示從孫濟 - 杜甫 종손자 제(濟)에게 - 두보 平明跨驢出,未知(委)適誰門。權門多噂𠴲,且復尋諸孫。 날이 밝아 나귀 타고 길나섰더니, 뉘 집에 갈지 모르겠구나. 권세 있는 집안에는 사람으로 북적대니, 종손자 제(濟)에게나 가보자꾸나. 諸孫貧無事,宅舍如荒村。堂前自生竹,堂後自生萱。 제(濟)는 가난하고 일도 없어 집이 마치 황폐한 시골같으니, 집 앞엔 대나무가 멋대로 자라고 뒤에는 원추리가 절로 자랐구나. 萱草秋已死,竹枝霜不蕃(飜/繁)。淘米少汲水,汲多井水渾。 가을이라 원추리는 이미 죽었고 대나무 가지도 서리 맞아 무성하지 않은데, 쌀 일 때는 물을 조금 써야지, 많이 길으면 우물이 흐려지느니라. 刈葵莫放手,放手傷葵根。阿翁嬾惰久,覺兒行步奔。 아욱을 벨 적엔 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이니, 함부로 손을 놀리면 아욱의 뿌리가 상하니라. 아! 할애비는 이미 게을러져 버려선가, 어린 자네의 행동이 분주해 보이는구나. 所來(求)爲宗族,亦不爲盤飧。小人利口實(實利口),薄俗難可(具)論。 찾아온 것은 가문의 일 때문이라, 밥 먹으러 오지 않았거늘, 소인(小人)들이야 꼬투리만 잡아대니, 각박한 습속(習俗)이야 어찌 다 논하겠느냐! 勿受外嫌猜,同姓古所敦。 세간의 시기나 질투걸랑 맘에 두지 말것이며, 옛부터 일가(一家) 간에는 돈후(敦厚)에 힘쓸지니라. |
입장은 동원에서부터 하기 때문에, 사전에 논의했던 대로, 각자 따로 또 같이, 약속시간에 약속 장소에 한두번 모여서 얘기해보는 것 말고는, 완전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녀 보는 걸로 했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 삼일 만에 처음 여유있게 잡아보는 스케쥴이네요^^Y
비교적 근대적으로 전면 조경을 한 동원의 경우, 답사로서는 그닥 매력이 덜해서, 저는 샤샤샥! 건너뛰어서 바로 오원(吴园)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남는 대로 동원을 스케치해보는 걸로... 결국 시간이 없어 동원은 보는 둥 마는 둥 서둘러 퇴사원으로 가는 길을 나서게 되었네요...
지도에서 초록색 영역이 오원(吴园), 분홍색 영역이 서원(书园) 영역인 셈입니다... 이렇게 뚜렷하게 담장으로 구획지어져 있는 것은, 근대 이후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 임의로 구획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졸정원이 겪은 오백년 동안의 변천을 생각해보면, 어찌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그 긴 세월에 걸맞게, 졸정원(拙政园)은 자그마치 세 가문의 원림으로 쪼개져 오랜 세월 따로따로 택원으로 향유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원림 간에 담장쯤이야, 어찌보면 당연했을 일이겠다 싶습니다...
우리는 삼삼오오 흩어졌다 모였다, 오원(吴园)과 서원(书园)을 스케지 하기 위해 각개약진, 서진했습니다... 위 지도에서보더라도, 졸정원 중부, 오원(吴园)이 표시되어 있는 영역을 보면, 거미줄같이 동선이 단선적이지 않아, 한번에 다 둘러보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兰雪堂▶涵青亭▶梧竹幽居▶玲珑馆/海棠春坞/枇杷园▶绣绮亭▶远香堂▶倚玉轩▶荷风四面亭/雪香云蔚亭/待霜亭▶香洲▶倒影楼▶浮翠閣▶与谁同坐轩▶卅六鸳鸯馆/十八曼陀罗花馆▶留听阁▶塔影亭▶见山楼▶小飞虹▶小沧浪▶绿漪亭
대략 이렇게 동선을 잡고 출발~~
원(元)대에는 이 터에 대홍사(大弘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동원 부근), 원말, 군벌이었던 장사성(张士诚, 1321-1367)이 평강(平江)을 점령하고, 오왕(吴王)에 오르면서, 사위 반원소(潘元绍)를 부마도위(驸马都尉)에 임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부마부(驸马府)가 여기에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원포(园圃)를 가꾸기를 좋아했던 반원소(潘元绍)가 아마도, 이 곳 일대를 원림으로 즐겼을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대홍사(大弘寺 )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고, 드디어 이 대목부터 왕헌신(王献臣,1474-1551)이 등장합니다^^;;
현재의 졸정원 입구는 동원, 예전의 귀전원거(归田园居)의 중심건물이었던 난설당(蘭雪堂)을 거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의 이름은 이백(李白,701-762)의 '노중련(鲁仲连,BC 305-BC 245)을 보내는 노래'에서 뜻을 따와 지었다고 합니다.
別魯頌- 李白 노중련(鲁仲连)을 보내는 노래 - 이백 誰道泰山高,下却魯連節。誰云秦軍衆,摧却魯連舌。 누가 태산이 높다 하고, 노련(魯連)의 절개를 물리치느냐. 누가 진나라 군사들이, 노련(魯連)의 혀를 꺾어 물리친다 하느냐. 獨立天地間,清風灑蘭雪。夫子還倜儻,攻文繼前烈。 천지 간에 홀로 섰더니 맑은 바람에 난설(蘭雪)은 소쇄(潇洒)하도다. 부자(夫子)는 다시 기개가 빼어나니, 문장을 닦아 앞서간 선열을 이으리라. 錯落石上松,無爲秋霜折。贈言鏤寶刀,千歲庶不滅。 바위 위 솔밭에 어지러이 떨어지고, 가을 서리에 꺾여 부질없어라. 그 맹세 보도(寶刀)에 새기니, 천년 세월에도 스러지지 않으리. |
난설(蘭雪)의 소쇄(潇洒)함을 품고자 했던 왕심일(王心一, 1572-1645)은 일찌기 형부좌시랑(刑部左侍郎)을 지냈던 강직한 선비였고, 그 뜻이 고스란히 난설당(蘭雪堂)에 녹아 있습니다. 명나라 숭정(崇琮) 8년 (1635년)에 오영초당(五楹草堂)이란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는데, 왕심일(王心一)은 '귀전원거기(归田园居记)'에 적기를,
东西桂树为屏,其后则有山如幅,纵横皆种梅花。 동서로 계수나무를 병풍삼았으니, 그 뒤는 한폭의 그림같은 산이고, 종횡으로 모두 매화를 심었다. 梅之外有竹,竹临僧舍,旦暮梵声,时从竹中来。 매화 외에 대나무도 심었는데 대나무는 요사채 옆이어서, 아침 저녁으로 범종(梵鐘)소리 들리면 때맞춰 중들이 대숲에서 나오더라. |
라고 그 풍경을 적고 있네요^^;; 이제 난설당(蘭雪堂)을 나서서 드디어 동원으로 살짝 들어섭니다... 선택과 집중 !! 살짝 지나치면서 바로 오원(吴园)으로 갈 계획인지라, 주마간산으로 휙휙 스케치하고 맙니다@@
지나가면서 본 함청정(涵青亭)...
함청(涵青)은 연못의 이름이기도 하고 정자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왕심일(王心一)의 '귀전원거기(归田园居记)'에서 기록하기를, 성당(盛唐, 713-765)시인이었던 저광희(儲光羲, 707-763)의 시 '同張侍御鼎和京兆蕭兵曹華歲晚南園'에서 그 뜻을 취했다고 합니다...
同張侍御鼎和京兆蕭兵曹華歲晚南園 - 儲光羲 公府傳休沐,私庭效陸沈。方知從大隱,非復在幽林。 조정에서 어쩌다 쉴 때면, 내 거닐던 뜰을 버려둔 게 보이네. 마땅히 대은(大隱)을 쫓아야 함을 알지만, 다시 그 그윽한 숲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네. 闕下忠貞志,人間孝友心。既將冠蓋雅,仍與薜蘿深。 대궐에서야 곧은 뜻으로 충성하지만, 사람은 효와 우애하는 마음 있으니, 벼슬살이야 이미 우아하지만, 이내 무성해진 칡덩쿨이랑 함께 할까. 寒變中園柳,春歸上苑禽。池涵青草色,山帶白雲陰。 추위에 뜰 안 버들은 빛바랬지만, 뜰 안 짐승들에게도 봄은 돌아오니, 연못은 푸른 풀빛으로 가득하고, 산은 흰 구름 그늘로 띠를 둘렀네. 潘岳閑居賦,鍾期流水琴。一經當自足,何用遺黃金。 반악(潘岳) 한거부(閑居賦)에, 종자기(鍾子期)는 흐르는 냇물에 거문고를 튕겼거늘, 오솔길 하나면 족하나니, 황금 남겨봐야 어디에 쓰겠는가? |
푸른 빛을 가득 머금은 연못을 관조하면서 한가롭게 거닐면서, 가슴속에 품은 대은(大隱)의 기개를 몇 번이고 되새겨보고 싶지만, 다음 번에 꼭 좀 더 머물러봐야지~ 하면서 우리는 서둘러 오원(吴园)으로 옮겨갑니다...
오원(吴园)의 입구인 기홍(倚虹)을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왼쪽 청우헌(聽雨軒)과 영롱관(玲珑馆)을 들릅니다... 절정을 맞이하느라, 놏쳐버릴 것같은 경관을 그나마 챙기기 위해^^;;
자그마하게 구획지어진 마당에 영롱관(玲珑馆)과 청우헌(聽雨軒)이 서로 교차하여 비껴 서 있습니다... 청우헌(聽雨軒)이란 이름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남당(南唐)의 시인이었던 이중(李中)의 시 '贈朐山楊宰'와 남송(南宋)의 시인 양만리(杨万里,1127-1206)의 시 '秋雨歎十解'에서 그 뜻을 따왔다고 하네요...
贈朐山楊宰 - 李中 訟閑徴賦畢,吏散卷簾時。聽雨入秋竹,留僧覆舊棋。 송사가 한가하면, 부세도 끝나게 되니, 발을 걷어올릴 때 즈음 관리들도 흩어졌네. 비가 가을 대숲에 듣는 소리를 들으며, 머물던 스님은 옛 바둑을 다시 두네. 得詩書落葉,煮茗汲寒池。化俗功成後,煙霄會有期。 낙엽에 시를 적으며, 추운 연못에서 물을 길어 차를 끓이네. 속인이 되어 공을 이룬 후에, 안개가 되어 모이기를 기약하네. |
秋雨歎十解 其三 - 楊萬里 濕侵團扇不能輕,冷逼孤燈分外明。 눅눅해진 둥근 부채는 가벼웁지 못하고, 차갑게 떠는 외로운 등불 저 너머를 밝히네. 蕉葉半黄荷葉碧,兩家秋雨一家聲。 파초 잎은 샛노랗고, 연잎은 파릇파릇, 양쪽 집에 내리는 가을 비는 한 집 소리같구나. |
대숲에 내리는 빗소리일지, 파초 위에 연꽃 위에 내리는 빗소리일지 청우헌(聽雨軒)에서 들리는 듯한 이 소리는 그런 가을비 소리입니다^^... 봄이지만, 웬지 서늘한 가을 느낌의 집이름... 창문 너머에 파초가 언듯 보이네요^^;; 그 옆에는 마당의 또 다른 주역 영롱관(玲珑馆)이 있습니다..
중국 원림 후기를 쓰다보니, 때아닌 전고(典故)를 뒤지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영롱관(玲珑馆)이란 이름은 대표적인 북송(北宋) 시인 소순흠(苏舜钦, 1008-1048)의 시 '滄浪亭懷貫之'에서 뜻을 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滄浪亭懷貫之 - 蘇舜欽 창랑정에서의 변치않는 소회 滄浪獨步亦無悰,聊上危臺四望中。 창랑을 홀로 걸으니 역시 즐겁지 않아, 그나마 위태로이 대(臺) 위를 올라 사방을 내다보네. 秋色入林紅黯澹,日光穿竹翠玲瓏。 가을빛 숲에 들어와 붉다가 어두컴컴. 햇빛은 대숲을 뚫고 구슬 구르는 소리마냥 비취빛이네. 酒徒飄落風前燕,詩社凋零霜後桐。 술친구들은 나부끼는 바람 앞 제비같고, 시짓는 친구들은 서리내려 시든 오동잎을 아파하네. 君又暫來還徑往,醉吟誰復伴衰翁。 그대 잠깐 와서 길을 돌아가니, 취해 읊노니 누가 다시 힘빠진 늙은이 벗이 되줄텐가. |
비취빛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와 그 푸르고 영롱!!한 빛깔이 엮인 집을 더 머물지 못하고 또 옆으로 옮겨갑니다... 인문학 소양이 얕아서 저 침잠하여 그 심상을 관조해보거나 짐작해보거나 할 엄두는 못내겠고, 이 후기에서는 일단 첫 발을 디딘 것에 의미를 두는 걸로^^;;;
이제 우리는 오원(吴园)의 하이라이트를 만끽하러 오죽유거(梧竹幽居)를 향해 복도를 걷습니다... 열린 왼쪽 연못 물결 너머에는 저 멀리 북사탑이 우람하게 우뚝 서있습니다... 그 왼쪽에는 울창해진 오월의 숲에 안기듯 원향당이 보일듯 말듯, 그 오른쪽에는 원근간에 삼신산마냥 세 섬이 하나가 되어 마치 하풍사면정, 설향운울정, 대상정이 한 언덕 위에 나란히 서있는 마냥 원향당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永寧小園即事 - 羊士諤 영녕사 작은 원림에서 시를 짓다 - 양사악 蕭條梧竹下,秋物映園廬。宿雨方然桂,朝飢更摘蔬。 쓸쓸한 가지 오동잎 대잎 아래, 가을 빛은 뜰 안 오두막을 비추네. 비는 며칠이고 계수나무에 내리고, 아침 허기에 다시 나물을 뜯네. 陰苔生白石,時菊覆清渠。陳力當何事,忘言媿道書。 그늘 이끼는 흰 바위를 덮고, 때마침 국화는 맑은 시내를 뒤덮네. 마땅히 진력함은 어찌된 일인가, 도서(道書)가 부끄러워 말을 잊었네. |
삼면에 둥근 창을 달아, 갇혀있는 듯하여도, 열린 듯 마음껏 사방을 휘리릭 둘러볼 수 있는 집 !!! 창과 창이 겹쳐, 기하학적인 운율을 느껴지기도 하고, 마침 한낯이라 눈부시도록 희고 찬란한 창문 너머와 완전히 대조적인 어두컴컴한 실내, 아니 반실내의 어둑어둑한 둥근 실루엣, 두께감이 있는 벽채의 부드러운 띠 같은 둥근 창호 둘을 겹쳐 자연스레 액자삼으면 저 너머 신선경은 바로 삼신산과 탑입니다...
이제 차근차근 클라이막스를 쌓아올리기 위해, 원향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천천히 둘러보는 오월의 졸정원(拙政园)은 녹음이 우거진 초록의 봉래산(蓬萊山)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저 멀리 북사도 힐끗 보이구요...
왕헌신(王獻臣)은 명나라때 사람으로 자는 경지(敬止), 호는 괴우(槐雨), 어사(御史) 벼슬을 지낸 바 있으며, 명(明) 정덕(正德) 5년 (1510년) - 8년 (1513년) 경에 낙향해 소주(苏州) 북쪽 영춘방(迎春坊)에 있었던 옛 영진관(寧真觀) 자리 (지금 소주박물관(蘇州博物館)이 있는)에 은거(隐居)했는데, 이 무렵까지 있었다는 대훙사(大弘寺)의 승도를 내쫗고, 불상을 치워버리고는 원림을 조성했다는 말이 있는데, 기실 명나라 중기 왕오(王鏊,1450-1524, 오문인가에서 얘기되었던 그 분^^)가 편찬한 고소지(姑苏志)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大弘寺……延佑间,僧余泽居此,尝别创东斋,斋前有井,因自号天泉。 대홍사 ..... 원나라 인종 연우년간(1314-1320)에 스님들이 주석하여 동재(东斋)를 짓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어 천천(天泉)이라 불렀는 데, 元末寺毁,相传毁时见红衣沙门立烟焰上,久之乃没,寺既荡尽,而东斋独存. 사찰은 원말(元末)에 황폐해졌고, 전하는 말로는 그 때, 불과 연기 속에 붉은 옷의 스님들이 내내 서있다가 사라졌는데, 절은 이제 없어진 지 오래이고, 동재(东斋) 만이 남아있다. |
라고 되어 있어, 대홍사(大弘寺)는 원말에 이미 폐사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민간에서 내려오던 폐사 당시의 모습이 왕헌신(王献臣)의 원림조성과 겹쳐 생긴 새로운 전승이었을 수도 ...
기실 이 당시 명과 조선 양안에서 사대부에 의한 불교유적의 훼손이 데자뷰처럼 빈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승으로 내려왔다는 왕헌신의 이 일화도 사실,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은, 조선 땅 여기저기, 바로 이맘때 벌어졌던 실화와 묘하게도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겠죠... 나의 믿음만이 옳다는, 검증거부의 아집,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체 믿고 돌아볼 생각조차 않는 일반화의 오류...
여튼, 이때 진나라 때의 반악(潘岳)이 지은 "闲居赋并序" 중 서문의 한 구절에서 뜻을 따와 이름을 졸정원(拙政园)이라고 지었다고 하네요^^
...... 于是览止足之分,庶浮云之志, 이 때 그침과 만족함의 분수를 살피고,부귀를 뜬 구름처럼 여기고자, 筑室种树,逍遥自得。 집짓고 나무심으며 소요(逍遥)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자 한다. 池沼足以渔钓,舂税足以代耕。 연못은 낚시하기 족하고 봄날 세경을 받으니 밭갈이를 대신하기에 족하다. 灌园鬻蔬,供朝夕之膳;牧羊酤酪,俟伏腊之费。 동산에 물대고 푸성귀 죽 끓여 아침저녁 찬을 구하고, 양을 키워 털을 팔아 복일(伏日), 납정(臘亭)을 치루고자 한다. 孝乎惟孝,友于兄弟,此亦拙者之为政也。 효라 함은, 오로지 효인 것이고, 형제와는 우애로울 일이니, 이 역시 하찮은 이(拙者)들에겐 바로잡을 일이다. ...... |
라는 구절에서 뜻을 얻어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전하는 왕헌신(王献臣) 선생의 면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명말청초의 순국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진자룡(陳子龍, 1608-1647)이 서부원(徐孚遠, 1599-1665)과 함께 황명경세문편(皇明經世文編) 504 권, 보유(补遗) 4권을 편찬하였는데, 권91에 수록된 송행인왕군사조선서(送行人王君使朝鲜序)에 당시 조선에 사절로 들렀던 그의 면모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弘治乙卯春三月、礼部言朝鲜之有事也、宜遣一行人、往致礼于其国、诏可、 홍치(弘治) 8년 (1495년), 예부(礼部)에서 조선(朝鲜)과 관련하여 행인(行人) 1인이, 그 나라(조선)에 예를 갖춰 다녀오도록 함이 마땅하다 하여, 惟时行人王君献臣实受命以行、凡与君同年举进士、尤厚善者、 그때 행인 왕헌신(王献臣)이 갑자기 수행을 명받았는데, 그때 막 진사(进士)가 되어, 돈후하고 선한 자로, 简讨郭君瑀而下、若干人、醵饯之、且相议曰、 곽우(郭瑀) 이하 약간명을 추렴하여 배웅하고는, 서로 의논하며 말하길, 敬止少年、伟丰仪、妙词翰、选于众而使远外、名一旦闻九重、临遣之日、赐一品服视他使为荣、"경지(敬止, 왕헌신)는 어리면서, 풍채나 거동이 훌륭하고, 언행과 문장이 신묘하여, 그 중 뛰어나 외지 멀리 보내었으니, 그 명을 무겁게 듣고, 명받아 떠나는 날, 사신 관복을 한 벌 하사받아 입었으니, 다른 사신들이 탄복하여, ...... |
이렇게 전도유망했고, 조선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왕헌신(王献臣)은 이런저런 온갖 풍상을 겪고난 만년, 정덕(正德) 4년 (1509년) 부친상으로 낙향하여 대홍사(大弘寺) 터, 영진도관(宁真道观) 자리에 터잡아 원림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이 당시 그 초창기의 졸정원의 면면은 당대의 화가였던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이 가정(嘉靖) 12년 (1533년)에 남긴 글과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왕씨졸정원기(王氏拙政园记), 그리고 그 중에서도 원림 내 경물 31군데를 골라 그린 졸원도영(拙园图咏) 31폭 등등, 그리고 그 안에 묘사되어 있는 약서당(若墅堂), 몽은루(梦隐楼), 소비홍(小飞虹), 기옥헌(倚玉轩), 유오(柳隩, 득진정 근처에 있었을 듯), 요포(瑶圃, 枇杷园 내에 있었던 연못) 등,,, 지금은 찾기 힘든 품격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당대의 면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원주(園主)였던왕헌신과 교류가 잦았고 또한 막역한 사이였던 문징명은 사실상 원림의 조성설계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졸원도영(拙园图咏) 제 1 도(图) 약서당(若墅堂) 편에 당시 조성되었던 졸정원의 소박한 풍모를 살펴보면, 지금과는 사뭇 밀도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조성 당시 약서당, 지금의 원향당의 전신, 시대가 바뀌면서 소박하고 한산했던 풍모가 화려하고 오밀조밀하게 변화한 듯 하죠...
지금은 이 자리에 원향당(遠香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원향당은 오원(吴园)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입니다. 동쪽으로는 수기정(綉綺亭), 서쪽으로는 의옥헌(倚玉軒), 북쪽으로 펼쳐지는 연못 등 둘러보는 사방 풍경이 모두 원향당을 중심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어, 마치 두루마리 화폭처럼 펼쳐지는데, 그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연못 가운데에 봉긋이 솟은 작은 가산에는 대상정(待霜亭)과 설향운울정(雪香雲蔚亭), 그리고 하풍사면정(荷风四面亭)이 원향당과 원근간에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조성 직후 졸정원 일찌기 당대에, 사가원림으로서의 그 명성이 문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이를 흠모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 원림을 방문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졸정원(拙政园)은 그렇게 이후 오백년동안 원주(園主)가 수없이 바뀌면서도 다른 듯 비슷한 듯 그 땅, 그 집, 그 연못을 그대로 품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금세 현지인 인파(사자림 들렀을 때 밀려들었던 인파, 그 사람들이 고스란히 졸정원(拙政园)에도 들른 게 틀림없습니다@@) 속에 파묻혀 서로의 인기척을 확인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ㅠㅠ 이날 이때 우리와 부대꼈던 그들은 현재 이 곳에 살고 있고, 집 담장 너머에 당장 졸정원(拙政园)을경유하는 노선버스가 하루에 수십번이고 오고가고, 1년짜리 졸정원 이용 할인 패스라도 끊은 원주민(??)이었다면 비용도 값싸게, 이미 수십번 이상은 들렀을 터이고... 우리와 부닺친 그들에게 이 날은 그 중 겨우 한 번 들른 것 뿐이라, 어쩌다 원향당(远香堂)이나 소비홍(小飞虹)을 빼먹어도 아깝지야 않겠지만, 우리는 좀 다릅니다 ㅠㅠ 이 날 들르지 못한 곳은, 다시 몇년 후에나 기회가 닿을지도 모르니, 참 마음만 바쁩니다..
저 멀리 북사탑이 바라다보이는 연못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새 원향당(远香堂) 앞 너른 마당에 다다릅니다...
여기는 온통 연꽃의 향기입니다... 원향당이란 이름 또한, 북송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던 주돈이(周敦颐, 1017-1073) 선생의 지극한 연꽃 사랑이 낳은 걸작, 애련설(愛蓮說)에서 그 뜻을 따왔습니다...
水陆草木之花,可爱者甚蕃。 물과 뭍의 초목(草木)에 나는 꽃은 사랑할만한 것이 대단히 많다. 晋陶渊明独爱菊,自李唐来,世人甚爱牡丹。 진(晋)나라의 도연명(陶渊明)은 오직 국화를 사랑하였고, 이(李)씨의 당(唐)나라 이래로 세상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予独爱莲之出淤泥而不染,濯清涟而不妖; 나는 오직 연꽃만을 사랑하느니, 진흙에서 나왔어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다, 中通外直,不蔓不枝; 속은 비었으나 겉은 곧아서 덩굴이나 가지를 뻗지 않으며, 香远益清,亭亭净植, 향기는 멀리서 더욱 맑고, 깨끗하게 우뚝 서 있으며, 可远观而不可亵玩焉。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희롱해보거나 가지고 놀 수는 없다. 予谓:菊,花之隐逸者也;牡丹,花之富贵者也;莲,花之君子者也。 나는 생각한다, 국화는 꽃 중에 은자(隐子)요 모란은 꽃 중에 부귀(富贵)한 자요, 연꽃은 꽃 중에 군자(君子)로구나. 噫!菊之爱,陶后鲜有闻。莲之爱,同予者何人?牡丹之爱,宜乎众矣! 아, 국화를 사랑함이 도연명 이후로는 거의 듣지 못했다. 연을 사랑함이 나같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모란을 사랑함은 당연히 많을 것 같다 ! |
桥陵诗三十韵因呈县内诸官 - 杜甫 교릉시(桥陵诗) 삼십 운을 지어 현 내의 관원들에게 드리다 - 두보(杜甫) 先帝昔晏驾,兹山朝百灵。崇冈拥象设,沃野开天庭。 일찌기 선제(예종)께서 붕어하시고 이 산에서 온갖 신령들을 조회하셨네. 높은 산은 왕릉을 껴안고 기름진 들판은 천자의 제단을 열었네. 即事壮重险,论功超五丁。坡陀因(用)厚地(力),却略罗峻屏。 시작함에 거듭 위험 무릅쓰니 공로로야 옛적 다섯 장사를 앞서는구나. 험한 산세는 후덕한 땅에서 나오고 뒤로는 험준한 절벽 병풍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네. 云阙虚冉冉,风松肃泠泠。石门霜露(雾)白,玉殿莓苔青。 구름 속 궁궐은 공중에 아련히 높고 불어오는 솔바람은 숙연히 차갑기만 하네. 왕릉 돌문에는 흰 서리와 이슬이, 황제의 사당에는 이끼가 푸르다. 宫女晚(晓)知曙,祠官(臣)朝见星。空梁簇画戟,阴井敲铜瓶。 궁녀는 일에 바빠 늦게야 날 샌 줄 알고 사당 관리는 아침부터 별을 보는구나. 빈 들보에는 화극(画戟)들, 어둑어둑 우물가엔 동병(铜瓶) 두드리는 소리. 中使日夜(相)继(日继夜),惟王心不宁。岂徒恤备享,尚谓求无形。 황제의 내관들이 밤낮으로 이어지니, 오직 편치 못한 황제의 마음때문이리. 어찌 갖춰 올린 제사만 걱정하시리오, 오히려 보이지않는 선왕을 찾으려 하셨음을. 孝理敦国政,神凝推道经。瑞芝产庙柱,好鸟鸣岩扃。 효(孝)로 국정을 돈독히 하시고 정신을 모아 도덕경을 헤아리시네. 영지풀은 상서로이 사당 기둥에서 돋고 예쁜 새들은 빗장 바위에서 우누나. 高岳前嵂崒,洪河左滢濙。金城蓄峻址,沙苑交回汀。 눈 앞에는 높고 험한 산, 너른 강물결은 소용돌이치며 왼쪽으로 흘러간다. 금성(金城)엔 가파른 터 투성이, 사원(沙苑)은 진창을 돌려줄 뿐. 永与奥区固,川原纷眇冥。居然赤县立,台榭争岧亭。 오래고도 그윽하도록 그 곳은 굿굿하였고, 강변엔 어지러이 낮게 흘러가는 물. 적현(赤县)은 태연히 그대로, 누대와 정자들은 앞다퉈 서있네. 官属果称是,声华真(宜)可听。王刘美竹润,裴李春兰馨。 과연 관속(官属)에 걸맞을까 ? 화려한 명성은 실로 들을만 할까 ? 왕선생(王粲, 177-217), 유선생(刘桢, -217)의 문장은 회계(會稽)의 화살처럼 윤기나고 배선생, 이선생은 봄 난초마냥 향기롭구나. 郑氏才振古,啖侯笔不停。遣辞必中律,利物常发硎。 정씨의 재주는 예부터 드날렸고 담후(啖侯)의 붓은 멈추지 않는니, 글만 쓰면 운율에 맞고 만물에 탐하는데는 항상 숫돌에 간 듯 하구나. 绮绣相展转,琳琅愈(逾)青荧。侧闻鲁恭化,秉德崔瑗铭。 문장은 비단을 펼친 듯 뒤집은 듯 곱고 마음씨는 푸른 옷빛보다도 맑구나. 노첨의 교화를 귀 기울여 듣고 최원의 좌우명을 덕망으로 간직한다. 太史侯凫影,王乔随鹤翎。朝仪限霄汉,客思回林坰。 태사 벼슬하는 관리는 오리의 그림자를 살피고 왕교처럼 학을 깃을 선망하여 신선의 세계를 따랐다. 조정의 의례가 하늘의 은하수처럼 멀리 막혀있어 나그네 처지의 나는 숲과 들판으로 돌아가련다. 轗轲辞下杜,飘飖陵(凌)浊泾。诸生旧短褐,旅泛一浮萍。 때 못 만난 불우한 처지로 하두성을 하직하고 바람에 나부끼듯 유랑하며 탁수와 경수를 지나가리라. 유생의 지난날 짧은 삼베옷을 걸치고 떠도는 나그네 한 뿌리 부평초로다. 荒岁儿女瘦,暮途涕泗零。主人念老马,廨署(宇)容(客)秋萤。 흉년으로 아이들은 수척해지고 황혼처럼 늙어가는 나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주인은 늙은 말 같은 나를 생각해주고 관공서에서는 가을 반딧불이 모습을 보인다. 流寓理岂惬,穷愁醉未醒。何当摆俗累,浩荡乘沧溟。 유랑하며 붙어사니 인간의 정리에 어찌 즐거울까 끝없는 수심에 취하여 깨어나지 못한다. 언제나 세속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호탕하게 푸른 바다 너머 신선세계로 가는 배를 타려나. |
倚楹碧玉万竿长,更割昆山片玉苍。 기둥에 기대니, 벽옥이 만 간(竿)이나 길고, 다시 곤산을 쪼개만든 편옥(片玉)이 푸르르구나. 如到王家堂上看,春风触目总琳琅。 왕가당 위에 다다라 보니, 봄바람이 눈에 닿아 온통 구슬들이네. |
<문징명의 졸정원도영(拙政园图咏)에 실려 있는 기옥헌의 옛모습>
柳浪接双亭,荷风来四面。 버들은 물결져 두 정자를 이어주고, 연꽃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네. |
四壁荷花三面柳,半潭秋水一房山 사방에는 연꽃, 삼면은 버들이요, 반쯤 담긴 가을 연못 속에는 어엿한 산이로다. |
山居喜友人見訪 - 李洞 入雲晴斸茯苓還,日暮逢迎木石間。 구름걷혀 다시 복령(茯苓)을 캐내고, 날 저물면서 나무와 돌 사이를 맞추네. 看待詩人無別物,半潭秋水(燒)一房山。 시인은 기다리다 분간이 안 되고, 반쯤 담긴 가을 연못 속에는 어엿한 산이로다. |
梅花 - 王安石 매화 - 와안석 牆角數枝梅,凌寒獨自開。遥知不是雪,爲有暗香來。 담 모서리 두서너 매화가지, 매서운 추위에도 홀로 피어 있네. 멀리서 보면 눈이 아닐까 했더니, 그윽한 향기가 피어나오네. |
风静林还净, 天宽水亦宽。 바람은 고요하고 숲도 다시금 깨끗하니, 하늘도 드넓고 물도 광활하네. |
入若邪溪诗 - 王籍 약야계곡에 들어가서 시를 지음 - 왕적 艅艎何泛泛,空水共悠悠。阴霞生远岫,阳景逐回流。 나룻배는 무척 많이 둥둥 떠다니는데, 하늘과 강물 다 함께 유유하구나. 흐릿한 노을은 먼뎃산에서 생겨나고, 햇빛은 빙 돌아 흐르는 강물 따라 도네. 蝉噪林逾静,鸟鸣山更幽。此地动归念,长年悲倦游。 시끄런 매미 소리에 숲은 더욱 고요하고, 새 소리에 산은 다시 그윽해지네. 이 땅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 일으키니, 오랜 세월 경치 구경에 지쳤음이라. |
答鄭騎曹青橘絕句 - 韋應物 정기조(鄭騎曹)가 귤을 청하는 편지에 답하여 지은 절구 憐君臥病思新橘,試摘猶酸亦未黃。 몸져 누워 햇귤 생각한다는 그대 가여워, 한번 따봤더니 아직 시고 노랗지도 않구나. 書後欲題三百顆,洞庭須待滿林霜。 편지 끝에 '삼백과(三百顆)'라 쓰고 싶지만, 동정호(洞庭湖)에 숲 가득 서리 내리길 꼭 기다려야 한다네. |
葛巾羽扇红尘静,紫李黄瓜村路香 |
送將官梁左藏赴莫州 - 蘇軾 막주로 부임해 가는 장관 양좌장을 전송하며 燕南垂,趙北際,其間不合大如礪。 연나라의 남쪽 변방, 조나라의 부쪽 경계 그 사이에 숫돌만 한 한 완충지대가 있었지요 至今父老哀公孫,蒸土為城鐵作門。 지금도 노인들이 공손씨를 애도 하나니 흙을 구워 성을 쌓고 쇠로 문을 만들어서 城中積穀三百萬,猛士如雲驕不戰。 성 안에 곡식을 삼백 만 섬을 쌓았는데 운집한 용사들이 교만 부리며 안 싸운지라 一旦鼓角鳴地中,帳下美人空掩面。 하루 아침에 북과 뿔피리가 대지를 울리자 장막 밑의 미인들이 공연히 얼굴을 가렸지요 豈如千騎平時來,笑談謦欬生風雷。 그러니 어찌 천 명의 기병에게 태평한 시절이 담소하다 기침하면 바람이 불고천둥이 치며 葛巾羽扇紅塵靜,投壺雅歌清燕開。 칡베 두건 깃털 부채에 붉은 흙먼지 가라앉고, 투호 놀이에 우아하게 시 읊으며 청아하게 잔치여는 것과 같으리오? 東方健兒虓虎樣,泣涕懷思廉恥將。 동방의 건아들은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울며불며 염치 있는 장군을 그리겠고 彭城老守亦淒然,不見君家雪兒唱。 팽성 땅의 늙은 태수도 처량하게 되어서 그대 집의 설아가 노래하는 걸 못 보겠군요 |
病中遊祖塔院 - 蘇軾 병들어 조탑원에 자적하며 - 소식 紫李黃瓜村路香,烏紗白葛道衣涼。 자주빛 오얏 노란빛 오이에 시골길은 향기롭고, 검은 비단 모자에 흰 칡 도복 서늘하네 閉門野寺松陰轉,攲枕風軒客夢長。 문 닫힌 시골 절은 소나무 그늘로 덮여 베개 문지방에 기댄 나그네의 긴 꿈 因病得閑殊不惡,安心是藥更無方。 병들어 한적하니 달리 나쁠 것 없고 마음 편안하니 약은 더욱 필요 없네 道人不惜階前水,借與匏樽自在嘗。 도인은 섬돌 앞의 물을 아끼지 않고 표주박 빌려주어 맘껏 맛보게 하네 |
楚辞 九歌 其三 湘君 - 屈原 초사 상수(湘水)의 신 - 굴원 君不行兮夷猶,蹇誰留兮中洲? 임은 오질 않고 머뭇거리네, 아! 누가 물가 섬에 잡아두셨나 ? 美要眇兮宜修,沛吾乘兮桂舟。 곱게 꽃단장하고 나는 훌쩍 계수나무 배에 올라타노라. 令沅湘兮無波,使江水兮安流! 원컨대,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잠재워주시고, 장강(長江) 물도 고요히 흐르게 해주소서. 望夫君兮未來,吹參差兮誰思! 기다리는 저 님은 오지 않지만, 피리불며 다른 누굴 생각할까나 ? 駕飛龍兮北征,邅吾道兮洞庭。 비룡(飛龍) 타고 북쪽으로 가, 나는야 동정호(洞庭湖)로 길을 돌아드노라. 薜荔柏兮蕙綢,蓀橈兮蘭旌。 벽려 장막, 혜초 휘장, 창포로 꾸민 노와 난초 깃발, 望涔陽兮極浦,橫大江兮揚靈。 잠양(涔陽)을 바라보니, 포구는 아득하고, 큰 강 가로질러 영기 드날리노라. 揚靈兮未極,女嬋媛兮為余太息。 영기 아직 미치지 못하니, 그녀는 애틋하여, 날 위해 한숨 짓고, 橫流涕兮潺湲,隱思君兮陫側。 눈물 주르륵 흐르도록, 님을 떠올리면 애통하고 슬프누나.. 桂櫂兮蘭枻,斲冰兮積雪。 계수로 만든 노와 난초로 꾸민 돛대로 얼음 깨부수고 눈 치우노라, 采薜荔兮水中,搴芙蓉兮木末。 벽려를 물 속에서 캐고 부용을 나무 끝에서 뽑노라. 心不同兮媒勞,恩不甚兮輕絕。 마음이 같지 않으면 중매만 애쓰고 정이 깊지 않으면 끊어지기 쉬우나니. 石瀨兮淺淺,飛龍兮翩翩。 돌 많은 여울은 찰랑찰랑, 비룡(飛龍)은 가볍게 훨훨. 交不忠兮怨長,期不信兮告余以不閒。 사귀되 충직하지 않으니 원한만 길어지고, 약속하되 믿음이 없으니 내게 여유없다 하누나. 鼂騁騖兮江皋,夕弭節兮北渚。 아침에 말달려 강 언덕에 닿고, 저녁 북쪽 물강에서 멈추네. 鳥次兮屋上,水周兮堂下。 새는 지붕에 깃들고 강물은 집 아래를 맴도네. 捐余玦兮江中,遺余佩兮醴浦。 옥고리(玦)는 강 속에 던져버리고 패옥(佩)일랑 예수 포구에 놓아두누나. 采芳洲兮杜若,將以遺兮下女。 방주(芳洲)에서 두약(杜若) 캐다가 아랫세상 여인에게 남겨주리. 時不可兮再得,聊逍遙兮容與。 때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그냥 더불어 소요(逍遙)하리라. |
櫂歌行 - 徐堅 권가행 - 서견 櫂女飾銀鉤,新妝下翠樓。霜絲青桂檝,蘭栧紫霞舟。 노젓는 여인 은고리로 장식하여, 비취빛 다락 아래 꽃단장했네. 서리 빛 줄무늬에 푸른 계수나무 노, 목련으로 만든 키, 자주빛 어린 배. 水落金陵曙,風起洞庭秋。扣船過曲浦,飛帆越回流。 물은 새벽 금릉에 떨어지고, 바람은 가을 동정호(洞庭湖)에 일어서네. 배를 두드려 갯벌을 지나가니, 돛은 날으듯 흐름에 되날아오네. 影入桃花浪,香飄杜若洲。洲長殊未返,蕭散雲霞晚。 그림자 복숭아꽃 물결에 들어오니, 물가에 닿은 듯 향기 날리는데, 모랫벌은 긴듯 되돌아오지 않고, 소쇄하게 늦은 노을에 구름 흩어지네. 日下大江平,煙生歸岸遠。岸遠聞潮波,爭途遊戲多。 햇빛에 장강은 너르고, 돌아갈 언덕 멀리 구름 피어오르는데, 언덕 멀리 물결 부딪치는 소리, 길다퉈 노닥거리는구나. 因聲趙津女,來聽采菱歌。 소리들은 조진(趙津)의 여인, 와서 마름 뜯는 노래 듣네. |
《八旗奉直会馆图》중 화원 부분 확대
<중원 및 서원, 주택부분 평면도>
그 중 서원은, 청(清) 건륭(乾隆) 11년 (1746년) 태사(太史)였던 엽사관(叶士宽)의 서원(书园)이었을당시부터 살펴보자면, 황폐해진 터를 사들여 수리하여 옛모습을 되찾았고, 이후,제택(第宅)은 왕미기(汪美基) 등의 소유, 후원은 정(程), 조(赵), 왕(汪)씨 소유로 나뉘었고, 광서(光绪) 3년(1877년), 지방의 거상이었던 장이겸(张履谦,1838-1915)이 은 6,500냥을 들여 매입하여 이름을 보원(补园)이라 개칭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림을 이전보다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꾸미면서 명대의 소박하고 한산한 풍모가 많이 손상되었다고도 하구요, 이때 수리한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광서13년(1887) 팔기봉직회관도 대대적인 수리를 하여, 이 때의 모습대로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됩니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들은 대부분 만청시대의 것입니다.
이제 20세기로 넘어옵니다...헥헥@@
선통(宣統)3년 (1911) 신해혁명 후 강소성(江蘇省)이 독립하여 팔기봉직회관도 봉직회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37년 겨울, 일본군이 소주(苏州)를 점령할 당시 졸정원(拙政园)도 피해를 입어, 원향당(远香堂), 남헌(南轩) 등이 헐리기도 했습니다. 1938년에는 친일 왕정위(汪精卫,1883-1944) 정권 당시 봉직회관(奉直會館)과 보원(補園)이 강소성정부(江蘇省政府) 산하가 들어가서, 일식 가옥이 한 채 원림 내에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한편 동부의 제택(第宅) 영역은 1920년, 이경희(李经羲, 1857-1925)가 매입하여 수리 후 은거하기도 했지만, 자손에 이르러 은행에 저당잡히면서 귀전원거(归田园居)는 황폐해져, 일부 민가가가 들어서고, 일부는 정부 교육청에서 점유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1945년 항일정쟁 승리 후, 왕정위(汪精卫)정권이 붕괴되면서, 보원(补园)은 다시 장씨(张氏) 후손에게 넘어갔고, 봉직회관(奉直会馆)은 봉직동향회(奉直同乡会)로 남았습니다. 1946년 국립사회교육학원(国立社会教育学院)이 사천벽산(四川壁山)에서 소주(苏州)로 옮겨오면서, 졸정원(拙政园) 전체를 교사(봉직회관) 및 교직원 숙사(귀전원거 일대)로 활용하게 되었다가, 1948년에는 교사가 부족하여 사회교육학원(社会教育学院)에서 장씨(张氏) 후손에게서 보원(补园)을 임대하였습니다. 1949년, 사교학원(社教學院)이 무석(無錫)으로 옮겨가고, 교사로 쓰였던 졸정원(拙政园)은 수리를 거쳐 소남(蘇南) 소주행정구전원공서(蘇州行政區專員公署)로 사용되었고, 장씨후손은 인민정부에 보원(補園)을 헌납했습니다. 헌납@@
1951년 11월 다시 소주(蘇州) 전원공서(專員公署)가 이전해 나가고, 소남구(蘇南區) 문물관리위원회(文物管理委員會)가 관리하면서 수리를 거쳐 1952년 민간에 개방되었습니다. 이후, 원래의 팔기봉직회관(八旗奉直會館) 및 부속건물군 영역에 소주박물관이 들어섰는데, 당시 혁명의식을 반영하여 ‘忠王府’ 건물은 그대로 남아, 만청시기의 팔기봉직회관(八旗奉直會館)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 지금의 동부영역은 화포(花圃)와 직공숙사(職工宿舍)로 활용되었는데, 그 중 남쪽은 원래 장지만(张之万,1811-1897) 제택(第宅)이었다가 소남(苏南) 소주도서관(苏州图书馆)을 거쳐 강소성(江苏省) 소주공예미교(苏州工艺美校)가 되었습니다.
이제, 졸정원 내력의 마지막 장입니다@@
1954년 신설된 소주시(蘇州市) 원림관리처(園林管理處) 산하 소남(蘇南) 문물관리위원회(文物管理委員會)에서 졸정원(拙政园) 전체를 관리하게 되어, 바로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가서, 1959년 동부영역은 공원으로 개수되어 1960년 9월 준공되어, 동부, 중부, 서부를 모두 갖춘 원래의 영역으로 완성되었고, 각 구역별로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1961년 졸정원(拙政园)과 충왕부(忠王府)를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하였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이름이 동풍공원(東風公園)로 바뀌고, 건물과 편액이 철거되기까지 했다가, 이후 다시 원래 이름과 건물로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네요... 다시 1989년에는 성공예미교(省工艺美校)가 옮겨가고,동부의 이택(李宅, 원 장지만,张之万, 제택)을 활용하여 소주(苏州) 원림박물관(园林博物馆)이 들어서서, 1992년 개관하였습니다. 원래 보원(補園)의 주택영역도 우체국으로 쓰였다가, 평강구의원(平江區醫院)이 들어섰고, 2003년 11월 전면철거 후 소주박물관 신관이 들어서서 2006년 준공/개방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소주원림[蘇州園林]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다같이 모여 사진찍고 정리할 곳으로, 처음부터 소비홍(小飞虹)을 생각했더랬습니다... 아무래도 졸정원(拙政园)의 상징과도 같은 이 홍교에서 원림에서의 추억을 마무리하는 게 제격이겠다는 생각이 ^^;;
처음부터 내심 그렇게 염두에 두고는, 그렇게 모이자고,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하고는, 따로 또 같이, 원림을 거닐기 시작하여 이제 겨우, 1/6을 거진 돌아봤나 싶은데, 소비홍(小飞虹)을 놔두고 얼른 서원(书园)으로 서둘러 넘어갑니다..
원래 꽤 오랜동안 서로 다른 소유주에 의해 가꿔졌던 탓에, 서로 독립적으로 구획된 중부와 서부를 구분짓는 담장이 남북으로 길게, 다른 몸인냥 나누고 있고, 그 한 가운데에 아담한 문(별유동천,别有洞天)이 나있어 이제 또다른 신선의 원림, 그리로 들어가 봅니다...
<도영루에서 삼십육원앙관까지의 시선>
저 멀리 보이는 도영루(倒影楼), 그 1층의 방 하나를 따로 만들어 배문읍심지재(拜文揖沈之斋)라고 부릅니다. 제자였던 문징명(文徵明, 1470-1559) 선생이 절(拜)하고, 문징명 선생의 스승이자 당시 소주(苏州)의 저명한 화가이었던 심주(沈周, 1427-1509) 선생이 읍(揖)하는 방이라는 뜻 ??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저 멀리 보이는 도영루(倒影楼)는 유달리 반영이 즐겁습니다... 오죽하면 도영루(倒影楼)로 이어지는 복도마저도, 연못에 비치는 반영을 가까이서 살펴보라는 듯 수면 아주 가까이까지 내려가 있을까 싶네요....
그 가까이 내려가면, 마치 수면 반대편, 스승의 모습을 뵐 수라도 있을 듯이, 가까이 활강하는 것 같습니다...
연못 바로 건너편에는 선정(扇亭)인 여수동좌헌(与谁同坐轩)이 부채모양으로 연못가에 앉아 있습니다... 여수동좌(与谁同坐)는 북송의 저명한 시인 소식(苏轼)가 지은 사(词) 점강진(点绛唇) 2수 중 첫 수인, 한기호상(闲倚胡床)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고 하네요...
点绛唇 其一 閒倚胡床 - 苏轼 점강진 1수 한기호상 - 소식 閒倚胡床,庾公楼外峰千朵。 한가로이 호상에 기대어 유공루(庾公楼) 너머에는 수많은 봉우리, 与谁同坐。明月清风我。 누구와 함께 앉을까? 밝은 달, 맑은 바람, 그리고 나로구나 别乘一来,有唱应须和。 따로 올라타서 같이 오니, 부르면 틀림없이 응하여 어울리는구나. 还知么。自从添个。风月平分破。 와보니 미미함을 알겠고, 스스로 하나하나 따라가보니, 바람과 달이 고루 나눠 깨뜨리누나. |
여수동좌헌을 바라보며 도영루를 돌아 나오면 높다란 돌 언덕 위에 부취각(浮翠閣)이 우람하게 올라 서 있습니다. 높은 언덕 위인데도 누각 자체도 2층이라 더더욱 대지가 높아 졸정원(拙政园)이 다 내려다 보입니다... 혹자는 원림에 걸맞지 않게 너무 과시적으로 높고 크게 지었다고 비판적인 시각이 많은 듯하지만, 제 눈에는 이것도 뭐~ 하면서 좋은 쪽으로 보입니다^^;;;
山上林木茂密,绿草如茵, 산 위에 숲은 빽빽하고,풀밭은 마치 자리를 깔아 놓은 것 같은데, 建筑好像浮动于一片翠绿浓荫之上 지은 건물은 마치 짙은 비취빛 그늘 위에 떠 있는듯 하다. |
고 하여 지은 우아한 이름, 좀 몸집이 커서 약간 안어울리나 싶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잘 어울려 졸정원(拙政园)에 광활한 전망을 선사합니다...
천천히 기다랗게 남쪽으로 이어진 연못을 따라 유청각(留听阁)에 다다라 대 위에서 바라다 보니, 물길이 좁게 이어진 저 멀리, 탑영정이 내다 보입니다.. 참으로 절경입니다!!!
먼저, 유청각은 저명한 만당(晩唐) 시인이었던 이상은(李商隐, 812-858)의 시 '宿骆氏亭寄怀崔雍衮'에서 뜻을 따와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宿骆氏亭寄怀崔雍衮 - 李商隐 낙씨 정자에 묵으며 최옹과 최곤을 생각함 - 이상은 竹坞无尘水槛清,相思迢递隔重城。 언덕 위 대숲엔 티끌 하나 없이 물가에는 난간도 맑은데, 그리움 가는 길엔 겹겹이 막아선 성들. 秋阴不散霜飞晚,留得枯荷听雨声。 가을 그림자 흩지 못해 서리 내리는 황혼, 마른 연꽃에 들리는 빗방울 소리 뿐. |
가을이 아니라 봄에, 비가 내리지 않고 햇빛이 내리는 졸정원(拙政园)을 거닐고 있지만, 짐짓 유청각의 심상을 떠올려 상상해봅니다... 그 마당 건너 연못 건너편에는 탑영정이 보입니다... 그 이름은 역시 저명한^^ 만당(晩唐) 시인 허당(許棠)의 시에서 뜻을 따왔다네요...
題慈恩寺元遂上人院 - 許棠 자은사 원수상인원 - 허당 竹檻匝回廊,城中似外方。月雲開作片,枝鳥立成行。 대나무 난간은 회랑을 돌고, 성 안도 밖을 닮았네. 달과 구름은 조각나기 시작하고, 가지위의 새들은 열을 지어 서있네. 徑接河源潤,庭容塔影涼。天台頻去說,誰占最高房。 길은 물가에 있어 촉촉하고, 마당은 탑그림자로 서늘하네. 천태의 뜻을 자주 설법들으면, 누가 가장 높은 방을 차지하겠는가 ? |
좁다란 연못은 끝이 없이 펼쳐질 듯 저 뒤쪽까지 호리병 모양으로 돌아들어 끝을 맺고, 그 끝 즈음에 올라앉은 탑영정에서 바라보는 연못은 어릿어릿 그늘져 조금 따가운 햇빛도 가려지고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마침, 한국말을 알아보고 사진 같이 찍기를 청하는 중국인 가족과 같이 사진도 찍고^^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이 자주 나와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네요^^;;; 중국 명대(明代) 초기에 고병(高棅, 1350~1423)이 편찬한 당시(唐詩)의 선집(選集)인, 당시품휘(唐詩品彙)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던 시대구분인데요,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품휘(唐詩品彙)라는 당시 선집이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 엄청난 인기를 과시하며 그 명성을 떨쳤는데, 그 시작은 명나라 초,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민중(閩中) 복청(福淸)의 임홍(林鸿,?-1383)이라는 저명한 시인이 있었는데. 송대 엄우(严羽,1191-1241)가 자신의 시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성당(盛唐)의 시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주창했던 그 주장을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그들 따르던 일련의 무리, 민중십자(閩中十子) 중의 하나였던 고병(高棅, 1350~1423)이, 대표적인 당대(唐代) 시인 620인의 시 5,769수를 가려 뽑아, 꼼꼼하게 분류 정리하고 필요한 곳에 해설을 붙여 1393년에 90권으로 편찬하였고, 1398년에는다시 여기에 빠진 당대 시인 61인의 시 954수를 골라, 당시습유(唐詩拾遺) 10권을 내어, 도합 100권본으로 증보하였습니다.
이 때, 고병은, 초당(初唐)을 고조(高祖)의 무덕(武德, 618)으로부터 예종(睿宗)의 태극(太極, 712)까지 약 95년간, 성당(盛唐)을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713)으로부터 대종(代宗)의 영태(永泰, 765)까지 약 50년간, 중당(中唐)을 대종의 대력(大曆, 766)으로부터 경종(敬宗)의 보력(寶曆, 820)까지 약 60년간, 만당(晩唐)을 문종(文宗)의 태화(太和, 827)로부터 소선제(昭宣帝)의 천우(天祐, 906)까지 약 80년간으로 나눴다고 하네요.
각각의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초당(初唐)기에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 이교(李嶠), 두심언(杜審言), 진자앙(陳子昂), 장구령(張九齡) 등. 성당(盛唐)기에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저광희(儲光羲), 잠삼(岑參),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왕지환(王之渙), 왕한(王翰), 상건(常建) 등. 중당(中唐)기에 전기(錢起), 사공서(司空曙), 노윤(盧綸), 백거이(白居易),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맹교(孟郊), 가도(賈島), 위응물(韋應物), 유우석(劉禹錫) 등. 만당(晩唐)기에 이상은(李商隱), 온정균(溫庭筠), 두목(杜牧), 한악(韓偓), 호증(胡曾) 등, 전 시기에 걸쳐 기라성 같은 시인이 종횡무진 활약했습니다.
바로 이 당시품휘가 출판되면서부터, 그 영향으로 명대 일대에 성당시를 숭상하는 기풍이 중국 전역을 휩쓸다시피 하였고, 조선에서도 이를 애독하여 조선본(朝鮮本)을 간행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이구요, 구체적으로 고병은 당시 접근 가능했던 각종의 당시선집들 중 원대 양사굉(楊士宏)이 편찬한 '당음집(唐音集)'을 참고로 하여, 전체 시를 시형(詩形)에 따라 오언고시(五言古詩 附 五言長篇) 24권, 칠언고시(七言古詩, 長短句 포함, 附 歌行長篇) 13권, 오언절구(五言絶句 附 六言絶句) 8권, 칠언절구(七言絶句) 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15권, 오언배율(五言排律) 11권, 칠언율시(七言律詩, 附 七言排律) 9권 등 7가지로 분류, 각각 시형에 대해서는 정시(正始), 정종(正宗), 대가(大家), 명가(名家), 우익(羽翼), 접무(接武), 정변(正變), 여향(餘響), 방류(傍流) 등 9가지 품목(品目)을 세웠습니다.
성당의 시를 최고로 여겼던 고병의 식견이 반영되어, 시기별 한시의 추세, 시사(詩史)적 의의, 그리고 각 개별 시인들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하여, 정시는 초당(初唐)에, 정종․대가․명가․우익은 성당(盛唐)에, 접무는 중당(中唐), 정변․여향은 만당(晩唐)에 각각 품격을 매겼습니다. 그 외 방류라고 하여 시기를 따로 구분하기 힘든 시들을 따로 분류하여 외국인, 승려, 도사, 부녀자 및 생애를 알 수 없는 작가들을 모아 놓았네요.
당시를 시기별로 초당․성당․중당․만당으로 나누는 방식은 송 엄우(嚴羽)때 처음 언급되기는 했지만,체적으로는 고병의 당시품휘에서 본격적으로 분류가 시도되어, 오늘날 중국문학사나 중국시사에서이 분류 방식을 가장 표준적인 분류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네요...
언제 한번 당시품휘를 정리하여 올려보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꽤 요원한 일 같습니다@@ 자그마치 7,000수에 가까운 한시를@@
어짰든둥, 서원(书园)의 중심건물은 아무래도 삼육원앙관(卅六鴛鴦館)입니다.
북쪽과 남쪽에 각각 서로 다른 편액을 달아 한 집을 두가지 개념으로 설계하고 의도했습니다. 북청(北厅)에는 삼육원앙관(卅六鸳鸯馆), 남청(南厅)에는 십팔만다라화관(十八曼佗罗花馆)이라는 서로다른 편액이 달려 있습니다@@
<원앙청 단면도>
원앙청(鸳鸯厅)은 사면청(四面厅)이라는 중국 전통건축양식을 취하여 지은 건물로,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 내에 공간을 둘로 분할하여, 내부에 또다시 작은 건물지붕 둘을 닫집마냥 설치합니다. 두 공간을 각각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여, 깨알 효율을 자랑하는 건축양식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 북청(北厅)에서는 남자주인이 손님을 응접하는 한편, 남청(南厅)에서는 여주인이 남편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공간하는 식으루요^^
먼저 북청의 이야기를 살펴본다면, 진솔필기(真率笔记)에 전하는 이야기에서 뜻을 취해 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
霍光在他自己的园中凿大池,植五色睡莲,养鸳鸯卅六,对望之烂若披锦。 곽광(霍光)이 원림 내에 큰 못을 파서 오색의 수련(睡莲)을 심고, 원앙(鸳鸯)을 서른여섯 마리를 키웠는데, 바라보면 찬란하여 마치 비단을 걸친 것 같다. |
원앙관에서 밖을 바라보면 언듯 오른쪽 끝으로 수랑이 흘러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 끝 숲 너머에는 도영루가 있을 터입니다...
십팔만다라화화관(十八曼陀罗花花馆)은, 남쪽 뜰에 심어져 있는 산다화(山茶花) 혹은 만다라화(曼陀罗花), 우리말로는 늦동백?? 에서 유래합니다. 여튼 십팔만다라화화관에는, 청 나라 말 장원이었던 육윤상(陆润庠,1841-1915)의 글씨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북쪽에 펼쳐진 꽤 너른 연못과 여러 누각에 비하면야 조촐한 뜰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엔 '십팔학사(十八学士)' 산다화가 심어져 있어 주목받을 만 합니다... 동백 중에서도 으뜸이라고들 하는 '십팔학사(十八学士)' 품종은, 한 그루에 열 여덟 송이만 핀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지만, 아마도 사실은 꽃잎이 열 여덟겹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한 면에 여섯 장이 열 여덟겹으로 빙 둘러싼 모습은, 백여닢이 성대하게 모여있는 장관이겠다 싶네요^^
시간이 많지 않네요... 이제 서둘러 견산루(见山楼)를 거쳐 소비홍(小飞虹)으로 향해 갑니다... 오원(吴园) 북쪽에 위치한 견산루(见山楼)로 가기 위해, 북쪽 끝까지 소요(逍遙)하며, 이제 동쪽으로 향합니다... 어느덧 남쪽으로 연못 너머 보이는 웅장한 이층 건물, 견산루(见山楼)입니다...
견산루(见山楼)는 동진(東晉)의 시인 도잠(陶潛, 365-427)의 시 '飲酒二十首并序'의 다섯번째 수에서 뜻을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飲酒二十首并序 其五 - 陶潛 술을 마시며 서문과 이십 수 시를 짓다 - 도잠 結廬在人境,而無車馬喧。 초막을 짓고 인가 근처에 살아도 수레 소리 시끄러운 줄 모르겠구나. 問君何能爾?心遠地自偏。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러한가 ? 마음이 멀어지니 머문 곳 외지기에 采菊東籬下,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따서 멀리 남산을 본다. 山氣日夕嘉,飛鳥相與還。 산 기운은 석양 빛에 아름답고, 나는 새는 쌍쌍이 되돌아온다. 此中有真意,欲辯已忘言。 이 중에 참 뜻이 있으니 말하려 해도 이미 할 말을 잊었구나. |
마침 견산루 이층이 출입금지여서 아쉽게도 이층에서 연꽃이 가득한 모습을 조망해볼 호사는 누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지그자그로 나있는 돌다리를 건너 들어선 1층의 개방된 누각에서 난간을 짚으며, 옆으로라도 연못의 탁트인 삼면을 시원스레 내다 볼 수 었어 비로소 편안하게 남을 일정을 반추도 해보고, 어느덧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소창랑에서 소비홍으로의 시선>
이제 다같이 모여 사진찍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네요...
다같이 모이기로 한 곳은, 바로 졸정원(拙政园)의 아이콘, 소비홍(小飞虹)입니다. 소비홍(小飞虹)은 남북조시대 송(宋) 때의 시인 포조(鲍照, 421-465)의 시 '白云诗'에서 뜻을 취해 이름을 지었습니다.
白云诗 - 鲍照 백운시 - 포조 探灵喜解骨,测化善腾天。情高不恋俗,厌世乐寻仙。 신을 찾다 해골에 기뻐하고, 헤아리다 하늘로 즐겨 오르네. 뜻높아 속세를 그리워하지 않으니, 세상을 멀리하고 즐겨 신선을 찾누나. 炼金宿明馆,屑玉止瑶渊。凤歌出林阙,龙驾戾蓬山。 금숙(金宿)을 달궈 집을 밝히고, 구슬을 달갑게 여겨 요연(瑶渊)도 그만두었네. 봉황의 노래는 대궐같은 숲 속에서 흘러나오고, 용이 끄는 수레는 봉래산에 닿았네. 凌崖采三露,攀鸿戏五烟。昭昭景临霞,汤汤风媚泉。 벼랑의 나물, 세 방울 이슬을 업신여기고, 반홍(攀鸿)은 오연(五烟)을 희롱하네. 밝디 밝은 풍경이 임한 노을 빛, 펄펄 끓듯이 바람은 샘에 아양을 떠네. 命娥双月际,要媛两星间。飞虹眺卷河,泛雾弄轻弦。 두 달 보고 예쁘구나 하였더니, 두 별 사이에 이 어여쁜 여인이여, 날으듯 무지개 너머 흐르는 강을 바라보니, 떠오른 물안개는 초승달을 가벼이 희롱하네. 笛声谢广宾,神道不复传。一逐白云去,千龄犹未旋。 피리소리 손님을 반기고, 귀신이 다닌 길은 다시 전해지지 않으니, 한번 좇아 희다 하겠는가, 천년되도록 원숭이는 돌아오질 않네. |
돌아드는 창랑의 강을 무지개너머에서 날으듯 바라보는 곳, 소비홍(小飞虹)입니다... 도연명 선생을 지나 창랑의 탄식, 어지러운 세상을 등져야 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양심이었던 굴원의 창랑에 닿았습니다. 유달리 도가에 심취하였던 왕헌신 선생의 뜻이 이 곳 저 곳에 배어 있는 듯합니다... 장장 2,400년에 걸친 강남 문인들의 격정과 회한, 감동의 파도는 이 곳 소창랑 난간에서 마무리됩니다...
<문징명 선생의 졸정원도영 31폭 중의 소비홍>
소비홍(小飞虹) 너머에는 소창랑(小沧浪)이 있습니다. 소창랑(小沧浪)에서 바라보는 소비홍(小飞虹)과 그 너머 보이는 연못들의 정경, 졸정원(拙政园)이라 할 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아이콘 중의 하나였습니다...
소창랑(小沧浪)은,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소주(苏州)의 창랑정에서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창랑정(沧浪亭) 소순흠(苏舜钦,1008-1048) 선생의 기개를 본받고자 했던 왕헌신(王献臣)의 뜻이 드러나 있는 이름입니다... 일찌기 매요신(梅堯臣,1002-1060)과 함께 북송의 시단의 한 축을 넉넉히 담당하며 개혁을 주창했고,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노선을 줄곧 지지하였다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그 회한을 못이겨 끝내 요절했던 시인...
이날 아침 일찍 쑤저우의 원림을 둘러보러 서둘러 나선 우리는, 창랑정(沧浪亭)에서 답사를 시작하여, 이렇게 소주(苏州) 시내 답사의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 졸정원(拙政园)에서 다시 창랑정(沧浪亭)의 정신을 돌이켜보면서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渔父(어부) - 굴원(屈原) 屈原既放,游于江潭,行吟泽畔,颜色憔悴,形容枯槁.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을 때, 그 안색은 초췌하고 몸은 볏집처럼 말랐더라. 渔父见而问之曰, “子非三闾大夫与?何故至于斯?” 한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삼려대부(三闾大夫)가 아니시오? 어찌 이 곳까지 오시었소?" 屈原曰, “举世皆浊我独清,众人皆醉我独醒,是以见放.” 굴원이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다 탁한데 나홀로 맑았고,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홀로 깨어있으니, 그런 연유로 이리 추방을 당했구려." 渔父曰, “圣人不凝滞于物,而能与世推移.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만물에 얽매이거나 머물지 않고, 또한 세상을 따라 능히 옮겨 가거늘, 世人皆浊,何不淈其泥而扬其波?众人皆醉,何不哺其糟而歠其醨? 세상 사람 다 혼탁하면, 왜 그 진흙을 휘저어 물결을 같이 일으키지 않으시는가 ? 세상 사람 다 취했으면, 왜 그 술지게미와 탁주를 같이 먹고 마시지 않으시는가 ? 何故深思高举,自令放为?” 어이해 깊이 생각하고 고매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던가?" 屈原曰, “吾闻之,新沐者必弹冠,新浴者必振衣; 굴원이 말하기를, "머리를 감은 후엔 반드시 갓의 먼지를 털어 쓰고, 몸을 씻은 후엔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 입는다 들었소. 安能以身之察察,受物之汶汶者乎? 어찌 더러운 물에 깨끗한 몸을 더럽히겠소? 宁赴湘流,葬于江鱼之腹中. 차라리 상강(湘江)에 뛰어들어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겠소이다. 安能以皓皓之白,而蒙世俗之尘埃乎?” 어찌 그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쓰겠소?" 渔父莞尔而笑, 鼓枻而去.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두드리며 떠나갔다. 乃歌曰, “沧浪之水清兮,可以濯吾缨;沧浪之水浊兮,可以濯吾足." 이내 노래를 부르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遂去,不复与言. 그렇게 가버리니, 다시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
오원을 되돌아나오는 모퉁이에 떡 버티고, 대상정 건너편에서 마주보고 있는 녹의정(绿漪亭)은 권경정(劝耕亭)이라고도 하는데, 시경(诗经) 기오(淇奥)에서 그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诗经 淇奥 시경 기오 瞻彼淇奥,绿竹猗猗。有匪君子, 저 기수가의 물굽이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 아름답구나 문채 빛나는 어른이시여 如切如磋,如琢如磨,瑟兮僴兮, 깎은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연마한 듯 장중하고 당당하시며 赫兮咺兮。有匪君子,终不可谖兮。 빛나고 의젓하시네 문채 빛나는 어른이시여 끝내 잊을 수가 없네 瞻彼淇奥,绿竹青青。有匪君子, 저 기수가의 물굽이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 푸르고도 푸르네 문채 빛나는 어른이시여 充耳秀莹,会弁如星。瑟兮僴兮。 귀막이 아름다운 옥돌이 빛나니 회변은 별같이 반짝이네 장중하게 반짝이며 赫兮咺兮,有匪君子,终不可谖兮。 빛나고 훤하시네 문채 빛나는 어른이시여 영원히 잊을 수가 없네 瞻彼淇奥,绿竹如箦。有匪君子, 저 기수가의 물굽이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 빽빽하도다. 문채 빛나는 어른이시여 如金如锡,如圭如璧。宽兮绰兮, 금 같고 주석 같고 옥홀과 둥근 구슬 같네 너그럽고 대범한 모습 猗重较兮。善戏谑兮,不为虐兮。 수레 옆에 기대어 스셨네 농담도 잘하시지만 심하게 하시지는 않는다네 |
또다른 근거로는, 남북조 때의 송(宋, 유유,劉裕가 개국하였던)의 시인 장솔(张率, 475-527)의 시 '咏跃鱼应诏诗'에서 뜻을 취했다고도 하네요.
咏跃鱼应诏诗 - 张率 시를 청하길래 응하여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것을 읊다 - 장솔 戢鳞隐繁藻,颁首承渌漪。何用游溟澥,且跃天渊池。 모여든 물고기 마름 속으로 숨어들고, 들었다 잠겼다하는 머리가 잔물결을 일으키네. 어찌 명해(溟澥)를 헤엄치고, 천연지(天渊池)를 뛰어오르는 데 소용있을까? |
<동원 평면도>
이제는 남은 시간 알차게 돌아나오면서, 퇴사원을 둘러볼 시간, 남원다사에서 저녁을 먹고, 무사히 항저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시간까지 생각할 때 남은 시간만큼, 동원을 돌아볼 시간입니다만, 안타깝게도 그냥 걸어나오기에도 약간 벅찬 정도의 시간밖에 남질 않았네요@@
위 도면에서 보이듯이(??) 약간은 공원 필의 구획정리에 걸맞게 아래의 사진에서도 넌즈시 암시되는 것처럼, 풍광좋게 널찌기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군데군데 연못이 있으, 그 가에는 옛 누각이 잘 걸터앉아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 누각에 대해 좀 생각하면서 머물 시간도 없었고, 그 누각안에 꽤 값비싸보이기도 하고, 나름 오밀조밀하게 주름져있는 수석을 돌아볼 시간도 부족한게 참 아쉽기는 하지만, 이 날 일정의 대미를 장식할 퇴사원을 그나마 여유있게 돌아보자면, 그 시간마저도 아껴야 합니다@@
이렇게 쑤저우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또한 여전히 버거운 공붓거리였던 졸정원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모두들 제 시간에 잘 모여 사진도 잘 찍고, 답사를 정리하고는 다음 목적지이자, 저녁식사장소가 있는 통리(同里)로 이동합니다.
이 곳에서, 또 버스기사의 활극이 벌어지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첫댓글 옛 생각이 솔솔...
귀하고 멋진 자료
아주 좋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다실 답사때 같이 못해 아쉽고 죄송하고~~ @@ 담 답사때 꼭 뵈요~ ^^
@칸텔리 ㅎㅎ 다실답사 때는 갈 형편이 안됐어요.
지금은 주말에 근무를 해야돼서 시간도 없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