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조건
선우
한때 J의 별명은 ‘체리’였다. 누군가 교복 재킷에 꽂아둔 사랑의 열매 배지를 보고 J가 체리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상식 부족이라 놀리며 별명을 붙여도 J는 해맑았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단 주변의 관심을 반길 줄 알던 J 곁엔 늘 사람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땐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J와 나는 열일곱에 같은 반 동급생으로 처음 만났다. 첫 인상이 차갑다는 평을 듣곤 했으나 목소리가 크고 괄괄했던 나. 예쁘장한 얼굴로 누구에게나 잘 웃어보이던 호감형의 J. 우리 두 사람은 쉬는 시간에 학교 선배들에 대한 가십을 떠들 정도의 사이는 되었지만 각자 그보다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다른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래도 첫 중간고사 성적을 함께 걱정하는 수준의 친분은 유지했달까. 공부 스트레스를 숨겨야 쿨하다고 믿던 나와 달리 급우들에게 기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J 덕이다. 나는 자습실 자리가 가까웠던 J를 단호한 말투로 응원해주곤 했다. “뭐가 그리 불안해! 넌 할 수 있어!”라고. 그러면 J는 “나 너무 징징대지?”라며 친구들 품을 파고들었다.
내게 없는 J의 능력이었다. 자신의 취약함을 적당히 드러내 타인의 호의를 끌어낼 줄 아는 것. 그런 J가 귀여웠고, 친구로 지내기에 거슬릴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내가 달라졌다. 성적은 오르지 않고, 가족이 해체되면서, 마음이 삐죽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짓던 그 시절 나는 우정의 기준을 한껏 높이며 날을 세웠다. 내 사정을 전부 알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만 친구라고 불렀다. ‘그렇지 않은 애들은 지인일 뿐 친구는 아니야.’ 홀로 엄격해졌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문제가 안 됐을 거다. 급기야 150여 명의 동기 중 다섯 명이 채 안 되는 이들만 친구로 바라보게 된 나는 J같은 아이들을 눈엣가시로 상정했다. ‘고작 내신 등급 갖고 불안해하면서, 화목한 가정을 자랑하면서, 모두를 친구 삼는 네가 뭘 알겠어.’ 예의 밝은 표정이 우스웠고, 좋은 성격도 좋은 환경에서 빚어졌을 테니 얄미웠다. 더는 복도에서 마주친 J에게 환히 손 흔들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도 시선을 바꾸진 못했다. 할머니와의 생활이 안정을 찾고 재수 끝에 대학에 진학하면서 관계를 다루는 날이 점차 무뎌지긴 했어도, 고교 동창들에겐 유독 방어 기제를 거두기 어려웠다.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기억할 사람들을, 나라도 잊고 싶었다. ‘진짜 친구’로 분류했던 몇을 제외하고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J의 근황은 가끔 화두에 올랐다. 발 넓은 J는 내 친구들의 친구로 존재하며 위성처럼 내 세계를 맴돌았다. 내 친구 1과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친구 2와는 종종 술자리를 했으며, 친구 3의 구애를 받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뜬 J는 고교 친구들은 물론 대학에서 사귄 새 인연들과의 추억을 아기자기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J가 나를 팔로우했지만 나는 맞팔로우를 하지 않았다. ‘난 너와 달라. 아무나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아.’ 괜한 자존심을 부렸다. 어머니께 물려받았다는 명품 가방을 팔 한 쪽에 걸친 사진 속 J는 여전히 나와 다른 세상 사람이라 치부하면서.
근황을 접해오고, 사진을 봐왔기 때문일까. 졸업 후 8년 만에 마주한 J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J를 다시 본 건 J 어머니의 빈소에서였다. 연결된 친구들이 있다 보니 J 어머니의 부고가 내게도 전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문하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등장하면 J가 당황하는 건 아닐까 우려했다. 그러나 몇 없는 내 고등학교 친구들이 동행하자고 메시지를 보내왔고, 한 친구는 ‘먼저 부모님을 보낸 네가 J에게 필요한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 말이 나를 움직였다. 견고한 벽을 치고 있었지만 실은 한 사람이라도 더 내 고통을 알아봐주길 바라던 열아홉의 나를 떠올리며, 일을 마친 새벽 J에게로 갔다. 딴에는 용기 내본 셈이지만 섣부른 결정일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따라붙었다.
하나 J는 당황하지 않았다. 10년 전처럼 친절히 나를 맞은 J는 어머니 영정을 향해 나긋이 내 소개를 하더니 와줘서 고맙다며 나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지만 오랜만인 것 같지 않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우리는 수 년 간 묵혀둔 이야기를 나눴다. J는 앞서 부모 없는 삶을 살아온 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궁금해 하며 입을 뗐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곁눈질 해온 ‘체리’의 미소 뒤에 내가 감히 짐작 못할 순간들이 있었음을. J는 자신이 겪은 가족의 형태를 회고하며 왜 어머니와 그리 돈독했는지, 성적에 집착하듯 매달렸는지, 밝은 겉모습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들려줬다. “무엇이든 완벽해보이고 싶었어. 내게 부족한 걸 들키기 싫었거든.” 이런 이야기를 아는 친구는 두어 명이었다고 했다. J에게 말했다. 그런 어려움이 있는지 몰랐다고.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은 괄호에 가뒀다. ‘아무 것도 몰랐으면서 아는 척, 널 나와 다르다며 밀어냈던 걸 사과할게. 우린 비슷한 고통을 다른 식으로 견디기 위해 애써왔을 뿐이구나.’
속죄하듯 몇 시간 동안 J 앞을 지켰다. 나는 위로에 능한 사람이 아니지만 공감 능력을 이기는 공통 경험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집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친인척들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J의 물음에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내가 아주 이기적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전적으로 이타적이어야 하는 순간에 꺼내 와야 한다는 게 아니러니했다. 한편으로는 상실에 이기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는 내 고백이 J에게 작은 숨구멍이 되길 바랐다. 당분간 네 생각만 해도 된다는, 그래도 다그칠 사람 없다는 뜻이 잘 전달되었을까. 다변한 탓에 눈치 없이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만회할 기회를 얻고 싶어 J의 손을 잡고 다시 만나자고 해버렸다. 새벽바람을 뚫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먼저 잃어본 자의 오만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약속은 지켜졌다. J는 내 얘기가 도움 되었다며 안부 묻기를 잊지 않았고, 나는 약속이 없던 일이 될까 날짜 잡기를 서둘렀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서 만난 우리는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대화를 했다. ‘우리가 결혼할 땐 누가 혼주여야 할까? 청첩장에 부모 이름은 써야할까? 이런 우리도 나중에 부모가 될 수 있을까?’ 그러자 그보다 가벼운 주제인 직장과 연애 얘기는 쉬워졌다. 서로가 없던 10년을 휙휙 따라잡았다. 어른이 된 서로를 신기해하는 건 덤이었다.
이제 나는 우정의 조건을 나열해가며 바운더리를 규정하지 않는다. 조건을 내걸고 누군가를 판단하기엔 상대에 대해 끝내 무지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J와의 재회는 내가 귀 기울일수록 더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음을 가르쳐줬다. 친구가 많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날 ‘이해’하는 사람만 친구로 대하겠다는 자세는 나와 깊이 관계 맺지 않은 이들에 대한 오해만 키운다는 걸 깨달았을 따름이다. 기억이 후회만으로 남지 않도록, 성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한 J에게 고맙다. 성숙하게 청소년기를 살아낸 J가 너무 외롭지 않았기를, 오래 살가운 친구들 곁에 둘러싸여 있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두 분의 우정만큼 따뜻하고 뭉클한 글, 잘 읽었습니다.^^
뭉클하게 읽혔다니 기분 좋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