / 夫家宜先
눈물 흘리며 궁궐 떠나 / 涕淚辭闕
어린 아들 앞세우고 / 孤兒在前
아득히 먼 변방으로 / 逖矣邊城
시동생에 의탁하니 / 歸託弟公
밝고 환한 옹주 심사 / 心明事白
구름조차 감동했네 / 雲水感通
부부 모두 명철하여 / 齊體傡哲
아름다운 명성 끝없으니 / 令聞何竆
한 가지만 가볍게 들어도 / 一事包輕
모든 일을 볼 수 있네 / 眎矜凡百
연성의 남쪽 산에 / 蓮城南岊
묘소를 우뚝 세우니 / 堂封儼若
부부 행적 새기어서 / 可錯可鐫
이 비석에 남기노라 / 有貞斯石
[주-D001] 부마로 선정되었다 : 유적(柳頔)이 선조의 여덟째 딸인, 정빈(貞嬪) 홍씨(洪氏) 소생의 정정옹주(貞正翁主)에게 장가들게 된 것을 이른다.[주-D002]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 1588~1644. 선조의 셋째 딸인, 인빈(仁嬪) 김씨(金氏) 소생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이다.[주-D003] 창화시(唱和詩) : 이때 창화한 신익성의 시는 한국문집총간 93집에 수록된 《낙전당집(樂全堂集)》 권2에 〈차사휴운(次四休韻)〉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주-D004]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 사건 : 대본에는 ‘金鏞之變’으로 되어 있는데 ‘鏞’은 ‘墉’의 오자이다. 금용성(金墉城)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에 만든 성으로 254년에 사마사(司馬師)가 위주(魏主) 조방(曹芳)을 폐위하여 이 성에 유폐하였고, 이후 진(晉)나라 양 태후(楊太后), 민회태자(愍懷太子), 가 태후(賈太后), 혜제(惠帝) 등도 이곳에 유폐되었다.[주-D005] 열여덟 번째 따님 : 선조는 2명의 정비(正妃)와 6명의 후궁(後宮)에게서 적자 적녀 1남 1녀와 서자 서녀 13남 10녀, 총 25명의 자녀를 낳았다. 정정옹주(貞正翁主)는 서녀로서는 여덟 번째이고 전체 25명 가운데서는 열여덟 번째 자식에 해당한다.[주-D006] 응교공 : 유영(柳潁, 1603~1646)을 가리킨다. 1627년(인조5)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을 거쳐 1636년에 간성 현감(杆城縣監)으로 나갔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난민 구제에 힘썼다. 이후 이조 좌랑과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고 1642년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음을 당하자 이를 애통해하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주-D007] 연성(蓮城) : 안산(安山)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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