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9~205
죄인, 신비가, 그리고 천체물리학자
역설을 기리는 법
나는 감추어진 것도 드러난 것도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만든 장인인 지혜가 나를 가르친 덕분이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지혜 7.21-27
대개의 서양문명은 악 없는 선, 어둠 없는 빛,
고통 없는 쾌락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기린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인들과 세속 과학자들이 같다.
앨런 와츠
캘리포니아의 어느 영성 모임에서 강연을 마친 내게 한 참석자가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리처드, 당신은 지성인같이 보이는데 설마 그 모든 잡동사니를 믿진 않겠지요?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 말입니다. 내 눈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환각제LSD에 취한,
몽롱한 환상공화국의 월트 디즈니처럼 보이거든요!" 그가 진지한 사람이고,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감옥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겠지만,
나는 교회의 전통적 교리를 믿 는다고 말해주었다.
장담하거니와, 제대로 된 안경을 쓰고 내적 경험을 충분히 했다면 그도 나처럼 교리를 믿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여기 온 것은 사람들이 믿는 교리를 바꿔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눈을 바꿔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적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교리를 뿌리째 뽑으려는 짓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변화된 사람들이 소속 그 룹의 일원에게 피살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변화된 사람은 그룹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심오한 충성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역설의 가치
이 새로운 눈은 서로 상충되는 듯이 보이는 것의 진실을 파악하면서
모든 것을 역설적으로 보고 생각하게 한다. 교회의 중대한 교의도 거의 모두 역설적이다.
예수는 사람이면서 하느님, 마리아는 처녀면서 어머니, 하느님은 하나면서 셋,
성체는 빵이면서 예수. 역설 자체가 이원적 사유를 뿌리부터 손상하기 때문에
이원론에 선 사람은 그것을 논리에 어긋나는 빈약한 사고 또는 혼동이라고 공격한다.
현대의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은 역설을 소화할 능력이 거의 없거니와
우리가 얼마나 퇴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동안 신비가들이 알고 있던 내용을 오늘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착실하게 가르치고 있으며, 교회 또한 오랜 건망증을 내려놓고 그것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영성의 역사는 우리가 역설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으며 제대로 보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해준다.
앞에 인용한 지혜서에서 인격화된 지혜Sophia가 어떻게 사물들을 역설적으로 볼 수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이 오묘한 지혜를 '여성명사'로 썼다.
가부장제가 다스리던 족장시대에 그것은 일종의 '대안'이었다.
앨런 와츠는 역설적 사유의 상실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심한 문맹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생명의 여성적인 면을 열등한 것으로 믿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우리 모두 역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 면 단 하루도 평화롭거나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역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혜로울 수 없고
'누구를 용서하거나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실은 그토록 명백한 것을 따로 힘주어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다.
'티 없는 거울'은 언제나 밝으면서 어둡고, 모양과 색깔과 질감의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빛의 미묘한 그늘로 덮여있는 옹근 그림을 비춘다고 지혜서는 말한다.
우리는 밝기만 한 빛과 어둡기만 한 어둠을 볼 수 없다.
무엇을 보려면 빛의 변동variances이 있어야 한다. 그늘진 땅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세상이다.
현실 자체가 역설적이다. 정직한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서로 충돌한다.
창조된 이 땅에는 선과 악, 유용과 무용, 사랑스러움과 역겨움,
죽음과 삶이 한데 섞여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것을 '파스카 신비'라고 불렀다.
그리스도 예수조차도 잘난 척하는 부자 젊은이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고 하셨다.
배우자나 자식들 또는 당신 자신을 보라.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어느 교황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구태여 성경 말씀으로 증명할 필요도 없다.
역설은 숨어있고 명백하다. 언제나 있고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강제로 우리 자신의 한쪽을 억압하지 않는 한.
이제 내가 이해하는 역설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보겠다.
역설이란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고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눈으로 또는 다른 틈에서 보면 결코 상충되지 않는 것이다.
앞에 인용한 지혜서 구절이 말하듯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역설과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혜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본다. 보이는 것들을 나누지 않는다.
지혜는 결코 내 것이 아니다. 모두가 더불어 나누는 경험이다.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혜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다. 성령이다. 원한다면 공동체의 무의식이라 해도 좋다.
어느 누구도 결코 지혜를 소유할 수 없다. 그냥 그것 안에서 그것을 나눠 가질 뿐이다.
지혜에 연관해서 우리 모두는 표절자다.
내가 내 책이나 녹음물의 판권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다른 누구한테서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종교들 대부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라고 요구한다.
무조건 믿는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경험 없는 이들이 보면 새로운 눈을 뜨라는게
맹신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종류의 빛, 어두운 그늘을 허용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빛을 보라는 것이다.
그 빛은 우리가 현실을 자비롭게, 옹글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보도록 도와준다.
이와 같은 진실을 보고 그것을 솜씨 있게 전해주는 사람이 시인들이다.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디킨스, 홉킨스, 릴케, 워즈워스, 월트 휘트먼,
메리 올리버, 브렌던 케넬리, T.S. 엘리엇, 나오미 니예, 데니즈 레버토브,
데이비드 화이트 등이 우선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다.
일부러 깎아내릴 뜻은 없지만, 대중이 듣고 싶은 말이나 하는 성직자들보다는
시인들이 훨씬 더 대중에게 도움이 될 진실을 세상에 전하는 것 같다.
서양 그리스도교는 계시된 신비를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대신 정신적 동의를 요구하는
교리적 선언으로 객관화하는 경향이 있다. 최소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별 상관 없이,
교리적 선언이 된 역설들을 '예배한다.'그러나 그래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인생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가르친 기본원리를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consciousness의 표상인 예수야말로 역설 그 자체다.
그는 인성인 신성, 하늘인 땅, 육인 영, 남성 육신인 여성 영혼, 살해당한 살아있음,
무능한 유능, 패배한 승자, 실패한 구원자, 변두리인 중심, 혼자인 모두,
사람 몸을 입은 우주, 박힌 해방자로서 '하나와 여럿'이라는 철학적 대과제를 해결한다.
바로 이 굉장하고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사적 구원자로 만든 것이다.
예수가 실제로 보여준 거대한 우주적 신비에 대한 언급 없이,
그분이 살아낸 진심을 우리 자신과 다른 피조물한테서도 보라는 초대 없이,
교사들은 너무 쉽게 예수 믿으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한다.
예수는 대우주의 소우주다. 이 말은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겠다. 우리가 그 앞에 굴복하려 하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는 '모두 안에서 모두를 위해' 가능하고 진실한 것1코린 15,28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존재 안에 완전하게 '요약한다.'콜로 1,15-20
예수가 계속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 일 뿐 아니라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2코린 2,14이라고
훌륭하게 표현한, 모든 파트너가 참여하는 위대한 행진을 공식적으로 출발한 분이다.
다음을 그리스도인의 원리로 삼자. 첫째, 예수에 관한 모든 진술은 한 영혼의 여정
(출생, 부르심, 일상, 입교, 사회생활, 오해와 반대, 실패, 여러 형태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느님께 돌아감)에 관한 진술이기도 하다.
둘째,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술은 그리스도의 '몸(지체)'에 관한 진술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 속의 예수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성姓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당신 안에 포함하는 친교의 마당이다.
우리는 이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이요 각자의 살아있는 경험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하든지 반박하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 할 것이 없다.
진지하게 내면의 여정을 계속하면 알게 될 것이다.
사실 교리는 방향이 옳으면 정말 좋은 지침이다. 그러나 위험한 여행을 하는 것보다
무엇을 믿거나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더 쉽다는 걸 알고 있다.
교회의 교리는 우리가 그 '신비들' 바닥에 흐르는 정신적 틀의 변화를 경험한다면
실로 눈부시고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충 해롭지 않은 명제에 그칠 수도 있다.
근원적 계시를 몸으로 경험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성스럽고 초합리적인 가르침들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위에서 말했다시피, 그때 종교는 전합리적인 어리석음이 되든가,
또는 젊은 시절의 훈련쯤으로 보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인생 안에서도 분명히 유일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다.
위대하면서도 과분한 은총의 경륜 속에서는 잃어버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 영혼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놓아버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를 더 잘 열어놓을 수 있듯이,
인생의 역설을 깨치는 일에 앞장서서 출발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죄인과 신비가가 그들이다. 죄인은 자신의 자가당착을 스스로 부인할 수가 없는 사람이고,
하느님과 함께 내면의 여행을 하는 신비가는 자가당착을 직면하여 받아들일 줄 알고
그것과 함께 울고 웃으며 차츰 더 큰 '오수 탱크'로 되어 간다.
죄인과 신비가 모두 인생의 상충하는 것들을 함께 부여잡아야만 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죄인은 경험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는 그들만의 훌륭한 시스템이 있다.
신비가는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거나 남들한테서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과 느낌을 기꺼이 떨쳐버리고, 모든 것을 오직 사랑으로 보는 눈을 뜨게 된다.
(비록 이 '놓아버림'이 투쟁 없이는, 그리고 자신의 착각에 대한 숱한 죽음 없이는 오지 않지만.)
그리스 논법
아직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접근해 보자.
서양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삼단논법에 기초를 둔다.
그것은 연속적이며 직선적인 논법이다.
1. 동일률: A=A. A는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정확하게 똑같은 둘은 없다.)
2. 모순율: A가 A면 A는 (A 아닌) B가 아니다.
3. 배중률排中律: A는 동시에 A이면서 B일 수 없다.
교육받은 서양인이라면 대개 부지불식간에 이 논리로 생각한다.
산업혁명, 측량과 수학, 대부분 일상생활 영역에서 이 논법이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과학, 철학, 신학, 그리고 천체물리학 등의 영역에서는
이 논법에 심각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닫힌 시스템을 관통하여 넘어서는 길이 필요하다.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장 19-31 절에서 경고했듯이,
그리스 논법은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로 우리를 데려가지 못한다.
실제로 그리스 논리의 원리는 환원법이고, 모든 것에 항상 옳지는 않다.
그것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켄 윌버가 '2차원 공간' 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논법의 결함을 보여주는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자.
하나는 4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의 최근 학설에서 온 것이다.
둘 다 그리스 논리의 밑동을 자르고 극복하여,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전혀 다른 틀로 우리를 인도한다.
둘 다 전혀 다른 생각으로 우리를 열어준다.
만일 종교가 여기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오는 세기에는 세상을 향해서 별로 할 말이 없는 퇴물로 남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삼위일체 신학은 인간의 논리적 사고에 바탕을 둔 그리스의 사고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시되었다. 삼위일체 신학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아버지는 아버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면서 동시에 아들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실상 성령이다.
진지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 교의는
생각의 이원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삼위일체 영성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생각을
전적으로 용도 폐기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어떤 것보다 삼위일체야말로
우리를 '신비' 앞에 참을성 있게 하고 이원적 생각을 겸손하게 만드는 하나의 축복이다.
발음되지 않는 야훼 하느님의 이름 YHWH에 이와 비슷한 효과가 있었으리라는 얘긴 앞에서 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노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삼위일체 교리를 일종의 불가사의로,
수학적 수수께끼 정도로 믿어버리고 그리스 논리에 함몰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상냥한 아일랜드 수녀님들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어린 나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셋이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토끼풀을 뜯어서 보여주었다.
삼위일체 교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의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고, 다른 교리들과 함께 선반에 고이 모셔두었다.
신비가들(아우구스티노, 보나벤투라, 노리치의 율리아나,카파도키아 교부들 같은)만이
열정적으로 삼위일체 방식으로 하느님께 접근하려 했다.
장담하거니와, 장래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강력하게 삼위일체 정신을 실현할 것이고,
그 결과 놀랄 정도로 종교간 대화에 문을 활짝 열어 놓을 것이다.
어쨌든 신앙이 전혀 다른 방식의 앎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대신,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이상한 내용들을 믿는(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리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로 되고 만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톨릭 신자들은 자주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십자성호를 긋고, 삼위일체를 중심 교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실제적이고 진정한 의미는 옆으로 밀쳐둔다.
셋의 원리로 둘의 이원적 원리를 해체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칼 라너가 말했듯이, 우리는 당장 내일이라도 삼위일체 교리를 버릴 수 있고
그래봤자 그것이 그리스도인 대부분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별로 또는 전혀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이자 오류다.
예수 본인이 그리스말을 몰랐고 하늘나라 비밀을 얘기하실 때에도
그리스 논법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양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
우리의 포스트모던 세계는 용감하게도 원자,은하계,시간,공간을 연구하겠다고 나선
과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겸손의 태도를 지니게 만들었다.
그들 마음에 떠오르는(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떠오를 수 없는) 것 하나는
전자 한 알이 '여기(A)'와 '저기(B)'의 불가능한 혼합이라는 발견이다,
그것도 동시에! 배운 사람이라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지성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흡사 마술 쇼 또는 요술쟁이들의 속임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배중률'이 여기서는 진실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긴 하지만,확실히 제3의 무엇이 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간접으로, 그것이 내는 효과를 보고 알 따름이다. 마치 성령처럼!
양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도 비슷한 논리적' 불가능들로 가득 차있다.
블랙홀에서 시작하여, 보이지도 않고 무게도 없지만 물질과 비물질이
서로 상대를 없애지 않도록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중성자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부분이 온갖 역설과 신비들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거기 있어야 한다. 아니면 사물들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해명하지 못한다.
그것이 내는 효과를 제외하고 과학적 방법으로는, 그것을 잴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빛이 파동이고 입자라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다.
과학자들은 과연 빛이 파동이냐 아니면 입자냐를 밝히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빛은 명백하게 입자요 파동이다, 그것도 동시에!
지성인인 당신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성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보여준다.
종교계와 과학계에서, 서양인의 환원론적 사고구조의 틀을 새로 짜도록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어이없는 일은, 더 잘 아는 위치에 있는 과학자들보다
종교인들이 훨씬 더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과학연구소가 다양한 이론과 가설을 안고 씨름하면서
더 많은 신비들이 이해될 때까지 한 가설을 진리로 가정하고 탐색해 나가고 있다.
반면에 우리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는 기도, 정직한 연구, 고통, 기다림 또는 내면의 여정 없이
확실한 결론을 갖고 싶어 한다. 우리는 단지 하느님께 가는 자신의 길을 '생각'하고 싶어 할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걸음 하나하나에 대해 확신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아서 에딩턴 경이 인용한 대로, "우주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울 뿐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경이롭다!"
데이비드 핀켈슈타인은 덧붙이기를
"우리는 그토록 말도 안되면서도 옳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할 능력이 없다" 고 했다.
종교학자로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휴스턴 스미스는
"과학이 강 건너편 기슭을 멀리 바라볼 수는 있지만
과학의 방법으로는 그리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한다.
많은 과학자가 이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기꺼이 기다리고 지속적으로 견뎌낸다.
이는 그들이 애초에 엿본 것들을 신뢰하면서도 좀 더 많은 단서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다.
과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도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켄 윌버는 많은 이에게 이 사실을 보여주고 '통합적 영성'이라 고 부르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오늘날의 탁월한 교사다.
그의 많은 저서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읽어보라.
그리스도인인 내가 불교도를 자처하는 그를 왜 추천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 포스트모던 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요,
세계 종교가 이제껏 가진 최고의 친구들(그리고 사랑 어린 비판자들) 가운데 하나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가톨릭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시아의 전통 종교들인 힌두교, 대승불교, 도교가
비이원성과 역설의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데 늘 감명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비이원성과 역설을 간과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어 '일치의 길' 또는 신적인 친밀함 이라고 말해왔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다음 문장을 문설주와 이마에 써서 붙이라는 명을 받았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비이원성은 여러 학파에서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 그중에는 내 가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비이원성은 철학적 원리가 아니다.
어떤 형태의 범신론도 아니고 필연적인 다름에 대한 부정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비이원적 역설과 신비는 살아있는 한 인간,
우리가 바라보며 사랑에 빠지게 되는 한 인간의 초상이다. 끊
임없이 "따라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예수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며 완성자'히브 12,2, "중개자",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분이다.
그는 '그분과 하느님이 한 분'요한 10,30 이라는 말씀처럼 살아있는 역설로서,
당신을 닮으라고 우리를 부른다. 콜로새서 저자가 말하는 대로,
그분 안에서 큰 틈새들이 극복되고 온 세상의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화해를 이룬다.1,15-20
그리스도인들은 비이원적 원리를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의 신비로 믿고 가르치고 있다.
비이원적 원리에 따라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보이는 모든 반대되는 것을 종합한다.
그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기쁘다.
일찍이 2세기에, 첫 그리스도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성 이레네오는 그
것을 '육화 스캔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오늘도 여전히 스캔들이다.
대부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함께 잡으려 하지 않았고 잡지도 못했다.
거의 모든 경우 내면의 영적 경험이나 지적 도구들이 부족했다.
우리는 모든 신비에 연관된 생각의 패턴을, 비록 그것이 예수 안에서 온전히 주어졌다 하더라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대신 예배했다.
예수를,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종교로 만들었다.
이 교체交替, shift가 우리를 변화의 종교가 아닌 소속의 종교로 들어가게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를 쓰고 도망치려고 온갖 시도를 하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은총의 신비 안에,
우리 모두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분의 방법에 따라 끌려들고 있다.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누구를 본받아 살기를 미하는 묘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높은 보좌에 모셔두고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예수가 신성을 지녔을 뿐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닌 구체적 인간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당신은 그분과 분리되지 않은 당신을 보게 된다.
마음을 열고 예수 안에 있는 위대한 역설들을 받아들여라.
그때 당신은, 당신한테도 똑같이 있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