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계를 알기 전에 조선시대의 정치조직과 성리학의 사상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조선 건국은 전주 한옥지구 오목대 경기전에서 태어난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부터 시작된다.
이안사>이춘>이자춘>이성계로 이어지는 조선은
이춘이 함남 영흥에 있는 몽골의 쌍성총관부 총관(다루가치) 조휘의 손녀와 결혼하면서
이춘이 천호장이 되어 이자춘,이성계로 이어진다.(조휘는 한양조씨의 시조 조지수의 아들)
이성계는 숙여진족이 함경도로 들어와 야인족이 되어 고려의 통제를 받던 퉁두란(이지란),
주매, 금고, 시첩목아, 허난두, 최야오내 등 10여 가문의 여진족 후예인 야인족을 등에 업고 성장한
이자춘, 이성계로 이어지며 조선이 건국된다.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함경도 여진족 세력은 한문을 몰라 등용되지 못하고
이지란 등 몇몇만이 정계에 진출한다.
(야인족은 함경도에서 귀족으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것으로 만족함)
고려시대 관료들이 여전히 자본과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조직으로 쇄신한다. [생여진(건주여진), 숙여진(란주여진)/야인족은 국정문자를 사용함]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치루기 전 여주, 이천(이서군), 전주로 조영무 등 사람을 보내
한양으로 끌어가 정도전 등을 살해하고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태종으로 등극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이 시작된다.
조선 훈구파 정권의 권력 독점으로 조선의 발전이 더디게 진행된다.
조선의 발전이 훈구파로 인해 더디게 진행되자 동인, 남인 등을 출사시킨다.
훈구파에서 서인으로 이어지는 서인정권에서 동인, 남인의 무장들은 북방의 변방에 등용시킨다.
이일로 인해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선조시기의 정치구조는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송익필, 윤두수, 정철, 김장생, 김집, 김류, 이귀, 이서, 신경진, 정엽,
윤선거, 송시열) -충북 옥천의 노론학파로 이어짐. 정주학[태극설]신봉학파. (양광도 서인 노론학파)
서인 주자학 중도파(성혼,조헌)-한성, 광주, 김포.- 충남 논산 노성 윤증의 소론학파로 이어짐.
서인 주자학 개혁 혁신파이자 주기학파/이이, 이항학파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박순, 김인후 등 40여명)-
개성, 파주, 강릉, 호남 전주,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식 개혁학파 [근대 이성철학파].
동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인 양광도 주리학파/이황학파 (이언적, 이황, 이산해, 류성룡, 김성주, 김성일)
-정이학[무극론/음양오행론]신봉학파.
경기 동부, 충청북부, 충북, 강원 서남단 영월, 경북 서북부 지역이 양광도이다.
동인 사림파(김종직 (밀양), 김굉필(대구), 정여창(함양), 김일손(선산))- 영남 중심학파.
동인(북인/대북) 조식학파(조식, 정인홍, 이이첨, 곽재우, 김우옹, 정구, 이달)-합천, 산청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학파. [노장철학,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
동인 윤휴학파(윤휴,허목)-동인에서 류성룡 계보를 이어 남인 윤휴학파로 분화- 주리철학적 개혁학파.
청소북>청남학파(청도~청송/남이공, 청풍/김신국)>허목학파로 이어짐.
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인 남인 허적학파로 나뉜다.
소북 [유영경, 유희분, 박승종(밀양)>탁소북>탁남학파(진주이남 마산, 창원, 진해, 거제)>
>허적학파로 이어진다.
선조시기는 조선 성리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주기학파와 주리학파와의 대립에서 사단칠정 논쟁과 이기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며
정국 주도권을 쥐고 근대화를 이룩하느냐 고대의 전통을 이어가느냐의 한판 싸움이었다.
주자의 주리론을 주기론으로 뒤집어버리고 주기설을 주창한 서경덕은
성리학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일대 혁명적인 성리학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신과 같은 주자의 주리론을 뒤집어버린 사건은 정치적으로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개성에서 제자들만을 키워내고 있었고,
이이 역시 파주에서 제자들만 길러내는데 치중하였다.
서경덕이 주기론을 최초로 주창하였다면 기대승은 사회 이성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주정설로 설명하며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내놓으며 주기론에 힘을 실어주며
이황과의 사단칠정 논쟁으로 이론적 확립을 시키게 된다. (기대승은 이론적 확립자)
주자학 안에는 도교적인 학문이 있었는데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이 노장철학의 영향으로
형이상학적인 학문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주기학파는 정이학, 정주학, 예학을 주자학 내에서 파내버리고 퇴출시켜
근대식 개혁을 하려던 근대 이성철학파였다.
이 학문 때문에 백성들은 점, 굿, 무당 푸닥거리, 정한수 띄워놓고 기도하기, 자연신, 산신, 바람신,
구름신,바다신 등의 샤머니즘과, 곰,호랑이 등 동물 숭배사상의 토테미즘,
주술, 주역/역술, 사술[사주, 관상], 도술[도참설], 예언, 예언서, 풍수지리, 토정비결, 저주 등의
도교적인 학문, 탑돌이 등 불교사찰에 가서 시주하기, 파계승들의 사이비 종교 등으로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 백성들의 의식은 정체되어 있었다.
고려말 멸망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100년 간의 무신정권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말세기적인 현상이 일어나
고려 백성들이 샤머니즘, 토테미즘, 도교, 불교에 의지하여 시주 돈을 모두 가져다가 바치자,
고려의 시중경제는 돈이 돌지않아 메말라갔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었었다.
사이비 교주들은 금고에 돈을 쌓아놓기만 할뿐, 고려경제를 돌릴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고려민들을 이끌어주길 바랬고,
이성계, 이방원은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통해 조선을 개창할 수가 있었다.
그 대립적인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 사회구조는 필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이유였다.
정도전이 추구하는 이상주의적 성리학국가는
이방원이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성리학국가에 필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선조시기에 주자의 주리론을 반대하고 서경덕[성종~중종]이 주기론을 주창하면서
기호사림파를 이어 주자학개혁, 혁신파인 주기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기대승이 주기론에 힘을 실어주고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내놓으며 사회 이성철학을 완성하자,
역시 이이가 기대승 이론에 힘을 실어주고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을 내놓으며 종교 이성철학을 완성한다.
주기학파는 주자학 안에 있는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의 도교적인 학문을 퇴출시키고
근대화하려던 학파였고 주리학파인 이황학파는 결사 고수하려던 학파였다.
이황은 정이학 신봉자였다.
주기학파와 주리학파 간에 치열한 사단칠정 논쟁(기대승vs이황), 이기논쟁(이이vs이황) 대립이
펼쳐지면서 정국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해 논쟁이 펼쳐진다.
1580년대 주기학파가 승리하여 성혼, 박순(영의정) 등이 권력을 잡자,
성혼의 중재로 주기학파 박순과 함께 동인과의 협상으로
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으로 협상을 완료한다.
이제 제자들만 길러내어 근대화시키면 지구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룰수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십자가를 목에 걸고 포르투갈 신부를 앞세운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부산을 침공하며 임진왜란을 일으켜 제1차로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게 된다.
[1560년대부터 기대승에 이어 1570년대 이항이 정읍 태인에서 수많은 호남 주기학파 문무관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조선 훈구파 정권은 동인을 출사시키면서
양광도 동인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영남 사림파, 조식학파, 윤휴학파, 허적학파로 이어지는 영남학파는
조선정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 양산 이징옥의 난 등으로 배척받음)
역시 호남 동부지방도 소외되어 있었으나 중종 때 사대사고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이성계가 남원 황산대첩을 치루고 회군하는 과정에서 진안 마이산을 보고 조선왕업을 개창할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호남 동부지방의 사람들이 출사하는 원인이 된다.
이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 전주의 정여립이었다.(정여립 본뿌리가 부산임)
정여립은 호남 동부지방과 영남지방의 권익을 위해 동인정권을 양광도 지방에서
호남동부, 영남지방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진안 죽도로 들어갔던 것이다.
호남을 끼고 영남으로 정권을 가져오려는 전략이야 말로 탁월한 전략이었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면서 영남지방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영남의 조식학파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고 조식 선생은 제자들을 정여립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이후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완주군 운봉면의 의연스님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나갔다.
정여립은 이이, 성혼, 박순, 이항 등의 주기학파를 비판하고 진안 죽도로 들어가
양명학에서 강조하는 실사구시 실천철학을 주장하였던 학파였다.
이황의 주리학파 계보에 이상주의적 성리학국가와 현실주의적 성리학국가를 동시에 추구하는 학파였다.
이이의 주기학파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정신 이성철학이 없는 사상누각과도 같은 학파였지만,
실사구시 실천철학을 실제로 구사한 학파였기 때문에 정여립의 사상은 인정을 받고 있다.
1587년 주기학파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탐색을 나왔던 왜군 지리정찰대를
대동계를 동원하여 토벌하므로서 동인권력은 양광도에서 정여립학파, 조식학파 연합으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조식 선생은 합천에서 산청으로 옮겨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정여립에게 보내자
양광도 동인권력은 호남동부, 영남의 합천, 산청지방으로 급속히 이전되기 시작하였다.
1589년 한강이 언틈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가 신립 대장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할 것이라는
황해도 관찰사 한준, 해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고변으로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관군에게 쫓기게 되자,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으나,
아들이 관군에게 죽고 포위망이 좁혀오자 죽도 폭포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서인 주도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이발, 백유양, 최영경 등 동인의 주요 인물이 체포되면서
제거되었으며 숙청된 인사는 1,000~2,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서인 송강 정철이 주도하여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의 앞잡이 역활을 하는
황해도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고변으로 서인 정철을 내세워 기축옥사로 진압하며
정여립, 이발, 백유양, 최영경, 정옥남 등 호남, 영남 동인 1~2천여 명이 죽어나가거나
유배 또는 파직되고 말았다.
정인홍도 이때 삭탈관직되어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광해군 때 무자비한 정치적 보복을 가한다.)
동인정권은 다시 양광도 동인 이황학파 이산해, 류성룡 등이 차지한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송익필을 엮어 송익필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송익필은 서얼출신이라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산해 등은 송익필의 약점을 십분 이용하였다.
15세기말 영남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자 훈구파 서인 영광유씨 유자광[남원]을 내세워 사림파를 진압하며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이는 갑자사화로 이어진다.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vs 영남 사림파간의 권력투쟁으로 서인을 내세워 옥사를 일으키고
양광도 동인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독차지한다.
이는 조광조의 기묘사화(70명)로 이어진다.
역시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는 서인 정철을 내세워 정여립의 기축옥사를 일으키며
사림파에 이어 일어난 영남 조식학파를 제거하며 동인권력을 독차지한다.
광해군 때 양광도 동인 이산해, 류성룡파와 조식학파 간의 권력투쟁에서
정인홍이 승리하여 이산해를 골북 영수로 밀어내고
소북의 유영경, 유희분 등을 누르고 계축옥사로 유영경을 사사하며 대북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유영경은 본뿌리가 전주유씨).
영남중 경북/경남 서부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낙동강 서안지방)가
최초로 광해군 때 권력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낙동강 동안 소북영수 유영경이 주리학파, 조식학파 등으로 부터 계축옥사로 사사당함.)
선조 때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당한 앙갚음으로 원한이 왜란에까지 미쳐
소극적인 의병활동으로 전환하였다가 광해군 때 정유재란 의병세력을 기반으로
동인권력을 차지하고 기축옥사로 당한 보복을 서인에게 해댄다.
조식학파는 노자의 도교철학, 장차철학, 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 신봉학파였다.
양명학에서 강조하는 실사구시, 실천철학파이기도 하였다.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을 성리학의 틀안에 넣어달라고 요구하였다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주자학 개혁파(주기학파), 동인 주리학파(이황학파)에게 거부당하고
성리학의 이단파로 취급을 받았다.
선조 당시 이황의 문묘종사 때 문묘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이황 등을 올리고 모시면서
이황학파의 제자들이 조식을 빼자 정인홍이 조식도 넣어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부당하고
생떼를 부리다가 청금록(유적)에서 삭제당하는 시비에 휘말린다.
성리학에서는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 철학은 인정되지 아니하였다.
이미 주자학 안에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이 노자의 도교적인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학문이라
더이상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이 성리학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최악의 폐쇠적이고 악질적인 학문이되어 변종학문으로 치닫고 말기 때문이었다.
이는 상고대로 회귀하는 사태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이상 주자학과 노장철학,제자백가 철학이 융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나친 "예학"에 제자백가 철학이 융합하면
그야말로 3년상이 아니라 10년상을 치뤄야할 정도로 패쇄적인 학문이 되어 버린다.
정이학 (무극론, 음양오행론)에 노장철학이 융합하면 초고대로 돌아가자는 소리나 다름없고,
정주학 (태극론/ 태극설)에 노장철학이 융합하면 자연과 무로 돌아가자(무위자연/ 만물일원론)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의리와 실천철학의 대명사인 제자백가 [백이숙제]철학이 융합하면 평생 의리를 지키면서
자연과 무로 돌아가 무위자연, 만물일원론 철학에 의리를 지키면서 실사구시 실천철학 하자는 소리나
다름없었기에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는 학문이 되어 버리므로,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은 성리학에서 인정되지 아니하였다.
제자백가 철학은 한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을 섬긴다는 철학으로 의리사상을 중시하는 철학이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에 의리를 지키려고 수많은 옥사를 일으켰고,
고대시대부터 가야, 신라의 순장제도가 존재하게 된 근본적 원인이었다.
동인에서 남인으로 갈라져 나가는 주리철학적 변종개혁파인 윤휴학파가
이황의 주리철학을 개혁하여 훗날 예학의 대가 노론학파 영수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매도되어 사사되고 만다.
윤휴학파 영수 허목 등은 예송논쟁에서 이겨 송시열을 유배보내고
결국 사약을내려 보복하게 되고 이이의 주기론과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이 성리학의 이단이라며
유직 등을 내세워 이이가 승려 출신이라며 맹공을 펼치고 보복하여 주기철학이
완전 몰락하기에 이르른다.
주리철학을 개혁시키면 변종개혁이 되어 주자학과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이 융합하는 학문이 되어
뒤죽박죽이 되고 고대로 회귀해버리는 변종학문이 되어버린다.
결코 주자학과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이 융합해서는 안되는 학문이었다.
남인 윤휴학파 허목 등은 집권한지 하루만에 효종을 독살하고 북벌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다.
남인을 잇는 홍성의 채제공은 윤휴학파의 철학이 정통이라며 평가를 내렸다.
그런 그는 정작 서자출신은 서류통청이라 하여 정계에 진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가
서자 출신들에게 맹비난을 당하며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당하는 사건을 당한다.
천주교에도 비판적이어서 천주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인 영수 채제공이 잘못된 평가를 내린 것임]
정여립의 사상철학은 아주 훌륭하였다.
정여립의 실수라고 한다면 이성의 정립이 없는 사상누각과도 같은 학파였다는 사실이다.
주기학파 vs 주리학파 간의 사단칠정 논쟁과 이기논쟁은 이성의 정립을 시키고
인격을 완성시키는 학문이었다.
조식학파는 사단칠정 논쟁과 이기논쟁을 공리공담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판하였던 학파였다.
가장 먼저 이성을 정립시키고 수양철학을 통해 이성을 회복시켜 인격을 완성하는 논쟁이었다.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송익필, 윤두수, 정철, 김장생, 김류,(송시열로 이어짐)는
"예"를 통한 도덕성 확립만으로도 이성이 회복되어 깨달음을 얻어 인격이 완성된다고 보았고,
동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인 주리학파/이황학파 이언적, 이산해, 류성룡, 김성일 등은
"서원"에서 수양철학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교육만으로도 이성이 회복되어
인격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서인 주자학 개혁, 혁신파인 주기학파가 완성한 이성의 상호 통제론과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된다.
광해군 때 대북정권은 성리학의 이단파 정권으로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 신봉학파였기 때문에
주자학에서 노자의 도교적인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을 퇴출시키려 하였던 주기학파는
정치적 보복이 무서워 현실론을 내세워 소나기는 피해보자는 심정으로 대북정권에
일시 협력하였다가 위축되어 2차로 몰락한다.
대북정권 때 주기학파가 2차로 몰락하고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양광도 서인정권은 주기학파 40여 명을
대북세력 200여 명이 유배갈때 3차로 몰락시켜 조선의 근대화가 완전사라지고 정묘, 병자호란을 맞는다.
서인정권은 양광도 옥천의 노론학파 영수 송시열로 이어진다.
주기학파는 유배지에서 심장이 타들어가는 시기를 보내며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주기학파의 영향으로 임진왜란 때 호남을 방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주기학파의 정신적 계승자인 이항이 정읍 태인에서 남언경, 김천일 등 다수의 문관, 무관제자들을 길러내었고,
1583년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 신립 휘하의 부장과 중소군장인 황박, 정담, 황진, 이복남, 김경로, 선거이,
송상현, 이순신 등이 주기학파 이항의 문하에서 수학을 받았으며 이순신은 주기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항은 서경덕의 주기설, 기대승의 주정설과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전파시키는데
최고의 역활을 한 인물이었다.
이항은 이이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며 활동한 실질적인 주기학파의 대부격이었다.
이순신은
1585년 조산보 만호, 녹둔도 녹도만호 종4품[대령급] 이순신이 니탕개의 잔당들이 침공해 올때
직속 상관 이일의 도주로 패전책임을 지고 1586년 잔당 소탕작전에 백의종군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순신을 발탁하여 조방장[종3품 장군급]으로 삼았다.
그후 1589년 선전관을 거쳐 1591년2월 서인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르쳤다는 상소공작으로
정권을 장악한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정권으로부터 직급 강등되어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되고
1592년 2월 임진왜란 발발직전에 비변사로부터 보직 변경되어 해남 고사리 첨사[종3품 장군급],
만포첨사, 진도군수 [호남 군수는 종3품 장군급]를 거쳐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 발발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해가게 된다.
이순신이 정읍에서 주기학파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은 맹자의 심성론, 천성설, 성선설을 기반으로 시작되는 학문이며,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철학으로
비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을 계몽하고 사회, 국가를 이성적, 경험적, 현실적, 합리적 방법으로
발전시켜 보자고 정립한 철학이었다.
그 근본은 바로 이성의 정립이고 이를 통한 인격을 완성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기학파의 철학은 서양의 근대 이성철학인 루소의 성선설, 사회계약설 등 근대 민주주의 이성철학으로
이어진다.
주기학파는 선조때 이미 근대 이성철학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성리학의 최종판은 선조 때 주기학파가 완성시키고 마무리 된다.
선조 이후에 시작되는 주자학은 죽은 학문이나 다름없었다.
인조때 주기학파가 유배지에서 사라지고 정치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조선은 더욱더 폐쇠된 조선으로 치닫고 만다.
일제 점령기에 가슴만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처자들과 기생들의 사진을 보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잘못된 주자학으로 조선을 이끌어왔는 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북의 등장으로 쇠퇴기로 접어들고 남인 윤휴학파의 등장으로 더욱더 폐쇠된 조선으로 치닫는다.
정여립의 대표적사상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민중군경(民重君輕)이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은 천하는 모두 공동의 소유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있으랴..로
군주제의 모순점과 평등, 분배사상이 담겨져 있다.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은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않는다"라는 말은 성현들의 통론이 아니었다"라고
군주제를 비판하였다.
여론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신분제 철폐 사상이 들어가 있다.
민중군경(民重君輕)은 왕위 계승에 있어서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 더욱 중요하다.
요(堯)·순(舜)·우(禹)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이 모범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투표선거제도를 통한 왕위 선출론을 담고 있다. (요, 순, 우임금이 백성들의 지지로 왕위에 오름)
조선시대 획기적인 사상, 사조로서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실제로 대동계는 신분차별을 두지 않았고, 이상주의적 성리학 사조를 중시하는
세상을 만들려하였다.(호남 동인의사상=이상주의적 유교국가+현실주의 채택)
이 사상은 훗날 실학사상의 근간으로 실학자들에 의해서 민권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정여립의 사상철학은 아주 훌륭하였으나
위의 것들을 실현시키려면 가장 먼저 이성의 정립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정여립은 이이, 성혼, 박순, 김인후, 이항 등을 비판하고 나가
사단칠정 논쟁과 이기논쟁의 이성 정립과정을 무시하는 바람에 패배하는 근본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성의 정립이 없는 대군양성은 사상누각과도 같으며 사냥꾼이 사냥을 끝낸 후
사냥개를 잡아 먹듯이 이성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끊임없는 군사반란과 권력투쟁으로
국민과 국가를 피로하게 할 뿐이었다.
그만큼 인격완성을 위한 이성철학의 정립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필수 과정이었다.
주리학파 이황학파의 철학은
인간성 회복주의, 도덕 원리주의, 서원주의, 이상주의, 신비주의 철학으로
주자학과 노장철학이 혼합된 철학이었다.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은 순자의 성악설로 이어지고 한비자의 법가사상, 신라의 풍류도로 이어지며
고려말 신진사림파 이규보, 이색 등의 영향으로 정도전의 이상국가를 거쳐 조선의 이황학파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사림파, 조식학파, 윤휴학파, 허적학파로 갈라지게 된다.
정여립학파는 서인 강경파에 속해 "구더기가 무서워 장못 담그나"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가오는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군양성을 우선시하였고,
이황의 주리철학에 주기학파의 현실주의를 채택한 학파였다.
실제로 실사구시 실천철학을 구사한 학파였기 때문에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광주지방은 무사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전주는 화마를 피해가지 못하였다.
대동계 설립의 근본목적은
양광도 주리학파가 보수파였기 때문에, 새로운 동인세력을 형성하여
조선을 개화시켜 근대화시키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고, 사림파의 몰락으로
호남 동부지방과 경상우도 낙동강 서안지방의 권익이 조선정권 내내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동인세력을 형성하여 양광도 동인권력을 호남 동부, 경상 서부지방으로
가져오는 것이 두번째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왜군의 침공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가지만
광해군 때 정인홍의 대북이 정권을 잡고 도학 남발로 수없는 옥사를 일으키면서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는 주기학파로 이어져 광해군의 대북정권, 인조의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40여 명의 주자학 개혁, 혁신파인 주기학파가 유배로 제3차로 사라지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는 완전 사라져 마무리 되고 만다.
남인 윤휴, 허목학파 때 효종이 등극하기 전 유직 등은 주기론이 성리학의 이단이라고 맹공격하여
주기철학 학문 자체가 완전 몰락해 버린다.
큰 전쟁이 터지기 전에 천재들이 등장하여 개혁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를 하고,
전쟁 세력이나 사이비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더욱더 폐쇠[幣衰]된 나라로 이어지는 역사는
전세계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공통적인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