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산 마을과 기산 팔문장 2. 기봉 선생의 만남과 참다운 가르침 3. 기산 팔문장의 작품과 문학 세계 4. 기봉 백광홍의 작품과 문학 세계 5. 어문교육을 염려하며 기봉 선생과 헤어짐 |
1. 기산 마을과 기산 팔문장
2009년 4월 26일 기산 마을을 찾는 나의 마음은 떨리고 있었다. 1994년에 조선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기 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이곳 기산 마을과 동계 마을에서 기봉의 흔적과 숨결을 물씬 맡을 수가 있었는데, 그 이후 16년만에 찾았기에 더욱 그랬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참 살기좋은 마을=2008년 전국 대상】을 차지했다는 표지석만 보더라도 마을 주민들이 그동안 일심단결했던 참 모습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날의 행사는 세 가지 의미를 담는 뜻깊은 날이라고 했다. 첫째는 2008년 전국 [참 살기좋은 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대상을 받은 행사요, 둘째는 기산팔문장(岐山八文章) 시문을 발굴하여 [가비(歌碑)를 세워 제막식]을 거행하는 행사며, 셋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산문집 출판기념회]를 겸하는 행사가 그것이라고 했다. 마을이 생긴 이후 가장 큰 행사라고 전해 들었다. 주로 장흥군내 유지 및 기관장과 읍면, 마을 단위 어른과 유지를 초청하여 그 의미를 널리 알리고 팔문장의 높은 뜻을 기리는 자리라고 했다.
행사 예정시간이 오전 11시였지만 그보다 2시간이 빠른 9시경에 마을에 도착했다. 변화된 마을모습도 돌아보고 가비의 면면을 좀더 소상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마을로 향하는 도로변에 즐비하게 가비가 세워져 있는가 하면, 봉명재(鳳明齋) 서당에서 훈장의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하는 학동들의 모습을 담는 그림 등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기산 마을 팔문장을 배출해 내는 산실이 이곳이었음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試圖)로 보였다.
기산팔현 혹은 기산팔문장으로는 당 시대에 널리 알려진 조선팔문장(송익필,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립 : 조선왕조실록 선조 18년 2월 1일과 12월 1일조)이자 [관서별곡:關西別曲]의 주인공인 기봉 백광홍(岐峰 白光弘 :1522~1556)을 비롯해서 삼당(三唐) 시인으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 봉명재에서 독실하게 동문수학한 후 동시대에 진사 현령을 지냈던 남계 김 윤(南溪 金 胤 :1506~1571), 서곡 임 분(林 賁:1501~1556), 죽곡 임 회(竹谷 林 薈:1508~1573), 동계 백광성(東溪 白光城 :1527~1595), 풍잠 백광안(風岑 白光顔:1527~1567), 지천 김공희(芷川 金公喜 :1540~1604) 등 8인이 그 분들이다.
2. 기봉 선생의 만남과 참다운 가르침
마을 입구 첫머리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꽉 미여질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기봉 백광홍 선생의 <관서별곡(關西別曲)> 원문과 번역문이 끝이 나비 날개 모양을 하면서도 하늘로 치솟아 그 높이가 3m가량 됨직한 거대한 자연석에 전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關西 名勝地에 王命으로 보내실새 / 行裝을 다사리니 칼 한나 뿐이로다…]
=위 원문은 [기산문집 39p]를 보고 아래하자(․)가 있는 옛글체로 고쳐주시오=
이 관서별곡이 학계에 알려지면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5년이 앞섰으며, 한국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 알려진 작품이다. 장흥고교장을 역임했던 김희준 선생의 제보에 의해 국민대 이상보 교수가 1963년 국어국문학 제26호에 이런 내용을 발표했고, 이후 전남대 정익섭 교수가 이를 확인하는 논문을 그의 저서 [호남가단연구]에서 가단의 일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서경가사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이 효시가 되어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정철(鄭澈)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기행서경가사는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이 효시가 되어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조우인(曺友仁)의 매호별곡(梅湖別曲)과 속관동별곡(續關東別曲), 위세직(魏世稷)의 금당별곡(金塘別曲)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정리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16세기 호남가단의 계통성이 바로 한국가단의 전모였기 때문에 나는 <관서별곡 가비>를 중시했으며, 1995년 학위논문을 쓰면서 논문의 한 장(章)을 마련하여 기봉의 관서별곡 내용을 분석 고찰했었기에 더욱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하면서 가비(歌碑) 앞에 우두커니 서는 순간 검은 삿갓 모자에 흰 도포를 입은 노인 한 분이 사자산 기슭 중턱의 정기를 타고 기산 마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오시더니만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관서별곡> 가비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어르신께서는 반갑게 인사를 청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우리 안양출신 여명(黎明) 장(張)아무개 선생이 아니시던가?]
[그렇습니다. 그러하신 어르신께서는…]
아뿔사. 이런, 이런 일이… 16년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기산과 동계마을을 찾아 기봉 종가에서 <동지부(冬至賻>로 으뜸되어 하사 받았던 선시십권(選詩十卷)을 살펴보고 나오려는 순간 대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시며 아주 짧게 대화를 나누었던 기봉 선생이셨다.
[기봉 선생님! 아니,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선생님을 뵈옵다니…]
[그렇다네. 몇 분의 학자들이 1960년대에 관서별곡의 일단을 잘 정리하여 역사적인 평가를 바르게 한 일은 잘한 일이었고, 국민적인 인식을 심는 것은 경하할만한 일이었지. 위의 일이 450여년간 묻혀있던 내 글이 드디어 빛을 보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면, 자네가 관서별곡 내용을 요목별로 분류하면서 서경의 일단을 정리하는 일과, 내 문집에 있는 한시의 상당 부분을 번역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던 일이 두 번째로 나의 글을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네. 이후 문화관광부이던가 정부 부처에서 갑신년인 2004년 6월 [이달의 문화 인물]로 지정하면서 관서별곡을 통한 나의 면모가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기봉집(岐峰集) 전문을 번역하는 쾌거야말로 높이 경하할만한 일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가 아니었던가. 이런 면에서 자네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네. 그런데 다시 이번에 내 고향 기산마을 후진들이 협동 단결하여 나와 아우들은 물론 동시대에 우리 마을의 문장이셨던 남계 김윤 선생 부자와 서곡 임분 선생 형제분을 비롯한 기산팔현 대표작에 해당되는 시문을 발굴하여 가비를 세우고 준공식 겸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하기에 내 기쁜 마음으로 찾아왔지. 그 뿐만 이던가. 무자년인 2008년에는 이런 가비 준공과 봉명재(鳳鳴齋) 복원을 기획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참 살기좋은 마을 전국대상>을 받은 바 있었기에 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겸사겸사 하여 축하하기 위해 큰 맘 먹고 찾아왔다네.]
[선생님! 그럼 오늘의 이 행사에 참석하시기 위해 일부러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시면 꿈에서라도 선몽으로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랬어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그 동안 기산 마을의 일을 그렇게 소상하게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내 육필(肉筆)로 써두었던 글을 19세기 초부터 내 후진들이 수등본(手謄本)과 목판본(木版本)으로 전각하는 작업을 하나 둘씩 완성하더니만 마지막에 채인(采寅), 희인(羲寅) 형제에 의해서 내 천수(天壽)를 다하고 운명을 달리했을 때 여러 친지들이 쓴 만사와 교유시를 비롯한 시산잡영(詩山雜詠) 등을 첨부하여 최종 완성한 후에, <기봉집(岐峰集)>이라 이름하여 전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다네.]
너무도 갑자기 기봉 선생을 뵙는 자리인지라 선생님의 말씀부터 근청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겠지만 작품의 배경과 내용의 진수부터 듣고 싶은 욕망이 불현듯 생겼다.
[선생님, 이왕 선생님의 작품 <관서별곡> 앞에 섰으니 선생님의 작품부터 그 당시의 상황을 곁들여 가면서 조금의 부연 설명을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 때의 생각이나 시대적인 상황을 많이 기억하실 수 있을런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일일이 기억할 수야 없지 않겠나. 그렇지만 개요적인 것만이라도 자네가 원한다면 조금은 설명할 수가 있을 것 같네. 나뿐만 아니라 천수를 다하여 육(肉)과 혼(魂)이 갈라져 영혼의 세계에 있는 분들은 다들 그럴 것이라고 보네.]
기봉 선생의 말씀은 그야말로 분명하고 똑바르셨다. 16년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찾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오늘 말씀은 더욱 그러했다. 다시 기봉 선생의 말씀은 이어졌다.
[자네의 학위논문에서 관서별곡을 모두 8개 단락으로 나누어 서사, 본사, 결사로 나눈 것은 잘한 일이었네. 한시의 단가인 사언(四言)이나 율시(律詩)의 선택도 좋았지. 나는 짧은 한시보다는 장문을 더 좋아했는데 옥루(屋漏), 오곡종지미(五穀種之美), 봉송석천안절관동(奉送石川按節關東), 시주전(詩酒戰)과 같은 꽤 긴 작품을 그 나름으로 잘 소화하여 다루었던 것도 매우 잘한 일이었네. 다만 내 학문의 모든 혼을 쏟은 작품이 바로 동지부(冬至賦)라고 보는데 자네의 논문에서는 이 작품분석을 그냥 스치고 지나쳤던 것 같네.]
[그렇습니다. 저는 얻어들은 것은 있을지언정 체계적인 학문이 다소 미약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賦)는 너무 어려워 제 실력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미쳐 다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동지부 뿐만 아니라 다른 <부(賦)> 작품과 한시문은 물론 선생님을 추모하는 다른 시문까지도 할 수만 있다면 좋은 가르침주시면 합니다.]
이렇게 기봉 선생께 간곡하게 부탁한 후 동지부(冬至賦) 가비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은 당시의 설명은 그냥 스칠 수 없는 귀중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지부는 경연의 자리에서 자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표했던 작품이라는 것이다. 문학성보다는 학문성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야 하고, 양과 질의 적당한 조화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경연은 임금 앞에서 지정한 지역 문신들이 함께 모여 자기의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는 것인 바, 명종 7년(1552년) 11월 동짓날(음력이니 약력으로는 12월임)에 임금이 <冬至>라는 주제를 내서 글재주를 겨루게 했다. 기봉 선생은 이 부를 경연장에서 거침없이 썼다는 것이다. 논문을 쓰는 식으로 책을 보고 인용하듯이 참고문헌을 보고 쓴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필한 것도 또한 아니라고 했다. 평소 읽었던 책을 통해 당신의 있는 실력 그대로를 주제에 맞게 써야 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기봉 선생은 경서를 두루 통달했던 것은 물론 사략, 통감, 외과서, 조조의 아들 조식의 글까지도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수백명이 모인 경연장에서 자기의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젊은 시절 폭넓게 공부했던 결과라고 했다. 그래서 동지부는 선생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명문장의 집합체였다고도 했다. 글방에서 벌이는 시회(詩會)나 누정(樓亭)에서 문답식으로 수창하는 수창시(酬唱詩)가 아닌 경연의 자리였기에 혼신을 다해 썼던 작품이란다.
동지부 가비 앞에서 동지부를 쓰게 된 위와 같은 배경과 시대적인 상황 일부를 전해들은 기봉 선생과 나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면서 기산 팔현 작품의 면면을 감상하기로 했다.
작가 소개나 시대적인 배경은 기봉 선생께서 기억하시거나 아시는 대로 설명해주시고, 작품에 대한 감상과 독자적인 태도의 문학 세계는 내가 설명하기로 했다. 독자적인 태도가 일부 미흡할 때는 작가적인 입장으로 돌아가 부연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데 합의했다. 다만 본인이 평가한 작품에 대한 감상을 놓고 기봉 선생이 감상의 시시비비에 대한 말씀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을 쓰는 작가적 태도와 느낌이 아니라, 제 3자가 보는 독자나 평론가들이 독자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느낌은 보는 이에 따라서, 시대와 계절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리라.
3. 기산 팔문장 작품과 문학 세계
(1). 남계 김윤(南溪 金胤)의 작품과 문학 세계
비교적 장문(長文)이었지만 관서별곡과 동지부 가비를 놓고 기봉 선생의 위와 같은 말씀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선생과 나는 가비에 새겨진 작품 하나하나를 놓고 기봉 선생 입장에서는 작가적 입장에서 작자를 소개하면서 끝맺음하고, 나는 독자적 입장에서 작품을 보고 난 느낌이나 작품 세계의 극히 일부이겠지만 설명하기로 한 약속을 다시 강조했다.
기봉 선생과 나는 남계(南溪) 김윤(金胤:1506~1571) 선생의 가비 앞에 다가섰다.
[남계 선생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겠네. 남계 선생은 광산인으로 자는 찬중(纘中)이요, 호는 남계이시며, 영천(靈川) 신잠(申潛)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으신 분일세, 경오년(1570년)인 선조 3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셨던 독실한 분일세. 스승인 영천 선생은 일찍이 제자인 남계 선생과 다음에 설명하게 될 서곡 선생을 당신의 뒤를 이어 학문에 전념하거나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하셨던 분이셨지. 마치 공자님이 안회를 두고 칭찬하셨듯이 말일세.]
[그렇군요. 선생님! 영천 신잠 선생에 대해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는 선생님과 영천 선생님과도 깊은 인연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네. 영천 선생은 신해년(1491년)인 성종 22년에 태어나시어 갑인년(1554년)인 명종 9년에 운명을 달리하신 분으로 학문에도 뛰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문인화가로도 그 이름을 높이 떨치신 분일세.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원량(元亮)이며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으로 불리시기도 하셨지. 그 분의 증조부는 사육신인 신숙주(申叔舟) 어른이시며, 아버지는 신종호(申從護)로 많이 알려지지 않으신 분이네. 중종 14년(1519년)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했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로 인해 파방(罷榜)되었고,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홍패(紅牌)가 마르기도 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장흥으로 유배를 오시게 되네. 영천 선생은 장흥읍 예양강변에서 16년간이나 외롭고 기나긴 적객(謫客) 생활을 보내게 되었지. 그 때 선생님께서는 <예양강, 억불산, 며느리바위, 보림사, 성불사…> 같은 시문을 절절하게 노래하셨고, 시문집 <冠山錄:관산록>을 남기셨네. 이 때 남계 김윤과 서곡 임분 선생을 지도하셨고, 나 또한 후로 선생님의 독실한 지도를 받아 학문적 위상을 적립할 수 있었네. 영천 선생은 48세에 귀양에서 풀려 나온 이후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書畵)에 몰두하다 인종 때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셨고, 상주목사 재임 중에 돌아가신 분일세. 영천 신잠 선생님은 추강 남효온 선생처럼 장흥땅을 인연으로 하셨기에 처음엔 예양사에 모셨다가 다음엔 예양서원에 합벽 추대되셨네. 이렇듯 선생은 장흥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 분이지.]
[그렇습니까. 선생님의 문집에 영천 선생에 대한 글이 자주 나오는데 이제 알겠습니다.]
남계 선생의 면면을 알게 되면서 영천 선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개괄적으로 부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기봉 선생으로부터 이미 알고 계신 작가적인 설명을 전해들은 나는 이제 독자적인 태도에 중점을 두면서 작품의 세계에 대한 감상 말씀을 드릴 차례였다.
내가 사는 집(卜 居) |
추운 겨울 이르러도 소나무 계수나무 향기 가득하고 짙푸른 구름 겹겹이 떠서 빈 산을 채우네. 창가에 앉아 밤새 이야기하는 동안 먼동이 터오는데 술 이외엔 매화향기까지도 끼어 들지 못하는구려. 松桂芳盟到歲寒 翠雲浮重滿空山 一窓夜話天將雪 酒外梅香未入欄 |
[남계 선생의 작품 제목은 복거(卜居)이지만 흔히 이를 복택(卜宅)이라고 합니다. 사전적인 제목의 뜻은 <살 곳을 미리 점쳐 정하다>는 것이지만, 그런 좋은 집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처럼 남계 선생은 아는 친지나 친척과 마주 대하여 밤새는 줄 모르고 술잔을 권하면서 정담을 나누었던 순간과 그 때의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누는 정담과 권하는 술잔이 누정(樓亭)이나 주막(酒幕)이 아니라 복이 넘치거나 넘칠 것 같은 당신의 집에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벗과 마주 앉아 서로가 권하는 한 잔의 술과 무르익은 대화 이외엔 매화 향기마저도 그 사이에 낄 수 없다고 했으니 술에 대한 흥취와 그 맛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누는 술잔 속에 무르익은 대화가 얼마나 진지하고 담담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음부터는 절구(絶句)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시문의 처음이니 아주 짧게 설명을 곁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 중에서 가장 짧은 단시가 절구인데 기승전결(起承轉結)이란 시적 형식에 맞추어 쓴 단시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밤새는 줄 모르는 대화]로 보아집니다.]
[그렇게 보았는가. 그렇지 내가 살던 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한 잔 술 속에는 시가 들어있고, 무르익은 대화 속엔 인간과 철학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남계 선생의 위 작품은 특히 이런 면을 염두에 두면서 시문을 썼던 것으로 생각되네. 자네도 지적했듯이 무르익은 대화 속 에는 술 이외엔 매화 향기마저도 그 사이에 끼어 들 수 없다고 했으니 시적(詩的)인 표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달리 이런 기교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네.]
선생의 지도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는 다음 시문작품 가비로 향했다.
(2). 서곡 임분(林賁)의 작품과 문학 세계
기봉 선생과 나는 서곡(書谷) 임분(林賁:1501~1556) 선생의 가비 앞에 섰다. 선생의 차분하시면서 떨리는 목소리는 서곡 선생의 소개로 이어졌다.
[서곡 선생은 부안인(扶安人)으로 자는 성보(成甫)이고 호는 서곡(書谷)이시라네. 남계 선생과 함께 영천(靈川) 신잠(申潛)의 문인으로 독실하게 공부하신 분이셨네. 중종 35년(1540)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에, 1540년 교수가 되셨네. 서곡 선생은 평생을 경전(經傳)과 역전(易傳)을 강구(講究)하면서 현량지사들과도 두텁게 교분을 나누셨지. 우리 기산마을 문장으로는 제일 나이가 많으신 분이라네. 서곡 선생의 학문은 남계의 학문과 비견할 만큼 출중하셨으니 영천 선생의 사랑을 듬뿍 받을 만 하기도 하셨겠지. 나도 또한 이런 남계 선생과 서곡 선생의 학문에 큰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말일세.]
위와 같은 서곡 선생에 대한 소개에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세계를 말씀드렸다.
이성주에게 감을 보냄 : 送柿李城主 |
바닷가 가을이 빨리 찾아와 / 산밭에 감이 벌써 붉어서 동글동글 이슬 빛이 맑고 / 알알이 서리가 짙게 맺혔습니다. 맛은 당신께서 드시기에 알맞고 / 과육도 당신께 적합할 것 같고 집이 가난하여 드릴 게 없기에 / 대바구니 가득 채워 보내드립니다. 海國秋來早 山園柿子紅 團團露色嫩 箇箇霜華濃 風味宜尊長 王更 漿合相公 貧家無表物 緘送萬筠籠 王更 : 王과 更의 합성자(이 색깔의 글씨는 ‘편집’에 참고만 하고 지우시오. 다음도 같음) |
[서곡 선생의 위의 작품 제목은 <送柿李城主>로 <이성주에게 감을 보내드림>이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주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작품 속의 내용으로 보아 친하게 지낸 선배나 친지가 아닌가 봅니다. 오언 율시로 되어 있는 이 시는 각 2구씩을 묶어 첫 구를 출구(出句), 둘째 구를 대구(對句)라고 하는 바 이와 같은 출대(出對)의 표현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입니다. 1.2연인 기연(起聯)은 가을이 되어 감이 익었음을, 3. 4연인 함연(頷聯)은 감이 먹음직스럽게 익어있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5.6연인 경연(頸聯)에서는 감을 받으실 이성주라는 분이 맛을 보기에 적절할 것으로 보이는 심회를 알맞은 어휘로 구사하고 있으며, 7.8연인 미연(尾聯)에서는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화자의 정성과 마음을 담듯이 대바구니에 감을 가득 담아 보내드린다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율시(律詩)는 흔히 사운(四韻)이라고도 하는데 잘 아시다시피 절구에서는 기승전결이란 표현을 쓰지만 율시에서는 두 개의 연을 묶어 기함경미(起頷頸尾)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감(柿)을 보내는 정성]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았는가. 시적인 표현도 그렇지만 문학은 생각만으로 쓰는 것은 아니라고 보네. 생각이 마음으로 응축되었을 때 참다운 글이 된다고 한다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마음이 없다면 그 글은 한갓 헛수고이자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법일세.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집이 가난하여 다른 것은 보낼 수가 없지만 계절에 맞게 익은 감이나마 정성스럽게 보내겠다는 마음이 스며있네.]
글은 생각만으로 쓸 수 없다는 새로운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가비로 향했다.
(3). 죽곡 임회(林薈)의 작품과 문학 세계
기봉 선생과 나는 죽곡(竹谷) 임회(林薈:1508~1573) 선생의 가비 앞에 섰다. 선생의 차분하시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죽곡 선생의 소개로 이어졌다.
[죽곡 선생은 서곡 임분 선생의 아우일세. 자(字)는 헌가(獻可)이며, 호는 죽곡(竹谷)이고. 처음의 휘(諱)는 회(誨)이셨네. 당대의 거유이셨고 학문이 출중한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선생의 문하에서 독실하게 수업하셨다네, 중종 29년(153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로, 1540년에 문과에 등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힌 이후 공조정랑을 거쳐 지방관으로는 처음엔 남원부사가 되신 이후, 상주, 순창, 나주, 광주, 능주 등 8주 목사를 두루 지내시고 나중에는 검상(檢祥)에 오르셨네. 부경(赴京)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천거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당대의 이름 있는 여러 학사들과 교유했었던 분일세.]
위와 같은 죽곡 선생에 대한 소개에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세계를 말씀드렸다.
수영의 풍경을 읊음(詠水營風土) |
수루에 늙은 장수 귀밑머리 하얗듯이 달밤에 파도 노래 무수히 밀려오네. 몇 해 전 집 떠나와 해안 방위 힘쓰면서 사람 시켜 한양 가는 배를 자주 묻곤 하네. 戌樓老將鬢皤然 月下啇歌無數入 皤(파) 啇(적) 前歲辭家鎭海邊 伻人頻問漢陽船 伻(팽) 頻(빈) |
[죽곡 선생의 작품 제목이 <詠水營風土>로 조선시대 삼도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군영(軍營)인 수영(水營)의 적막한 풍경을 시로 읊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 전선(戰線)이지만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수영이란 고요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시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고요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요한 풍경을 1구인 기구(起句)를 통해 수루의 늙은 장수의 귀밑머리로서 시를 일으키고, 이와 대비하여 늙은 수병의 머리카락을 2연인 승구(承句)에서는 파도에 비유하는 절묘함을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 ‘쏴~쏴’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그 흰 파도를 파도노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만 작중 화자가 부르는 노래는 임금님께 자기의 정성을 간곡하게 보내는 한양노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3연인 전구(轉句)에서는 국토방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해안 방위에 열중하고 있지만, 한양 가는 배를 통해 임금님의 소식이나 후방에 사시는 부모형제에 대한 소식을 자주 묻곤 한다는 내용으로 4연의 결구(結句)로 맺고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수영의 풍경을 읊은 외로운 심회]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네. 나도 죽곡 선생의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노장의 외로운 심회를 느낄 때가 있네. 죽곡이 8군의 현감을 지내는 과정에서 잠시 수군 장수가 되어 바다를 지키는 임무에 있으면서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이네. 자네가 지적한 한양 가는 소식을 자주 묻는 것은 고향이 아니라 임금님의 성은을 입어 혹시 다른 곳으로 천거되는 등 요즈음으로 말하면 승진발령을 받지 않을까, 그런 기뿐 소식이 당도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엿보기도 하네.]
마지막 연을 두고 거듭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고향 생각보다는 임금님의 소식을 기다리며 다른 곳으로 천거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어명(御命)을 기다림]으로 생각되었다.
(4). 동계 백광성(白光城)의 작품과 문학 세계
기봉 선생과 나는 동계(東溪) 백광성(白光城:1527~1595) 선생의 가비 앞에 섰다. 아우를 극진히 사랑하는 호소력 있는 선생의 목소리는 동계 선생의 소개로 이어졌다.
[동계는 내 종제(從弟)일세. 숙부(叔父)이신 세(世)자 례(禮)자의 장자였지. 동계의 자(字)는 대한이요, 호는 자기가 살고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저 부르기 쉽게 동계(東溪)라고 했다네. 명종 16년(1561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과업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오로지 후진 교육만으로 여생을 보냈던 사람일세. 송강, 일휴당과 사귀었고, 학포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독실하게 학문에 정진하기도 했었네. 백부장(白部將)으로 불리셨던 작은 아버님께서는 힘이 장사이셨다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셨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을묘년(1555년)에 장흥부사 한온과 함께 관군을 이끌고 당랑포(지금의 해남 남창) 전투에 참가하여 수많은 왜군을 섬멸했으나 전투중 독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버리고 전쟁에 임하게 되어 독이 온 몸으로 퍼져 전사하였다고 하네. 이 소식을 접한 장자 광성 아우가 남원에서 달려와 전장을 3일 동안 뒤져 부친의 시신을 수습한 후 장흥 장동 두룡에 장사하셨네. 이 만큼 동계는 효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형제간에도 우애가 깊었네.]
위와 같은 동계 선생에 대한 소개에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세계를 말씀드렸다.
문득 떠오른 시(偶 題) |
맑은 가을 물을 정신으로 삼고 옥을 비장으로 여기니 대바람 소리와 매화꽃 달이 시속에 담겨지네. 시내 동녘은 흥하고 발전하여 보기는 좋다하나 낙북을 내 스스로 영원히 떠나온 것을 누가 알리오, 秋水爲神玉作脾 竹風梅月入新詩 溪東謂興長相好 洛北誰知自永離 |
[동계 선생의 작품 제목이 <偶題>로 깊은 생각 없이 <문득 떠오른 시상>에 의해 쓴 시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문득 떠오른 시라기보다는 평소 시심이 풍부한 동계 선생께서 우람하고 큰 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만끽한 가을에 계곡에서 흐르는 맑을 물을 아무런 잡된 생각 없이 정신으로 삼고, 비상금으로 몸에 찬 옥을 비장으로 삼는다고 했으니 그 기개가 얼마나 컸던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자연을 작가의 모든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당찬 기백은 2연에서도 계속되니 대밭에서 이는 바람소리와 매화꽃 같이 고운 달을 작자의 시(詩)속에 모두 담아보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정신은 아닐지는 모르겠습니다. 계동(溪東)은 본인의 호이자 태어난 고장 ‘동계’를, 흥장(興長)은 고향 ‘장흥’골을 지칭한다고 생각되지만 전구(轉句)의 의미를 다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작자가 서울을 등지고 낙향하여 오로지 교육에만 힘썼던 것을 보면 낙북(洛北:한양)을 떠나온 뜻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고, 스승 학포 양팽손이 정암 조광조에게 보낸 의리정신까지도 엿볼 수 있는 기개로 보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낙북의 심회>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네. 동계 아우는 의리도 강했지만 시문에도 능통하여 종제이지만 친아우처럼 지낸 사이였네. 기산과 동계를 오가는 오붓한 정 속에는 학문의 심오함이 그대로 스며있고,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그대로 여과(濾過)한 것으로 보네. 동계를 ‘계동’으로, 장흥을 ‘흥장’으로 표현하면서도 시적인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으이. 아쉬운 것은 후손들이 그의 학문과 문학적인 가치를 많이 알지 못해 문집으로 묶어두지 않아 글이 전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네.]
동계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지 아니한 내용까지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5). 풍잠 백광안(白光顔)의 작품과 문학 세계
기봉 선생과 나는 풍잠(風岑) 백광안(白光顔:1527-1567) 선생의 시문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산마을 입구에는 가비가 세워져 있지 않았다. 가비를 세울 무렵 전하는 풍잠 글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수소문한 끝에 오늘 텍스트로 삼아야 할 <江行>이나마 겨우 발굴할 수 있었다 한다. 풍잠 선생 시문작품 가비는 별도로 세우도록 마을에서 이야기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나는 미리 준비한 시작품을 선생님께 드리면서 지도 받잡기로 했다.
[풍잠은 손아래 아우일세. 동계 아우와 동갑내기로 그와는 절친하게 지낸 처지였네. 그의 자(字)는 이수(而粹)이고, 호(號)는 풍잠(風岑)으로 했었지. 동계와는 동갑내기이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상당히 달랐었네. 동계는 호탕하고 기백이 넘치는 데 반하여, 풍잠은 차분하고 섬세하다고나 할까. 두 사람의 작품에서도 그런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아무튼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네. 풍잠 아우는 과업에 나아가지 않고 기산을 지키면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지. 동계를 포함해서 풍잠, 옥봉 아우까지 우리 4형제가 마주 앉으면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많이 했다네. 그래서 사종형제가 한 방에 단란하게 모여 도덕을 강론할 때에는 사람들이 중국 동한(東漢)의 원방계방(진기<陳紀>와 진심<(陳諶>)에 비교하기도 했다네(=與四從昆季團會一室講論道德時人比之於元方季方 詩). 이는 우리 마을 학문의 전당이었던 봉명재(鳳鳴齋)가 그 중심이 되었지.]
위와 같은 풍잠 선생에 대한 소개에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세계를 말씀드렸다.
강가에 거닐다가(江 行) |
강가의 인가에서는 마을을 기억하지 못하고 달 밝을 때에 이슬이 작은 봉우리에 흔적 남기네. 배에 홀로 앉아 종소리 나는 곳을 담아 들으며 안개 낀 나무 어렴풋하니 이곳이 절 입구인 것을. 江上人家不記村 月明時露小峯痕 維舟獨聽鍾來處 烟樹依微是寺門 |
[풍잠 선생의 작품 제목은 <江行>으로 할 일없이 강가를 거닐다가 강가에 메어둔 배에 앉아 멀리서 은은하게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 나서야 시인이 있는 곳이 비로소 절의 입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강가에 있는 조그마한 인가를 군락을 이룬 마을과 상호 구분하지도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는 것으로 시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다시 시인은 달 밝은 밤이 깊어가면서 살며시 작중 화자도 모르는 사이에 내리는 이슬이 소복하게 쌓여서 작은 봉오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승구(承句)를 전개했습니다. 작품 속의 화자는 강가에 메어 둔 배에 앉아 대화의 상대 없이 소복하게 내리는 이슬이나마 벗 삼아보려는 그 적막함을 깨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으니 한 편으로는 놀라면서 반가움이야 더 이상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강행(江行)에 나섰다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에 그만 정신을 차려보니 안개 낀 숲 사이로 즐비한 나무가 어렴풋하게 보이니 비로소 그 자리가 절 입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고요한 자연과 벗하는 골똘한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보았네. 풍잠의 작품에서 보듯이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고, 자네의 감상과 평가는 지당하다고 생각하네. 아우의 작품을 이것이나마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잘한 일이었네. 그 자신이 글을 쓰면 늘 습작처럼 여겼고, 아무렇게나 취급했던 것을 알고 있다네. 천성이 어질고 착했지만 그에겐 그런 면이 있었거든. 시적인 구상이나 비유법과 상상력이 뛰어나고, 경서를 읽으면 누구보다 심도있게 공부에 전념했던 아우였지만 말일세.]
풍잠 선생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았던 성격에 대해서도 기봉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6). 옥봉 백광훈(白光勳)의 작품과 문학 세계
기봉 선생과 나는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 선생의 가비 앞에 섰다. 선생의 애절한 듯하면서도 떨리는 듯한 목소리는 옥봉 선생의 소개로 이어졌다.
[옥봉은 내 막내아우일세. 성격이 올곧고 한번 마음먹으면 꼭 이루고야 마는 독특한 성격이었네. 형편에 의해 소시적부터 해남 옥천으로 가서 성숙된 학문이 이룩되었지만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인편을 통해 서찰을 보내거나 기제사나 명절 때는 먼길을 단숨에 달려오는 등 그 효성과 우애가 남다른 사람이었네. 막내 옥봉은 나를 누구보다더 존경하고 따랐지. 옥봉 아우의 자(字)는 창경(彰卿)이요, 호는 옥봉(玉峯)이라네.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3세에 상경(上京)하여 양응정 선생에게 사사하기도 했고, 22세 때는 진도에 귀양왔던 노수신 선생 등에게 사사를 받아 학문적 기반을 닦기도 했네. 28세인 1564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書道)를 즐겨하기도 했었네. 옥봉이 과거를 포기하게 된 구체적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미한 가문과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연유한 것으로 알고 있네. 내가 운명을 달리한 후 그의 나이 36세인 1572년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의 천거로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하게 해 명성을 크게 얻기도 했었네. 그의 나이 40이 되는 1577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정릉(靖陵), 예빈사(禮賓寺),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내면서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네. 그에게 관직생활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토지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적 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에 유일한 호구책으로 계속 관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네. 특히 옥봉은 삼당시인으로 불리는 만큼 당풍(唐風)의 시들을 남겼다네. 그래서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과 함께 언필칭 일컫기를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하지 않던가. 아우 옥봉의 주옥같은 시문이 지금까지도 많이들 칭송을 받고 있는 줄 아네. 1960년대 70년대 초기엔 관서별곡을 옥봉 아우의 작이라 하면서 서정적인 그의 시와 함께 많이들 칭송하기도 했었지.]
누구보다 막내아우 옥봉에 대한 소개를 소상하게 하고 난 기봉 선생은 가끔 긴 한숨을 내쉬며 아우에 대한 사랑과 고마운 정을 많이 생각하시는 듯했다. 아쉬움과 기특함이라고나 할까. 출중한 실력을 보면 삼정승을 해도 아까울 분이셨는데 냉엄했던 시대와 곧은 성격 때문에 현실을 도피하다 싶이 한 옥봉이었기에 더욱 그랬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와 같은 옥봉 선생에 대한 소개에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세계를 말씀드렸다.
여원에 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到女院月出山) |
두 해 동안 서울 땅 나그네로 떠돌 때에는 꿈에 본 고향 산 얼마나 정겨웠나. 오늘 와서 문득 (고향의) 참모습 보니 꿈속이나 아닐까 두려워하며 고개를 드네. 二年辛苦客秦城 夢見鄕山別有情 今日却逢眞面目 擧頭猶怕夢中行 |
[옥봉 선생의 작품 제목은 <到女院月出山>으로 <여원에 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라는 절구인데 몇 해 동안 타관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산천의 정겨운 풍광을 시에 담고 있습니다. 만년이 참봉이란 벼슬을 얻어 호구책으로 벼슬에 있기는 했지만 어려서 자랐던 해남 옥천을 잊지 못하여 향수에 젖는 모습을 봅니다. 서울에서 나그네 신세로 이리저리 떠돌 때에도 정겨운 고향 산천을 꿈에서나마 자주 보았었다는 내용으로 시상을 일으켜 이어갑니다. 월출산 정기 받은 고향에 돌아와 그 산을 바라보았으니 그 진면목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꿈속에서 자주 보았던 그런 고향이 아닌가 싶어 다시 고개를 들어보았다는 내용으로 전환하며 심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잘 담고 있습니다. 선생은 고죽․손곡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리는 바 그의 시는 대부분 순간적으로 포착된 삶의 한 국면을 관조적으로 그리면서 전원의 삶을 다룬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과 평화로 가득 찬 밝은 분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시적 세계가 이 작품에 잘 나타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시의 주제는 <고향>으로 보여집니다.]
[매우 잘 보았네. 첫머리에서 막내아우에 대한 소개를 자상하게 했으니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지만 옥봉 아우는 고향과 자연에 대한 시 그리고 당시풍을 많이 남겼고, 풍잠 아우와는 달리 그 자신이 작품을 잘 보관하고 후손들 또한 잘 관리했던 것으로 아네.]
옥봉 선생에 대한 내용은 문헌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그 분의 성격이며, 학문적인 세계 등을 알고 나니 한 편으론 마음 든든했다. 서정적인 심오한 시의 세계에 매료되는 듯했다.
(7). 지천 김공희(金公喜)의 작품과 문학 세계
기봉 선생과 나는 芷川 金公喜(김공희)(1540~1604) 선생의 가비 앞에 섰다. 선생의 정이 넘치는 듯하면서도 예사롭지 못한 특유의 목소리는 지천 선생의 소개로 이어졌다.
[이 사람은 남계 김윤선생의 자제 분일세. 옥봉 보다 나이는 조금 어리지만 동년배로 학문이 출중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네. 지천은 광산인(光山人)으로 자(字)는 지명(之鳴)이고 호는 지천(芷川)이라네. 그의 나이 25세인 명종 19년(1564)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다시 40세인 선조 13년(1580)에는 문과에 등제 하였다고 들었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고, 그런 공로 등이 인정되어 군수를 제수 받아 남도 6郡을 돌며 선정을 베풀었다고 알고 있네. 그의 글에서 보면 고향을 그리는 시문들이 많고 선정을 베풀며 어르신들을 정성껏 모시었던 것으로 보이네.]
위와 같은 지천 선생에 대한 소개에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세계를 말씀드렸다.
고향을 그리워 하며(懷鄕) |
푸른 산 하늘 경계를 너머 달빛이 밝으니 나는 아우와 함께 저 가을 하늘 서로 바라보았네. 어르신께 드린 축수잔, 늦가을 국화가 더디지고 흰 구름에 깡마른 눈물이 단풍을 시들게 한다네. 가마 타고 오기 어렵게 한 시내와 고개가 밉지만 오히려 관직으로 떠도는 내 신세를 한탄한다오. 외딴 곳에 사는 이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 써서 지금 남녘으로 날아 갈 기러기 편에 부치려 하오. 靑山連界月明通 相望秋天弟我同 黃髮壽觴遲晩菊 白雲枯淚滴殘楓 生憎川嶺遲來駕 却歎瓢旅繫佩銅 陋地論心惟一紙 自今勸付向南鴻 |
[지천 선생의 작품 제목은 <懷鄕>인 바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는 사무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했듯이 나이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게 마련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임진왜란의 포성이 전국 각지에서 그치지 않는 시대였던 만큼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면서도 군정을 책임지는 군수를 지냈지만 향수만큼은 떠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칠언 율시로 되어 있는 이 시는 각 2구씩을 묶어 출구(出句)와 대구(對句)로 표현되는 운율을 조화롭게 맞추고 있습니다. 1.2연인 기연(起聯)은 달이 밝아 아우와 함께 하늘 너머 가을의 푸른 산을 바라보며 시상을 일으켰고, 3. 4연인 함연(頷聯)은 군청에서 나이든 어르신께 축수잔을 드리는 비유를 늦가을의 국화와 흰 구름으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5.6연인 경연(頸聯)에서는 고향에 가서 어르신께 축수잔을 드리고 싶은데 냇물과 산고개가 군수가마행차 방해를 비유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지천은 비유법을 잘 구사한 시인이 아닌가 보아집니다. 그런 향수의 심회를 편지로 써서 남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편에 부치고 싶다는 심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회심에 젖는 향수]일 것 같습니다.]
[잘 보셨네. 이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공무를 위해 선정을 베풀면서도 나이 드신 어른들을 깎듯이 모셨던 것으로 보여 지천의 인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구먼. 서정적 지향세계가 얼마나 좋은가를 보네. 내 고향 장흥에 가서도 어르신들께 축수잔을 드리려고 가마 타고 가고 싶지만 시내와 높은 고개가 가로막아 갈 수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지 않는가. 자네도 누차 이야기하였지만 역시 문학은 적절한 비유와 상상력을 동원하는 일이 중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지천의 작품은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하여 상상력을 많이 동원한 것으로 보이네.]
지천 선생에 대해서 미쳐 알지 못하는 내용을 견주어 가면서 소상히 알게 되었다.
4. 기봉 백광홍(白光弘)의 작품과 문학 세계
이제 마지막으로 기봉 선생의 작가와 작품 세계를 감상할 차례다. 이 장은 기산 팔문장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장을 구분하지 않고 여덟 번째 말미에 두는 것이 바른 순서이겠다. 그러나 기봉 선생 자신에 대한 내용일뿐더러 한국기행가사의 효시가 된 <관서별곡>과 임금 앞에서 벌인 경연의 석상에서 으뜸이 되었던 <동지부>에 대한 배경까지를 함께 묶어 알아보는 자리이기에 장을 달리한다. 다만 시적인 한문학 작품의 중심은 위의 일곱 분 문장처럼 절구 한 편을 분석 고찰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기봉 선생님(岐峯 白光弘:1522-1556)! 선생님 소개를, 선생님 자신이 할 수는 없겠지요. 더욱이 선생님과 단 둘이 텍스트의 시문을 두고 작가와 작품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다음 몇 가지를 우선 묻고자 합니다. 먼저 <관서별곡>은 어떤 동기로 쓰게 되셨던가요?]
[작가에게 이런 걸 묻지 않기로 했으면서도. 장 선생 자네도 원.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배경을 아는 중요한 일단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네.
불우헌 정극인(丁克仁:1401-1481)이 단종이 폐위되자 정언(正言)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교육할 때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봄 경치를 완상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노래한 것이었지. 내용은 서사(序詞)․춘흥(春興)․취락(醉樂)․결사(結詞)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찍이 내 이 작품을 읽은 적이 있네. 그 이전에 단가는 많이들 있었지만 가사로는 단연 으뜸이었지. 내 관서지방 평사 벼슬을 제수 받아 가는 여정과 관서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고 국문(한국)과 한문으로 글을 짓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써본 것이네. 상춘곡이 모두 4단으로 쓰여졌다면, 자네가 지적했듯이 관서별곡은 모두 8단으로 분류할 수 있네. 추후에 안 일이지만 이 가사를 두고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라고 하니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좀더 잘 쓸 것을 하는 후회감도 없지 않다네.]
[그렇군요. 그럼 <동지부(冬至賦)는 어떤 동기로 쓰시게 되었습니까?]
[그야 간단하지. 명종 임금께서 영호남 문신들을 택하여 경연을 하게 하셨는데, 그 때 발표된 글제가 <동지>였다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외우고 있는 경서문장들을 총동원하여 얽히고 설키게 하여 쓴 작품이라네. 당시는 으뜸(首魁)의 수위를 잘 몰랐는데, 요즈음 알고 보니 뭐 1등급 작품이라나 아마 그렇게들 평가해주고 있는 것 같으이.]
이런 말씀을 듣고 난 후 마지막으로 선생의 작품을 감상하기로 했다. 다른 팔문장분들과의 형평성에 의해 가비가 세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풍잠(風岑)의 경우처럼 미리 준비한 기봉 선생의 작품 세 편중에서 한 작품을 고르기로 하고 선생의 의중을 물었다.
[선생님, 지금까지 기산 팔문장 중에서 일곱 분의 작품을 다 둘러보았습니다.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위의 여덟 분 작품처럼 선생님의 작품을 감상해야 할 차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관서별곡>은 저의 학위논문에서 장(章)을 달리하여 분석 고찰했고, 명종 임금 앞에서 경연을 벌여 으뜸이 되셨던 <冬至賦>는 제가 다음 해에 한 편의 논문으로 일구어볼 예정입니다. 이런 작품이 쓰여지게 된 동기에 따라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잘 반영하겠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다른 작품을 분석하기 위해 여기 가비(歌碑)는 세워지지 아니하였지만 <岐峰集>에 실려 있는 다른 작품 중에서 무작위로 다음 몇 편을 우선 골라 보았습니다. 오언절구 <宿小蘇來>, 칠언절구 <題滿樹院> 역시 칠언절구 <題崔孤竹扇>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작품을 선택했으면 좋겠는지 가르침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관서별곡과 동지부 가비가 세워져 오가는 이들이 보고 감상하면 될 것을 굳이 가비도 없는 작품을 자네와 단 둘이서 감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점까지를 생각하고 있다니 마음 든든하여 이야기하겠네. 작품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라네. 작자는 작품을 쓰는 것이지 작품의 배경과 감상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사실이 아니던가. 작품 감상과 문학적인 세계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겠지. 그 해석은 독자(혹은 연구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일세. 그 해석을 두고 <이것이 정답이다. 그렇지 않다>를 따질 필요는 없을 터이고.]
기봉 선생의 논리 정연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또 한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의 말씀은 절절이 옳았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작자 선생께 먼저 의향을 묻는 것은 나의 정중함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씀드린 것이다.
[선생님, 그럼 <題崔孤竹扇>으로 하겠습니다. 위의 일곱 분에 대한 개괄적인 인적사항에 대한 말씀은 선생님이 해주셨지만 선생님 자신에 대한 말씀은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우선 나의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선정한 위의 세 작품 중에서 <題崔孤竹扇>을 골라서 그 감상과 시적 세계에 대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드릴 수 있었다.
최고죽의 부채에 붙임(題崔孤竹扇) |
관서의 명승으로 큰 강이 셋이 흐르나니 곳곳마다 꽃 정자가 객의 수레 머물게 하네. 그대 백상루에 가거들랑 누 아래서 물어보게 푸른 창엔 분명히 몽강남(夢江南)이 있을테니. 關西名勝大江三 處處花亭駐客驂 君到百祥樓下問 碧牕應有夢江南 |
[선생님, 설명하고자 하는 이 작품 앞에 {공이 평사가 되었을 때 안주의 기생을 사랑했다. 병으로 교체되어 돌아오다가 길에서 (북으로) 올라가던 고죽과 만났다. 부채에 이 시를 써주었더니 고죽은 부채를 기생에게 주었다. 기생은 그 부채를 받아들고 구슬퍼했는데, 이미 (기봉이 죽었다는) 부고가 이르렀다.=題崔孤竹扇(公爲評事時 眷安州妓 以病遞還 路逢交承孤竹 題此詩於扇 孤竹以贈扇妓 妓慘然而已訃至)}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선생님께서 평사의 소임을 마치고 되돌아오시는 길에 고죽 최경창 선생을 만나 부채에 써주셨던 시문이 지금 말씀 나누고자 하는 텍스트인데 위 내용으로 보아 안주의 기생과 좋은 로맨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아기자기했던 그 때의 일을 듣고자 하는데…]
[에끼, 이 사람아. 이미 450여년 전의 일인걸.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후진과 후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점잖은 양반 체면에 어떻게 말할 수가 있더란 말인가.]
[그렇던가요. 요즈음 보면 작품 속에 여자와의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가 독자나 시청자들의 관심을 더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잠시 농담 삼아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안주의 기녀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사정 이야기를 농담 삼아 슬쩍 해보았지만 기봉 선생의 재치 있는 말씀에 나 또한 풋풋한 사랑 이야기일랑 가볍게 스칠 수 있었다.
[그럼 선생님의 작품 제목인 <題崔孤竹扇>의 <최고죽의 부채에 쓰다>는 작품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다소 선생님의 뜻에 어긋나더라도 크게 꾸중은 말으시길 바랍니다.]
이 말에 기봉 선생은 빙긋하게 웃으시면서 마냥 고개를 끄덕이셨다.
[관서지방엔 명승지가 많습니다. 서도팔경이라고 하는 관서팔경이 그것인데 평안도에 있는 여덟 군데의 명승지입니다. 강계의 인풍루(仁風樓),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선천의 동림폭(東林瀑), 안주의 백상루(百祥樓),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성천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의 세검정(洗劍亭),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팔경은 거의 전부가 관서의 큰 강 셋을 끼고 있습니다. 압록강(鴨綠江)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洞江)이 지요. 선생님께서는 이 큰 강 셋을 휘감고 보는 명승의 곳곳에 꽃이 피어있음을 ‘화정(花亭)’이라고 표현하면서 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인 안주(安州) 북쪽 성안에 있고 굽이쳐 흐르는 청천강과 넓은 들의 조망이 한 눈에 볼 수 있는 풍치(風致) 좋은 백상루 아래에 도착하거든 누구에게나 한번 물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엔 분명 선생님께서 사모했던 안주의 천하일색 몽강남(夢江南)이라는 여인이 있을 것이니 만나서 안부라도 전해 달라는 간곡하게 청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엇 참. 내가 그랬던가. 최고족을 만나 내 즉흥적으로 그 사람이 손에 들었던 부채에 시 한 편을 써주었는데 고죽이 도착하기 전에 내 운을 다했다는 부고가 안주의 그 여인에게 이미 당도했던 모양일세. 이 글을 쓴 것이 내가 세상을 등지기 며칠 전이었으니 16세 청년 고죽도 어지간했던 모양일세. 고죽 그 사람은 내 아우 옥봉과는 아주 절친했던 사람일세.]
기봉 선생은 상기된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하듯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 이 ‘몽강남(夢江南)’이란 표현을 두고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른 견해도 있는 듯합니다. 관서명승지 따뜻한 대동강(혹은 청천강) 이남인 남쪽에서 살고 싶어하는 여인으로 보아 [강남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제가 보기엔 한문문장을 두고 잘못 본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려 합니다. 이 ‘몽강남(夢江南)’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요?]
‘몽강남’이란 어휘를 두고 잔뜩 의문이 생겨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물어보았다.
[이 사람아, 작자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고,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독자나 평론가가 하는 것이라고 내 누차 이야기하지 않던가. 이 몽강남(夢江南)의 표현 또한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알고 나에게 더 이상 많은 기대는 하지 말게나.]
기봉 선생 말씀은 단호했다. 선생의 말씀을 듣는 순간 다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편의 글일망정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분명한 정답을 주는 듯 했다. 어디 이런 감상적인 태도가 문학 작품 뿐이겠는가. 음악을 듣는 것도, 한 편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예술 작품 모두는 독자들의 판단에 의지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1982년에 운명을 달리하신 은사 모후산인(母后山人) 오지호(吳之湖) 선생이나, 2006년에 타계하신 은사 산암(汕巖) 변시연(邊時淵) 선생에게서 이런 의지의 표현을 간접적으로나마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기봉 선생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처럼 기봉 선생을 대하는 자리인지라 선생님께 다소 의지하거나 어린 아이처럼 이렇게나마 응석을 부리고 싶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5. 어문교육을 염려하며 기봉 선생과 헤어짐
[장 선생! 자네가 문학작품을 보는 감상적 태도는 독자의 수준이었지만, 조금만 더 발전하면 훌륭한 비평가적 수준에도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네. 16년전 자네가 학위논문을 쓸 때 막연한 기대감과 실망감들이 교차되었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적지 아니 실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네. 나는 제2의 학위논문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오늘 자네를 만나서 나의 의중을 이야기하고 자네의 해박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이제는 자네를 많이 믿고 싶으이. 열심히 하시게나.]
[예 선생님, 그 동안 어떻게 고향 장흥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위의 기산 팔문장분들께서 고향에 대한 회심(懷心)을 표정(表情)했듯이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자한문을 지도하지 않아 가시밭길이었던 한국어문교육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그 결과 쓴 책만도 50여권이 넘습니다. 그 만큼 현장교육의 다른 분야에서 노력했던 것뿐이었지, 결코 선생님과 역저 ‘기봉집’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기대감과 실망감이 교차했던 선생의 말씀에 그 동안 애써서 노력했던 비운(悲運)의 한국어문교육을 부여잡고 무던히도 애썼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내가 걸었던 외로운 길에 대한 후회는 조금도 없다. 또 다시 언제 기봉 선생을 뵈올 수 있을지 모르는 가슴 벅찬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나의 짧고 단호한 절규는 계속이어졌다.
[선생님! 이제는 제가 어문교육에 관여하지 않아도 후진들 다수가 이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그만 손을 떼어도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2~3년만 더 지금 추진하고 있는 한자한문지도사를 양성하고, 자격을 부여하려는 일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한자급수대사전] 원고가 마무리되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장흥이든지, 광주든지 귀향(歸鄕)하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선생님과 기산 아니 장흥과 한국 학문의 맥을 이어가야 할 것으로 보이는 저! 봉명재(鳳鳴齋)에 대한 생각도 신중하게 하겠습니다. 문제는 제 능력의 한계와 저물어 가는 나이입니다. 그러나 힘써 노력해 보겠습니다.]
[장선생! 자네의 의중을 이제 많이 알게 되었네. 자네가 생각한 대로 하시면서 한자한문에 바탕을 둔 한국어문교육의 발전이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바라네. 다만 어렵겠지만 내년에 추진하기로 계획한 <冬至賦> 분석은 이제 자네 손에 달려있다고 보네. 잘 해보시게.]
<잘 해보시게. 잘 해보시게나>라는 은은한 말씀만을 흔적(痕迹)처럼 남기시고 언제인지 모르게 선생의 모습이 나의 시야를 벗어나고야 말았다. 선생의 아련한 그림자는 이미 퇴직자마을이 들어설 것이라는 사자산 중턱을 쏜살같은 걸음으로 달리시더니만 그만 하늘을 향해 훨훨 오르시고 말았다. 무엇이 그리 바쁘셔서 작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홀연히 떠나셨는지. 한참을 멍하니 사자산 정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선생님! 무자년(2007)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께도 안부 전해주시옵고, 아버님과 정답게 대화 나눌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당시 제 학위 논문을 다 읽으신 후 많이 칭찬해 주셨나이다> 하는 개인적인 소망을 중얼거려 보았다. 선생의 뒷모습마저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아쉬운 나머지 혼자서 작별의 손을 마냥 흔들어드렸다.
[장박사님!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 기산팔문장 가비 제막식과 기산문집 출판기념식이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 우리 마을 큰 잔치를 위해 모든 부락주민들의 정성에 의해 큰 소 한 마리를 잡았으니 마음껏 드시지요. 자 어서 가십시다.]
손목을 끄는 기산 이장의 목소리에 그만 정신을 차려보니 잔칫상은 진수성찬이었다.
기산 마을 추진위원장 어르신께 아직은 습작 수준에 불과하지만 현대시조 세 수를 올려드린 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팔문장 선양과 오늘의 행사가 있기까지 불철주야 노력하셨던 수원인(水原人) 후예(後裔) 백광철씨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두 손 ‘꼬옥’ 잡으면서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그 전부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기산 마을 팔문장 선양
예부터 기산 팔문장이 지역을 울렸는데
이제야 천하에 알리는 大役事 시작됐네
봄기운 완연하구나 장흥의 기산 마을.
사자산 정기 받아 곱게 자란 장흥골 문학
억불산 품에 안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네
북소리 둥둥 울리누나, 너와 나의 가슴에.
걸음마 단계에서 이제 우물을 파는 일이
멀리는 후진이 문학 고장으로 다듬을지니
학동들 글 읽는 소리 먼 곳까지 들리네.
[기산이여! 지금부터 시작이다]고, [장흥이여! 영원하라]고 하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