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 남한산성, 환황녀, 홍제천
삼전도 청태종 공덕비
1636년 12월에 '병자년' 병자호란은'1592년 임진년 임진왜란' 7년 전쟁보다
기간은 짧았지만,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특히, 병자호란은 국력이 취약했던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약소국이 외교정책을 실패했을 때 어떠한 결과로 나타났는지 대변해준다.
성남시 청량산 남한산성 남쪽 검단산 정상부에 옹성 하나.
남한산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통과해야 만 하고,
성문 밖으로 나와 있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시설물.
조선이 자랑하던'철옹성' 남한산성.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어떻게 함락당한 것일까?
청군은 그당시 어떤 루트로 어떤 무기로 공격했던 것일까?
남한산성.,옹성
검단산(657m)은 하남시 동쪽 한경변에 솟아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예봉산(禮峰山 : 679m)과 마주한다.
백제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은거한데서 유래된 지명 검단산.
또한,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이
이곳에서 검사받고 단속하는 것에서 검단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남한산성 행궁.
1631년 6월 홍이포 제조에 성공, 1631년 8월 명나라 '대릉하' 공략
명 수비군보다 더 많은 홍이포 6문, 대장군포' 54문으로., 공격하여 성공.
1636년 12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홍이포'로 공략.
벌봉(512.2m) 정상은 남한산성 안 수어장대보다 높아 남한산성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청군이 산성 안 동태를 훤히 살피며.,화포.공격.
청군이 남한산성 성곽 일부를 무너뜨린,벌봉 루트.
1636년 12월에 발생한 병자호란 이듬해,음력 1월 23일.
화포 공격 일주일 후인,음력 1월 30일에 인조는 항복한다.
이제 더 이상 항전은'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인조.
이미 일주일 전에 조선 최후의 보루 강화도 마저.,함락.
인조의 두 아들마저 청군의 포로가 된 것.
청군의 인질이 되어 남한산성 아래까지 끌려 온.,두 대군.
아무런 대책도 없이 결사항전을 외치다가 항복할 적절한 시기마저
놓치고 말았기에 후회막급.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인조14) 음12월 9일 청군이
또 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처들어왔다.
청태종이 병자호란 발발 10개월 전 병자년 초 조선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귀국이 산성(山城)을 많이 쌓고 있으나 우리는 큰 길로 처들어 갈 것이오." - 청 태종-
무려, 12만 8천 청 대군이 조선을 침공한지 불과, 5일 만에 질풍 같이 한양을 점령한 것.
혹한기 얼어붙은 강위로 질풍처럼 말을 달려 청군은 한양 도성을 향해 곧장 처들어 왔던 것. 인조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후 성문을 닫아걸고는 온갖 지연전을 펼치자
청군은 도성 안 사대부 가문 부녀자들을 유린.
남산 위에 푸른 송림(松林)이 날이 갈수록 하얗게 변해갔다.
청군에게 정절을 유린당한 도성 여인들이 소복을 입고 남산 소나무마다 목 매어 자살.
청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술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안에 고립되어 꿈쩍도 하지 않았던.,인조.
군사들은 풀 뿌리로 연명.인조는 죽을 쑤어 허기를 해소.
남한산성 혹한기 추위는 살벌했다.
인조는 밤새 뒤치닥거리며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새벽닭 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인조의 아침 수라상에 닭 백숙이 올라왔다.
그제서야 뒤늦게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진 사실을.,감지하게 된 인조.
'이것이 나에게 마지막 식사일지 모른다.'
남한산성 안에서 새벽 임을 알리던 마지막 숫닭이었다.
'그것으로서 자신의 운명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여긴.,인조.
1937년 1월 30일 인조가 47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인해
성밖으로 나가 삼전도에 가서 항복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태종은 높은 단상에 앉아 예를 받았다.
'조선실록에는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옷으로.,기록.'
1637.1.30. 인조는 삼전도 항복 조인식을 치루기 위해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옷을 입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왔다.
인조가 관을 등에 메고 수의를 입지 않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
서문(西門)은 곧.,'죽음의 문(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상으로 성 안에서 끝까지 항전한 패전국의 왕이
목숨을 부지한채 성밖으로 나온 적은,없는 법.'
인조는 최후 항전 끝에 죽임보다 치욕적인 '굴욕의 길'을 선택한다.
엄동설한에 맨발로 성(城)을 나온 것.
'인조는 삼전도까지 걸어 갔을까?' '말을 타고 갔을까? 압송되어 갔을까?'
인조에게는 춥고도 고달픈 길이었으리라.
조선 사신 측에서는 인조가 곤룡포를 입고 청군에게 압송되길 간청.
원래, 청나라 장수들의 측에서는.,'반합'을 요구.
항복하는 의식의 일종인데 죽은 사람인 것처럼 입에 구슬을 물고 두손을 묶인 채로
빈 관을 끌며 청태종이 있는 삼전도까지 청군에게 압송되길 요구.
그 대신에 항복 조인식은 삼전도 단상의 9 계단을 오르며
한 계단 오를 때마다.,'삼배고구두례'.
즉, 한 계단마다 삼배를 하면서 아홉번씩 계단에 이마를 박는 의식.
조선왕이 자청해 목숨을 구걸하는 의식.
조선왕 인조의 생사여탈권은 청태종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
'다시는 청나라를 무시하지 않고, 상국(上國)으로 모시겠다는.,의식.'
'병자호란에 패해 항복한 조선왕은 청태종에 감히 대항했던.,죄인의 몸.'
삼전도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청태종의 귀에까지 인조가 계단에 이마를 쥐어박는 "쿵"소리가 들려야 하는 삼배고구두례' 항복 의식은 죽음 못지 않은,굴욕이었다.
조선왕이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에 그 댓가를 톡톡히 치뤄야 하는 의식.
그러나,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일.
인조가 충분한 대가를 치루지 못하면 청 태종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을
복위 시킨다면, 자신이 폐위 될지도 모를.,일.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 의례 만큼이나 번민 속의.,갈등 또한 고통스러웠으리라.'
'구차한 목숨을 부지할 길이 암울했으리라.'
* 홍타아지(1559~1624).
·1636년 만주에서 '만주족·몽골족·한족' 황제로 등극.
후금 카간' 누르하치(1559~1626)'의 여덟번 째 아들로
청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청태조(재위 1616~1626년).
누르하치 병사 후, 국호를 후금에서 청(靑)으로 바꾸고. 여진 통일 후, 후금을 세웠으며
명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대승. 청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진.,청 태종.
조선시대에 '후금 태종' 누르하치는 날로 그 세력을 키워., 내몽골을 정벌.
만리장성 넘어 북경 근처까지 나아가 명나라를 위협하였다.
1636(인조 14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그해 12월, 청나라는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
* 당시 조선 상황.
1627년 1월 정묘호란에 이어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은 재침.
인조반정 집권 서인정권은 '친명배금' 명나라를 가까이 하고 후금(청)을 배척한 조선.
1623년 광해군 중립 외교가 막을 내리고 친명배금 정책전환.
1624년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설파.
1627년 후금의 침입으로 인조가 강화로 피신하다.
1627년 1월 중순, 후금 군사 3만이 압록강 넘어 침입.
인조와 대신들은 적군의 침입 배경과 전황을 점검하고,
전시체제 각종 조치들을 의논했지만 파죽지세로 밀렸다.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맹약 후 3월 초 철수.
당시 중국의 정세 변화로 조선은 또 다시 국운을 건 선택에 내몰려야 했던 상황.
청나라가 정묘년 '정묘호란' 조선 침공때 맺었던 형제지맹(兄弟之盟)을 군신지의
(君臣之義)로 바꾸고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 세폐도 크게 늘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외교적인 교섭으로., '문제해결' 주화론.
무력으로 강력하게 응징해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주전론.
조경(趙絅), 김상헌(金尙憲), 유계(兪棨) 등 소장파는 주전론,
이귀, 최명길, 홍서봉 등 인조반정 공신들은.,주화론.
이 과정에서 조선과 청 사이는 전운이 짙어졌다.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인열왕후 국상에 사신으로
왔다가 인조가 국서를 받길 거부.주전론자들이 두 사신 엄벌 상소를 올리자
황급히 조선을 떠났다.
이어 청나라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주전론 주창자들을 볼모로 보내지 않으면
다시 군대를 일으키겠다.”라며 11월에는.,최후 통첩.
하지만, 주전론 쪽으로 기울던 조선에서 이 같은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1636년 12월 1일, 청태종은 청군 7만, 몽골인 3만, 한족 2만' 총 12만
청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1636년 병자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은 뒤 거침없이 한성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가 12일에 압록강을 넘은 뒤, 13일에는 평양,
14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하자. 도성 주민들은 혼란이 일었다.
피란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하자 인조도 한성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세자빈 강씨와 원손, 둘째 봉림대군, 셋째 인평대군.,14일에 강화도로 피란.
인조도 이날 밤 강화도로 향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연서역(延曙驛, 연신내)을 통과,
강화도 길까지 차단하자 강화도행을 포기했다.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한성 주변 관리들이 수백명씩 군사를 몰고 집결.
남한산성 내 병력은 1만 4,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인조는 도성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적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 녹번동)까지
왔다는 급보를 받자 최명길을 청군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며 시간을 끌게 했다.
15일 새벽, 인조는 거처를 강화도로 옮기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섰으나, 눈보라로
산길이 얼어붙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걷다가,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다.
또 강화도로 향한 세자빈 강씨 일행은 갑곶나루에 이르렀으나,
나룻배가 없어 이틀을 추위에 떨다가 강화도로 들어갔다.
하지만 수많은 백성들은 미처 나룻배를 타지 못한 채 추격해온 청군에게 희생당했다.
조정에서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청군의 거센 진격에 손쓸 틈이 없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15일 “적군이 압록강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군을 깊이 들어오도록 내버려둬 백성이 큰 고통을 겪고,
국왕이 어찌할 도리 없도록 만들었다.”라고 하며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등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했다.
이튿날 마침내 청군이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조선군과 청군은 전면전은 피한채 산발적인 전투. 이 과정에서 조선군 300명이
청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남한산성 바깥으로 나갔다가 몰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 군사들은 청군이 일부러 소와 말을 풀어 둔 것을 알고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체찰사 김류가 잡아오라며 재촉하는 바람에 결국 화를 당해
조선군사 사기는 다시 크게 떨어졌다.
해가 바뀌고 1월 들어 청 태종은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
남한산성은 갈수록 고립무원에 빠져들었다.
당초 산성 내에는 양곡 1만 4,300석.장 220항아리 등 '50일 간' 양곡 준비.
이마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성일기》 1월 14일 기록을 보면 ‘하루 양식으로 군병은 3홉씩 줄이고,
백관은 5홉씩 줄여도 다음 달까지 닿지 못하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라는 상황.
이를 간파한 청 태종은 서한을 보내 화친의 뜻, 인조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군신의
예를 갖추고, 그에 앞서 척화신(斥和臣) 2~3명을 먼저 내보라 압박.
그러자 이미 싸울 뜻을 잃은 일부 군사들은 "척화신을 내보내라."면서 목소리를
드높였고, 주전론자 윤집. 오달제는 적진에 가길 자청했다.
그러던 와중에 강화도 이미 함락 사실이 알려지자, 마침내 인조는 청태종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 이때 청군에 넘겨진 윤집 오달제는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에 끌려가 청에 항복을 거부해 죽임을 당한다.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삼학사(三學士)라 한다.
남한산성에 피신한지 48일째인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남색옷을 입고
서문으로 산성을 나갔다. 죽음을 뜻하는 서문이라 성 내서는 통곡이 울려 퍼졌다.
청 태종은 한강 동편 나루터 삼전도(三田渡)에 9층으로 단을 만들어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막과 양산에 청군 병기와 깃발이 단을 에워싸고 있었고,
정병 수만 명이 단을 중심으로.,네모나게 포진.
청 태종은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키다가 멈추게 하고는
인조에게 100보가량을 걸어서 삼공육경(三公六卿, 3정승과 6조 판서)과 함께
뜰 안의 진흙 바닥 위에 엎드려서 배례하게 했다.
신하들이 배례 진흙 위에 돗자리 깔기를 청했지만,
인조는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을 향하여 3번 절을 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예를 거행.
이를 두고 후세 역사에서는‘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돈피(獤皮, 모피) 가죽옷 두 벌을 건네자,
인조는 그중에 한 벌을 입고 다시 뜰에서 세 번을 절하며 사례.
이로써 조선왕은 청나라 황제와 군신 관계를 맺고 조약을 체결.
'어떠한 굴욕적 조약을 체결했기에 인조는 죽임을 면하고, 모피 두벌을
청태종으로부터 건네 받았던 것일까?'
청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
조선은 명과 단교(斷交)할 것,
청에 물자와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적 움직임을 보이지 말 것,
청에 세폐를 보낼 것 등의 내용이었다.
조선과 청의 이런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할 때까지 그 기본 방향이 유지되었다.
청은 철군때 소현세자 세자빈, 봉림대군 등을 볼모. 조선인 60만명도 끌려갔는데
당시 심양 노예시장에서 팔린 조선인의 숫자만 해도 66만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당시 조선 인구는 약 1천만명. 인조가 삼전도 항복의 예를 마친 뒤 백관과 함께
한양 도성으로 향할 때, 포로로 잡힌 남녀 조선인 1만여 명이 길의 좌우에서
인조를 향해 울부짖었다.
“아!~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이처럼 굴욕적인 항복에 분노한 백성들은 조선팔도 삼천리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박철산의 의병부대로, 이들은 용강 근처 적산에서 적의 주력군을
맞아 저항. 그로 인하여, 훗날 적산은 ‘의병산’으로 불렸다.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은 1642년 청의 요청으로 명에 출병,
명군과 손잡고 청에 맞서려다 사전발각.
두 차례 호란으로 국가 운영과 존명사대주의(尊明事大主義)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전란 후.,조선.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봉림대군) 재위기간 내내 북벌론(北伐論)을 통해
조선왕조의 국가 위기 수습을 시도한다.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는 청군 일진 기마대 330명에게 4만 조선군이 지휘관 무능으로
궤멸 치욕적인 전투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쌍령.
* 병자호란 쌍령전투.
쌍령은 현재 경기도 광주시에서 동으로 16㎞ 거리에 있는 크고 작은
두개의 고개를 가리킨다.
.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남한산성이 포위, 고립되자 제도(諸道)의 감사나 병사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는데 이 때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栐)도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쌍령에서 청군과 맞부딪친 전투.
허완은 미처 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일군이 패하여 전사.
민영은 휘하의 군사를 독전하여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일군이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
.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용인 험천(險川)에서 패전 후
자신과 함께 많은 전사자를 냈다.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쌍령 전장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영부사(領府事) 김수흥 등 제언으로 전사자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위령제.
1734년(영조 10) 왕명으로 쌍령전망처(雙嶺戰亡處)에 비를 세워 전사자 혼령을 추모.
1636년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소현세자.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후., 청나라 연호를 사용.
* 병자호란 이후에'살아 돌아온.,죄(罪)' 환향녀(還鄕女)의 비애.
서울 북한산 비봉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승가봉을 지나 ‘사모바위’를 만날 수 있다.
‘사모’는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로,
바위모양이 그것과 비슷해 붙은 이름.
.
1968년 1월,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간첩 김신조 일행이 이곳 아래
굴에 숨어 ‘김신조 바위’로도 알려졌다.
'현대사' 한 단편이 담긴 이 사모바위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전설을 품고 있다.
* 사모바위 전설.
병자호란 때 한 청년이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사랑하는 약혼녀가 청나라로 끌려갔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많은 사람이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중 여자들은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북한산 아래 홍제동 홍제천에 잠시 머물러 샛강에 몸을 깨끗이 씻었다.
청년은 날마다 홍제천을 뒤졌으나 약혼녀를 찾을 수 없었다.
약혼녀를 잊지 못한 청년은 북한산에 올라가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끝내 약혼녀가 돌아오지 않자 그곳에 바위로 변한 청년.
훗날, 사람들은 그곳을 사모바위라 불렀고 그곳 청년과 약혼녀의 혼령을 위로했다 한다.
그러나, 사모바위 전설은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조선 여인들은 결코 환영 받지 못했다.
전설의 주인공과는 달리 조선의 사대부 가문에서는 그녀들을 ‘환향녀’라며 내쳤다.
가문에서 버림을 받았던 여인들은 냉대 속에 목을 매거나 절벽에 투신.
죽을 용기가 없는 사람은 기생이 되거나, 심지어 청나라로 되돌아가는 비운을 겪었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충효사상 유교관은 조선의 국가 통치이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통치이념일 뿐 아니라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
그 연장선에서 여자도 남자에게 복종해야 했다.
소위 ‘삼강오륜’이라 일컫는 이 규범은 원칙적으로는
상호 의무개념이 조선에서는 아내의 일방적인 의무였다.
어려서 어버이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여자의 3가지 도리는 일방적 복종의 완결판.
또한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고,
아들을 낳지 못하며, 바람을 피우는 칠거지악은 남자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여필종부’, ‘일부종사’, ‘출가외인’ 여성을 옭아매는 조선의 규범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 규범들은 평민과 천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이전에 여성의 지위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시대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언제든지 재혼 가.
남녀 구분이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족보에 올랐으며,
남자든 여자든 맏이 제사. 부모의 유산도 똑같이 분배.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지킬 최고 도리는 정절.
남편 외 남자에게 몸은 물론 마음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 정절 강요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조선처럼 국가가 그것을 국법으로서
통제한 경우는 드물었다.
《경국대전》에는 “정절을 잃은 부녀자의 가문은
대대로 문과에 응시하거나 요직에 등용될 수 없다.”
수절하는 과부에게 국가가 주는 토지 ‘수신전’은 조선시대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밭이었는데 “과부여야 하고, 과부 중에서도 재가하지 않은 사람.
그중에서도 과전을 받았던 관료를 남편으로 둔 사람”
정절을 지키다 죽은 여자에게 ‘열녀’ 칭호를 내렸다.
‘열녀문’은 조선싣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영광이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대표적인 열녀에는 도미의 아내, 박제상의 아내, 평강공주 등
그녀들이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사후에
아내 재혼이 일반적이던 사회에서 특이한 인물인 때문.
남편 살아 생전에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기는것만으론 열녀 칭호 받기 부족.
수신전에서 볼 수 있듯, 남편이 죽었을 때 그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열녀의 잣대였다.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무덤을 지키고 평생 동안 상복을 입게 한 것도 정절을
지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1년 만 상복을 입고 곧 재혼 가.
남자의 충절은 나라를 지탱하고, 여자의 정절은 가정을 지탱하는 근간.
“천하 각국 어디에도 없고 중국도 이것만은 조선을 따르지 못한다.”
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 사대부에게 조선 여인의 정절’은 자부심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사대부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부랴부랴 발행했다.
이 책은 세종의 명에 따라 만든 《삼강행실도》의 속편이었다.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본받을 만한 충신 112명, 효자 110명,
열녀 94명을 뽑아 그들의 행실을 소개한 책으로 조선시대 유교관.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열녀 356명, 효자 67명, 충신 11명으로
열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것은 곧 정절을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정언명령’.
* 삼강행실도.,열녀 편.
《삼강행실도》는 본받을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을 뽑아 그들의 행실을 소개한 책인데, 임진왜란 직후 사대부가 펴낸《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열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것은 곧 정절을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정언명령이었다.
절대적 가치를 품은 정절은 '조선 16대 왕' 인조에 이르러 국가 통치이념이 크게 흔들린다. ‘환향녀’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우리나라 여성 차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것.
*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인조
압록강 북쪽에 여진족 족장 누르하치.만주를 평정하고 ‘후금’을 세운 1616년,
당시 중국 패권은 명나라가 쥐고 있었지만,이미 국운이 쇠잔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명나라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지원 요청. 후금의 힘을 간파한 광해군은
중립정책을 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
또한 사대주의에 젖어 ‘오랑캐’ 후금과 타협할 수 없다는 생각도 확고부동 했다.
이런 사대부의 반감은 결국,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1623년 인조반정 원인.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 포기‘향명배금’,
즉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표명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인 조선부터 제압하기로 했다.
1627년 1월, 광해군 폐위를 이유로 들며 후금은 정예병 3만을 몰고와 조선을 침략.
인조는 강화도에 피신하여 장기전에 돌입했다.
대군을 계속 조선에 주둔할 수 없던 후금은 ‘형제의 나라’라는 정묘조약을 맺고 철수했다.
조선은 정묘호란에서 패했지만, 인조반정에 대한 후금의 묵인과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는 적대하지 않을 것” 소기 목적 달성.
조선을 굴복시킨 후 누르하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국호를 ‘대청’으로 바꿔 국력을 키웠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청을 형제의 나라 아닌, 군신관계로 대하고, 황금과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결사항전을 표방하며 이 요구를 묵살했던 것.
1636년 12월, 홍타이지는 1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 정벌을 위해 나섰다.
병자년 이 전쟁이.,병자호란.
청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불과 15일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항전.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청 태종은 남한산성보다 강화도를 먼저 쳤다.
정묘호란 당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였으나 감찰사가 지형만 믿고
임전태세에 소홀하여 한나절 만에 청 수군에게 무너졌다.
함락된 강화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에 빠졌고, 조선의 여인들은 겪어본 적 없는 능욕을 겪는다. 청나라 군인들은 철저하게 강화도 전체를 유린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고 어린이는 닥치는 대로 절벽이나 우물에 던졌다.
여자들은 강간하고 포로로 삼았는데, 평생 지아비만을 섬기며 정절을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던 여염집 여인들은 오랑캐에게 능욕 보다 죽음을 택해 강화해협이 하얗게 변했다. 소복 여인들의 시신이 강화해협을 가득 메웠기 때문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도 내시들이 급히 잡지 않았으면 스스로 자기 목을 찔렀을 것이다.
이긍익은 당시 강화도에서 벌어진 사대부 여인들의 참상을 《연려실기술》에 실었다.
윤선거의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맸다. 이돈오의 아내 김 씨는 시어머니,
동서와 함께 목을 찔렀다.
홍명일의 아내 이 씨와 시어머니는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적병에게 들키자
서로 껴안고 물에 뛰어들었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 군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라고 당부한 뒤 목을 매 죽었다.
토굴 안에 숨어 있던 이호선의 아내는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유인립의 아내는 끝까지 버티다가 적군이 난사한 총에 살이 다 뜯겨
나갔지만 꼿꼿하게 선 채로 죽었다.
남자들은 부인과 여동생, 며느리, 딸의 자결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 자결을 재촉하기까지도 했다.
강화 감찰사 김경징은 혼자 도망가고,
그의 아들 김진표가 할머니와 어머니, 부인을 다그쳐 스스로 자살하게 했다.
정선흥 아내는 청나라 군사가 접근하자 왕족에게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게 낫다!”고 꾸짖자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자결.
평민 여성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연려실기술》은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숫자를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라며 애도했다.”고 기록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한문 소설 《강도몽유록》은 이러한 여인들의 죽음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나라가 수치를 맞았으나 의에 죽은 충신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이다.” 그러나 자결한
사람보다 포로가 많았다. 강화도 만 1만 포로.
40일 넘게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벌이던 인조는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량도 부족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대립하던 대신들도 항복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청은 조선이 신하의 예를 갖추고, 명의 연호를 폐지하며, 왕자와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내고, 황금 100냥과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 종의 공물을 바칠 것 등을 요구했다. 조선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청 태종은 항복문서로 만족하지 않았다. 인조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왕족과 대신 500명을 이끌고 한강 동편의 삼전도(송파구 삼전동)에 머물고 있는 청 태종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인조는 세번 절, 아홉번 땅에 이마를 조아리며 맨발로 '삼배구고두' 항복의 예를 올려야 했다.
청 태종은 조선왕 인조가 머리를 조아릴 때
땅에 "쿵~" 찧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말했다.
.
언 땅에 이마를 박은 인조 머리에서 흐른 피는 가슴까지 적셨으며, 이를 본 백성과 대신들은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청 태종은 이렇게 자신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조선의
자존심을 깡그리 뭉갠 후 철군하기 시작.
이로써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된 것.
1636년 12월 조선을 침략해 1637년 2월에 돌아가기까지, 청군은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저항하지 않는 민간인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병자년 겨울은 유독 엄동설한이 심해 청군에게 약탈당한 백성들은 얼어 죽었다.
이와 같은 만행은 청태종의 전략적인 지시였다.
본격적인 명나라 공략에 앞서 조선을 확실하게 굴복시키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조선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승리한 뒤 안전장치를 추가했다.
강화도를 함락하고 남한산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당시, 전 군대에 포로를 50만 이상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규모 인질을 잡아두면 조선이 복수를 할 수 없어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안심하고 치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청나라가 이제 조선인 포로들을 끌고 갈지언대 만약 포로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가는데 성공하면 잡지 않을 것이나, 압록강을 건너 한 발자국이라도
만주 땅을 디디면 도망치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즉시 만주 땅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조선 팔도에는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개별적으로 포로를 잡던 청의 각 부대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조직적으로 포로사냥.
노인과 어린이를 제쳐두고 젊은 사람만 골랐다.
청군이 특히 선호한 것은 사대부가 젊은 여인들. 재색을 겸비한 그녀들은 첩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노예로 팔거나 나중에 조선에 돌려줄 때 상대적으로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여인이 오랑캐에게 끌려가기보다 은장도로 자신의 목을 찌르거나 우물에 투신.
방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척살했으므로 여인들은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순순히
끌려가 생이별의 곡소리가 방방곡곡에 울렸다.
청 태종은 항복문서를 받은 후 인조에게
“우리 청나라가 이제 조선인 포로들을 끌고 갈지언대 만약 포로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가는 데 성공하면 잡지 않을 것이나, 압록강을 건너 한 발자국이라도 만주 땅을 디디면 도망치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즉시 만주 땅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와 같은 엄명에 따라 만주에서 탈출한 조선인 포로들이 조선 관청에 붙잡혀 다시
만주로 보내지는 비극적 장면도 연출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잡혀갔을까?
최명길의 《지천집》에 의하면 50만 명이 넘었고,
남한산성에서의 저항 기록을 담은 《산성일기》는
60만. 훗날 정약용은 60만 명이 넘는다. '비어고' 기록.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이었으니, 가족 친척 중 끌려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온 나라 백성 중 태반이 연루되었다.”- 실록.
60만 포로 중 여자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여인이 포로로 끌려간 적은 조선 역사 상 없었다.
봉림대군 부부와 소현세자, 그밖에 많은 대신, 각료도 인질.
척화파 강경론자로, 이른바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은 청태종의
회유를 거절하고 참형을 받았다.
인조는 매우 괴로웠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예를 올린 후 입궁을 할 때 청나라 진영에 있는 백성들은
인조를 향해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라며 절규했다.
인조는 달포 넘도록 살려달라는 백성들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왕은 사관에게 “죄 없는 백성을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게 했다.”
라는 사과문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적인 문서에 포로의 수가 얼마인지는 오늘날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다.
청나라가 전쟁 피해의 실태를 일절 조사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
조선인 포로들의 종착지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현재 랴오닝 성.,'성도' 선양 시)
한양에서 1660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들은 한겨울에 끌려다니면서 말채찍으로 얻어맞기 일쑤였다.
포로들은 언 살에 채찍을 맞으니 온통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추위와 기아로 주검이 수두룩 쌓였다.
청 병사 활쏘기 연습때 과녁으로 이용. 청군은 모자란 만큼 다시 잡아들였다.
조선 백성 포로 숫자가 워낙 많아 하루 30리 밖에 행군할 수 없었다.
심양까지 가는 데 60일이 걸렸다.
청나라 사료에 의하면 그들 몸에 이가 들끓었다.
청나라는 조선인 포로를 "피로인(被虜人)"이라 호칭.
포로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민간인 인질을 의미했다.
청군에게 청나라까지 끌려가며 여인네들이 온갖 수모를 당했다.
특히 청군 병영에서 시중을 들며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다.
이에 항거할 경우에 죽임을 당했고, 여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오랑캐’에게 붙잡혔으니 수치심이 컸다.
후세에 정약용은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 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 - '비어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포로가 된 것 자체가 창피하고 치욕스러웠던 것이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청병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아름다운 한 처녀가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자 음식을 주지 않았는데,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고 이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심양은 1625년 누르하치가 후금의 수도로 삼은 곳이며,
1634년에 홍타이지가 성경(만주어로 ‘묵던’)으로 개칭.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에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심양은 청의 '제2 수도'로 삼았다.
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한 피로인 중에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남자들은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징병되었다.
철을 다룰줄 아는 기술자들은 상대적으로 청에서 대접을 받았다.
재색이 뛰어난 여인은 궁에 들어갔다.
그밖에 남자들은 농장 머슴으로, 여자는 첩 또는 창부로 노예시장에서 팔려 나갔다.
특히 첩 문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만주족 본처들이 조선인 첩을 질투하여 펄펄 끓는 물을 부으며 폭행하는 일들이 잦았다.
그런 짓을 하는 부인은 남편이 죽을 때 순장시키겠다고 청 태종이 엄포.
예조좌랑 허박은 “피로인이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심하다.” 말했다.
심양에서 탈출하여 압록강을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청나라는 이들을 ‘주회인’이라 불렀다.
조약에 따라 조선은 이들을 책임지고 다시 청나라로 돌려보내야 했다.
잡혀온 주회인들은 발뒤꿈치가 잘리는 끔찍한 형벌을 당했다.
주회인을 잡아오라는 청나라의 요구가 드셀 때는 조선 조정에서 부랑아들을
압송시키기도 했다.
심양이 큰 도시이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몇 십만 수용은 불가능.
그래서 청 태종은 항복의 ‘선물’로 강화도에서 잡힌 1600명을 조선에 송환.
청은 조선에 바로 속환 절차를 밟으라고 통보했지만 조선 조정도
그들을 고국으로 데려오는게 급선무.
그러나 국가가 나서기도 전에 사대부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속환 방침이 발표되자 심양 거리 곳곳에 피로인 매매시장이 열렸다.
“피로인의 매매를 허락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남녀 포로들을 성문 밖에 모아놓았다. 그 수가 수만이나 되는데 혹은 모자 상봉하고 혹은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심양일기》기록
그러나 그들 중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수는 매우 적었다. 요구하는
몸값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그리 높지 않아서 남자는 한 사람당 닷 냥, 여자는 석 냥 정도이고
양반 몸값 역시 아무리 높다 해도 열 냥을 넘지 않았다.
이 가격은 정묘호란을 기준으로 매긴 가격이었다.
그런데 돈 많은 조선 사대부들이 자신의 가족을 하루라도 빨리
빼오려고 높은 값을 치렀고, 이에 따라 매매가가 높아졌다.
좌승지를 지낸 영중추부사 이성구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1500냥,
영의정 김류는 딸을 구하는 데 1000냥을,
병조의 사령 신성회는 첩을 위해 600냥을 냈다.
높은 속환가에 낙담한 피로인 가족들은 세자가 머무는 심양관에 몰려가 이 문제를
조정이 직접 해결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청나라도 조속히 속환 문제를 마무리 짓고자 공인되지 않은 속환은 허락하지 않겠다고 약속. 이에 조선은 ‘속환사’를 두어 속환 절차 및 방법을 강구.
속환은 가족이 속환사를 따라가 개인의 재산으로 속환해 오는 사속,
사속을 원하지만 속가가 부족해 그 일부를 나라에서 보조받거나 대여받아 속환하는 반사반공속, 국고에서 속가를 전액 부담하는 공속이 있었다.
공속의 대상은 종실 및 그들의 호위 군사와 처자로, 소수에 불과.
다음은 속환가를 정해야 했다. 최명길은 속환 가격이 100냥을 넘지 못하게 규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닷 냥이고, 농촌의 하루 품삯이 한 냥이었다.
제법 많은 액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이 속환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불한 이성구가 첫 번째 속환사로 임명되었으니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양측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공식적인 속환가를 정하지 못하고 시장 논리에 따라 가격을 매겼다.
성인 남녀는 150냥에서 200냥이 제일 많았고,
어린아이는 100냥 미만, 양반의 속환가는 500~600냥 정도에 형성되었다.
공속이든 사속이든 속환 순서는 남자가 우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리 높은 몸값이라도 지불해야만 했다.
장남들이 제일 먼저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효 사상에 충실한 조선인들은 다음으로 부모님의 신주를 돈 주고 샀다.
청나라에서 효심을 이용해 죽은 사람까지도 한 사람 몫으로 쳐서
팔았기 때문이었다.
딸이나 부인은 나중에 돈이 마련되는 대로 데려와야 했다.
공속에 해당하는 여인은 아주 적었고 대부분 반사반공속에 의존했는데, 국고가 바닥난
조정에서 완벽하게 지원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몸값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여인들이 낙담하여
자결하는 사건도 더러 발생했다.
여자들이 고향에 돌아올 수 없던 또 하나의 이유는 본인의 선택이었다.
인질로 끌려오는 동안 성적 노리개가 되거나, 심양에서 첩이나 창부로 팔린 여인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빠졌다.
더렵혀진 몸을 지아비가 반겨줄리도 없지만 본인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죽기도 두려워서 결국 청나라에 주저앉기로 결심.
일부는 청나라 사람의 아이까지 낳아서 더욱 돌아갈 수가 없었다.
북한산의 사모바위가 된 청년의 약혼녀도 어쩌면 이러한 연유에
해당되는 경우는 아닐까?
1645년 3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힌 지 9년 만에 귀국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 비록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충분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속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 피로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10년 동안 조선에 환속한 여인은 2만 5000~ 5만 명으로 추정된다.
20만 명에 이르는 여성 중 2/3 이상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는 여인들은 드디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 중 1만 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 끊는 비극이 그토록 그립던 고향에서
일어날 줄 어찌 알았을까?
물론 압록강을 건널 때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사대부가 여인일수록 그 불안은 더욱 컸다.
그래도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이기에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홍제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지금의 홍제동, 남가좌동,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환속한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조정에서는 한양뿐만 아니라 각 고을의 강과 하천에서 여인들의 몸을 씻게 했다.
유독 여자들에게만 씻으라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속환은 1638년 2월 말에 있었다.
최명길은 세자의 귀환, 징병, 그리고 피로인 속환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1637년 9월 심양으로 떠났다.
그의 수중에는 국고 2500냥거금이 있었다.
심양에서 청 태종은 성문 밖까지 나와 최명길 일행을 맞이했다.
최명길은 황제에게 위의 세 가지 문제를 간청했다.
청 태종은 세자의 귀국은 불허했지만, 아량을 과시하려고 나머지 두 가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심양에서 새해를 맞은 최명길은 세자와 대군에게 절하고 고국으로 향했다.
이때 거의 3만 명에 육박하는 피로인이 최명길과 동행했다.
이 어마어마한 행렬은 조선 강토를 들뜨게 했다.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가족 친지들이 대거 돌아오면서
해후의 기쁨을 누렸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도 헤어진 가족을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피로인 중 여성들을 향한 환호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며느리, 아내, 누이를 맞이하는 조선 남자들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그녀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지 않았다.
조선의 예법을 어겼으나 사대부들의 잘못으로 죄없이 애꿎은 여인들이
희생을 당하고 돌아왔기에 사대부 가문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속출했다.
이 불편한 감정을 처음으로 드러낸 이는 '장유'였다.
최명길의 대규모 속환 행렬 속에는 강화도에서 피랍된 '장유'의 며느리가 있었다.
며느리는 시댁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정에 머물고 있었다.
장유는 1638년 3월 11일 인조에게 진정서를 올렸다.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강화도 참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 친정집에 있습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아들이 이혼하고 새로 장가 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 이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장유는 조선 17대 임금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아버지이자 인조반정의 공신,
사대부를 대표하는 명문가 집안의 수장이었다.
이 진정서에 차마 ‘며느리의 몸이 더러워졌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다른 사대부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사실 장유는 최명길과 함께 대표적인 주화파였고, 평소 주자학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하는 데에도 앞장 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여인의 정절에 관해서는 한 치 물러섬이 없었다.
그런데 장유의 진정서와는 반대 내용의 진정서가 비슷한 시기에 접수되었다.
“제 딸이 청군에 사로잡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원통해 못 살겠습니다.” - 승지 한이겸.
조정에서는 환속한 여인, 환향녀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사실 환향녀 문제가 이때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비슷한 상소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선조는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어명.
그러나 선례가 있었음에도 인조는 결정을 주저했다.
신하들의 도움으로 옥좌에 앉은 그의 권위는 여느 역대 왕보다 취약했고,
더욱이 장유는 자신을 임금으로 내세운 공신.
그리고 장유의 주장이 조선 사대부의 속마음을 대변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선왕의 교지를 내세워 ‘이혼 불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하,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오나, 이는 스스로 음행을 자행한 것이 아니옵고 극심했던 전락과 적지에 인질이 되었던 만부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신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나라가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물정으로 참작해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 환속한 아내와 이혼시켜 달라는 상소에 대해 최명길이 인조에게 한말 -
그러나 최명길의 입장은 소수였다.
《인조실록》에서 사관은 최명길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고,
이 논평은 당시 사대부 대부분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이 문제가 공전을 거듭하는 동안 환향녀들의 불안은 깊어졌다.
이윽고 버림받은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궁궐에 전해졌다.
인조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최명길의 논리는 반박할 수 없을 만큼완벽했다. 결국 인조는 장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부는 자신들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두달 후 다시 이혼주장 제기.
특진관 조문수.,상소,
“부부는 인간의 대륜입니다.
포로로 잡힌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어찌 다시
억지로 합해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은 예의의 나라인데··.”
인조는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이미 본심이 아니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
라며 “더는 재론하지 말라.” 하고 매듭지었다.
임금의 두 번에 걸친 확인에도 불구 사대부들은 환속한 부인들을 홀대하고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며, 첩을 두기도 했다.
이 와중에 조정에서는 전쟁 중에 자결한 여인의 집안에 열녀문을 내렸다.
이는 다른 사대부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임금의 엄명 때문에 이혼하지는 못했지만 환향한 부인과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는 쌀쌀맞아졌다.
이를 지켜보던 최명길은 인조에게 궁여지책을 진언. 날을 정해, 환향녀들이 각 고을마다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으면 심신을 모두 정화한 것으로 보고 각 집안에서
따뜻하게 맞이하도록 전교를 내리자는 것이었다.
나라가 환향녀 정절을 회복시켜 주자는 일종의 ‘면죄부’였다.
인조는 즉각 수용해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 환향녀가 많아지자 조정에서는 청천강, 낙동강, 섬진강을 추가 지정.
국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전에 없이 추상같은 어명.
한양과 경기도가 고향인 환향녀들은 한강 지류 홍제천 깊숙한 곳에서 씻었다.
홍제천(모래내)는 물이 맑기로 유명했다.
병자호란 희생이 가장 컸던 곳이 한양과 경기도였던 만큼 홍제천은 발 디딜 틈없이 몸씻는 여인들로 북적.
절개를 지키기 못한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구석구석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녀들은 자신을 구제해준 임금님의 넓은 은혜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홍은’이란 지명으로 불렀던 것.
* 홍제원(弘濟院).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지역에 있었던 원(院) 고려~조선'시대 역원제 실시로 공무여행자에게 편의제공을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공무여행자 숙소.
중국으로 향하는 의주로에 위치하여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원이었다.
공관이 별도로 있었고, 누각도 있었다.
서대문 밖 무악재를 넘으면 동편에 위치. 도성과는 가장 가까운 의주로상 첫번째 원.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중국사신들을 위한 공관을 따로 지어 유숙.사신들이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등 도성 안으로 들기 위한 준비를 갖추던 곳이었다. 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언제 건물이 없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병자호란 ~ 청일전쟁'까지., 청나라 사신 숙소.
장유의 며느리도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부푼 마음으로 비로소 시댁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버려진 여인들,국법까지 언급한 왕의 엄명에 사대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환향녀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다.
돌아온 여인들을 별당에 처박아놓고 식솔들은 출입을 금지.
그리고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집요하게 올려 임금과 최명길을 압박했다.
“저 부인들이 의지할 곳을 잃는 것은 참으로 불쌍하지만 남편의 후사가 끊기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부인은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남편도 또 재취하지 못한다면 피차가 모두 홀로된 것을 원망하는 신세가 될 것이니 양쪽 다 막는 것보다는 한쪽이라도 허락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 역적의 딸도 이혼하게 하는 예가 있는데 지금 이 오욕을 입은 부인은 역적 집안의 자손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리가 몹시 절박한 자는 사유를 갖추어 상언하여 교지를 내려 이혼하게 하면 중도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영중추부사 이성구 상소에 인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반전은 회절강 어명이 있은 지 2년 뒤에 일어났다.
1640년 9월에 장유의 아내, 즉 시어머니가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
남편 장유가 살아 있을 적에 아들 선징의 아내가 청나라에 잡혀간 것을 속환금을 내고
찾아왔잖습니까. 그런데 청에 잡혀가 오욕을 당한 며느리와 아들이 그대로 다시 부부가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는 없는 것이지요.
2년 전 남편이 죽기 전에 이런 이유로 이혼시켜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제가 지금 재차 단자를 올리는 까닭은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돼서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청나라에 끌려갔다 온 뒤로는 더욱 편치 않게 행동해서입니다. 이는 칠거지악에 해당되니 이혼시켜주시기를 거듭 청합니다.”
즉, 이번에는 환속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의 행위를 저질렀으니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시어머니의 본심을 전혀 들추어내지 않고 칠거지악 만을 강조했다.
이에 인조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장선징이 훈신의 독자임을 고려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 교지.
비슷한 상소가 계속 올라오는 것을 경계하여 “관례로는 삼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은 칠거지악을 이유로 환속한 며느리를 내치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은 결국 이혼을 금지한 선대의 지시를 폐기해야 했다. 봉림대군 시절에 인질로 끌려갔던 터라 누구보다 환향녀의 심정을 잘 아는 그였지만, 빗발치는 신하들의 상소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환향녀에 대한 사대부들의 태도는 일반 평민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임금의 지시 없이도 이혼할 수 있었으므로 환속한 아내와 며느리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환향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이는 본디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였으나,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정절을 잃지 않은 여자들도 환향녀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손가락질은 집안에서 시작돼 동네 전체로 번졌다.
환향녀의 이빨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없도록 한
마을도 있다고 한다.
'버림 받은 환향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출가외인’이라 친정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에서 정절을 잃은 여자들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첫 번째 선택은 삶을 끊는 것이었다. 우물에 몸을 던지고,
시댁과 친정이 보이는 동구 밖 큰나무에 목맨 환향녀들이 즐비.
이혼당하지 않고 별당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던 여인들은 방 천장에 명주실을 내리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찔렀다.
아예 집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회절강에 몸을 던졌다.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그녀들의 ‘한’은 전설을 낳았다.
원귀가 되어 시댁 식구들을 몰살했다는 내용이 대부분.,'환향녀 전설'.
환속한 지 1년 만에, 죽은 여성은 1만 명이 넘었다는데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자결한 환향녀의 기구한 사연없는 고을이 없었다.
차마 죽을 용기가 없는 환향녀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다른 남자와 깊은 밤에 도주하거나, 유객에 머물며 환향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술과 몸을 팔았는데 홍제천이 가까운 탓인지 서대문 밖에는 환향녀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다.
심지어 청나라 심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도 많았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곳이지만 동병상련을 겪는 사람들이 있고
생지옥 조선보다는 살기 편한 때문.
환향녀 스스로 돌아간 것이므로 발뒤꿈치가 잘리는 무서운 형벌도
면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그녀들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혹은 조선을 떠났다.
그러나, 이승을 떠난 이후에도 환향녀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동구 밖에서 죽은 여인들의 주검은 아무도 모르는 임야에 아무렇게나 매장.
별당에서 자결한 여인을 오히려 ‘열녀’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사대부들도 있었다.
매우 드물게 온전하게 지내는 환향녀들도 있었으나 그 또한 죽은뒤 집안에서 내쳐졌다.
숙종 3년(1677년), 사헌부 소속 최선이 자기 어머니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상소문.
최선의 어머니 권씨는 최계창 후처로, 병자호란 때 환속한 여인.
최 씨 집안은 그녀를 전혀 홀대하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도리어 권 씨를 가문의 종부로 들여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전처의 아들인 최관에게도 “네 어미로 섬기라.”라고 당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계창이 죽고 곧 이어 권씨가 사망하자., 작은 아버지가
“권씨 신주를 집안 사당에 둘 수 없다.” 선언.
1649년(인조 27)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인조가 의식을 잃었다.
세자가 달려와 약지를 깨물어 입에 피를 흘려넣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옹색한 55세 평생을 상기한다면 누구도 깨어나지 않길 바랐을 것.
인조( 1595-1649, 재위 1623~1649 ).
광해군( 1575-1641, 재위1608∼1623 ).
인조는 삼촌 광해군보다 8년 더 살다 갔다.
그리고, 조선시대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대부들의 이율배반적 민낯이 이렇게 추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반만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또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희생된 여성들을 보듬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사지로 내몰았다. 사대부들이 떠받든 유교관은 인간의 도리를 추구.
삼강오륜은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 그중에 하나인 ‘부부유별’은 남편과 아내에게
각자 본분이 따로 있으니 이를 잘 헤아리라는 말.
그런데도 유교를 이유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환향녀를 거부.
이보다 비극적인 자가당착도 없었으리라.
병자호란 때 환향녀(還鄕女)를 유일하게 감싸안은 대신 최명길
* 최명길(崔鳴吉 : 1586 ~1647).
병자호란은 우리나라 2대 전란에 속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7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병자호란은 48일 간이었는데도 피해가 컸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에는 항복한 일이 없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군신 맹약을 맺는 치욕의 항복. 이를 수습한 그는 역사에서는 주화파라고 부른다.
"나는 척화파도 주화파도 아니다."- 최명길. 1637년 인조는 '난국을 수습하라.'는 뜻으로 그를 정승의 반열에 올리고 영의정을 맡겼다.
그는 인질로 끌려간 척화대신과 포로 석방을 교섭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독보라는 승려를 명나라에 보내 그쪽 정세를 살피게 했고, 쫓겨온 명나라 군대를 도와 주었다.
그는 최고 관직에 있으면서 동분서주 뒷수습.그의 계책은 청나라 첩자에 의해 모두 발각된다. 청나라는 조선 조정의 동정을 환하게 꿰고 있었다.
하여, 1642년 그는 청 수도 선양으로 끌려가 김상헌이 갇혀 있는 감옥 옆에 갇히게 되었다. 2년간 고초를 겪은 끝에 김상헌과 함께 풀려났다.
청나라는 그들이 풀려날 때 청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끝내 절을 안 했지만 최명길은 서슴없이 절을 했다.
그는 외형 따위에는 구애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마음을 믿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철학은 바로 양명학을 수양한데서 나온 것으로 평가된다.
선양에서 돌아온 그는 현직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저술에 몰두하며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시국이 조용해지자 다시 그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오랑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요, 명과 의리를 저버렸다는 따위 비난.
이와 달리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는 우러름을 받았다.
김상헌 일파는 이념논쟁보다는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최명길은 외로운 말년을 보냈지만, 조선시대 명문장가.
그와 늘 뜻을 같이한 장유는 그를 알아주었지만 그보다 일찍 죽어 더욱 외로운 만년을 보냈는데 그가 죽고난뒤 그의 후손들은 이런 비난 때문인지 척화파와 당파를 달리했다. 곧 척화파의 후손들이 대부분 노론이 되었을 때 이들은 소론이 되었던 것.
이들 후손들은 양명학의 계통을 이었고 뒷날 강화학파(江華學派) 줄기를 이뤘다.
척화파와 주화파,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감히 우리 후세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외침에 무너지면서도 명분 만을 먹고 살 수 없는 것이요,
국력을 기르지 않고 기개만을 떠들어 보아야 나라를 파멸로 이끌고 말 것이다.
최명길은 광해군을 몰아내는 대열에 섰지만, '실리와 타협' 광해군의 외교를 계승한 외교가. 그는 외침에 적절히 대응하는 외교전통을 세웠다.
전란에 대한 풍부한 내용이 담긴 시문집, 그의 '지천집'은 다행히 온전히 남아있다.
그의 묘소는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고 1702년에 그의 묘소 앞에 신도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