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5장 죽음의 음향, 파도소리...! -1
"가가!"
"...!"
사라빈영이 기이한 열정이 일고 있는 눈을 들어 대담히 백리천을
직시했다.
"저, 저도 모르겠어요. 제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지...."
사라빈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음 순간 백리천의 가
슴으로 몸을 던져왔다.
"음...!"
백리천이 내심 신음했다. 생동하는 여체(女體)의 굴곡이 가슴에
전율을 남기고 있었다. 성숙한 여인의 체향(體香)이 백리천의 코
끝을 자극했다.
"가가!"
사라빈영은 백리천의 가슴에 안긴 채 몽롱한 음성을 흘려냈다.
"저는... 가가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녀는 소녀의 몸으로는 하기 어려운 고백을 대담하게 내뱉고 있
었다.
'훗! 중원의 소녀들과 달리 대담하구나!'
백리천은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경망되다고 하셔도 할 수 없어요. 허나...."
사라빈영은 일단 백리천의 가슴에 안기자 다음 순간 으스러져라
백리천을 꼭 끌어안으며 입에서 단내를 풍겨내고 있었다. 실로 대
담한 행동이 아닌가! 백리천과 그녀가 만난 지는 겨우 반시진이
흘렀을 뿐이었다.
백리천이 고개를 저으며 정색했다.
"영매...."
허나 사라빈영은 백리천의 말을 끊었다.
"가가, 아무말 하지 마세요. 소녀는 가가께서 무어라 말씀하셔도
가가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것은 불행한 일이오."
백리천이 사라빈영의 말뜻을 깨닫고 우울한 표정을 떠올렸다.
"나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과 같은 존재라오. 나
에게는 내일이 없소."
"그래도 좋아요."
사라빈영이 자르듯 말했다.
"저는 아침까지만이라도 가가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
백리천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매, 사람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다오. 당신과 나의 길은 결코
같을 수 없소."
"...!"
"그대는 막관의 대초원을 마음대로 활보하며 사는 것이 행
복일 것이오."
사라빈영이 한 손가락을 들어 백리천의 입술을 꼬옥 눌렀다.
"됐어요. 가가께서 저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 것 같으니 제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도 들었겠군요."
"훗!"
백리천은 사라빈영의 결심이 이미 굳어 있음을 느끼고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낭패가, 내가 무엇이기에 이 소녀가 나를 이렇게 따른단 말
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다 입을 열었다.
"좋소, 실은... 나도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외인(外人)으로 느끼
지 않았소."
"아아...!"
사라빈영이 더욱 백리천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허나...."
"허나...?"
"항차의 일에 대비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
"영매, 막천관으로 돌아가 있으시오."
"...!"
사라빈영이 놀람에 찬 눈을 들었다.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는
눈이었다.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이 취해야 할 행
동이오."
백리천이 정색하며 말했다.
"알았어요."
사라빈영은 어리석은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백리천에게 자신이
방해가 될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허나... 나에게도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후후, 걱정하지 마시오. 나의 일이 모두 마무리 되면, 그대가 오
지 말라고 해도 막천관으로 찾아갈 것이오."
"그 부탁이 아니예요."
"...!"
"좋아요. 저는 가가의 말씀대로 이길로 막천관으로 돌아가 가가께
서 찾아 주시기만을 기다리겠어요. 허나...."
"...?"
"그전에 저에게 해주실 일이 있어요."
사라빈영의 음성에 점차 기이한 열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입을... 맞춰 주세요."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할듯 망설이다 한순간 빠르게 내뱉은 후 눈
을 내리 깔았다.
'으음...!'
백리천은 가슴이 진탕되었다. 그의 눈에 당황과 경악이 스치고 있
었다. 그가 어찌 사라빈영이 이같은 요구를 해올 줄 짐작이나 했
겠는가?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사라빈영의 모습, 귀
밑까지 잘 익은 능금처럼 물들어 있고, 발의 뒤꿈치를 세워 한치
라도 백리천에게 가까이 대고 싶어하는 그녀의 이런 모습은 백리
천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일게 했다.
백리천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백리천의 뜨거운 입김이 다가오
자 사라빈영의 가녀린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아아...!'
드디어, 두 개의 입술이 합쳐졌다. 백리천은 자신의 입술로 사라
빈영의 꽃잎같은 입술을 덮었다. 사라빈영은 경악성과 함께 희고
가는 두 팔을 뻗어 백리천의 목에 매달렸다.
'이 여인이면... 나의 이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줄 수 있으리라.
나의 고뇌를 알아줄 수 있으리라!'
백리천과 사라빈영, 황금물결의 한가운데에서 깊게 포옹한 채 떨
어질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은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기
이를데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아쉬운 듯 포옹을 풀었다.
이때,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린 백리천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저것은...?"
백리천의 눈은 삼십여 장 밖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주시하고 있었
다.
"무슨 일이에요...?"
"후후...! 영매, 저 허수아비를 보시오."
백리천은 허수아비를 손짓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허수아비는 농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헌데 예의 허수아비의 이마 부근에는 기이하게도
녹색의 영웅건이 질끈 매여져 있었다.
"저 허수아비의 녹색 영웅건은... 농막에서 나에게 더욱 은밀히
알릴 것이 있다는 표식이외다."
백리천은 예의 허수아비로 다가가 녹색 영웅건을 끌러냈다.
'음! 이런 방법으로 연락한 것을 보니 매우 은밀한 연락인가 본
데....'
백리천은 소리로 전하지 않고 더욱 은밀한 방법으로 연락해온 농
막의 연락방법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아야! 천군단이 드디어 너 일개인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 쏟
고 있다. 천군단의 최정예라는 금천당(金天堂)의 고수들이 모두
출동해 너를 쫓고 있다.>
"금천당, 으음...! 금천당이라면 천룡군 휘하의 신비단체가 아닌
가?"
백리천은 나직이 침음성을 터뜨렸다. 영웅건의 왼쪽에 쓰여져 있
는 글귀는 이숙 각진걸이 보낸 연락이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너를 집요하게 죽이려고 하는 것은 결코 천
군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짐작컨대, 네가 천군의 후계자로 지목
된 것에 일곱 제자들이 너를 제거하려는 것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에 신중을 기하기 바란다.
천군단의 제이인자 천룡군은 심기가 매우 깊은 자이고 천군은 제
자들의 행동을 방관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천룡군, 후후...! 너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백리천은 각진걸의 서신을 모두 읽은 후 차가운 눈을 들어 황금의
대해를 직시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들이 나를 집요하게 쫓는 이유를 알았다. 내가 천군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천군의 일곱 제자가 천군에
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군!'
백리천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천군에게는 모두 일곱 명의 제자가 있고 그들 모두에게 천군단의
다음 대 지존이 될 자격이 있었다. 헌데 천군은 백리천을 지목했
으니 그들은 우선 백리천을 제거하고 차후에 다시 일곱 제자들의
후계자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이때, 돌연 백리천의 눈이 조용히 감겨갔다.
"빠르군, 벌써 오는가?"
사사삭삭!
백리천의 전면과 후면, 벌판을 메우고 있는 벼들이 각기 두 방향
에서 눕혀지며 두 가닥 직선이 백리천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
가!
허나 이것은 곧 네 갈래로 변했고, 다시 순식간에 여덟에서 열여
섯 갈래로 확산된 채 백리천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은은히 바다의 소리, 파도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
는가! 동시에, 백리천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의 눈에는 가공할
섬광이 창공을 활보하는 청룡의 기세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쏴아아...!
철썩!
은은한 파도소리, 그것은 바로 백리천의 전신에서 발출되고 있는
음향이었다.
"파도와 싸우며 바다 속에서 무공을 익힌 나다. 이제부터는 천하
가 나의 해파대설음을 죽음의 음향으로 인식하리라."
아아, 해파대설음(海波大舌音)은 곧 농막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연
락하기 위해 창안해낸 음공이 아닌가!
때아닌 드넓은 평야에서 파도소리가 들리고, 이것은 이후 천하를
경동시킬 죽음의 음향이 되었으니....
사사삭... 사삭!
백리천을 향해 다가오는 갈래도 순식간에 삼십육 갈래로 확산되었
다.
그러다 백리천의 삼 장 앞에 이르자 다시 칠십이 방향으로 나뉘어
지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일견해 매우 느린 듯 했으나 기실은 엄
청나게 빠른 것이었다.
"후후...!"
두루룩...!
백리천이 담담한 미소와 함께 우수를 뻗어 벼를 훑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수십 알의 낱알이 쥐어졌다.
쏴쏴아아!
철썩!
백리천의 전신에서 이는 해파대설음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파아앗!
일순, 새하얀 섬광이 천공을 달리는 뇌전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며
똑바로 백리천을 향해 폭사해왔다. 두 인영이 백리천의 앞뒤에서
번개치듯 나타난 것이었다.
"갈!"
백리천이 냉소했다. 동시에 그의 손목에서 새하얀 백사(白蛇)가
뻗어나가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바로 천산백리금사였다.
그 속도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리만큼 빨라 습격해온 자들의 공
세가 채 백리천의 일 장 가까이 오기도 전에 천산백리금사는 그들
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크아악!"
"으윽!"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다음 순간, 백리천이 차갑게 웃으며 손을
아래로 쳐냈다.
촤아아!
순간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백리천이 손을 아래로 쳐내리며 잡아당기자 천산백리금사 역시 그
의 손짓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끌려왔고, 그에 따라 천산백리금사
에 관통당한 이 인의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갈라지고 있지 않은
가!
엄청난 피(血)의 분사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실
에 의해 이 인의 몸이 허공에서 두 조각으로 분리되며 피의 무지
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헉!"
"저... 저럴 수가...!"
황금물결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습격자들의 경악성이 들려왔
다.
천산백리금사는 이미 백리천의 손목에 감겨 있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명품, 실로 무기로 대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
다.
사사삭! 사삭!
순식간에 무거운 정적이 찾아들었다.
백리천은 담담히 서 있었고 습격자들은 다시 벼사이에 몸을 숨긴
채 긴밀히 움직이며 미세한 음향만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믿어지지 않을만큼 신속했다. 벼들이 갈라지는
방향이 수시로 바뀜은 물론, 그 다가오고 있는 방향도 수십에서
몇개로 압축되었다가 다시 수십 갈래로 확산되며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었다.
"후후...! 금선탈각(金蟬脫慤)의 환신술(幻身術)! 허나...."
백리천은 조용히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벼들의 갈라지는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사삭!
쓰윽!
"나는 강렬한 태양을 마주보며 눈의 기(氣)를 기른 사람이다. 그
까짓 속임수로 나를 상대하려 했다면 돌아갈 것은 죽음 뿐이
지...!"
사사삭!
다가오고 있는 방향이 순식간에 삼십육 방위로 바뀌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같이 벼들이 갈라지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다.
'하나... 둘, 셋, 넷, 정확히 네 명이로군!'
사사삭!
습격자들의 방향은 백리천의 앞, 삼 장에 이르자 다시 팔십이방으
로 늘어났다. 허나 기실 그 수효는 팔십이 명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효는 백리천의 정확한 이목이 밝혀낸 수효, 바로 네명 뿐인 것
이다.
꽈꽈꽈아!
어느 한순간, 백리천의 사면으로 무서운 검기가 밀려들었다.
"훗!"
한 줄기 냉소를 흘린 백리천은 담담한 눈으로 손에 들었던 낱알들
을 돌연 입에 물었다.
"풋!"
기음, 그리고 엄청난 파공음이 터졌다.
쐐애액!
파파파파팟!
백리천의 입에서 벼의 낱알이 무서운 속도로 네 갈래로 폭사해 나
가기 시작했다.
"후후...! 내가 장님이 아닌 이상 너희들이 숨을 곳은 없다."
"크악!"
"아아악!"
백리천의 차가운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절한 비명과 함께 벼
의 대해(大海) 속으로부터 네 개의 신형이 펄쩍 뛰어 올랐다.
헌데 그들의 전신을 보라! 전신의 모든 사혈(死穴)마다에 한알씩
의 낱알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세, 세상에...."
이 광경에 사라빈영이 혀를 내둘렀다.
"헌데 왜 시신들이 튀어 오르지...?"
백리천이 천천히 사라빈영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그 무공의 특징이오."
'시체가 튀어 오르는 것이 무공의 특징... 그런 무공이 있었단 말
인가?'
사라빈영은 백리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춘추전국시대를 주름잡던 암기의 대가가 있었소. 일만암기(一萬
暗器)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그분의 명호는 귀기자(鬼機恣)
라 하오."
"귀기자?"
"후후...! 그분의 회의비사술(回回飛沙術)은 격중되면 무서운 고
통을 느껴 저절로 몸이 튀어오르게 되오."
- 귀기자(鬼機者).
금천대해궁의 구백칠십 다섯 번째의 황금기둥에 기록되어 있는 명
호.
그는 암기의 명인으로써 원래 귀기자의 회회비사술은 모래로써 펼
치는 무공이었다. 이것은 적중된 사람은 전신을 개미가 무는 듯한
간지러움과 뼈속 깊이 파고 드는 무서운 고통에 전신을 꿈틀거리
게 된다.
백리천의 설명에 사라빈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문득 그녀의
눈에 의혹이 솟아났다.
"헌데 누가 있어 가가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인가요?"
"영매는 알 필요 없소."
백리천이 담담히 말하며 멀리 들판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정작 혈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오. 산아!"
"예!"
멀리서 천해산이 구르듯 달려왔다.
"크흐흐, 드디어 천군단의 정예들이 출현하는 것입니까?"
백리천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크하하하, 드디어 천군이 분통이 터진 모양이군요."
천해산은 천군단의 정예들이 대거 달려오고 있음을 하나도 두려워
하는 빛이 아니었다.
"뜻밖의 고전을 겪을지도 모른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
는 자는 단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백리천은 얼굴을 굳히며 천공을 주시했다.
천공은 너무도 맑을 뿐이었다.
'고전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천해산이 흠칫했다.
"음! 대단한 놈들이 오는 모양이군요?"
백리천이 대꾸하지 않은 채 사라빈영을 바라보았다.
"영매, 잘 가시오."
"...!"
사라빈영은 입을 열지 못한 채 안타까운 눈을 들었다.
"산아!"
"예!"
"저 분을 옥문관까지 모시고 가라... 그리고 임무를 무사히 마친
후, 오호농정으로 오너라."
백리천의 담담한 말에 천해산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제 대혈전을 눈 앞에 두고 도련님이 나를 떼어놓으려 하
다니....'
그는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백리천은 이미 오십여 장을 걸어가
고 있었다.
"가가...!"
"도... 도련님!"
천해산과 사라빈영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
왔다. 허나 백리천은 이미 그들과 떨어져 아득히 먼 곳을 걸어가
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벼들이 대해처럼 펼쳐져 있는 화북대평야는 이별과 일인대
전(一人大戰)의 가공할 대혈전을 잉태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쏴아아...!
우르르...!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의 비는 결코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
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 빗 속을 지금 한 인영이 조용히 걷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지(草地), 녹색초원 위로 비에 젖은 채 미끄러지듯 나아가
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리천이었다.
"비..., 좋군."
백리천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손바닥으로 고였다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기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하게 보였다. 쓸쓸한 그의 눈
으로 멀리 아름다운 호수의 정경이 들어왔다.
"소호(巢湖)인가? 중원 오대호의 하나라 하더니... 역시 아름다운
곳이군."
백리천은 뜻없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
호농정의 대초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삼숙의 초지는 넓기도 하군, 벌써 십여 리를 왔는데도
초지만이 펼쳐져 있다니...."
이때, 멀리 한 채의 모옥(茅屋)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예의 모옥으로부터는 인기척과 여러 종류의 동물들 울음소리가 새
어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닭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소들, 여기에 돼지 등의 온갖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섞여 백리천이 다가갈수록 그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었
다.
"흠! 저곳인가? 이른바 황금에 팔려 온 자들이 저곳에서 나를 기
다리고 있단 말이지?"
이때였다.
두두두두두!
그가 지나온 곳으로부터 돌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던 백리천의 눈에 이내 반가운
기색이 스쳐가고 있었다.
초지 위로 미친 듯이 질주해오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천해산이
었다. 천해산은 제법 거대한 말을 구해 타고 있었으나 그 말조차
그의 체구에 비해 장난감같이 느껴졌다.
히히힝!
두두두두두!
천해산의 전신은 땀에 젖어 있었다. 이로 보아 그는 최대한도로
빨리 달려오려고 전력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호, 빨리도 갔다 오는군."
"도, 도련님!"
백리천을 발견한 천해산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때, 그가 타고 있던 말이 그대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제기랄, 다 와서 죽다니...."
천해산이 몸을 날려 백리천 앞에 내서서며 지쳐 쓰러진 말을 돌아
보았다.
"제기, 계속 비틀대더니 결국 쓰러져 버리는군."
"하하하, 말을 탓할 것이 아니라 너의 체구가 너무 크구나."
백리천이 실소한 후 천해산을 향해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헌데 벌써 다녀온 것이냐?"
"예, 다행히 중도에서 막천관의 인물들을 만나...."
"막천관의 인물들을 중도에서 만났단 말이냐?"
순간, 백리천이 놀람을 드러냈다.
'그들이 중원에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으음...!'
백리천이 놀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막천관은 중원에 들어올
수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들이 중원에 들어섰다는 것, 곧 중원
진출을 뜻하는 것이었다.
막천관, 장성이북의 패자(覇者)! 그들은 과연 중원에 어떠한 변수
로 등장할 것인가...?
백리천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문득 눈을 들었다. 그의 눈에 저
멀리 오십여 장 밖에서 한 사나이가 천천히 초지 위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 그의 자세는 그야말로 물샐 틈 하나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휘날리는 흑발, 헐렁한 장포, 삼십대의 흑의청년의 기세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아도 그는 전혀 없는
것 같았고, 또 있는 것 같기도 한 괴이한 무심(無心)이 그의 전신
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일체무심(一體無心)의 경지, 바위로 생각하면 바위로 느껴지고,
한 줄기 바람이라고 생각하면 생명없는 바람처럼 느껴질 기도(氣
道)였다.
백리천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천해산은 그 괴청년을 등지고 있어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
었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괴청년은 이미 십장 안까지 접근해 있
음에도 천해산같은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가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
백리천은 그가 적이 아님을 느끼고 의아해 했다.
"도련님, 십패천이라는 자들은 만나 보셨습니까?"
천해산은 아직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백리천을 향해 입을 열
었다.
"아마...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백리천은 말하는 한편 다가오고 있는 괴청년을 바라보았다.
천해산이 고개를 돌렸다.
"저자는...?"
그는 검미를 찌푸리다 해연히 놀라고 있었다.
흑의괴청년의 왼손 아래에서 번뜩이는 검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천해산은 그가 천군단의 인물이라고 짐작하고 싸늘히 비
웃었다.
"미친 놈 같으니... 아예 검을 뽑아서 들고 다니는군요."
"아니다. 그는 검을 뽑아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왼팔에
검신을 박아 넣고 다니는구나."
백리천이 순간 고개를 저었다.
"예에?"
천해산이 입을 딱 벌렸다.
"저 사람의 기도로 보아... 쾌검(快劍) 전문의 검수(劍手)임이 분
명하다. 이는 곧 검을 뽑을 시간조차 줄이기 위해 팔을 잘라내고
그곳에 검을 박아 넣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아...!"
백리천이 담담히 흘려내고 있는 말의 내용, 실로 믿기 어려운 말
이 아닌가! 더욱 빠른 쾌검을 위해 자신의 한팔을 스스로 잘라냈
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왼팔을 스스로 잘라내야 할 한(恨)을 품고 있는지
도 모르고...."
백리천이 중얼거리는 동안 예의 흑의괴청년은 그들의 삼 장 앞에
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대는... 십패천의 인물이 아닌가?"
백리천의 입에서 불쑥 질문이 흘러나왔다.
예의 괴청년의 눈에 기광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허나 그는 이내
무심하기 이를데 없는 표정으로 돌아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음! 내 짐작이 맞았군!'
백리천은 그가 십패천의 인물임을 시인하자 새삼 탄복을 금치 못
했다.
"귀공이... 백리공이시요?"
십패천의 일인, 흑의괴청년이 무심일성을 흘려냈다. 마치 대답을
원하지 않는 듯한 지극히 무심한 일성이었다.
백리천 역시 그가 했던 그대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괴청년은 가볍게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공동의 좌섬일사(左閃一死) 은한비(銀漢飛), 백리공께 인사드리
오."
'인사? 그게 인사하는 거냐?'
천해산은 속이 끓어 올랐다. 정중한 예는 표하지 못할망정 고개만
까닥이는 형상이 아닌가!
"공동파...?"
백리천은 그 순간 다른 놀람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면 삼숙께서 황금으로 사들였다는 인물들이 구파일방의 사
람들이란 말인가?'
엄청난 일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낙양애림원(洛陽愛林院)에는 열 명의 고
아가 있었소."
흑의괴청년, 좌섬일사 은한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 의부께서 나타나 추위와 고독에 떨고 있는 우리들을 인간으
로 만들어 주셨고, 이어 수십만 냥의 황금을 들여가면서 구파일방
에 입문할 수 있게 해주셨소."
"으음...!"
백리천이 절로 신음했다. 십패천이 심상치 않은 내력을 지녔으리
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태중서가 기실 그들을 사들인 것이 아니
라 십 년을 내다보고 그들을 키운 것임을 깨닫고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십 년 후, 오늘... 오호농정에서 귀공을 기다리라고 말씀
하셨소."
좌섬일사 은한비는 조용히 말을 잇고 있었다.
"아마... 딴 사람들은 모두 도착했을 것이오. 나는 원래 걸음이
느려 늦게 도착한 것이오."
"...!"
"나는... 의부의 은혜를 갚고자 왼팔을 잘라 내면서까지 쾌검을
익혔소. 이제 그 은혜를 갚을 날이 온 것이오. 허나 이제는 본파
(本波)의 천 년 숙원까지 풀어야 할 막중한 몸이 되었소."
은한비는 백리천 등이 입을 열 시간도 주지 않고 많은 말을 하였
다. 허나 기이하게도 그는 많은 말을 하면서도 말이 없는 사람이
라고 느껴지게 했다.
'음! 내가 지난 십 년 동안 무공을 익히고 있을 동안, 숙부님들은
결코 놀고만 있지는 않았구나. 십패천, 열 명의 고아들... 그들이
이제 구파일방의 기둥이 된 모양이군!'
백리천은 모든 것을 알게 되자 새삼 세 명 숙부의 노고에 대해 마
음으로 감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옥에 있겠군."
"그렇소. 나의 검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지만 걸음만은 천하에
서 가장 느리오. 나보다 늦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훗! 천하제일의 쾌검이라... 헌데 걸음은 천하에서 가장 느리
다...? 자만이 대단하구나!'
그렇다. 좌섬일사 은한비의 태도는 자만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그가 백리천을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그의 태도에 나타나 있
었다.
"그대는 자만이 대단하군."
백리천이 은한비를 직시했다.
순간, 은한비의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자만? 후후후, 나를 아는 사람은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
오. 나는 천하제일의 쾌검을 위해 내 팔을 잘라냈고... 오늘에 이
르러서는 자만해도 좋을 무공을 얻었소."
광오하기 이를데 없는 은한비의 태도에 천해산이 도끼눈을 부릅떴
다.
"산아, 소검(小劍)과 대검(大劍)을 다오."
백리천의 얼굴이 굳어지며 천해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해산이
내심 득의의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천하제일 쾌검수라 자처하던 네놈은 이제 다시 십 년은
더 쾌검을 연마하며 이를 갈아야 할 것이다!'
천해산은 황급히 두 자루 크고 작은 검을 백리천에게 내주었다.
백리천은 두 개의 검을 받아 서서히 허리에 맸다. 그 광경에 은한
비의 눈에서 한기가 솟았다. 백리천의 태도가 분명 자신과 비무
(比武)를 하기 위함인데 검을 허리에 차지 않는가!
'검을 허리에... 그것도 검집에 꽂힌 채....'
은한비, 그는 검을 뽑을 시간조차 줄이기 위해 검집을 지니고 다
니지 않을 정도이며, 또한 검을 빼는 시간조차 단축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팔에 검신을 박아넣지 않았던가. 그러한 자신 앞에서 검
을 허리에 매니 이 얼마나 자신을 능멸하는 태도란 말인가!
"후후후, 자만은 곧 죽음으로 직결된다. 내 오늘 그것을 가르쳐
주리라!"
백리천이 은한비 앞에 섰다. 백리천의 전신에서는 일체의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은한비 역시 일체의 동요도 없고, 두 사람은 마치 바위와 바위가
마주선 듯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검영십이사(劍影十二死)!"
어느 한순간, 은한비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번쩍!
은한비의 검이 기이한 각도, 그리고 가공할 속도로 백리천을 압박
해 들었다. 이것은 실로 번갯불이 번쩍! 하는 순간을 십분지 일로
나눈 찰나지간에 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열두 개의 검영이 허공을 떠돌다 사라졌다. 검이 내려쳐
지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 허공에 검이 스쳐간 자국마다 검영이 남
는 것이었다.
실로, 파공음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가공할 속도가 아닌가!
"소검만환식(小劍萬環式)!"
백리천이 담담히 외치며 왼손의 소검을 밀어냈다. 수십 수백의 검
환(劍環)이 그의 소검에서 뻗어 나왔다. 백리천의 소검과 은한비의
좌수검이 불을 뿜었다.
카캉!
"윽!"
다급한 침음성이 들렸다.
은한비는 백리천이 자신의 쾌검을 막아낸 것에 크게 눈을 뜬채 불
신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후후후...! 이제 너의 허리에 닿아있는 대검을 어떻게 막을 것이
냐?"
백리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대검이
어느새 은한비의 오른쪽 허리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은한비의 얼
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쾌검이란 빠른 손과 빠른 검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못지 않은 빠른 발놀림도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다."
"졌, 졌소이다."
은한비가 고개를 숙였다.
"다행이군. 자신의 단점을 빨리 시인할 수 있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든다."
백리천이 미소했다.
백리천과 은한비의 두 눈이 소리 없이 얽혔다. 그 사이에 형성되는
것은 곧 그들만의 감정, 사나이와 사나이로서의 뜨거운 감성이었
다.
두두두... 두두두...!
히히힝!
이때, 그들의 귀로 돌연 은은히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진
동했다.
'이 소리는... 하나... 둘, 오백... 십리 밖이다! 정확히 오백 칠
십의 기마대가 이곳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다!'
백리천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누구인가? 나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백리천,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를 노리는 것이라면 피하지 않겠다. 그것이 설혹 일만이라도
나는 상대해 주겠다!'
"산아야, 너는 저 사람과 함께 모옥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백리천이 쌍검을 나눠쥐며 오연히 외쳤다. 천해산 역시 수많은 기
마대가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음을 감지했기에 그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도, 도련님 혼자서 저들을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
백리천, 너무 광오하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라면 적은 자그마치 오백여, 게다가 그들이 만약 천군
단의 금천당 고수들이라면 약자가 있을 리 없을 터였다.
천해산은 백리천의 기세에 눌려 입도 열지 못하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멀리 초지 위에 쏟아지는 빗 속임에도 불구하고 황진을 일으키
며 엄청난 수효의 기마대가 백리천 쪽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는 것
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는 비, 땅에는 녹색의 초지(草地), 그리고 그 사이의 엄청
난 기마대...,
백리천은 홀로 초지 위에 남아 쌍검을 나눠 쥐었다. 그의 오른손
에 쥐어져 있는 장검은 건(乾)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소검은 곤(坤=대지)을 찌르고 있었다.
백리천의 모습은 그대로 대자연이었다. 있다고 보면 그는 존재했
고, 없다고 보면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
히히힝!
오백여에 달하는 기마대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며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흑마(黑馬)에 흑의를 입은 흑의검수들, 이마에 흑색 영
웅건까지 두르고 흑발을 휘날리며 질주해오고 있는 마상인물들의
기태는 보통이 아니었다. 담담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 일견하기
에도 초절정의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백리천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문득 천공을 올려다 보았다. 대
혈전을 눈 앞에 둔 사람같지 않은 허허로운 태도였다.
천공에는 점차 비가 그쳐가고 있었으며, 대신 어둠이 자라나고 있
었다.
세우(細雨)....
비는 점차 가늘어지고, 천공에는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두두두...!
히히힝!
오백여 기마대의 질주 속도는 놀라웠다. 그들은 순식간에 백리천
의 오십여 장 앞으로 압축해 들었다.
백리천은 의혹과 싸늘한 한기가 담긴 눈으로 뒤를 돌아보고 있었
다. 그의 뒤에는 들어간 줄 알았던 천해산과 은한비가 제각기 병
기를 든 채 십여 장 뒤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산아, 모옥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백리천의 전신에서 한기가 일었다.
허나 은한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고, 천해산
은 결연의 눈을 들어 외치듯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 명은 받지 못하겠습니다!"
"...!"
"저는 도련님의 신변을 지키겠다고 죽음으로 맹세한 놈이 아니오
이까! 도련님의 명에도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
을 이제 알았습니다!"
"...!"
천해산의 음성에는 충직하기 이를데 없는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
러나 있어 백리천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백리천은 천해산의 결심이 굳음을 느끼고 은한비에게 눈을 돌렸
다.
"그대는?"
"나는 내가 나오고 싶어 나온 것이오. 또, 싸우고 싶은 생각이 나
면 싸울 것이오."
은한비는 태연히 대꾸하며 더욱 다가들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자
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무언의 암시같기도 했
다.
'음! 무심한 듯 하지만 의외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군!'
백리천은 은한비의 진정을 느끼고 가슴이 진동되어옴을 느꼈다.
이것은 남녀간의 애정보다도 더욱 진한 사나이와 사나이의 뜨거운
정이 아니겠는가.
백리천과 은한비는 만난 지 불과 한 시진도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들 사이의 뜨거운 감정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때, 오백여 기마대는 순식간에 그들의 십 장 거리로 치닫고 있
었다.
"크흐흐흐...!"
천해산이 괴소를 흩날리며 몸을 솟구치려 했다. 그의 손에는 거대
한 청룡도가 죽음의 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잠깐! 저들은... 적이 아닌 듯 하구나!"
백리천이 손을 저어 천해산을 막지 않는가!
"예...?"
천해산이 주춤했다.
"저들은... 천군단의 수하들이 아니다."
백리천이 조용히 말하며 마상의 인물들을 직시했다.
흑의기마대, 그들의 중앙에는 한 대 사두마차가 기마대의 호위를
받고 있는 형상으로 함께 질주해 오고 있었다.
헌데 사두마차의 지붕에는 한 개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사(邪).>
섬칫한 사기가 감도는 힘찬 서체. 그것은 결코 천군단의 표식이
아니었다. 여기에 흑의검수들의 가슴에 역시 똑같은 글귀가 수놓
아져 있었다.
"도련님! 저들은...?"
백리천이 긴장을 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들은... 복장으로 보아 사사혈우회의 인물들인 듯하구나."
"사사... 혈우회...?"
천해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사사혈우회(邪死血友會).
사도무림의 종주임을 자처하는 사도대파.
"사사혈우회가 왜 저렇게 많은 수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천해산은 의아한 눈으로 새삼 다가오고 있는 사사혈우회의 인물들
을 바라보았다.
"멈춰라!"
이때 흑의기마대 중앙에 있는 사두마차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
왔다. 오백여에 달하는 기마대가 순식간에 멈춰섰다.
그들과 백리천과의 거리는 십 장여, 천해산이 청룡도를 부여잡으
며 당당히 질문했다.
"그대들은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조용히 내려섰다. 흑의를 걸
친 칠순의 장발괴노였다.
"본인은 사사혈우회의 부회주(副會主) 흑연천면마(黑燕天面魔) 감
능치(甘能致)라고 하오. 천마대해존(天魔大海尊) 백리공을 긴히
뵈려고 왔소이다."
장발괴노의 태도는 매우 정중한 것이었다. 물처럼 고요한 눈은 깊
은 심기를 말해주는 것이었고, 한점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태도는
또한 그의 무공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나타내는 것
이었다.
"도련님...?"
천해산이 놀람과 함께 백리천에게 눈을 돌렸다.
이때, 백리천은 마치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듯 천천히 몸
을 돌려 모옥 쪽으로 다가가지 않는가?
천해산은 백리천의 이같은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산아야, 나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를 만나러 왔다면, 내
가 일을 마칠 동안 기다리도록 해라."
백리천, 어찌 이토록 광오할 수 있단 말인가?
사사혈우회가 비록 천군단에 가려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당금무림의 사도를 대표하는 대문파이다. 그들이 직접 백리천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을 천해산을 시켜 기다리라고 하다니 실로 광망
스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사사혈우회의 부회주 흑연천면마 감능치의 얼굴이 미미하게 흔들
렸다. 백리천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천해산을 시켜 기다리
라고 말을 전하다니 어찌 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천해산이 허리를 접었다.
"예!"
그는 우렁찬 대답과 함께 흑연천면마 감능치를 직시했다.
"들으셨소? 기다리시오!"
천해산 역시 광오하게 외쳤다.
흑연천면마 감능치는 이러한 굴욕스러운 일에 어깨를 진동시켰다.
허나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뒤를 향해 외쳤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천마대해존께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감능치, 그는 역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경우 범
인들이라면 분노할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으음! 천마대해존... 대단한 사람이다. 사사혈우회를 마치 수하
다루듯 하다니...!'
은한비는 모옥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왔음인가?"
문득 백리천의 얼굴에 결연의 빛이 스쳐가고, 그의 눈 깊숙이 두
마리 청룡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뜻이련가? 백리천은 사사혈우회가 자신을 찾아온 것을 대하
고 무슨 결심을 굳히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타다닥!
타닥...!
사방 삼십여 장에 달하는 넓은 모옥 안에서는 한 무더기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닥불의 주위에는 천해산과 백리천, 그리고
은한비 외 팔 인이 조용히 둘러앉아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백리천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천해산이 신경
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기럴, 발이 가장 느리다는 천하제일 쾌검수보다도 걸음이 느린
자도 있었단 말이냐!"
그는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때때로 밖을 내다보며 투덜거리고 있
었다.
그렇다. 백리천이 만나고자 하는 십패천의 인물은 모두 열 명, 그
중 한 명이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어 백리천과 천해산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었다. 모옥의 밖에서는 사사혈우회의 오백여
수하들이 백리천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막상 백리천은
그들을 빗 속에 세워두고 십패천 중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인물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제기럴! 이러다가는 밤새 기다리겠군!"
천해산이 다시 투덜거렸다. 백리천은 천해산의 불평이 들리지 않
는다는 기색으로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지그시 내리 감고만 있을
뿐이었다.
은한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눈은 멀리 초지 위에 비를 맞으
며 우뚝 서 있는 사사혈우회의 오백여 인마를 쓸어보았다.
'으음! 사사혈우회, 저자들은 벌써 이 빗 속에 한 시진 이상을 저
러고 서 있었다. 놀라운 인물들이 아닌가! 이 정도의 굴욕을 참으
며 백리공자를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눈이 다시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앉아있는 백리천에게 돌
려졌다.
'저 사람은...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저들을 저렇게 기다리게 해
놓고 마치 잊은 듯 거들떠도 보지 않다니!'
돌연, 백리천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
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오는군."
"...?"
천해산이 황급히 모옥 밖을 바라보았다.
"크흐...!"
다음 순간 천해산이 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계, 계집애가 아닌가! 우리가 여태 저까짓 계집애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단 말인가!"
그렇다! 모옥에서 이십여 장 밖, 사사혈우회가 늘어서 있는 뒤쪽
으로 한 묘령의 소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얼씨구! 백옥우산(白玉雨傘)까지 쓰고... 여유만만하시군!"
천해산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쳤다.
초지 위,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 비 아래 묘령의 소녀가 백옥빛 우
산을 쓴 채 비를 피하며 천천히 모옥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
가!
그녀의 걸음은 대단히 느렸다. 마치 주위를 감상이라도 하는 양
천천히 살피며 걸어오고 있는 그녀의 태도는 유람객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헌데 사사혈우회가 늘어서 있는 곳까지 다가온 홍의경장의 소녀는
돌연 표독하게 외쳤다.
"비켜라! 왜 길을 막고 있느냐?"
그녀의 돌연한 호통에 천해산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사사혈우회 수
하들의 놀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가 있어 이렇게 많은 고수
들을 보고 그녀처럼 감히 비키라고 외칠 수 있겠는가!
'히야! 엄청난 계집애구나!'
천해산은 어이가 없어 모옥의 창을 통해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
었다.
한편, 사사혈우회의 부회주 흑연천면마 감능치는 홍의경장소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백리천 때문에 울화가 치
미는 것을 억누르고 있는데 이런 모욕을 또 받으니 제 아무리 심
기가 깊다해도 더 이상 참기 어려울 것이었다.
헌데, 고개를 돌려 홍의경장소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다소 놀람
이 스치고 있었다.
"훗!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독화비봉산(毒花飛鳳傘) 표갈련이었군!"
- 독화비봉산 표갈련.
사천당문의 절대고수,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 사천당문의 다음 대
문주(門主)로 내정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독과 암기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사천당가(四川唐家)에 어찌 외인
을 문주로 앉힐 수 있으랴만은, 독화비봉산 표갈련의 재질은 세인
의 상상을 초월하여 당씨가 아닌 사람으로서 최초로 당문의 문주
로 내정된 것이었다.
허나 그녀가 당씨 가문 중에서 다음 대 문주로 내정되는 데엔 또
다른 힘이 작용했는데....
"호호호,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눈이 먼 자들은 아니군!"
독화비봉산 표갈련은 비봉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관능적인 교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표갈련의 이어지는 독설에 감능치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젖비린내나는 계집애같으니... 우리가 그까짓 당문을 두려워할
줄 아느냐!"
"호호호, 말이 좋구나! 그럼 어디 한 번 나의 비봉산 맛을 보겠느
냐!"
독화비봉산 표갈련은 실로 사내못지 않은 호기를 지닌 소녀였다.
오백여에 달하는 흑의검수들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봄에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쏘아붙이고 있었다.
"흐흐흐, 조금만 기다려라. 내 천마대해존을 뵈온 후... 네년을
갈가리 찢어죽이고 말리라."
감능치는 귓구멍에서 연기가 치솟을만큼 노했으나 백리천을 만나
기 위해 온 사명 때문인지 억지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길을 비켜줘라! 아직은 피를 볼 시간이 아니다! 훗날 네년 때문
에 사천당문은 쥐새끼 한 마리 남지 못할 것이다."
감능치는 수하들에게 길을 트라 명하고 이를 갈아 붙였다.
"호호호...!"
독화비봉산 표갈련은 태연히 사사혈우회의 수하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교소를 터뜨렸다. 놀라운 담력, 그리고 실로 엄청난 독설
꾼 소녀였다.
그녀 역시 태중서가 키운 십패천의 일인이련가...?
"호호호...!"
천천히 사사혈우회 수하들 사이를 빠져나온 독화비봉산 표갈련이
돌연 몸을 돌려 감능치를 바라보았다.
"사사혈우회의 늙은 여우! 언제고 오너라! 본문에서는 사사혈우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녀의 음성은 실로 부드러웠다. 입가에는 교태어린 미소까지 감
돌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분히
도발적이었다.
"끄응!"
감능치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이제라도 덮쳐들듯 무서운 신광
을 뻗어내다 겨우 진정하고 있었다.
'참... 자...! 이따위 계집애 때문에 화를 낸다면... 천마대해존
이 보고 있는 이 마당에 본회의 체면이 말이 안 된다. 참자!'
"...?"
표갈련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흑의천면마 감능치가 그녀의 독설에도 덮쳐들지 않는 것이 신기했
던 것이다.
'지독한 놈... 사사혈우회에 지독한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다고
하더니 과연...! 헌데 저 음흉한 놈이 무엇을 노리고 이곳까지 와
있단 말인가?'
표갈련은 더 이상 감능치를 도발시키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
녀는 모옥 안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씽긋 미소를 머
금었다.
"호호호, 소림의 백미(白眉)라는 젊은 땡초, 공동의 외팔이...개
방( 幇)의 어린 거지, 종남(終南), 그리고 화산(華山)의 번가(飜
家), 세 마리 등등... 호호호, 모두 모였구나."
"하하, 련매의 독설은 여전하구나!"
그녀의 지독한 독설에 회색가사를 걸친 젊은 승인이 지그시 눈을
떴다.
- 백미(白眉).
소림사의 후대장문인으로 내정된 소림최고의 기재, 그는 현 소림
장문인 영허선사(英虛禪師)조차 완성하지 못한 달마칠십이종절예
(達磨七十二種絶藝)를 약관 이십에 모두 연성한 불세출의 기재였
다.
나이 스물 일곱.
기실 지금 모옥 안에 한 개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모두 달랐다. 승(僧), 개( ), 도(道)에서부터
비구니까지, 열 명이 모였으나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공통된 점이
라면 그들의 나이가 모두 삼십 미만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 십 인이 이 외진 곳에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그는 경악을 금할 수 없으리라! 명문정파인 구파일방
의 젊은 기둥들, 그들은 곧 구파일방의 모든 것이라고 대변될만큼
구파일방의 핵심들이었던 것이다.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 중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십 인,십
패천. 허나 십패천이라는 명호는 태중서와 백리천이 알 뿐이고,
이들에게 주어진 무림에서의 명호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무림십성(武林十星).>
약관의 나이로 이같은 명호를 얻은 인물이 과연 존재했던가!
무림의 젊은 열 개의 별, 이들은 곧 무림의 희망이요, 등불인 것
이다.
- 무당(武當)의 청학자(靑鶴子).
무당파의 후대지존, 이십삼 세.
출신을 모르는 고아출신이나 무당에 입문한 지 구 년만에 후대장
문인으로 내정됨. 그의 재질은 무당을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고 알
려져 있을 정도.
- 청송제일검(靑松第一劍) 하후진악(夏侯眞嶽).
몰락해가는 청성파의 유일한 기재, 그로 인해 청성의 이름이 점차
드높아지고 있음. 이십칠 세.
- 낙봉취개(落鳳醉 ) 번천민.
개방일걸( 幇一傑)로 손꼽히는 대단한 익살꾼, 허나 그의 성취는
놀라워 구파일방의 기재들 중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 없다고까지
알려져 있음. 십구 세.
- 종남후랑(終南侯郞) 번승(繁勝).
종남의 비전절예 종남삼검(終南三劍)을 단 오 년만에 완성한 기라
성같은 영재.
그는 개방의 번천민과 한 형제였다. 번천민과 번승, 그리고 화산
을 맡고 있다시피한 번욱(蒜旭)은 삼형제가 각기 일파의 지존으로
떠올라 더욱 유명했다.
이들 외에 소림의 백미, 그리고 당문의 독화비봉산 표갈련, 아미
(峨嵋)의 삼청일룡(三淸一龍) 용천화(龍天華), 공동의 은한비등,
이들 십 인의 이름은 그대로 정파를 대표하는 이름인 것이다.
아아,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태중서가 키운 십패천이
구파일방을 맡고 있는 무림 십성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큭큭큭, 련매! 백옥사혈산(白玉死血傘)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
소림 백미의 옆에는 꾀죄죄한 거지가 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는데 마치 무슨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찾
아다니는 악동의 눈빛 같았다.
"호호호, 거지 오빠야!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쫓아왔
어?"
독화비봉산 표갈련의 독설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녀와 낙봉취개
번천민 사이는 다소 친근한 듯 그녀의 눈빛이 그를 대하자 부드럽
게 풀리고 있었다.
"하하, 낙양 애린원에서 저 거지가 련매를 많이 보살펴준 것이 오
늘날 제일 욕을 덜 먹는 비결이 되었군."
도복차림의 준미한 청년이 미소를 던졌다. 그는 아미파의 지존으
로 떠오른 삼청일룡 용천화였다.
"끼끼끼, 그것 봐라! 사람은 선견지명이 있어야 한단다."
낙봉취개 번천민이 익살을 터뜨렸다.
그들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백리천이나, 눈을 부라리고 있는
천해산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희희
낙락하고 있었다.
"끄응!"
천해산의 눈에서 벼락 치듯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크흐흐흐, 쥐꼬리만한 성취를 얻었다고 기고만장들 하는 꼴이
란...!"
"뭐야?"
표갈련의 아미가 치켜 떠졌다. 기실 독화비봉산의 용모는 대단히
아름다왔다. 여기에 불이 붙은 듯 빨간 홍의경장을 걸치고 있어
보는 이의 심혼이 뒤흔들릴 정도의 미모였다.
헌데 그러한 그녀가 아미를 찌푸리자 대번에 주위에 한풍이 이는
듯했다.
"흥! 천력만병마(天力萬兵魔), 그대의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
다만... 감히 본녀에게...!"
촤악!
그녀의 손에 접혀져 있던 백옥사혈산이 다시 펴졌다.
백옥사혈산은 바로 표갈련의 독문병기였다. 일견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우산으로 보이지만 기실 엄청난 독과 암기가 내장되어 있
는 가공할 병기인 것이다.
"백옥사혈산의 맛을 보여주겠다!"
표갈련이 앙칼지게 외치며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녀의 성격은 실로 불같아 대뜸 공세를 펼치려 하고 있었다.
"십패천, 아니, 무림십성!"
이때, 고요히 감겨있던 백리천의 눈이 뜨여졌다. 그의 입에서 조
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대들에게... 본좌가 한 마디 전하겠다!"
백리천의 눈이 좌중을 쓸었다.
이때.
"흥! 본좌? 가소로운 자로군!"
독화비봉산 표갈련이 냉소를 터뜨렸다.
백리천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어렸다. 사이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 가공할 지옥의 마소(魔笑)였다.
"산아!"
백리천이 조용히 천해산을 불렀다.
"예!"
천해산이 백리천의 의도를 짐작하고 우렁찬 대답과 함께 몸을 일
으켰다. 그는 주먹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음향을 내며 주먹을 어루
만졌다.
"크흐흐흐, 도대체가 못돼 먹은 자들이다. 오만과 우쭐해 하는 자
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 너희들에게 본인이 오늘 무서운 맛을 보여
주마!"
"호호호, 미련한 놈! 힘만이 제일이 아님을 본녀가 깨우쳐 주겠
다!"
천해산의 호통에 표갈련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었다.
"끄으!"
천해산의 몸이 진동했다. 그는 노기로 전신의 털을 곤두세운 채
표갈련에게 한 발 다가들었다. 허나 표갈련은 백옥사혈산을 돌리
며 오히려 한 걸음 전진하고 있었다.
패앵!
핑!
백옥사혈산이 더욱 빠르게 회전하며 순식간에 허공에 십여 개의
환(環)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크흐흐, 어지럽다!"
꽈앙!
천해산의 손에서 벼락 치는 듯한 장력이 뻗어나갔다. 실로 가공할
신력, 태산 같은 거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신력은 그대로 산(傘)을
부수고 대해를 밀어낼 듯한 기세였다.
카아앙!
타탕!
헌데 그의 무서운 힘이 백옥사혈산에 적중되며 그대로 미끄러져
나가지 않는가! 동시에 백옥사혈산에서 몇 대의 우산살이 빠져나
오며 가공할 속도로 천해산의 전신대혈로 폭사해왔다.
그녀와 천해산과의 거리는 일 장 정도, 눈으로 보기도 힘드리만큼
빠른 속도인데다 기이한 방위로 날아드는 우산살을 피하기란 불가
능한 상황이었다.
"호호호...!"
표갈련은 앙칼진 교소를 터뜨리며 백옥사혈산을 수평으로 세우며
두 손으로 퉁겼다.
꽈아! 파파파파팟!
무서운 묵광이 허공을 덮었다. 백옥사혈산에서 수십 개의 소전(小
箭)이 우박처럼 천해산의 전신을 덮어온 것이었다.
"윽!"
천해산의 거구가 움찔했다. 그의 어깨에 한 대의 우산살이 깊숙이
박혀든 것이었다. 천해산은 이미 금강불괴를 이루어 천하의 어떤
병장기로도 털끝 하나 베어지지 않는 몸이 아니던가!
"어이없군! 끄응!"
천해산이 빙그레 미소하며 어깨에 박힌 우산살을 뽑아냈다.
주르륵!
그의 상처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순간, 천해산은 예의 선혈을
손바닥으로 쓰윽 훔쳐 입으로 핥지 않는가!
"크흐흐흐, 네가 내몸에 상처를 입혔겠다?"
천해산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일었다. 이 광경에 표갈련이 입
을 딱 벌렸다. 그녀의 암기 하나하나에는 모두 엄청난 독이 묻어
있어 누구든 적중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게 되어 있었다.
헌데 천해산은 쓰러지기는커녕 그 독을 입으로 핥아 먹기까지 하
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허나 그녀는 이내 악독한 눈빛을 떠올리며 다시 백옥사혈산을 돌
리기 시작했다.
"호호호, 만독불침의 몸이었군. 좋다! 다음에는 너의 목이다!"
패앵!
또 다시 무서운 묵광이 허공을 달렸다. 허나 천해산은 이미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쉽사리 당하지 않았다.
"크흐흐흐, 부수기에는 아깝다만...!"
꽈릉!
일권(一券)이 은은한 뇌성을 동반하며 백옥사혈산을 강타했다.
타앙!
백옥사혈산이 빙글 돌며 천해산의 주먹을 미끄러뜨렸다.
"제기럴, 제법 단단한 물건이군!"
꽈꽝!
천해산은 노호와 함께 잇달아 칠권을 쳐냈다. 무서운 장력이 노도
처럼 휘날리며 지면이 푹푹 패여나갔다. 십 장 밖의 모옥의 벽이
예의 잠력에 그대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호호호, 힘만 아는 미련한 놈같으니...!"
표갈련은 천해산의 가공할 공세를 대하고도 여전히 독설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신법은 매우 절묘하여 천해산의 주먹을 교묘
히 젖혀내고 있었는데 백옥사혈산은 무섭게 회전하며 그녀를 힘의
폭풍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천해산은 무섭게 노호하고 있었으나 백옥사혈산이 회전하며 그의
공세를 미끄러뜨리고 있어 그의 공세는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
(산아야, 백옥사혈산의 약점은 중심에 있다!)
이때였다. 돌연 천해산의 귀로 한 가닥 전음이 파고 들지 않는가?
"크흐...!"
찰나, 천해산은 백리천의 음성에 얼굴을 붉히며 왼손으로 백옥사
혈산의 중심을 찍어갔다.
"헉!"
순간, 표갈련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번개같이 백옥사혈산을
오른손으로 바꿔쥐며 천해산의 공격을 피해냈다.
"크하하,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천해산의 우수가 그 순간 이미 백옥사혈산의 중심을 찍어가고 있
었다. 천해산의 이 한 동작은 엄청난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무섭
도록 빠른 것이었다.
와지직!
백옥사혈산이 비명을 토하며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으윽!"
백옥사혈산과 함께 표갈련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팟!
순간, 천해산의 엄청나게 큰 발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맞으면 그대로 가루가 될 것이리라.
"멈춰라!"
"이놈이--!"
십패천중 몇 명이 몸을 날렸다. 이때 백리천이 조용히 외치며 손
을 흔들었다.
"산아!"
십패천의 눈에 경악이 가득해 있었다. 그들은 무형의 잠력에 꼼짝
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한편, 천해산은 표갈련을 강타하기 직전에 백리천의 음성을 듣고
공세를 멈추었다. 그의 발끝은 거의 표갈련의 턱에 닿아 있었다.
'아아! 믿어지지 않는다. 저 엄청난 거구가 저렇게 민첩하게 몸을
놀리다니...!'
모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무릇 공세를 뻗어내는 것 보다는 그 공세를 순식간에 멈추는 것이
더욱 힘든 법. 천해산은 표갈련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제자리
로 돌아와 백리천의 뒤에 우뚝 섰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당
당한 태도, 마치 전설 속의 하늘을 이고 있다는 천장(天將)을 방
불하는 신위였다.
백리천이 다시 무림십성을 쓸어보았다.
"그대들은 나를 도우기 위해 키워진 사람들... 나는 그대들에게
한 가지를 명하겠다."
백리천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무형의 위엄, 이것은 그대로 만승
지존(萬勝至尊)의 풍도요, 천하를 굽어보는 절대군림존(絶代君臨
尊)의 위엄이었다.
"그대들은 각파로 돌아가라! 그리고 전하라!"
백리천의 전신에서 산악같은 기개가 일었다. 감히 마주 보기도 어
려운 일대영웅의 엄청난 기도.
"이제부터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문파들, 구파일방은 일체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마라!"
"헉!"
"으음...!"
백리천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무림십성은 제
각기 눈을 부릅뜨며 경악성을 흘려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백리천의
말, 이는 곧 구파일방의 봉문(封門)을 뜻하지 않는가!
"기한은 육개월, 만에 하나 본좌의 명에 거역하는 문파가 있다면
그것은...."
무서운 살기가 허공을 베었다. 천신(天神)의 노호(怒號)가 이러할
까!
십패천은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에 누가 있어 명문구
파일방에게 동시에 봉문을 선언한단 말인가! 유구한 역사를 이어
내려온 중원무림의 본산(本産)들. 그들에게 무림에서 손을 떼라고
명하다니...!
백리천은 말을 끊고 푸르른 마화가 일렁이는 눈으로 십패천을 둘
러보았다.
"그 문파는 영원히 사라지리라!"
- 봉문을 거역하는 문파, 영원히 사라지리라!
오오! 누가 있어 이토록 광오할 수 있으랴만은....
십패천은 각기 세차게 몸을 떨고만 있을 뿐 백리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으니....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호호호호...!"
돌연, 독화비봉산 표갈련이 미친 듯 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미련한 종에 광오한 주인이로구나!"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백리천을 바라보며 허리를 잡고
웃었다.
백리천의 눈에 한기가 치달렸다.
"표낭자, 입을 조심하거라! 본좌는 여인이라 해서 인정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허나 백리천의 입가에는 일견 다정해 보이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
었다.
'헛!'
표갈련은 백리천의 미소를 대하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리
천의 입꼬리에 맺혀 있는 기이한 미소, 이것은 섬칫하리만큼 그녀
의 뇌리로 파고 들며 그녀의 등골에서 땀이 맺히게 만드는 지옥의
미소인 것이다.
독화비봉산 표갈련은 결코 누구의 미소 한 번에 몸을 떠는 여인이
아니었다. 허나 백리천의 미소는 실로 무서운 공포를 심어주는 미
소였다.
"마등구만리!"
백리천이 돌연 낭랑한 대갈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 어느새 구주벽
화유황등이 들려 있었다.
번쩍!
순식간에 건(乾)과 곤(坤)이 푸르른 마화에 휩싸였다.
고오오...!
구주벽화유황등에서 엄청난 섬광이 뻗어나왔다. 지옥의 유황불을
방불하는 새파란 섬광이었다. 동시에 천지는 그대로 마염(魔琰)
아래 밟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