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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화랑을 제도화하기 전후하여 청소년들 사이에 검무(劍舞)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들은 백제왕을 해하는 것을 큰 목표로 하고 있었다. 신라에는 어떤 형태이든 자객이나 첩자를 백제에 보내고 있었다. 이첨의 고증에서는 황창을 관창으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신라 진흥왕 15년(554년)에 백제왕을 죽였다는 고간도도(高干都刀)가 창일 가능성도 있다. 신라의 검술은 이때 이미 매우 발전해 있었으며 일본에도 전파된 것이 분명하다. 이 검법은 조선왕조 초기까지는 전승되고 있었으니 적어도 신라의 <무오병법(武烏兵法)>이나 고려의 <김해병서(金海兵書)>(단채 신채호는 김해병서가 연개소문의 저서라는 설이 있다고 함)에는 실려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서거정(徐居正)의 <문천빙망(蚊川聘望)>이라는 시구에도 '황강개보군원(黃慷慨報君寃)'이라는 황창의 애기가 있고 김종직(金宗直)의 시 <칠영(七詠)>중에도 황창랑이라 하여 '이란 사람이 있었도다! 어린 나이에, 키는 석 자도 못되면서 어찌 그렇게 웅걸하고 날쌘고, 언제나 왕기를 스승으로 삼아, 나라 위해 치욕을 씻었으니 마음에 뉘우침 없네, 공을 이루고는 춤을 그치고 가버리니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 건넌 듯' 이라고 썼다. 서거정이나 김종직은 성종때 사람으로 잘 알려진 문인들인데 그들이 남긴 시로 보아도 그때까지는 황창에 관한 문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