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국 몽고와 맞선 고려 민중의 힘
심재석(한국외국어대 강사)
역사를 보는 눈, 현재를 보는 눈
고려는 승패가 달리 결정 났더라면 민족의 운명이 크게 위태로웠을 외침들을 물리치며 500여 년을 지속하였다. 양규의 분전,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과 같이 나라의 운명을 가름한 중요한 전투들을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공로를 전투 지휘관에게 돌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자질과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영웅들이 성공한 이면에는 결의에 찬 백성들이 있었음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삼베옷에 맨손으로 병장기를 잡고 적진에 뛰어들던 평민 군사의 모습을 연상하지 못한 채 지휘관에 대한 찬양에만 여념이 없다면, 그는 역사의 반쪽만을 이해하며, 나아가 현실도 반쪽 밖에 보지 못한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장군이나 성군을 떠들썩하게 재조명하고 현창상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에 대한 반쪽짜리 시각을 은연중에 현재에 적용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게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배층이 쓴 역사책에는 지배층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사건이 주로 수록되었고, 이로부터 독자는 위인에 대한 강한 인상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재를 합리화하고 독재자를 미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에서는 지배층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반 백성만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한 전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수록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층 스스로 자신들의 낯을 깎아내릴 승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엇인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개 몽고 침략기에 집중되어 있다.
몽고의 1차 침입
몽고족은 고려에서 최씨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에 흥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원에서 약탈을 일삼던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접촉하는 모든 민족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대다수의 농경민족이 취하고 있던 중간의 길- 적당한 군림과 복종- 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고족의 공격에 직면하여 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항 아니면 무조건 항복뿐이었다.
항복하면 그들의 노예가 되어 상상하기 힘든 부담을 져야 했고, 견디다 못해 저항하면 모든 주민은 학살당하고 도시와 마을은 불태워졌다. 바그다드에서는 하루 사이에 수십만 명이 살육 당했고, 러시아의 귀족들은 몽고군의 승전 기념 술자리 밑에 깔려 질식해 갔다. 서하, 금, 호라즘제국, 러시아의 공국들, 압바스 왕조, 대리국, 동진, 남송 등 많은 나라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농경민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고려’는 끝내 독립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먼저 망해 버렸다.
1231년(고종18) 몽고는 고려에 대한 1차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들은 고려에서 저고여를 살해했다는 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저고여는 공물을 거둬가기 위해 몇 년 전 몽고에서 파견한 사신이었다. 몽고는 고려와 관계를 맺은 이래 과중한 물품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고려 측으로서는 요나라나 금나라에 했던 것과 같은 의례적인 조공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수탈이었다.
사신 한 떼가 가면 곧바로 또 한 떼가 오고, 뒤에 온 자는 먼저 가지고 간 물품 중 나쁜 것을 왕 앞에 던지면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저고여도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사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자가 공물을 받아 가던 도중 압록강 부근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조사하러 나왔던 몽고인들은 고려 복장을 한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쫓겨 도망하고 말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려와 관계를 끊고 급기야 침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저고여를 고려에서 죽였는지 아니면 고려를 모함하려는 다른 세력이 죽였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물론 고려에서는 금나라 장수가 한 짓이라고 강변했지만.
고려 백성의 적극적인 저항
고려에서는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의 중앙군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북상할 때, 몽고군은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공격, 함락시키고 있었다. 함락되면 닭이나 돼지의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도륙 당하였다. 철주(평북 철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당시 서북지역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잘 대변해준다.
철주는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몽고군은 이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문대’라는 사로잡은 장교를 시켜 “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치고 죽임을 당했다. 문대를 죽인 몽고병은 철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공방전은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자 성을 지키던 관리 이세화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창고에 넣고 불을 질렀으며, 자신은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성이 무너지면 부녀자는 욕을 당하고 아이들과 함께 끌려가 노예가 되며, 저항한 장병들 모두 처참하게 살육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북의 여러 성들은 거의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몇몇 성들은 끝내 항복하거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지휘관 박서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이 끝내 성을 지킨 구주(평안북도 구성)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몽고군은 큰 돌을 날리는 포차를 만들어 성을 파괴하였고, 소가죽을 씌운 큰 수레에 병사를 태워 성 밑에 접근시킨 다음 성벽에 구멍을 뚫었으며, 심지어는 마른 풀에 사람 기름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성에서도 포차를 만들어 반격하고, 구멍에 쇳물을 녹여 부어 수레를 태워 버렸으며,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결국 몽고군은 구주를 그대로 둔 채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3군으로 편제한 고려의 대군은 황주(황해도 황주)에서 몽고군과 첫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기병을 주축으로 한 몽고군 선봉이 기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놀란 고려군은 일시 무너질 뻔 하였으나 몇몇 장군들의 분전으로 겨우 몽고군을 격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산(경기도 파주)의 초적[산골에서 물푼을 터는 도적]으로 종군한 두 사람이 몽고병을 쏘니 그대로 엎어졌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 쳐서 패주시켰다’고 하여 실제로는 지배층의 부패에 항거하다 국난을 맞아 정부에 협력하게 된 초적 출신 병사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황주에서 적의 선봉을 격퇴한 후 중앙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에서 몽고 주력부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는 고려 측의 완전한 패배였다. 고려군의 태반이 살상당하였다. 이 싸움은 고려 중앙군이 몽고병과 접전한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고려 정부에서는 몽고의 힘에 놀라 화친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친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몽고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충주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투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충주의 주민은 지배층인 양반별초와 피지배층인 노군 잡류들에게 혐의를 씌워 죽이려 하였다. 이에 노군 잡류부대는 “몽고군이 오자 다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은 지키지도 않더니, 이제는 몽고군이 약탈해 간 것까지 우리에게 죄를 돌려 죽이고자 하는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역사는 승리와 반란이 동시에 부각되는 쪽으로 서술되고 말았다. 할 말 없는 지배층이 권위를 회복하고자 큰 공로를 세운 피지배층을 몰아붙인 안타까운 사례이다.
몽고의 2차 침입
충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화의의 결과는 고려의 주권을 크게 침해할 뿐만 아니라 최씨 정권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몽고에서는 점령한 지역과 개경에 다루가치를 두어 내정을 간섭하게 했다. 또한 국내에서 몽고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최씨 정권의 입지는 점점 더 위험해 질 것이었다. 이에 따라 최우는 대다수 관료들의 반대 속에 다루가치를 모두 죽이고 수도를 강화로 옮겨 몽고에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몽고에 대한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당시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30여 년에 걸친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강화천도와 대몽항쟁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었기에 사실상 백성들을 몽고병사들의 말발굽 아래 아무 대책 없이 노출시킨 것과 다름없었다. 강화천도 이후 기나긴 대몽항쟁 기간 동안 중앙에서 출동한 대군이 몽고군과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예병은 담나 좁은 강화도에서 권력층의 안일한 삶을 보호할 뿐이었다. 중앙에서 백성들에게 한 일이란 기껏해야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도록 독려 혹은 위협한 것뿐이었다.
백성들은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렇듯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꿋꿋하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이 시기에 백성들의 힘으로 몽고병을 격퇴한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자주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처인성 전투가 있다.
처인성 전투
눈발이 몹시나 휘몰아쳤을 1232년 12월 16일, 몽공장군 살리타이는 용인땅 아골리 처인성에서 맥없이 꺼꾸러져 이국땅의 외로운 혼이 되었다. 그는 몽고의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왔다가 용인의 처인성에서 피살되었다. “태종 4년 8월, 다시 살리타이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했는데,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죽었다”“ 몽고의 원수 살리타이가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이상은 <원사>와 <고려사>의 기록이다.
그러면 처인성은 어떤 곳일까?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그 장수를 죽였으니 만큰 험한 지형, 돌로 쌓은 튼튼한 성벽, 높은 망루등과 같은 난공불락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을까? 실상은 이와 정반대이다. 성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 2리에 있다. 이 성은 둘레가 650여 보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토성으로 총면적 5,820평에 불과한 작은 동산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잡목들만이 어지럽게 서 있을 뿐, 이곳이 ‘경기도 기념물 44호’라는 사실은 인근의 주민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조그마한 성에서 세계역사상 크게 기록될 만한 사건이 지금부터 760년 전에 발생하였다. 세계를 제패하던 몽고군의 고려정벌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1232년 10월 살리타이를 사령관으로 한 몽고군의 제2차 원정군은 강화도 정부를 비켜지나 지금의 서울인 남경을 노략하면서 큰 저항 없이 광주에 이르렀다.
이 때 몽고군은 특정 지역을 목표로 공략에 나섰던 것이 아니라, 육지를 무제한 노략하여 고려정부가 스스로 백기를 들게 하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몽고의 주력군이 광주에 이르는 동안 그들의 별동부대는 대구까지 내려가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
남경을 수비하는 중요한 요충인 광주에 살리타이가 휘하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1232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쉽게 광주성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사 이세화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일장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 응거하여 강력히 저항하자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살리타이는 말머리를 돌려 수주(경기도 수원)에 속했던 처인부곡을 지나 충주로 남하하고자 했다. 이 길목의 한편에 흙으로 쌓아 올린 처인성이 초라하게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인근 부곡에 사는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일반 주민의 힘으로 살리타이를 사살하다
처인부곡민들은 몽고군의 말머리가 자기네 고장으로 향하자 가까운 처인성에 들어갔다고 짐작된다. 이렇게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백원현에서 온 승려 김윤후도 있었다. 대덕이나 선사등과 같이 지배층 출신이 거의 독점하는 승계를 띠지 않고 다만 ‘승려’라고 표기된 것을 볼 때, 그는 일반 백성 신분의 승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그가 처인성에 피난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는 피난을 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위하여 처인성에 포진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피난하려는 승려가 몽고군이 이동하는 길목으로 찾아들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성 공략에 실패한 살리타이는 준마에 높이 올라 남하를 시작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처인성은 그야말로 싸울 만한 그리고 점령할 만한 가치도 없어 보였으리라. 다만, 지나치는 길목 그 한 귀퉁이 조그마한 토성에서 감히 자신에게 대항하는 ‘애교의 화살’을 둔 채 남진하는 것은 그의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살리타이는 처인성의 맞은편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에서, 가볍게 치고 남하를 계속할 요량으로, 휘하 군사들에게 시급히 함락시킬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때 처인성 안에서는 주민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대항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여기서 구심점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승려 김윤후였다. 그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은 몽고군의 공격에 대해 응사하기 시작하였고, 필사적인 전투가 한창일 때 맞은편 언덕위에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던 살리타이가 느닷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처인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것이다. 사령관이 어이없게도 쓰러져 버둥거리자 몽고의 기마부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총사령관이 죽을 경우 전투를 중단하는 것이 몽고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살리타이의 싸늘한 시체를 거두어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살리타이의 뒤를 이어 몽고군을 지휘한 테케는 강화도정부와 몇 가지 가벼운 조약을 맺어 체면을 세운 뒤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처인성의 승리는 몽고의 침략기간 중 고려가 세운 가장 큰 전승이었다. 정규군이 아닌 주민들이 자위적으로 항전하여 대륙을 헤집고 다니던 몽장 살리타이를 죽이고 나라를 구했다는 점에서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남긴 울림
이후로도 오랜 기간 전쟁이 계속되었다. 산성과 해도로 들어간 백성들은 결국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항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족도 어느덧 농경민족의 삶을 이해하고 그전처럼 약탈과 살육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시일이 지날수록 요구조건을 대폭 낮추어 제시하였다. 최씨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러다가 지배층 전체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태자가 직접몽고에 가서 화친을 요청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고려가 몽고로부터 승인받은 조건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로부터의 관습과 제도 또한 그대로 유지할 것을 허락받으며, 국력이 회복될 동안은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까지 있었다.
이 때 태자[뒷날의 원종]와 쿠빌라이[원 세조]간에 합의된 사항들은 ‘세조구제’라 하여 중요한 협정으로 취급되었고, 이후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많은 나라가 멸망하는 속에서도 끝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고제국체제하에서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려 백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항쟁의 결과였다. 백성들은 지배층 출신의 훌륭한 장수가 지휘할 때 물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몽고병을 격퇴했거니와, 지배층이 도망했을 때조차 스스로 단결하여 성을 고수했던 것이다. 초적출신 병사들의 대활약, 양반과 지휘관이 모두 도망한 성을 노군 잡류들이 끝내 지킨 충주성 전투, 아예 지배층의 지휘를 받지 않고 부곡민 스스로 단결하여 침략군 총사령관을 죽인 처인성 전투, 백성들의 이러한 항쟁이 고려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일개 지휘관이 모든 것을 다 했고, 그 인물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누구의 무슨 대첩’식의 역사이해는 그릇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 백성을 국난 극복의 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보는 역사인식은 현재를 올바로 보고 더욱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