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청양식 안내 ●
소설제목 : 이별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1~10)
작가명 : 떡갈나무요정
E-mail : kj2091kr@hanmail.net">kj2091kr@hanmail.net
연재장소 : 열매소설 1
총편수 : 총47 편 완결
장르 :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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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1편-
그녀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이는 느낌에 몸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 알람시계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올려진 알람시계 버튼을 누르고 옆 자리에 누운 채령을 쳐다봤다.
“일어났어?”
“어.”
채령은 알람소리에는 이미 익숙한 듯, 시큰둥하게 묻고, 욕실로 가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몸에 걸친 하얀 원피스 잠옷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와 그녀의 매끈한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냈다. 상일은 침대를 벗어나 한 발짝 내 딛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다시 침대로 끌어들였다.
“아침부터 왜 이래? 안 씻을 거야?”
“휴일이잖아. 잠깐만 이리 와봐.”
상일은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을 익숙하게 끌어 내리고 침대에 엎드린 그녀의 등 곡선을 따라 입맞춤을 했다. 그녀의 보드라운 피부에 입을 맞출 때마다 생각했다. 세상에 이 보다 달콤한 크림은 없을 거라고.
등 곡선을 따라 입을 맞추던 상일이 그녀의 허리께까지 내려와 입맞춤을 하고, 엉덩이로 이어지는 꼬리뼈 주위에 머물러 혀로 곡선을 그리듯 부드러운 키스 세례를 퍼부으며 능청스런 한마디를 내 뱉었다.
“의사선생님! 여기가 미골이 맞나요? 흐으~음 난 당신의 미골 1번 뼈가 가장 사랑스러워.”
“치. 지난번에 요추 4번, 5번이 가장 사랑스럽다면서?”
“내가 그랬나?”
“거짓말쟁이.”
“아니야. 당신 등부터 허리, 그리고 여기 꼬리뼈 있는 곳까지 모두 다 사랑스러운 걸 나 보고 어쩌라고?”
상일은 움푹 들어간 그녀의 허리 뼈 있는 곳에 입술을 대고 몇 번이고 다시 입맞춤을 하고는 그녀를 돌려 눕혔다. 아침햇살 만큼, 아니 그 보다 더 뽀얗게 피어난 그녀의 피부가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올을 쓸어 올리고 반짝거리며 쳐다보는 채령의 눈을 마주치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럽게, 달콤하게~ 그녀의 도톰하고 살캉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 때의 그 느낌이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냉정하고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여자지만 상일의 품속에 안겨 있을 때만큼은 그녀 앞에 따라 붙는 이성적, 논리적, 냉정함 이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까만 머리카락을 목 뒤로 쓸어 넘기며 상일은 그녀의 가슴에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전신은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움찔했고, 그를 재촉하기라도 하듯, 그의 넓은 등을 끌어 당겨 그녀 자신에게 밀착 시켰다.
‘안 씻을 거야?’ 라고 했던 그녀도, 그의 황홀한 입맞춤과 애무가 한참 이어지자 어느새 그를 바닥에 눕히고 그의 위로 올라갔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그의 가슴 근육을 향해 부드러운 손을 뻗쳐 매만지고 그의 팔뚝과 급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이 자리 잡은 곳까지 입맞춤을 한 후 다시 두 사람의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꼭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끌어 당겼다.
블랙커피 한 잔과 잘 구워진 토스트 접시를 앞에 두고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는 그녀의 하루는 언제나 똑같았다. 두 사람이 같이 산지 1년 동안, 그녀는 매일 똑같은 아침을 반복했다. 오늘 같은 휴일도 어김없었다. 늦잠을 자도 될 텐데, 하루쯤 신문 읽는 일은 건너뛰어도 될 텐데.
“커피 더 줄까?”
그녀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상일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난 약속 있어서 나갈 건데. 자기는?”
채령은 여전히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약속?”
“총동문회.”
“그래? 난 별 다른 스케줄 없어. 하루만이라도 좀 제대로 쉬어야지.”
“그래. 그럼.”
그녀는 신물을 다 읽은 것인지 그대로 접어 식탁 한편에 놓고 주방을 벗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매일 같은 일상, 매일 같은 모습의 그녀를 봐 오면서도 이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품에 안겨 함께 사랑을 나눌 때면 세상 어떤 여자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그저, 사랑스럽고 여린 한 여자에 불과한데, 침대를 벗어난 그녀는 차갑고 냉정했다.
준비를 다 마친 그녀가 2층 계단을 내려와 1층 거실을 통과해 현관으로 향했다. 까만색 슈트에 은색이 도는 공단 스커트를 걸치고, 비즈가 촘촘히 박힌 검정색 실크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차림은 멋졌다. 그녀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냄새도 훌륭했다.
“너무 신경 쓴 거 아니야? 멋진데!”
“고마워. 가봤자 나오는 이야기 뻔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수는 없잖아. 다녀올게.”
그녀는 철저하게 사생활을 보장받기를 원했다. 두 사람이 같이 산지 1년, 하지만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출, 퇴근 시간만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서울 외곽으로 집을 옮긴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1층엔 거실과 주방 그리고 게스트룸과 욕실이 있지만 말이 게스트룸일 뿐, 이 집엔 상일과 채령 두 사람 외엔 그 누구의 출입도 허가되지 않았다. 2층엔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침실과 상일과 채령이 각각 따로 사용하는 서재가 있을 뿐, 자리를 차지하는 덩치 큰 짐이나,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그 흔한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의 뜻이었다.
채령이 읽다 두고 간 신문을 막 펼쳐 읽으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에요. 유민경!>
갑자기 “선생님” 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전화 속 목소리에 적잖게 당황하며 상대방의 이름을 낮게 몇 번 불러봤다.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상일이 반색을 하며 반겼다.
“유민경....유민경....아! 그래 민경이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네, 선생님! 어떻게 지내세요?>
“나야. 항상 잘 지내지. 시골이야?”
<아뇨. 저 서울 올라왔어요!>
“서울?”
아직은 순박한 시골 아가씨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민경이 상일을 기다리며 커피숍 한편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민경아!”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상일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는 민경.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은 따끈한 코코아 두 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
“할머님은 건강하시고?”
“올 봄에 돌아 가셨어요.·····.”
그 욕 잘 하고, 정 듬뿍 많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 할머니 덕택에 어쩌면 이렇게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경찬은 민경이 눈치 못하게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서울로 올라온 거고?”
“네······.”
“그래, 그럼 지금 어디서 지내니?”
“아는 친구 집에서요. 거기서 먹고 자고, 그 친구랑 같이 일도 해요.”
“일? 무슨 일?”
“엄청 유명한 사람들······. 오는 곳인데, 거기서 이것저것······. ”
“그래?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라도 전화하고. 알았지?”
말을 얼버무리는 민경에게 상일은 웃어 보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시골 처녀가 서울에 와서 무슨 대단한 직장을 갖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뻔히 아는데 거기 대고, 무슨 일을 하느냐고 꼬치꼬치 깨물어서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선생님······. 진즉 연락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야. 이제라도 했으니까 됐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데도 굳이 괜찮다며 버스 승강장으로 뛰 듯이 가버리는 민경의 뒷모습을 보고 상일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선생님” 이라고 부르는 저 어린 아가씨, 천방지축인 것 같던 소녀가 어느새 커서 여인이 되어 버린 시간이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자신의 나이도 무색하게 다가오고. 휴······.
-2편-
“채령이 쟤는 학교 때나 지금이나 재수 없지 않니?”
“그러게~ 뭐가 그렇게 잘났는지 목 디스크 걸리겠더라. 하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녀서 말야.”
와인바 여자 화장실에 들어온 은희와 윤숙은 계속해서 채령을 씹어대는 중이었다. 모임 내내 남자 동문들 틈에 쌓여 관심세례를 듬뿍 받고 있는 채령이 못 마땅해서였다. 사실, 여자가 외과전문의를 선택한 것도 그렇고, 거기다가 손꼽히는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도 그렇고 동문들 사이에선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받았다. 채령의 미모와 의사로서의 실력은 부족할 것 없이 넘치고 넘쳤지만 그것 외엔 그녀의 집안이 내세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은희와 윤숙이 씹어대는 것도 납득이 되긴 했다. 의사 집안에 의사 나온다는데, 채령은 도대체 어디서 불쑥 나타난 씨앗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은채령! 너 결혼은 안 하니?”
“그러는 선배는요?”
“인생은 즐기는 거라는데, 나야 좀 더 즐긴 다음에 하려고 그러지.”
“난 아직 생각이·····.”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좀 즐기는 건 어때? 예전처럼 말이야”
와인바 한 켠에 마련된 스테이지에서 학교 때부터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정현과 브루스를 추느라 엉켜 있는데 소문난 바람둥이답게 은근슬쩍 한손이 채령의 엉덩이쪽을 더듬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브래지어 끈 있는 곳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정현의 표정만은 신사다웠다. 아니, 고수답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예전처럼 이라는 정현의 말에 채령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고 정현의 말을 받아쳤다.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가요? 선배! 난 기억에 없는데.”
“이거 왜 이러실까? 섭섭하게.”
“곧 약혼한다는 소문 있던데 사생활 정리는 깨끗이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흠....소문 한 번 빠르군.”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손은 채령의 여기저기를 더듬고 있었다.
그렇다고 움칫 할 채령이 아니었다.
“선배랑 즐기는 거 무서워서 안 되겠는걸요. 저기서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 쳐다보는 여자 선배들 시선이 장난이 아니네요.”
그제야 정현이 더듬던 손을 어깨 쪽으로 올리고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정말 채령의 말대로 꽤 많은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잡아먹을 듯한 여자 눈만 있는 게 아니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애송이도 한 녀석 있는 걸?”
애송이? 그러고 보니, 오늘 모임에 나와서 내내 채령 주위에 앉아 말없이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감시하는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저 애송이. 너네 병원 레지던트 맞지?”
“맞아요.”
“저 애송이가 너 좋아하나 본데? 하긴 은채령 안 좋아 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 문제는 은채령의 마음이 어디 가 있느냐겠지.”
음악이 바뀌고 채령은 서둘러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능글맞은 정현선배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받으며 그 몹쓸 손버릇까지 당하고 있느라 죽을 맛이었다. 마음 같아선 정강이라도 한대 걷어 차 주고 싶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즐겨주고, 적당히 받아주면 될 일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정현은 채령의 잔에 와인 한잔을 가득 부었다.
“목 마르지 않아?”
“고마워요. 선배.”
채령은 사양하지 않았다. 술이라도 왕창 취해 그 다음 수순을 밟듯 어느 호텔방이라도 들어가 같이 뒹굴기라도 바라는 저 은근한 속내를 모를리 없지만 보란 듯이 한 컵 가득 든 와인을 단번에 마셨다. 채령이 한 잔 쭈욱 들이킨 것을 보는 정현의 눈빛은 묘한 기대감으로 빛이났다. ‘미친놈!’ 그런 정현을 보며 채령은 속으로 욕을 내 뱉었다.
다시 정현이 채령의 잔에 와인을 한 가득 부었다. 작정하고 덤비는 놈처럼 그의 눈은 총기를 띠며 빛나고 있었다. 채령이 다시 그 잔을 들어 마시려는 순간 정현이 애송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달려들어 잔을 빼앗았다.
“선생님! 이러다 취하세요.”
그 애송이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채령을 만류했지만 채령은 그 애송이가 가소로웠다.
“안 선생! 그 잔 제자리에 놓지 못해?”
“선생님!”
“제자리에 놓으라고 했어!”
“선생님·······. 내일 아침 일찍부터 수술인데 취하시면······.”
애송이는 채령의 단호한 말투에 뺏어들었던 잔을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걱정하는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는 애송이를 향해 채령이 다시 한번 쐬기를 박았다.
“까분다! 누가 안 선생보고 그런 걱정 하라고 했나?”
“·······.”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애송이와 그 옆에 당당하게 앉아서 술잔을 받아 든 채령을 향해 화장실에 잘근잘근 채령을 씹어대던 윤숙이 기어이 한마디 내 뱉고 말았다.
“여긴 완전히 은채령 독무대네? 너 인기 많아서 좋겠다? 정현 선배에 직속 레지던트 후배까지. 아주 은채령 판이네 판이야!”
윤숙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변에서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던 사람들까지도 채령 주변으로 시선을 모았다. 어색해 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정현이 나서 보지만 그럴수록 채령의 입장만 난처해 질 뿐이었다.
“윤숙이 네 덕분에 오늘은 그만 집에 돌아가야겠다.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어. 아참~! 그런데 나 가고 나면 장현 선배나, 안 선생이 너 한테 눈길이라도 준다던?”
채령의 한 마디에 윤숙은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했는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보란 듯이 채령은 가방을 챙겨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와인바를 빠져 나왔다. 막 복도를 빠져나와 현관을 나가려는 찰라 정현이 뒤 쫒아와 채령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냥 가려고?”
“그냥 안 가면요?”
“우리 어디 가서 단 둘이 한 잔 어때?”
“오늘은 그럴 기분 아니에요. 나중에 봐요. 선배!”
“딱딱하게 왜 그래?”
집으로 가겠다는 채령의 손목을 더 세게 붙들고 정현이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 당겼다.
정말 질긴 놈이네. 끈적끈적한 시선 한번 받아주고 춤 한번 춰 줬더니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끝까지 빨아보시겠다고?
붙잡고 늘어지는 정현의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니게 조여 오자 채령은 신고 있는 힐의 뾰족한 앞굼치로 정현의 정강이라도 한 대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에겐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채령이 걷어차기도 전에 정현의 얼굴로 주먹이 한 대 날아 든 것은.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바닥에 주저앉은 정현과, 그런 정현을 씩씩거리며 쏘아보고 있는 녀석은 다름 아닌 그 애송이 안 선생 이었다.
“너 이 자식 죽고 싶어 환장했어?”
언제 일어났는지 정현이 애송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먼저 우리 선생님 손목을 억지로 잡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이 새끼야.”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채령이 나서기 시작했다.
“선배! 그 손 놔 줘요.”
“너 지금, 네 직속 레지던트라고 편드는 거냐?”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놔 줘요.”
일단 채령의 말을 듣고 정현은 꽉 붙들고 흔들었던 멱살을 풀어주었다.
“안 선생! 선배님께 사과 드려.”
“선생님!”
“내말 안 들려? 선배님께 사과드리라고!”
“못 합니다. 선배님이 먼저 선생님께 무례하게 굴었잖아요.”
“안희준! 사과 못 해!”
채령이 결국 희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서야 희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모기만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정현은 코를 씩씩거리며 희준을 노려봤다.
“야. 애송이!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닥터 은 아니었으면 넌 오늘 죽었어. 이 새끼야. 어디서 하늘같은 선배한테 주먹질이야? 이 바닥에서 매장 당하고 싶어서 환장했어?”
“미안해요 선배! 화 풀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채령은 분을 삯이지 못하는 정현에게 거듭 사과를 하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꼴이 우습게 된 것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자코 그 곳을 벗어나 무작정 걸었다.
한참 만에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희준을 불러 세웠다.
“안 선생! 이리 와봐!”
“네, 선생님!”
기다렸다는 듯 희준이 재빨리 채령 앞으로 와 섰다.
“안 선생, 네가 오늘 날 얼마나 우습게 만들었는지 알아?”
“·······.”
“내가 언제 안 선생 보고 내 일에 참견하라고 했나?”
“그게 아니고 선생님께서······.”
희준이 뭐라고 변명을 하기도 전에 채령은 희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건 하늘같은 선배에게 주먹 함부로 날린 벌이야!”
그리고 채령은 희준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며 정강이를 부여잡고 동동거리던 희준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섰을 때 채령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오늘 내 꼴을 우습게 만든 것에 대한 벌이야.”
채령은 희준의 손에 차 키를 쥐어주었다.
“난 택시타고 들어 갈 거니까 내 차 가지고 들어가. 내일 아침 일찍 수술 있는 거 알고 있지? 늦지 않게 와. 알았어?”
“그런데 선생님! 왜 꼭 저 선배님께만 쩔쩔 매시는 겁니까? 제가 잘 못 본겁니까?”
“·······.”
“선생님답지 않으셔서요.”
“하늘같은 선배에게 주먹질 하는 것 보단 낫지. 내일 늦지 않게 와라.”
“······.네 선생님!”
채령은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 그대로 애송이인 안 선생이 언젠가부터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서 맴돌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애송이의 감정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든 말든, 무슨 감정을 갖든 말든, 채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 다른 사람의 감정에는 관심 없었다. 그러니 제발 저 애송이도 내 일에 관심 꺼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2층 욕실로 들어가 홀라당 옷을 벗어버리고 그 느끼하고 찜찜한 기분들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구석구석 거품 타월로 닦아 냈다. 그리고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몸에 목욕가운만 걸친 채 침실로 들어갔다.
상당히 늦은 시간, 상일이 깨어있을 리 없었다. 조심스레 이불을 들추고, 침대로 들어가기 직전 목욕가운을 바닥에 벗어 버리고 알몸만 집어넣었다. 차가운 채령의 몸뚱이가 닿자 상일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채령을 확인하고는 차갑지만 보드라운 그녀의 몸을 바짝 끌어 당겨 자신의 팔에 감싸 앉았다.
“술 마셨어?”
그녀에게 엷은 알콜 냄새가 풍기자 상일이 조용히 물었다.
“조금.”
“향기 좋군. 내일 일요일인데 뭐 할 거야?”
“아침 일찍 수술이야.”
“그래······. 그럼 편히 쉬어.”
상일은 바짝 끌어당겼던 채령의 몸을 느슨하게 풀고 자세를 고쳐 누웠다. 어느새 잠이 들어 버린 것인지 간헐적인 채령의 숨소리가 엷은 술 냄새를 풍기며 잦아들고 있었다.
-3편-
울고불고 매달리는 보호자들 사이에 몇 명의 의사들이 서있고 그 틈에 유독 싸늘한 표정을 한 채령이 있었다. 이런 소란스러운 광경이 하루 이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대기실이며, 로비에 있는 사람들까지 이 소란스러움이 몹시 궁금한 듯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선생님! 제발 살려 주세요.”
“진정하세요. 어르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우리 애들 애비, 이제 겨우 서른여섯인데,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랍니까? 네 선생님!”
“예, 예, 그러니까 잠시만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매달리는 보호자들을 향해 희준은 안타까운 목소리를 담아 진정을 시키고자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으로 희준과 환자 보호자들의 모습을 보던 채령은 무뚝뚝하고 건조한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정 원하시면 수술을 해 드릴 수는 있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채령의 한 마디에 조금 전까지 울고불고 매달리던 사람들 중 젊은 남자 하나가 금방이라도 채령을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멱살을 잡고 달려들었다.
“네가 의사야? 너 같은 것도 의사야?”
“어거 놓으세요!”
그 사람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채령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싸늘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사람이 죽어 간다는데, 의사라는 작자가 고작 하는 말이 집으로 가라고?”
“정 원하시며 수술을 해 드릴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수술을 해서 살려내야 할 거 아니야?”
“수술을 해서 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면 처음부터 수술 하라고 했을 겁니다. 가능성이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한 거 아닙니까?”
“의사가 뭐 이 따위야? 그러고도 네가 의사야? 사람 살리라고 있는 직업이 의사 아니야?”
“의사가 신 입니까? 저 환자 저렇게까지 되도록 가족들은 뭐 했습니까? 그 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데려와 의사에게 살려내라고 억지를 쓰는 겁니까? 그런다고 죽을 사람이 삽니까? 살리고 싶었으면 진즉 데려왔어야죠!”
채령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 젊은 남자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때서야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는지 그 자리에 고꾸라지듯 엎드려 통곡을 했다. 어찌나 서럽게 병원 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울어대는지, 희준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채령을 따라 복도를 빠져 나가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복도를 빠져 나오는 채령을 한참 만에 뒤 쫓아 온 희준을 채령이 단호한 어조로 불러 세웠다.
“안 선생! 마무리 하고 내 방으로 와.”
“네, 선생님!”
아직도 귀 속에서 환자의 어머니로 보이던 할머니의 울부짖음과 그 젊은 남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쟁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채령은 자신의 방 의자에 목을 뒤로 한껏 저친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뻐근한 뒷목에 손을 얹어 주물러 본다.
-똑, 똑
“들어와!”
어딜 보나, 누가 보나, 훤칠하고 멋진 의사 선생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희준도 채령 앞에선 꼼짝 못하는 레지던트였다.
“앉아!”
채령의 말 한마디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전공의 안희준! 채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파로 와서 앉아 그 다음을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잘못한 게 있어 불호령을 기다리는 건지, 아무 말 없었다.
“안 선생! 너는 의사가 뭐라고 생각하니?”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살리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 이라고·······.생각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사람을 살린다? 그래, 맞는 말이지. 하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의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환자들이 울고불고 매달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진 않아. 의사는 냉정해 져야 해. 그런데 넌 뭐니? 네가 왜 감상적이 돼는 건데? 의사는 절대 감상적이어선 안 돼.”
“선생님! 의사는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직업입니다. 몸을 고치기 이전에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서 넌 밖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상적으로 다가서서 그 사람들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니?”
“·······.”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죽음, 아니면 삶이이라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어. 그리고 그 사람들에겐 헛된 희망을 주는 것보다 정확한 현실을 알려주는 게 의사의 도리야. 알겠어?”
“·······.”
“나가봐.”
“야, 너 또 깨진 거야? 저 얼음마녀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환자들한테 암입니다. 3개월 밖에 못 삽니다. 준비 하십시오. 라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도 하는지, 그럴 때 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무섭다니까.”
밖에서 기다리던 동료 레지던트가 희준을 위로한답시고 채령의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희준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바람이나 쏘이자며 밖으로 병원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앞에 귤을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희준은 잠깐 귤이 쌓인 리어카를 뚫어져라 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뛰어가 귤 한 봉지를 샀다.
-똑, 똑
“들어 와.”
희준이 검은 봉지 하나를 채령의 책상 앞에 놓았다.
“뭐야?”
“귤이에요. 요 앞 노점에서 파는데, 선생님 귤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언제 귤 좋아한다고 말 한적 있었니?”
“아뇨. 그건 아니고.”
“좋아. 어쨌든 고맙다. 그만 가봐.”
“······.”
“왜? 할말 있어?”
“아, 아뇨.”
희준이 방을 나가고 나자 뻐근한 목의 통증과 더불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까만 봉지에 들어 있는 귤 하나를 가져와 냄새를 맡아본다. 이제 막 시작되려는 겨울처럼 코끝을 찌릿하게 파고드는 차갑고 상큼한 향이 났다. 귤 하나를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집어 넣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병원옥상에 마련된 작은 정원의 나무들은 어느새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앙상한 마른 나뭇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로소 이 곳에 올라와야지만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 할 수 있었다. 찬 기운이 감도는 벤치에 앉아 크게 한숨을 내쉬는데 구석 벤치에 조금 전 채령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던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채령은 방해꾼이라도 만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그 곳을 빠져 나오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 선생님······.”
자신을 부르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채령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
“선생님 말씀이 다 맞아요. 우리 형, 저렇게 된 거 누구 잘못도 아닌, 다 제 잘못이거든요. 저만 아니었다면······. 아깐 정말 죄송했습니다.”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던 남자는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고백하듯 말하고 있었다. 채령은 묵묵히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걸음을 옮겨 그 남자가 앉은 벤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있는 귤을 내 밀었다.
“귤 좋아해요?”
“?”
“사람 살고, 죽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문제는 그 다음이죠.”
“?”
“남은 시간, 잘 돌봐 주세요. 가장 행복한 시간에 눈감을 수 있도록요.”
“······.”
아무 말도 못한 채 채령이 건네 준 귤만 받아들고 앉아 있는 남자는 찬바람이 쌩쌩 불던 아까 그 의사가 정녕 맞느냐는 눈빛이었다. 채령은 그 남자에게 돌아서 옥상을 내려왔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변해 있었다.
채령이 옥상을 빠져나가고 나자, 반대편 벤치에 앉아 있던 희준이 모습을 드려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얼음마녀라고 부르는 그녀에게서 가끔 봄바람과 같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그런데 왜 자꾸 그녀는 더 차가워지고, 더 냉정해지려 하는지······.
-4편-
오늘도 상일은 사무실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샤이닝 호텔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간간히 차량이 나가고 들어오는 정문으로 잠시 후,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멈춰 서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색상의 양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내려,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상일은 곧바로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사장님!”
방을 나서는데, 들어오는 지석과 마주쳤다.
“호텔에······.”
“다 봤어. 모니터 하러 나가는 중이었다. 가자!”
상일은 지석과 함께 복도 옆으로 늘어선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수 십대의 모니터가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호텔 입구부터 시작해,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잡아내고 있는 화면에서 조금 전, 그 건장한 사내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또 온 모양입니다.”
“·······.”
화면속의 사내들은 이윽고, 두 무리로 나누어 걸어갔다. 한 무리가 도착한 곳은 호텔 헬스클럽, 그리고 나머지 사내들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상일은 아무 말 없이 모니터만 쳐다 보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도 그냥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래도 번번이 이런 식으로 넘어가다보면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상일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지만 지석은 이렇게 대처하고 있는 상일이 답답한지, 모니터를 쳐다보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고 그래?”
“사장님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옵니까?”
“그럼 땅이라도 치고 울까? 가서 서비스나 잘 해드리라고 해! 괜한 소란 만들지 말고.”
“········.”
“내 말 못 알아들었어?”
“휴·······. 알겠습니다. 사장님!”
방으로 돌아 온 상일은 얼굴에서 완전히 웃음을 거두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어찌나 꽉 쥐고 있는지, 주먹이라도 내리치면 곧 큰일이라도 낼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일은 주먹에서 힘을 빼고 평정을 되찾았다.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사인을 하던 그의 손이 어색한 듯 펜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망설임 끝에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머니, 접니다.”
-웬일이냐.
“그냥 걸었습니다.”
-······.
“어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그런 쓸데없는 거 물어 보려고 전화했냐? 할 말 없으면 이만 끊자.
“어머니······.”
이미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 버린 상태였다. 전화 할 때마다 번번이 이런 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듣고 나면 한동안은 답답한 속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끊긴 전화기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들고 있던 상일은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다. 강상일 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흠······. 강 사장 뜻에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일주일후에 만납시다. 나도 좀 준비할 게 있고 하니.
“그러시죠. 네, 알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쉽게 처리될 수 있는 것들도 그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다 보면 시간에 비례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야 만 했으니까.
“칼이 왜 이렇게 안 들어? 대체, 음식을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그 건장한 사내들이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험상궃게 생긴 녀석들이 나타나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나이프가 잘 안 든다는 이유로 소리를 높이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손님! 나이프가 잘 안 드시면 바꿔 드리겠습니다.”
지배인이 다가가 허리를 최대한 굽혀 예의를 갖춰 말했지만 이 사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을 보란 듯이 바닥으로 떨어뜨려 곳곳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지배인은 계속 해서 몸을 굽혀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지만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 사내들은 도통 말을 들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스토랑 한 편에 서서 이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지석이 그 남자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다른 손님들께서 불편해 하시지 않습니까?”
“넌 또 뭐야?”
지석의 출연에 사내들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석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지석과 그 건장한 사내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지석은 금방이라도 앞에 선 이 녀석을 흠씬 두들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곧, 상일의 당부를 떠 올리며 치켜떴던 시선을 거두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음식을 다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리고 나이프도 바꿔 드리겠습니다.”
지석은 세팅 테이블에서 나이프를 꺼내 그 사내 앞에 정중히 놓았다.
“너 이 자식, 뭐 하는 놈이야?”
“보시다시피 호텔 종업원입니다. 그럼, 맛있는 식사 하고 가십시오.”
지석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그 사내들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사내 중 하나가 지석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너 이 새끼! 누군데 여와서 깝죽거려? 엉? 죽고싶어?”
“이거 놓으시죠. 손님!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 주십시오. 다른 손님들께서 불편해 하시지 않습니까?”
“너 이 새끼! 죽을라고 환장 했냐고!”
지석은 붙잡고 있는 사내의 팔을 힘껏 잡아 무력으로 제압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직히, 그 사내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호텔 밖에서 만나면 내 손에 죽습니다! 잔소리 하지 말고 빨리 쳐 먹고 꺼져 주십시오. 손님!”
“?”
갑자기 한방 먹은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 마디도 못하고 서 있는 그 사내를 향해 지석은 조금 전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냥 지나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이지 이 짓도 못 해 먹을 일이라며 궁시렁 거리며 이번엔 헬스클럽으로 이동했다. 역시, 이곳도 난장판 이긴 마찬가지였다. 건장한 사내들은 사람 몸이 무슨 도화지도 아니고 별 이상한 문신들로 망측하게 만들어 놓은 몸을 보란 듯이 드러내 놓고 운동하는 손님들 사이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여자 손님들은 서둘러 헬스클럽을 빠져 나가기 바빴고, 운동 꽤나 했다는 남자 손님들도 한 덩어리로 등장해서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석은 한 숨을 푹 내쉬고는 그 사내들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손님! 트레이닝복이 준비되어 있는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거 안 입어!”
남자는 험악한 인상을 더 구기며 지석의 말을 콧등으로도 안 들었다.
“손님! 면 티를 입고 운동을 하시면 땀 흡수율도 높아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운동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냐? 그럼 너나 많이 입어!”
“저야, 항상 착용하고 다니죠.”
지석은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을 머금고 시종일관 그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향해 넉살좋게 굴었다. 하지만 그 사내들은 지석의 웃는 모습이 기분이 나쁜지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부라렸다.
“넌 뭔데 여기 와서 깝죽 거리냐? 방해되니까 비켜라. 형님들 운동 좀 해야 겠으니까.”
“손님! 실례지만 맴버쉽 카드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그런 거 안 키운다!”
“저희 호텔 헬스클럽은 맴버십으로 운영됩니다. 즉, 다시 말해 맴버쉽 카드가 없으면 출입하실 수 없는 곳이라는 얘깁니다.”
“이 새끼가 아까부터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내가 그런 거 안 키운다고 했지? 말을 콧구멍으로 알아들은 거냐 이 새끼야?”
사내는 지석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단번에 이 사내를 제압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다시 한번 지석이 마음을 다 잡았다.
“알겠습니다. 손님. 일단 이거 놓으시죠. 이게 보기보다 꽤 비싼 양복이거든요.”
“하~ 이 새끼 말 하는 거 보게!”
기가 막히다는 듯 그 사내는 지석의 잡았던 멱살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지석은 옷을 바르게 털고는 그 사내를 향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맴버쉽 신청은 호텔 1층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자세한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참! 그리고 가족 한정이라서 함께 오신 분들께서는 각각 따로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너, 지금 우리랑 장난 하자는 거야? 우리가 와서 운동 좀 하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
“손님과 장난을 하다니요? 그리고 한글만 읽으실 줄 알면 누구나 작성 할 수 있습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지요.”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석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남자의 주먹을 자연스럽게 피해 버리는 지석에게 약이 올랐는지, 한꺼번에 그 덩치들이 달려 들려들었다.
“잠깐만요. 손님!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폭력 사용이라니요~ 말도 안 되죠. 그러지 마시고 1:1로 한 판 어떻습니까?”
“아쭈~ 이 자식 보게. 어디 한번 붙어 보겠다 이거야?”
남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물었다.
“손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폭력 없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싸움질을 할 수야 없죠. 런닝 한 판 어떻습니까?”
“?”
헬스클럽 문을 나서는 지석의 등판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장장 30분을 뛰었다. 그나마 그 살덩어리 녀석이 출렁거리는 살을 못 이겨 나가떨어져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지석이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이런 젠장할~ 내가 이제 하다하다 별 짓을 다하는 군.”
모니터로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상일에게 지석이 오자마자 볼멘 소리를 늘어 놓았다.
“사장님! 정말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못 하면? 내가 하리?”
“아, 사장님! 정말~”
“알았어. 앞으로는 내가 하지 뭐.”
힘들어 죽겠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지석을 두고 상일은 빙긋 웃어 넘기고 만다. 속을 알 수 없었다.
-5편-
채령은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나섰다. 지난번 그렇게 헤어진 후로 선배 정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눈치보고 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바닥에서 나름대로 지켜야 하는 룰이 있었다. 하늘같은 선배를 깍듯이 모셔야 하는 일종의 법칙! 아니, 정현과 채령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
잘 나가는 개인병원 원장자리를 꿰차고 있는 정현은 일요일을 온전하게 쉴 수 있는 팔자 좋은 성형외과 의사였다. 금싸라기 땅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그의 병원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유명세를 타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오만과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겠지.
“선배! 일찍 오셨어요?”
“아니야. 방금. 오늘도 수술 있었다고?”
“네, 저야 휴일이 따로 있나요? 24시간 근무 안 하게 된 것만도 감사한 거죠.”
“지난번에, 그렇게 그냥 가 버린 게 섭섭해서 말이야.”
“어제 일은 죄송해요. 선배님. 따끔하게 혼냈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아니야. 닥터 은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한 잔 할 거야?”
이미 술을 한 잔 마신 그는 자신의 잔을 들어 보이며 채령에게 술을 권했다.
“아니요. 선배! 오늘은 차 가지고 들어가야 해서요.”
“그래? 그럼 할 수 없구.”
정현은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더 마셨다. 그리고는 지난번처럼 묘한 눈빛으로 채령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나?”
“무슨 이야기요?”
“왜 모르는 척 하고 그래? 여기선 좀 그렇고. 나갈까?”
“······.”
“왜? 싫어?”
정현과 호텔 바를 나와 룸으로 올라가기 위해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정현은 계속해서 그 다음 수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채령은 심하게 경직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상일이 막 호텔 커피숍에서 고객과 헤어지고 로비로 내려왔을 때, 채령과 그 옆에 어떤 남자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동료 의사와의 만남이라고 보기엔 그 남자의 눈빛과 채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룸에 들어오자마자 채령이 정현을 다그쳤다.
“할 말 하세요. 선배!”
“뭐가 그렇게 급해?”
“할말 있다면서요.”
“천천히 하자고. 일단 간단하게 와인 어때?”
“차 가지고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와인 한 잔 가지고 뭘 그래. 아니면 대리 기사 불러도 되잖아.”
싫다는 채령앞에 기어이 와인 한잔을 따라 내 놓고 그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채령의 몸을 위 아래로 쓸어보는 정현에게 이대로 앞에 놓인 와인을 확 부어 버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정현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채령이 앉아 있는 의자 뒤로 가, 뒤에서 채령을 끌어 앉았다. 그의 손이 곧바로 채령의 가슴에 와 닿았다. 채령이 움찔하며 거부하려고 하자 그는 더 힘껏 그녀를 껴 앉고 그녀의 귀에 뜨거운 목소리를 담아 속삭였다.
“우리 좋았잖아? 안 그래? 난 네가 그립던데, 너도 그렇지 않아?”
“선배! 이러지 말아요.”
“괜찮아. 가만 있어봐.”
정현은 채령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쪽에 올려놓은 손을 더 깊숙이 집어 넣고 입술로는 채령의 뒷목덜미와 귀 주변에 키스를 퍼부었다.
“선배! 이러지 말라고요!”
급기야 채령이 소리를 꽥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야겠어요.”
채령은 가방을 집고 그 곳을 빠져 나가려고 몇 걸음 옮겼다. 그때,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정현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얼음처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닥터 은! 벌써 잊었나 본데, 난 아직 그때 일이 생생한데, 어쩌지?”
“······.”
채령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쁜 새끼~! 비열한 새끼! 그 일 때문에 너 같은 쓰레기한테 붙잡혀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도 그걸 미끼로 날 괴롭혀? 더러운 새끼. 인간도 아닌 나쁜 새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대단한 거라도 되나? 그리고 그게 어디 나만 좋자고 그러는 건가? 너도 솔직히 좋잖아. 안 그래?”
뺨이라도 한 대 쳐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자신이 한 없이 싫어진다. 채령은 눈에 독기를 품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정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토할 것처럼 속이 답답해 왔다. 하지만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채령은 순순히 정현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갔다. 채령의 몸에서 하나씩 하나씩 옷이 벗겨 질 때마다 정현은 무슨 대단한 작품이라도 발견 할 것처럼 묘한 신음 소리를 냈다. 부끄러울 것도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이 그 앞에 알몸이 드러났을 때, 채령은 시트를 끌어 올려 몸을 덮으려고 했다.
“왜 그래? 난 감추는 거 싫어하잖아. 벌써 잊어 버렸어?”
그는 모멸감이 들 정도로 기름진 목소리로 시트를 끌어 올리려던 채령의 손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양손을 붙든 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대로 드러난 채령의 몸 여기저기를 마치 자기 몸인 것처럼 핥으며 그 묘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만 하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기어이 그녀의 몸속 깊은 곳까지 점령한 그를 채령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정말 우습게도 그가 더 깊이 들어올수록 채령의 입 밖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 나왔다.
셔츠의 단추를 채우던 그가 비열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거봐. 너도 좋아하잖아. 앞으론 종종 만나자. 그 동안 너무 공백이 컸던 것 같아.”
“이젠 제발 나 좀 놔 줘요.”
“또 그 소리야?
“이젠 그만 할 때도 됐잖아요.”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걸로 아는데.”
“······.”
“전화할게.”
그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치룬 것처럼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대로 호텔방을 빠져나갔다. 채령은 한참을 더 룸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더러운 기분이 씻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로비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상일의 눈에 채령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그 남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게······.
그 남자의 걸음을 쫓아 상일의 시선이 머문 곳은 호텔 정문에 매끈하게 주차된 군청 색 BMW 였다. 그 남자는 벨맨이 건넨 차키를 받아들고 유유히 호텔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채령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의 모습이 경직된 것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지만 그 속에는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상일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밖에서 그녀를 따로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시선을 바닥에 주고 빠른 걸음걸이로 호텔을 빠져 나갔다. 이윽고, 역시, 벨맨이 쥐어 준 차키를 받아들고 그녀의 하얀색 승용차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방금 나가신 분, 형수님 아니십니까? 사장님!”
언제 온 건지, 지석이 상일 옆으로 와 앉으며 물었다.
“그런 것도 같고.”
“딱 보니까 형수님 맞던데요. 워낙에 미모가 출중하셔서 100m전방에서 봐도 한 눈에 쏙 들어오시지 않습니까. 사장님 만나러 오신 건 아닐테고,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너, 말 많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일 끝났으면 그만 가자!”
“네. 사장님!”
말끝마다 사장님, 사장님 부르긴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지낸 사이라서 그런지 지석은 상일이 꼬치꼬치 캐묻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상일의 일들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전까지 지석과 몇 명의 직원들(?)이 상일이 주차장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상일은 막 주차라인에서 차를 빼서 출발 하려다 멈춰서 창을 내리고 지석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사장님!”
“너, 요즘 너무 바짝 붙어서 따라 오는 것 같다. 웬만하면 좀 떨어져.”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천천히 따라 가겠습니다.”
무슨 일을 시켜도, 무슨 말을 해도 넉살좋게 받아들이는 지석 때문에 상일은 또 한 번 웃어넘기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집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어두컴컴한 거실이 스산했다. 상일은 호텔에서 봤던 그녀 얼굴이 꺼림칙하게 가슴 한 구석에 남아 불편했다.
-6편-
채령은 늦은 밤이 되서야 집에 돌아왔다. 거실을 환하게 밝히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상일이 현관에 막 들어서는 채령과 눈이 마주쳤다.
“늦었네?”
“응.”
“수술이 많았나봐?”
“어? 으·······.응. 그래.”
태연한척 애쓰며 대답하는 채령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상일은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일의 이상한 모습을 보고도, 때론, 낌새를 느끼고도 단 한번도 왜냐고 물은 적인 없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상일도 무슨 일 있냐고 묻지 않는 게 옳은 것 같아서 상일은 그대로 채령이 2층으로 올라가도록 두었다.
채령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좀 뜨겁다 싶을 정도로 물을 받고 그 속에 들어갔다. 얼굴만 빼꼼히 내 놓고 눈을 감았다. 이런다고, 이 더러운 기분이 씻겨질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녀가 선택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 속에 담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뽀얗게 욕조를 가든 채운 그녀의 몸에는 군데군데 정현이 남겨놓은 빨간 입술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나쁜 새끼!” 나직이 읊조려 본다.
텔레비전을 끄고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에 한발 내 딛었을 때, 상일의 핸드폰이 울렸다. 폴더에 찍힌 번호를 보는 상일은 익숙한 번호인 듯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사장님! 지금 좀 나오셔야 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김상섭 이 죽었습니다.
“뭐?”
-오늘 오후에 집에서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답니다.
“알았어. 지금 갈께.”
전화를 걸어 온 목소리도 다급했지만 상일의 표정은 다급함과 불편함이 동시에 자리했다. 이대로 바로 집을 뛰쳐나가야 했지만 상일은 익숙하게 2층 욕실의 문을 먼저 노크한 후 욕실로 들어갔다.
“할말 있어?”
피곤이 무겁게 짓누르는 목소리로 채령이 물었다.
“나 좀 나갔다 올께.”
“그래. 알았어.”
상일은 채령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몸 여기저기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얼핏 보았다. 잠시 낮에 봤던 그 남자를 떠 올려 보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끔씩 저녁 시간에 외출을 하는 상일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왜 가느냐고 한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때론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녀는 묻지 않았다.
상일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지석이 다가와 전화에서 들었던 목소리보다 더 난처하고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식 쪽에서 전화 왔었습니다.”
“······.”
“김상섭이 지분이 이대식에게 넘어간 모양입니다.”
“·······.”
상일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깊은 숨을 내쉬고 잠시 아무 말 없이 책상에 놓인 서류만 노려보고 있었다. 상일의 지시를 기다리는 지석은 초조한 눈빛으로 상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상일은 오히려 조금 전 보다 평정을 되찾은 듯 차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네?”
“네가 이대식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지분을 가지고 원하는 걸 협상하겠지요.”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답은 나왔다.”
“하지만 그건······.”
“준비해! 가자!”
조선시대 유명한 어떤 양반집을 현대판 요정으로 꾸며 사용하고 있는 고즈넉한 공간에 들어섰다. 상일이 앞장서고 그 뒤로 지석과 몇 명의 남자들이 상일의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이대식이 머물러 있는 방 앞에 거의 다다라서는 지석과 상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들어 올 수 없도록 제지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만 다시 쭉 늘어선 문들을 통과해야 하는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자식, 폼은 더럽게 많이 잡고 있군.”
상일이 문들 마다 감시하듯 늘어선 건장한 사내들을 지나치며 내 뱉은 말이었다. 주눅이 들만큼 건장한 자내들이 쫙 깔렸지만 지석이나 상일, 두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대식이 있는 방까지 걸어갔다. 방 문 앞에 도착해서는 상일만 안으로 들어가고 지석은 역시 그 건장한 자내들에 의해 밖에서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오랜만이네. 그 동안 잘 있었는가?”
상일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는 대뜸 상일에게 하대를 했다. 그 남자를 향해 상일은 45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네 덕분에 요즘 골머리를 앓느라 안녕 할 틈이 없었는데 오늘 자네가 내 짐 좀 덜어 주려고 왔으니 기대 함세. 자~ 이리 와 앉게.”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상에는 한 마디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이대식은 무식할 정도로 음식들을 먹어댔다. 상일은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갖은 애를 써야 했다. 물론 이 상황이 웃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식의 식성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깡패들은 그럴듯한 일식집에서 화려한 회 접시 여러 개를 앞에 두고도 술이나 한 잔씩 먹는 것 외에는 저렇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대식은 깡패답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건 가지고 왔나?”
“물론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상일의 입에서 조건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대식은 먹는 걸 멈추고 심기가 불편한 듯 건조한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 호텔에 사장님 식구들 드나들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뭐?”
“손님들께서 불편해 하셔서요.”
“하~ 지들 발로 지들이 간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막아? 다리라도 분질러야 되나?”
“그렇게라도 하십시오!”
“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상일 건방져 보였는지 이대식은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더 높이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상위에 세차게 내려놓았다.
“너 많이 컸다? 호텔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맞는 모양일세.”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상일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처음 듣는 말인 것처럼 대꾸했다. 그리곤 이대식보다 한 수 위의 자세로 받아쳤다.
“고객의 일을 제 일처럼 하다보니, 간혹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설마 그 큰 호텔의 주인이 하찮은 깡패 일리가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흠.”
이대식은 기분 나쁜 웃음을 머금고 술잔을 들이켰다.
들어왔던 복도를 빠져나오는 지석과 상일을 향해 건장한 녀석들 중 하나가 깐죽거리듯 인사를 내 뱉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그 소리에 상일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하나같이 검은색 일색인 틈에서 빈정거리듯 웃으며 서 있는 한 녀석을 발견했다. 상일은 그 건장한 녀석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 남자 앞에 똑바로 서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안, 안, 안녕히 가십시오. 혀,혀, 혀, 형님······.”
조금 전까지 빈정거리는 남자는 상일의 태도에 압도당한 듯 말을 더듬고 오금을 저리고 있었다. 곧바로 한 대 때릴 기세였던 상일은 그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며 옆에 서 있는 지석을 향해 물었다.
“지석아! 등본 좀 떼 봐야겠다. 나도 모르는 동생이 있는 것 같은데.”
“등본 떼보나 마나입니다. 어디하나 닮은 구석이 있어야 말입니다. 사장님!”
“그러게 말이다.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을리 없지.”
그리고는 상일은 그 건장한 사내의 어깨를 조금 힘을 주어 두 번 토닥였다. 그러자 그 사내는 허리를 굽혀 숙이고는 긴장한 목소리로 다시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혀, 혀······.”
형님 소리가 또 한번 나오려다 찔끔하고 들어갔다. 상일은 그대로 그 건장한 사내들을 지나쳐 복도를 빠져 나왔다. 마지막 통로를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쪽으로 발을 옮기던 상일의 눈에 낯익은 얼굴하나가 저쪽 통로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 상일은 고개를 돌려 저쪽으로 지나가는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유민경, 민경이가 틀림없었다. 상일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지석이 궁금한 듯 물었다.
“사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조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까?”
“말은 뭔들 못해. 우리 쪽에서도 준비해야 할 거야.”
“그래도 약속 했을 거 아닙니까?”
“깡패새끼가 약속 지키는 거 봤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대식은 그럴 놈 아니야.”
“그럴 거면 뭣 하러 지키지 않을 거 뻔한데 지분을 넘겨줍니까?”
“두고 보면 알게 돼.”
늦은 밤 상일이 집에 도착했다. 침실에 들어서자 방안 가득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녀가 목욕하며 풀었던 바스 냄새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채령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상일이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는 잠꼬대처럼 뒤로 돌아 누웠다.
-7편-
아침 식탁. 블랙커피와 잘 구워진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앞에 두고 신문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았다.
“뭐 읽을 만한 거라도 있어?”
“별로.”
“그런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
“내가 그랬나?”
채령은 상일의 말에 읽던 신문을 덮어 식탁 옆으로 치우고 토스트 한 조각을 떼어 입으로 가져갔다. 기분만큼이나 건조한 빵 덩어리가 입안에서 겉도는 느낌이 싫어 얼른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오늘 저녁에 외식할까?”
뜬금없이 외식을 하자는 상일의 말에 채령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상일을 쳐다보자, 상일은 곧바로 말을 바꿨다.
“바쁘면 관두고.”
“아니야. 그러자. 우리 외식하자. 어디서 만날까?”
두 사람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같이 현관문을 나서서 각자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채령의 차가 먼저 출발하고, 그 뒤로 상일의 차가 뒤 따랐다. 한적한 시골길을 벗어날 즈음 상일의 차 뒤에 또 다른 차량 한 대가 뒤 따랐다. 그리고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뒤 따르는 차량들은 많아졌다.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상일의 차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채령은 오늘도 여전히 상일이 운전하는 내내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비슷한 차량이 합류를 하고, 그 뒤로는 많아지는 차량들 사이에 엉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저녁에 식사 할만한 곳 좀 예약해 줘.”
“네, 사장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예약을 부탁하는 상일에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지석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옆에 잠자코 서 있었다.
“왜? 할 말 이라도 있어?”
“일식, 중식, 한식, 양식. 어떤 걸로 할까요?”
“음······. 그런 것 까지 일일이 말해야 하는 거였어?”
“그래도 형수님과 오랜만에 데이트인데 신경 좀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한식만 빼고 뭐든 괜찮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한식은 왜?”
“어제 이대식이가 먹어 치운 걸 네가 봤어야 하는데, 아무튼 한식만 빼고!”
상일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무식한 깡패새끼’ 라는 말인데, 이대식을 만날 때 마다 스스로 가장 싫어하는 이 단어를 떠 올리게 됐다. 이대식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불가분의 관계였다. 어쨌든 이대식과 얽히면 단순한 문제도 복잡해지고, 쉬운 문제도 자꾸만 얽히는 것 같아 싫었다.
수술실 문을 나오는 채령은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후배 의사들의 실수를 그냥 넘어 갈만한 아량을 베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안희준 선생! 전병수 선생! 옷 갈아입고 내 방으로 와!”
뭔가 심상찮은 바람이 불어오는 걸 직감 했는지 쌩 하게 말만 남기고 복도를 빠져 나가는 채령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병수가 ‘이젠 죽었다!’ 라는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닥터 안! 우리 오늘 또 깨지는 거냐?”
“그러게 뭣 하러 수술실에서 쓸데없는 농담을 해 가지고 그래.”
“아니, 나는 딱딱한 분위기 좀 부드럽게 해 보겠다고 그런 거지.”
“아무튼 네 입이 문제야. 문제!”
채령에게 된통 깨지기 위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희준을 병수가 가로 막았다.
“왜?”
“잠깐만, 일단 심호흡 좀 하고 들어가자. 난 얼음마녀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려서 죽겠다니까. 붉은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고 하지만 가시도 가시 나름이지, 완전 독가시잖아.”
“독가시는 무슨.”
“황 선생 넌 그럼 안 무섭단 말이야? 저 얼음마녀가?”
“그 얼음마녀 소리 좀 빼라. 입 다물고 들어가기나 하자고.”
아니나 다를까 채령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희준과 병수를 불러 세워 놓고도 한 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섭도록 긴 침묵이 이어지자 참지 못하고 병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잘못 했습니다.”
“뭐가?”
“예?”
“잘못 했다면서?”
“그러니까, 수술실에서 쓸데없는 농담한 거요.”
“그래? 그럼 안희준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뭘?”
“······.”
“니들 수술실에서 안락사 어쩌고저쩌고 그랬지? 죽고 사는 결정권은 의사에게 있는 게 아니야. 아무리 살아도 사는 게 아닌 환자라고 해도, 차라리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못 해도 그건 의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앞으로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알았어?”
“선생님! 어차피 고통당하고 죽을 거, 수술도 안 해 줄 거면 고통이라도 덜어주는 게 의사의 마지막 도리 아닐까요?”
채령의 말에 바로 반기를 드는 희준을 병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손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너 지금 미쳤어? 무슨 말 대꾸를 하고 그래?’ 라며 눈치를 주지만 희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의사가 신도 아니라고 굳이 살아도 사는 것도 아닌 사람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의사의 도리입니까?”
희준의 말에 채령이 얼굴이 심하게 굳어지며 눈빛이 흔들렸다.
“안희준 선생! 그래서 넌 환자를 위해서라면 안락사라도 시켜 줘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게 해서 그 환자와 가족들이 편안하다면······.”
그때였다. 채령이 희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것은.
“선생님·····.”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희준이 채령을 쳐다봤다.
“안희준 선생! 지금 이 시간부로 우리 팀에서 빠져.”
“선생님·····.”
“더 이상 안 선생이랑 말하고 싶지 않아. 전 선생! 안희준 선생 데리고 나가!”
“네, 선생님. 가자 안 선생! 가자고~”
희준은 너무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채령의 태도에 놀라 무슨 말이든 해 보려고 했지만 두 사람을 등지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채령과 막무가내로 끄집고 나가려는 병준에게 이끌려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서도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자 병준이 한 마디 했다.
“오늘 얼음마녀 최악이다. 최악! 그렇다고 뺨을 때리냐? 이건 완전히 9시 톱뉴스 감이다. 안 그러냐? 안 선생! 안 선생! 이거 완전 쇼크 먹었구만.”
병준이 거듭 불러도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희준은 채령이 자신을 뺨을 때렸다는 사실보다 심하게 흔들렸던 채령이 눈빛이 더 깊이 각인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
채령은 방에 멍하게 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차라리 의사가 되는 게 아니었다고, 의사로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고 수십, 수백 번 후회하고 또 후회했었다. 의대에 들어섰던 순간부터 전문의가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수술 일정이 잡힐 만큼 제법 자리를 잡은 외과 의사가 된 지금까지도 의사가 된 사실에 기뻐 한 적이 없었다.
이때 딩동 하고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녁 식사 예약 해 놨어. XX에서 8시.
상일의 문자가 아니었다면 아침에 외식하자고 했던 약속을 깜빡 잊어버릴 뻔 했다.
-이따 봐요.
간단하게 답장을 보내고 채령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희준의 뺨을 때린 건 실수였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희준이 의사의 도리를 운운하며 이야기 하자 채령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곧바로 미안하다고 말 할 수도 없었다. 희준을 팀에서 빼겠다고 한 것은 희준이 갖고 있는 생각들이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녀석을 보고 있으면 자꾸 괴로운 이유가 더 컸다.
상일이 채령과의 저녁을 먹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며 지석을 향해 다시 한번 다짐을 받듯 말했다.
“제발 한꺼번에 몰려다니지들 말고, 너하고 다른 녀석 둘 만 보내. 제발 부탁이다. 응?”
“알겠습니다. 사장님!”
“분명히 말했어!”
“예.”
상일은 빙긋 웃어 보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채령도 코트를 걸치고 막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번호를 보니 정현이었다. 망설이다 그대로 가방에 핸드폰을 집어 넣어버렸다. 몇 번 더 벨이 울리다가 끊겼다. 주차장에 내려와 시동을 거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다. 보나마나 정현이겠지 생각하며 채령은 그대로 차를 빼 내, 밖으로 나왔다.
병원 입구에 차를 세워 놓고 채령에게 전화를 걸 던 정현은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자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머금고 다시 한 번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신호가 떨어지는데도 받지 않자 병원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그녀의 차가 보였다. 정현은 그대로 채령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8편-
먼저 와 있던 상일이 채령이 오자, 일어나 의자를 빼 주었다. 자리에 앉으며 상기된 표정으로 채령이 말 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조금 전에 왔어. 차는 안 막혔어?”
“괜찮았어.”
그리고 채령은 옷과 함께 가방을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핸드폰을 꺼 놓을 걸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번 빙 둘러봤다. 사람들이 별로 없고 한가해 보이는 게 맘에 들었다. 두 군데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가족들이나, 연인들이 찾아오는 레스토랑에 남자들 두, 서너 명이 앉아서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스테이크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는데 채령이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불쑥 꺼낸 말에 하마터면 상일은 스테이크가 목구멍에 걸릴 뻔 했다.
“자기 그거 알아? 외국에선 남자끼리, 아니면 여자끼리 이런 곳에 오거나 거리에서 팔짱끼고 돌아다니면 100% 동성연애자 라는 거?”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상일은 레스토랑 입구에 자리한 테이블과 반대편 창쪽에서 열심히 나이프질을 하고 있는 남자들이 앉아 있는 곳을 쳐다봤다. 마침, 지석이 상일과 눈이 마주치자 지석은 상일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상일은 재빨리 티슈로 입을 눌러 닦고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래? 직장 동료들인가 보지 뭐. 나도 자주 우리 비서랑 식사하러 가는데 그럼 사람들이 나도 동성연애자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풋~ 아니라곤 할 수 없지.”
채령은 가볍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었지만 상일은 혹시 그녀가 뭔가를 알고 하는 소린가 싶어서 자꾸 따라온 녀석들이 신경 쓰였다.
채령과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데, 그녀의 가방 속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채령은 짐짓 모르는 척 하며 상일과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하는데, 쉽게 진동이 멈추질 않았다.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어? 그래? 잠깐.”
채령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나마나 정현이겠지만······. 역시나 였다. 채령은 그대로 슬라이드를 열었다 닫아 버리고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무슨 전환데 그래?”
“안 받아도 돼는 전화야. 신경 쓰지마.”
“그래? 하여튼, 유능한 의사 선생님과 식사 한끼 하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채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일의 말에 웃어 보였지만 손에서는 진땀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느라 상일의 미간이 잠깐 좁혀지는 걸 눈치 채지 못했지만 상일은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깐, 나 화장실 좀.”
상일은 자리를 빠져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곧바로 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먹고 있던 지석은 상일의 전화가 오기도 전에, 상일이 자리를 벗어나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뒤 따라 오던 참이었다.
신호가 떨어지기도 전에 화장실에 와 있는 지석을 보고 상일이 깜짝 놀라며 뒤로 주춤했다.
“뭐야 너?”
“저한테 전화 하신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대, 그래도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놀랐잖아.”
“에이~ 사장님도 놀랄 때가 있습니까?”
“그러게, 나도 이젠 늙었나봐. 그건 그렇고 연락 온 거 없었어?”
“예 사장님! 아직요.”
“그래 알았다.”
상일은 물기가 남은 손을 타월에 닦다가 옆에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서 있는 지석을 향해 심드렁하게 한 마디를 내 뱉고 화장실을 빠져 나갔다.
“너, 그거 아냐? 남자끼리 밥 먹으러 오면 동성연애자라고 하더라.”
“네?”
난데없는 상일의 말에 지석은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냐며 대꾸하려다가 금세 빠져나가버린 상일의 뒷모습만 보고 멍하게 서 있었다.
“바로 집으로 가는 거면 같이 들어갈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상일이 물었다.
“그럼 그럴까? 잠깐 화장실 좀 들렸다 나올께. 기다려”
“그래. 그럼.”
채령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정현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만 4통이었다. 그리고 문자 하나.
-거기 이태리 음식 괜찮은데, 식사는 맛있어? 일부러 전화 안 받는 거라면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문자를 읽는 채령의 손이 떨렸다.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인데, 채령은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얼굴에서 긴장된 표정을 지우려고 거울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상일을 따라 그의 차에 탄 채령은 백밀러를 통해 몇 번이고 뒤를 확인했다.
집으로 가는 길, 채령이 자꾸 어딘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상일은 룸밀러와 백밀러를 통해 밖을 주시했다. 깜깜해진 시간이라 차량의 라이트 불빛 외에는 무엇을 분간한다는 건 어려웠다.
“우리 잠깐 드라이브 좀 하다 들어가.”
갑작스런 채령의 제안에 상일이 쳐다보자 채령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오랜만에 자기랑 만났는데 바로 집으로 가는 게 좀 그래서 말이야.”
“그러지 뭐.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좀 달리고 싶어서. 양평 쪽도 괜찮을 것 같고.”
누군가 따라 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채령이 이렇게 갑작스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채령은 눈을 감고 태연한 척 허리를 뒤로 기대어 반쯤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달라보였다.
“아니, 갑자기 왜 방향을 바꾸는 거지?”
상일의 뒤를 따라 달리던 지석은 갑자기 방향을 꺽어 달리는 상일을 따라 잡느라 급하게 차선을 변경했다. 뒤 따라오던 차들이 라이트를 깜박거리고 경적을 울리는 작은 소란을 피웠다. 방향을 바꿔 달리던 상일의 차는 88올림픽 도로 끝을 벗어나자 최대한 속도를 내며 달렸다.
“아니 또 왜 이렇게 속도를 높이는 거야? 갑자기 형수님을 옆에 태우더니 혈기라도 왕성하게 솟는 건가?”
지석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상일의 뒤를 쫒아가며 궁시렁 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차를 따르는 다른 차에 탄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당부했다.
“야, 오늘 사장님께서 스피드 좀 내시려나 보다. 집중해서 잘 따라 붙어.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요령껏 잘 좀 해라. 알았냐?”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
“오늘 즐거웠어.”
그렇게 서 너 시간을 드라이브 한다는 명목으로 달리고 집에 들어 온 채령은 말로는 상일을 향해 즐거웠다고 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네, 들어가 먼저 쉬어.”
“그래.”
채령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상일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소파에 앉아 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따라 오면서 이상한 낌새 없었어?”
-네? 아니요. 그런 거 없었습니다. 사장님!
“제대로 보긴 한 거야?”
-저도 사장님 쫓아 달리느라 죽을 뻔 했는데 어떤 간 큰 놈이 따라 붙습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왜 그렇게 달리신 겁니까? 말이라도 해 줘야······.
“알았다. 쉬어라.
지석은 뭐가 또 그렇게 궁금한지 말이 길어질 뻔 했다. 상일은 그쯤 해서 지석의 말을 자르고 전화를 먼저 끊었다.
2층 침실에 들어가자 채령은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침대에 눕기 위해 옆으로 다가갔을 때 사이드 테이블 위에 채령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식사 때, 채령이 당황하며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던 모습이 생각나, 슬라이드를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상일은 곧 무시해 버렸다.
아침 일찍부터 잡힌 수술 일정 때문에 새벽같이 집을 나서야 하는 채령의 일정에 맞춰 상일도 이른 출근 준비를 했다. 넥타이를 매느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상일 옆으로 채령이 머리를 빗어 넘기며 오랜만에 관심있는 질문을 던졌다.
“요즘은 통, 출장은 안 가나봐? 지난번 수출 건은 잘 되고 있어?”
“어? 그런대로.”
지난번에 며칠 병원에 입원하느라 수출 건 때문에 출장 간다는 핑계를 댔었는데 아직 그걸 기억하고 물어오는 채령 때문에 상일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법이 없는 채령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채령을 병원 근처에 내려주고 상일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습관처럼 모니터가 들어 찬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호텔 대부분은 적막이 흐를 정도로 고요했다. 룸 메이드들만 간혹 복도를 오가는 것이 보일 뿐.
지석이 따끈한 커피가 담긴 컵을 상일 앞에 내 밀었다. 커피를 받아 들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모습이 서글퍼 보이는 듯 표정을 하고 지석에게 물었다.
"지석아. 너 샤이닝 호텔 사장실 들어가 봤지?”
“네. 사장님!”
“좋지?”
“여기보다 훨씬 좋죠. 커다란 방에 으리으리한 책상에 크리스탈 명패가 딱!”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지석은 입을 다물고 상일을 쳐다봤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사장님! 혹시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그럼 제가 당장 사장님 명패 파서 들어가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아직은 아니야!”
“그럼 왜······.”
“휴...... 아무것도 아니야.”
상일은 한숨을 푹 쉬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석은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라는 생각을 해 본다.
-9편-
“사장님. 왜 그만 드시려고요?”
늦은 점심을 챙기느라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던 상일은 몇 번 떠먹는가 싶더니 수저를 내려놓았다.
“별로 입맛이 없어서.”
“그래도 조금 더 드세요.”
“아니, 그만. 지석이 너나 더 먹어.”
“에이, 그러지 말고 조금 더 드시라니까요.”
“됐어. 징그럽게 왜 마누라 행세를 하려 들어?”
내려놓았던 수저를 억지로 손에 쥐어 주려는 지석을 향해 상일이 밉지 않은 눈총을 보내고는 컵을 들어 물만 들이켰다. 상일의 고집을 누가 말리겠는가 싶어 지석은 그만 두었다. 상일은 몇 모금 물을 더 들이키더니 갑자기 잊어 버렸던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참! 지난번에 그 집 있지?”
“그 집 이라뇨?”
“왜, 거~ 이대식이 만났던 집 있잖아.”
“네, 거긴 왜요. 사장님?”
“밥 먹고, 거기 좀 다녀와야 겠다.”
으슥한 밤에 왔을 때, 그 검은 옷 입은 덩치들만 보느라 고풍스러운 이 집의 진가를 모르고 지나쳤는데, 낮에 와 보니, 깡패들이 자리 잡고 밥 먹기엔 그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곳이네. 히야, 도대체 방이 몇 개야? 웬만한 기업체 보다 낫겠군. 생각하는 사이, 지석 앞으로 어떤 여자가 다가왔다.
“사장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집은 저녁에 여는데요.”
“아. 그게 아니고, 사람 좀 만나러 왔습니다.”
“네?”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말에 그 여자는 경계의 눈빛을 보이더니 지석을 아늑하게 잘 꾸며놓은 방으로 안내하고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이 집 주인으로 보이는 단아한 차림새의 여자와 앳되어 보이는 곱상한 여자 하나가 같이 방에 들어왔다.
“유민경씨를 찾으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유민경씨?”
지석은 앳되어 보이는 여자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네······.”
생김새만큼이나 목소리도 여리고 작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실례가 되는데요.”
단아한 여 주인의 물음에, 대뜸, 농담 같지 않은 말을 내 뱉은 지석을 향해 여 주인은 알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보이고 민경을 남겨 둔 채, 방을 나갔다.
무작정 사장님이 가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이건 뭐야? 완전 어린 애 아니야? 생전 여자라곤 관심도 없던 양반이 어쩐 일로 여자를 알아보라 한다 했더니, 이런 어린 여자 애였단 말이야? 흠…….
지석이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사이, 민경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 온 낯선 남자를 향해 의심과 호기심을 가득 담아 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기, 근데 누구세요?”
초조함과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민경이 입을 열었다.
“어? 나? 음······. 그러니까 너 찾으러 온 사람.”
“저를 왜 찾으시는데요?”
“그야 너한테 궁금한 게 있으니까 그렇지.”
“궁금한 게 뭔데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조근조근 물어오는 민경의 얼굴을 보면서, 저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 있으면 퍽이나 매력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정신 차리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유민경씨. 그러니까, 민경씨는 몇 살이지?”
이런 이런······. 그런 질문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걸 묻고 말았네. 지금 저 여자 나이가 궁금해서 여기 온 게 아니잖아.
“네? 스물 둘이요.”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어지간히 의심스럽다는 듯 민경은 의아해 하며 대꾸했다.
“여기서 일 한지는 얼마나 됐어?”
“1년 좀 못 됐어요.”
“그렇군. 그럼, 여기선 무슨 일 하는데?”
“네?”
“무슨 일 하느냐고.”
“······.”
민경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은 대답하기 싫다는 의지를 보이기라는 듯 눈에 잔뜩 힘을 주어 지석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왜 그런 걸 자꾸 물으시는데요?”
“물어 볼만 하니까 물어보는 거지.”
“그러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고요.”
“······. ”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장님이 시켜서 왔다고 할 수도 없고, 딱히 핑계 댈 만한 구실이 없었다.
“너한테 관심 있으니까 그렇지.”
“?”
고작 생각해 낸다는 게 쌍 팔년도 시절에도 안 먹혔다는 수작이란 말인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경은 ‘웃기지도 않는 사람이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를 언제 보셨는데요?”
“며, 며, 몇 주 전에.”
말까지 더듬어 버렸다. 지금까지 수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살아 왔는데 새삼 거짓말 한다고 말을 더듬을 게 뭐란 말인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일에는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데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꼴이란.
민경은 지석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알려 들지 않았다. 그리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방을 빠져나갔다. 그 사이 지석은 민경에게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냥 상일의 말대로, 잘 지내는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때 보이는 지만 알아 가면 될 일인데, 그 간단한 일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평생, 이래 본적 없었는데 말이지.
잠시 후, 민경은 작은 상을 하나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상위에 올려 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민경이 들고 들어오는 상만 보고 지석은 지레 짐작으로 말을 했다.
“나, 술 안 마시는데.”
“이거 술 아니거든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술 파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녀가 지석 앞에 내려놓은 상에는 다기 잔과 약과 한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녹차? 약과? 집만 조선시대 줄 알았더니, 먹거리도 꽤나······.”
“이거 드시고 돌아가세요.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과 더 이상 나눌 이야기도 없고, 혹시, 다른 분들처럼 술 드시는 것 외에 다른 걸 요구하시는 거라면 제 대답은 NO 예요.”
“뭐? 다른 걸 요구해?”
“다들 첨엔 그러더군요. 신사답고, 멋지고, 그런데 결국 원하는 건 다 똑같더라고요.”
“지금 그래서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거야? 뭐야?”
“저희 할머니께서, 집에 오는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제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 하시니 준비했습니다. 드시고 돌아가세요.”
지석은 얌전하고 곱상하게 생겨서 목소리까지 여린 그녀, 민경이 또박또박 내 뱉는 말에 더 이상 대꾸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이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 어떻게 지내고 있대?”
“뭐, 그냥······. 잘······.”
“무슨 대답이 그래?”
상일은 지석이 하는 대답이 맘이 들지 않은지,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 소파로 내려앉았다.
“자세히 말 해봐. 만나긴 만난거야?”
“네, 사장님!”
“설마, 거기서 다른 애들처럼 술 팔고······. 그러는 거야?”
“거기야, 모두들 술 팔고, 몸 팔고 하는 곳인데, 그 애라고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지석의 대꾸에 상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지석을 노려봤다. 상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 챈 지석이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
“작고, 여리긴 한데, 할 말은 꼬박꼬박 하는 게, 다른 애들과는 달랐습니다. 자기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면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흠······. 그런데서 일 할 아이는 아니지. 네가 계속 지켜봐야겠다.”
“예?”
“자주 들려서 어떻게 지내는지 좀 알아보고, 도와 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그러란 말이야.”
“아······.네. 사장님! 그런데, 그 애가 누굽니까?”
“그런 게 왜 궁금해?”
“아니,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이제 스물 둘 이라는데.”
“지금 무슨 상상하는 거야? 설마 내가 스물 두 살짜리 어린 애랑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런 사이 아니니까 신경 끄고, 지석이 넌 민경이 좀 잘 보살펴 줘. 나머지는 말 안해도 알지?”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평소에 절대 그런 일이 없던 채령은 수술실에서 벌써 두 번이나 실수를 했다. 큰 실수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의료사고가 될 뻔 했다.
정현과 다시 시작된 악연이 채령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정현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채령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방에 들어 왔을 때, 여러 통의 전화와 문자 몇 개가 와 있었다.
정현 선배라는 이름으로 온 전화가 여섯 통, 그리고 그 인간에게서 온 문자가 두 통 이었다.
-왜 전화 안 받아? 분명 내가 말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고.
-전화 하니 수술 들어갔다고 하더군. 끝나면 전화 줘. 할 말 있어.
수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누군 한테 들어 거야? 생각하며 책상을 보니, 피로회복제 캅셀과 병이 하나 놓여있었다.
-선생님! 피곤하실 것 같아 놓고 갑니다.
보나마나 희준이었다. 그렇다면 정현에게 온 전화도 그 녀석이 받았다는 말이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정현 선배에게 왜 꼼짝도 못하는 거냐면서 가뜩이나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는데, 왜 하필 희준이 전화를 받은 거야. 혹시 문자도 본 거 아니야? 젠장할~
-10편-
채령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복도 끝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희준은 그녀의 발걸음이 지쳐보였다. 지체 없이 약국으로 뛰어 가 피로회복제를 구입해 채령의 방으로 들어섰다.
짧은 메모만 놓고 나오려는 데, 연속해서 전화가 걸려오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핸드폰 액정에는 ‘정현 선배’ 라고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은채령 선생님 핸드폰입니다.”
-아, 닥터 은은?
“선생님께서는 수술 중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근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물어 봐도 될까요?
“안 희준 입니다. 선배님.”
-안 희준? 아~ 그 애송이! 네가 왜 닥터 은, 방에 있는 거냐?
“······.”
-뭐,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얼굴 마주 대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목소리로만 듣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그냥 채령의 방을 나가야 하는데, 자꾸 그녀의 핸드폰으로 눈길이 간다. 열어서 확인하고 싶은······.
희준은 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채령의 문자를 읽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지만 이미 읽어 버린 것을. 도대체 정현과 무슨 관계로 얽힌 것이기에, 협박에 가까운 그 인간의 문자를 채령이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맘 같아선 당장 정현이든, 채령이든 붙들고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지만 자신의 위치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희준은 다만 그 인간이 보내온 문자가 담긴 휴대폰만 죽일 듯이 노려봤다.
채령은 한 참을 망설인 끝에, 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신호가 떨어지고 곧바로 정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닥터 은, 이제 수술 끝났나?
“네······.”
-지난번 저녁 식사는 맛있었나? 약혼자랑 거기 몇 번 갔었는데 음식 괜찮더라고. 그건 그렇고 우리 좀 만나야겠는데.
“오늘은 좀 곤란해요. 선배! 제가 나중에.”
-이거 왜 이러실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진짜 곤란한 일 생길 텐데.
“······.”
-지난번에 만났던 호텔로 와.
“아니요. 선배! 오늘은 정말 안 되겠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게요.”
-흠…….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생각지도 않게, 정현이 채령의 부탁을 들어줬다.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 오히려 이렇게 나오는 정현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채령은 정현에 대한 생각으로 한 참, 더 물끄러미 전화를 바라보다가 희준이 놓고 간 피로회복제 캅셀과 드링크를 마셨다. 달큼하면서 쌉쌀한 맛이 목구멍을 따라 흐른다.
2시간이 넘게 걸리는 퇴근길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전쟁과도 같지만 채령은 이 시간이 그 나마 가장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쩔 땐 1시간 가까이 같은 곳에서 꼼짝 못하고 정체 될 때도 있지만 그런 시간까지도 기꺼이 편안하다고 느낄 만큼 다른 일련의 생활들이 무료하고, 답답하고, 의미 없게 느껴졌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곳곳이 넉넉함으로 채워진 시골길이 드러나고, 그 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어느새 집이었다.
함께 살고 있는 상일은 대부분은 출, 퇴근을 하고 있었지만 무역업을 하고 있다는 그 남자의 출, 퇴근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때론 출장 때문에 며칠 씩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 남자와 사는 동안, 단 한번도, 그는 내게 사적인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1년이 넘는 시간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도 나에게 숨기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집 앞 주차 라인에 들어섰다. 아직 상일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마당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한점도 없었다. 채령은 익숙하게 현관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거실 창을 통해 많은 양의 빛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제 좀 사람 사는 듯한 포근함이 전해졌다.
조금 떨어진 농로에 차를 세운 정현은 채령이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려섰다.
“여기였단 말이지? 은채령이 꼭 꼭 숨어 사는 곳이!”
그는 비열한 웃음을 머금고 다시 한번 하얀 목조로 지어진 2층 집을 훑어 봤다. 혼자 사는 걸까? 아니면 누구랑 같이 사는 건가? 궁금한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지만 오늘은 일단 채령이 살고 있는 은신처(?)를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있는 셈이었다.
정현은 다시 차에 올라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은채령! 지금부터는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이 생기겠는 걸?”
어쩌면 채령을 한 동안 더 붙잡아 둘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긴 거라고,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몰았다.
상일의 차가 시골 길에 접어들었다. 그나마 농로를 들어서기 직전까지는 2차선이라서 오가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일단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겨우 차 1대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농로를 지나쳐야만 했다. 아직까지 이 농로 맞은편에서 차량이 튀어나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지라, 상일은 앞에서 라이트를 밝게 켜고 서서히 다가오는 차량을 피하기 위해 갓길이 있는 곳까지 상당히 먼 거리를 후진으로 비켜줘야 만 했다.
겨우 갓길에 차를 비켜 세웠을 때, 앞 차의 운전자는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창을 내리고 상일을 마주 봤다.
그의 얼굴을 마주보는 상일의 표정이 급하게 변했다. 차 안에서 싱글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는 남자는 지난번 호텔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확인이라도 하듯 상일은 지나쳐 다시 달려가기 시작하는 그 차를 유심히 살폈다. 군청색 BMW······.
“밥 먹었어?”
현관에 들어서는 상일을 보고 채령이 오랜만에 웃는 얼굴을 보였다.
분명, 그 남자와 같이 있었거나, 그 남자가 여기 왔었다면 채령의 표정이 저렇게 밝은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봤을 때, 그녀의 표정으로 봐선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니, 아직·····.”
“잘 됐네, 씻고 내려와 같이 먹게.”
상일이 식탁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식탁 중앙에 올려놓고 채령은 앞치마를 벗고 맞은편에 앉았다. 꾸민 듯, 아니면 자연스러운 듯 그녀의 미소에 상일은 눈웃음을 머금고 그녀가 차려낸 식탁을 바라봤다. 음식 솜씨는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되는 그녀지만 보기엔 항상 그럴 듯 하지.
찌개를 한 수저 가져다 먹었다. 역시나, 상일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훌륭한 의사선생님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요리사는 아니라는.
“어때 먹을 만 해?”
“어, 맛있어.”
“당신 거짓말은 항상 진짜처럼 들려.”
그리고 채령은 웃어 버린다. 자신의 솜씨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 듣기 좋은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 할 줄 아는 남자에게 밉지 않은 눈총을 보낸다.
“왜. 그만 먹으려고? ”
“어.”
“별로라서?”
“아니. 소식하는 중이야.”
상일이 몇 수저를 뜨지 않고 먹기를 중단한 건, 결코 채령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요즘 통 입맛이 없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이네?”
“그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수척해 보인다고 하면 맞는 말이겠지만 상일 자신은 못 느끼고 있었다. 멋쩍은 듯 턱을 쓸어내려 본다.
“병원에라도 한 번 가봐.”
“어디가 아픈 건 아닌데, 뭘.”
“어디가 아파야만 가는 곳이 병원인가? 아프기 전에 가는 곳이 병원이지.”
그리곤 채령은 다시 입을 다물고 밥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작은 연립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며 상일은 조심스럽지만 밝은 얼굴을 하고 어머니를 불렀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가 싶더니, 잠시 후 상일의 엄마가 손의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오셨다. 그녀는 아들을 보고도 이렇다 할 말이 없이 그대로 거실에 깔린 얇은 패드 위에 아들에게서 반쯤 등을 돌린 채 앉았다. 상일은 신발을 벗고 어머니의 얼굴이 마주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미역국은 드셨어요?”
“해년마다 있는 생일, 뭐 대수라고!”
“······.”
무뚝뚝한 어머니의 말투에 상일은 대답대신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힐끔 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셨다.
“어머니 입으시면 따뜻하겠다 싶어서요.”
“누가 너한테 이런 거 사오라고 하더냐. 필요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
“어머니, 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지금 얼마나 제가 절실하게 살고 있는지 어머니 아시잖아요.”
사정하듯 말하는 상일을 향해 반쯤 돌렸던 몸을 바로하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상일의 말을 듣던 어머니는 그것이 그저 상일의 투정으로 밖에 안 들리는 듯 말을 이었다.
“절실하게? 네가 지금 절실이라고 했냐? 이렇게 앉아 있는 내 눈에는 아직도 네가 예전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뭘 얼마나 절실하게 살고 있다는 게냐?”
“어머니·······. 모르셔서 그러세요? ”
흐느끼듯 내 뱉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눈빛은 단호하고 의미심장했지만 아들의 마음을 모를리 없기에 행여 흔들리는 눈빛이 들킬까 다시 고개를 돌려 상일을 외면해 버렸다.
“그만 가 볼께요. 어머니.”
상일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 버리는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는 어머니의 작은 연립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어머니는 상일이 놓고 간 쇼핑봉투를 열어 제법 두툼해 보이는 스웨터를 펼치고는 복잡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