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의 울타리 / 박인규
1) 내 고향 창원은 계획된 공업 도시다. 1974년부터 조성되었고, 공단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은 동네별로 순차적 강제 이주를 해야 했다. 우리 동네도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2) 나는 사 남매 중 막내로, 바로 위 형과 그 위로 누나가 둘이다. 큰누나는 출가하여 인근 도시에 살았고, 작은 누나는 그즈음 자형과 타지에서 소규모 사업을 경영했다. 업을 꾸리다 보면 자금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를 통해 융통하는가 보았다. 없는 살림이라 어머니는 지인들로부터 돈을 둘러대는 눈치였다.
3) 당시의 급전 이자는 대개 오 푼이었다. 사업이 원활하지 않아 빚은 점점 불어났고, 매달 원금은커녕 이자 갚기도 빠듯한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나는 입대하였고, 복무 중에도 사업이 잘 굴러간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역 후 돌아오니 이미 부도가 났고 누나 내외는 행적이 묘연한 상태였다.
4) 쉬쉬하고 발만 동동거리던 어머니는 일이 터지고 나서야 빚의 전모를 밝혔다. 원금과 제때 갚지 못해 복리로 불어난 이자를 합한 액수는 꽤 컸다. 당시 우리 고장의 25평 다세대주택의 시세와 비교할 때 얼추 두 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5) 어머니의 사람됨을 믿고 돈을 꿔 준 사람들은, 처음에는 점잖게 채근하다 이자마저 밀리자 집을 들락이는 횟수가 잦아졌다. 갚을 길이 막막했던 부모님의 고심은 깊어지고, 소문으로 알게 된 이웃에게도 면목이 없어 어쩔 줄 몰라 했다.
6) 그런 와중에 때가 되어 우리 동네도 철거 통보를 받았다. 이주 절차에 따라 보상금이 주어졌는데 보상이라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았다. 대충 감정한 집값에다, 토지는 공시지가로 후려쳐 헐값에 넘어갔다. 그마저 남의 땅에 지어진 퇴락한 가옥인 데다, ‘두락가웃’도 못 미치는 자갈밭 한 필지, 거기에 거주하는 머릿수를 따져 지급되는 이주비가 모두였다.
7) 빚쟁이는 저승사자보다 무섭다고 했던가. 독촉은 더욱 거세지고, 뻔뻔스레 떼어먹어도 안 될 노릇이어서 어떻게든 시급한 결단이 필요했다. 뒤로 미룬다고 뾰족한 수가 생길 것도 아니었다. 방법은 딱 하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이주 보상금을 내놓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8) 보상금 전액과 통장을 탈탈 털어 채권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모든 부채를 갚았다. 이른바 빚잔치를 한 것이다. 우리 가산은 그렇게 산산이 소멸되었다.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속은 편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의 일이었다.
9) 집이 없어진 후에는 그날그날 먹고 살기에 바빴고, 가진 것 없고 살 집도 없어 사글셋방을 전전했다. 형과 내가 실업계 학력을 지닌 것이 그나마 요행이었다. 그 덕에 누구나 부러워할 그럴싸한 직장은 아니지만, 땟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될 일자리는 구할 수 있었다. 낱낱이 들출 수 없지만 그렇게 벌이를 하여, 어머니도 모시고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웠다. 우여곡절 끝에 작은 누나도 제자리를 찾고, 사 남매는 지난한 세월을 그악스레 견디며 지금에 이르렀다.
10)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지만, 반면 마음 따습게 하는 일면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집안이 졸지에 쫄딱 망했으니 당혹스럽고 어수선한 마음이야 어찌 없었겠는가. 하지만 간난에 허덕이고 힘든 세월을 버텨내면서도 가족 중 누구 하나 내색하거나 원망을 품지 않았다. 속으로야 어쩐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못난 심보로 치면 총중에 막내인 내가 으뜸인데, 나조차도 그런 생각이 없었으니 다른 식구는 말해 무엇하랴. 오히려 우리는 잠적해버린 사람이 혹여 나쁜 마음이나 먹지 않을까 조바심만 더 앞섰다.
11) 되돌아보면, 우리 형제는 어릴 때부터 모자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결핍 속에서도 제각기 할 몫은 묵묵히 해내며 살았다. 부모님은 말할 나위도 없고, 누나들은 생계를 위해 약관도 되기 전 객지의 일터로 나섰다. 더군다나 심성이 유순하여 부모와 동생들을 끔찍이 챙기기도 했다.
12) 떨어져 살다 보니 얼굴 붉힐 일도 없을뿐더러 늘 보고 싶은 갈증만 가득했다. 사업을 벌인 것도, 사사로운 욕심보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싶은 의지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살가운 풍경은 가족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날이 갈수록 켜켜이 쌓여 동기간 정이 더욱 도타워지고 애틋해지지 않았나 싶다.
13) 형제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함께 만난다. 가끔 콤콤하게 묵은 기억을 끄집어내어 무거운 마음 없이 두런두런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작은 누나의 시간은 그때 그 시점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자기 허물을 가슴에 쟁여놓고 수시로 들여다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미 환갑을 지난 두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도, 버거운 세월에 맞서던 그때의 안쓰러운 혈육으로 비치는가 보았다.
14) 이미 세상을 등진 부모님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동생들에게는 뭔가 거들지 못해 한사코 안달이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데도 도울 것은 없는지 ‘일정신’으로 묻는다. 그뿐이면 모를까, 이제 살 만한 동생들인데도 볼 때마다 주머니를 열기 바쁘다. 괜찮다고, 우린 가족이라고,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통사정해도 막무가내다. 아마 자기 나름의 빚 청산이 늘 가슴을 짓누르는가 본데, 그런 누나를 바라보는 동생들 마음도 짠하다. 모르긴 해도 누나가 제정신을 가눌 때까지 이 진풍경이 이어질 것 같아서 여간 난감하지가 않다.
15)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돈의 가치보다 핏줄의 끈끈함이 먼저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인데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지만, 지난날을 떠올리면 봄날 연둣빛 숲을 보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16) 가족은 핏줄로 엮인,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울타리가 아니고 무얼까. 검질긴 그 울 안에서 타산 없이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살고 있지 않은가. 별일이 없는 한 우리 형제는 앞으로도 울을 벗어나지 않고 큰 욕심 없이 분수에 맞춰 살 것이다. 사 남매의 여생 내내 수수하고 무탈한 삶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빚정리로 바닥을 쳤음에도, 형제간에 등지기보다 우애가 더 끈끈하게 이어진다니, 그 지혜로움이 경이롭습니다.
무탈한 삶이 분명 이어질겁니다.
굴곡진 삶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우리 형제는 우애가 좋아
동기간에 마음 고생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마조마해 하며 잘읽었습니다.
돈보다 우애로 다져진게 더 큰 재산입니다^^
그렇지요. 어찌 보면 돈에 휘둘리지 않고
적절하게 대처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애를 저버리지 않는 멋진 가족입니다. 인간애가 묻어 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없이 살아도 마음이 편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돈으로 인한 마음 상함이 가족 연을 끊기도 하던데 동기 간에 대단한 우애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그리 미담도 아닌데 과제물 때문에 어렵사리 끄집어낸 집안 이야기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세상 살다보면 가족사랑이 최고입니다.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죠? 살아가는 데 가족 간의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돈과 유산으로 끔찍한 사건·사고가 생겨나고 뉴스마다 떠들썩하던데, 참으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른 집안입니다.
당연지사이지만 그 당연함이 이즘엔 찾아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글을 읽으며 많은 걸 배우게 됩니다.
글을 쓰고 싶은 꿈을 가지고 배우러 나서게 되었지만, 문우님들의 글을 보며 더불어 더 많은 걸 배우게 되어,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이트에 접속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답글이 늦었습니다.
우리 형제들도 만나면 얘기를 나눕니다. 없이 살아도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는 게 참 좋다고...
저도 수필문학관에 노크를 한 것이 참 잘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ㅎ
돈으로 힘들어하던 중에도 따뜻한 가족애가 은은하게 빛납니다.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