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엔 '김이나의 작사법'과
'사진에 미친놈, 신미식' , 이란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현재 두 분은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 받아
작품 가격이 상당한 것으로 압니다.
매체 등에도 자주 소개가 되어 유명 하고요.
김이나 씨는 싱어게인이란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나와
심사평을 글을 쓰듯 말을 해서 관심이 갔던 인물이었습니다.
마침 책이 눈에 띄어 읽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작사했던 곡들의 소개와
더불어 에피소드 등을 함께 서술해서 술술
읽어지는 책입니다.
소개된 곡이 궁금하면 유튜브 화면을 열어놓고
찾아 들으니 재밌는 책읽기가 되더군요.
발표된지는 오래전이지만 이번에 알게 된
몇 곡은 다운 받아 폰에 저장했습니다.
만일 작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신미식 사진작가, 하면 자연스럽게 '마다가스카르'가 떠오릅니다.
우리나라에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를 사진으로 소개한
작가이며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의 나라인지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저한테는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밥 나무의 다양한 사진들을 보면서
가보고 싶은 소망을 품게 한 분입니다.
효창동에 마다가스카르란 간판을 걸고
갤러리카페를 운영해서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카페를 오픈하게 된 이유는 형편이 안되는
이들에게 무료로 사진 전시회 할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작가가 사진이 찍고 싶어 무작정 첫
외국 여행지로 파리를 갔을때 무섭고
숙소를 찾지못해 공중전화 부스에서
밤을 지샌 기억 때문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공중전화 박스를 두었고,
들고 다니던 각종 카메라와 소품들이
꽤 있어 구경거리가 많아 좋아했던 카페였습니다.
동네 재개발로 작년에 문을 닫았지만요.
양평인가에 작업실이 있는데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더군요.
아주 오래전부터 독자로 좋아하던 분이고
작품과 글이 낯설지 않아서인지
작가의 성장과정과 사진에 대한 철학을
풀어놓은 글이 쉽게 읽혀졌습니다.
지난한 시간을 거쳐온 작가의 삶을 읽는데
간혹 가슴 저릿하고 뭉클하더군요.
그중에서 엄마와 관련된 내용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제 또래나 몇 살 위인 분들이라면 공감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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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난한 집 1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43세의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머니의 한숨소리를 듣고 자랐다.
형제가 많다 보니 밤낮으로 자식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한숨이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라도 엄마 속 썩이지 말아야지.’
그런 내가 정작 고등학교 전기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후기 고등학교에 응시했는데 그것도 경쟁률이 5대 1이나 되었다.
그날부터 어머니가 나보다 더 애를 태우며 걱정을 하셨다.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에도 떨어지면 아버지에게 쫓겨나 집에 들어오지도 못할 텐데...”
사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옆에 있던 친구가 어머니를 보고는
“야, 너희 할머니 오셨다.”라며 나를 놀려댔다.
그날 이후 나는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게 너무 싫었다.
학교에서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면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어머니가 학교에 못 오시게 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오시는 게 싫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도 어머니가 오시지 않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어머니는 입학식 전날 푸른색 한복을 꺼내서 동정을 달고
고무신도 짚수세미로 깨끗이 닦았다.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는 아끼는 한복을 차려입고
은비녀를 꽂은 모습으로 입학식에 나타나셨다.
한복을 입은 62세의 어머니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교복을 입고 중간 정도에 서 있던 나는 어머니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찾느라 입학식 내내 두리번거리셨지만,
나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모른 체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줄을 지어 들어가는데
어머니만 혼자 스탠드에 남아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교실로 들어와 자리를 정해 앉았는데 하필 내 자리가 창가 쪽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교문을 나서서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막내아들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시는 어머니가 짠하게 느껴졌다.
선생님께 어머니한테 인사하러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교실을 나왔다.
언덕을 뛰어 내려가는데 마구 눈물이 났다.
‘내가 나쁜 놈이구나.’
“엄마!” 어머니가 뒤돌아 나를 보시더니
한복 속주머니에서 껌 한 통과 꾸깃꾸깃한 돈을 꺼내 주셨다.
그때 돌아오면서 또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앞으로 엄마를 절대 창피해하지 말자.’
고등학교 1학년이 되고 나서였다.
어느 날 우연히 실내화를 직접 빨아보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보기보다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엄마가 모두 하셨구나.’
그간 우리 13남매의 빨래를 모두 해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에게 빨래를 숨기고 살았다.
청바지, 운동화, 양말을 모두 감춰두었다가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몰래 빨았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보이지 않는 사랑을 시작했다.
철없는 막내의 작은 변화인 셈이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는 매년 4월이면 백일장을 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일장의 주제는 보통 5월 8일 어버이날에 맞춰
부모님에 관한 것으로 정해졌다.
중학생 때는 원고지 매수를 채우느라 힘들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나도 놀랄 정도로
원고지 60매를 순식간에 채울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아들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에겐 늘 안쓰러운 존재인 막내의 심정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백일장에서 덜컥 장원이 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글을 써서 상장을 받았다.
분명 그 상장은 어머니가 나에게 주시는 선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내가 글로 상을 받다니...’ 80~84쪽
첫댓글 뭉클 입니다 대장님~~♡
온겸 대장님 글 흔적 고맙습니다.
편안한 오후 시간 되시길요.
아궁...
신미식 작가의 글보고 눈물이 한웅큼
떨어지네요.
엄마의 지극한 사랑.... ^^
마가렛 대장님 ㅜ
더 애틋한 사연도 많아
읽고 나서 살짝 우울했어요.
대장님 글을 보니 저도 회한이 밀러드네요.
아버지 쉰,45에 낳으신 어머니의 품속에 꼭 매달려 큰 막내인 저는 내리사랑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너무나 당연한 걸로 받아드린 철부지였지요.막내인 내가 환갑되던 해에 돌아가시자 비로소 어머님이 얼마나 큰 존재였던가를 알게 된 붏효막심한 놈이 보름달만 보면 지금도 눈물이 줄줄 흐르곤 한답니다.(당신 생신이 음력 9월 보름여서)그날부터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답니다.어머님을 만나러 갈 테니까요.
저는 글솜씨가 없어 길게는 못 쓰지만 어머님에 대한 글은 몇번 고교 카페에 올린 적이 있답니다.그만큼 제 삶에 가장 큰 자리를 마련해주셨기에요.잘 쓰신 글 고맙습니다~~대장님!
선배님
늦둥이셨군요.
진달래가 떨어지고 있는데.... 산에서 또 시한수 읊프시는 모습 그리워 집니다.
둡시다님 댓글을 읽는데...
제가 감히 뭐라 답글 쓰기가
조심스럽네요.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란 걸
그동안 느껴왔습니다.
비가 많이 내립니다.
꼭 읽어봐야지 ....
엄마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지는 이야기,
철없던 막둥이가 철들어가는 이야기..
궁금해지네요.
오늘도 감사한 맘으로 배워가요.
저는 사진 때문에 알게 된
작가인데 훌륭한 업적이 많아요.
한 예로 수익금으로
농촌 어르신들 영정 사진을 무료로 액자까지 해서 드리고
아프리카 학교에 지원도 해주고..
감성이 뛰어난 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