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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수양대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에 즉위
← 보덕사 산신각의 단종대왕화상(강원 영월군 영월읍)
1455년 윤6월11일, 왕위에 올라 갓 3년을 보낸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이 2년 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뒤부터 명목상의 임금으로 근근히 왕권을 유지해왔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의 측근들을 유배시키며 압력을 조여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왕위를 포기한 것이다.
단종은 태어난지 3일 만에 어머니가 숨지는 불운을 겪었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8세 때 세손, 10세 때 세자로 책봉돼 나름대로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병약한 아버지 문종마저 즉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은 1452년 5월,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기구한 운명 속으로 내몰렸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위해 사육신 등이 한때 복위를 시도했지만 그들의 목숨은 물론 단종의 수명까지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단종도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당해 강원도 영월땅 청령포로 유배됐다. 그해 12월 사약을 받고 영월 장릉에 묻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경기도 밖에 묻힌 왕이 됐다./조선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표지판 헌정
← 도산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남부 지역을 가로지르는 110번 프리웨이와 샌타모니카 쪽 10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인터체인지 이름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을 선거구로 하는 캘리포니아주(州)의 민주당 상원의원인 케빈 머레이(Kevin Murray)가 도산기념사업회·밝은미래재단과 공동으로 발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2003년 1월 북미 이민 100주년에 즈음해 한인 밀집지역을 통과하는 10번 프리웨이 일부 구간에 한국인을 대표할 만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발의해 캘리포니아주 하원에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2002년 8월 26일 캘리포니아주 하원은 찬성 39, 반대 0으로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교통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같은 달 30일 본회의에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로 하는 안을 확정하였다. 미국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생긴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남쪽을 가로지르는 10번 프리웨이는 안창호의 주 활동무대였던 리버사이드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2004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조선
[2001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파범 멕베이 사형
← 사형에 처해진 티노시 멕베이(왼쪽)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파사건의 범인 티노시 맥베이(33)가 2001년 6월 11일 오전 7시 인디애나주 테러호트 교도소에서 독극물 주입 방식으로 처형됐다.
당초 맥베이는 5월 16일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연방수사국(FBI)이 일부 자료를 그의 변호인측에 넘겨주지 않아 사형 집행이 연기됐었다. 그는 1963년 이후 처음으로 연방정부에 의해 처형된 죄수로 기록됐다. 맥베이는 이에 앞서 6월 8일 사형 집행 연기를 위한 모든 법률적 노력을 포기했으며, 6월 9일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처음으로 용서를 구했다.
8분간의 독극물 주입에 의한 사형 집행장면은 처형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희생자 유족 10명, 취재진 10명, 친지·친구 등 맥베이의 초청인 10명 등 모두 30명이 지켜봤다./조선
[1999년] 월북작가 함세덕 희곡 ‘무의도 기행’,국립극단서 처음 공연
← 국립극단이 공연한 월북 극작가 함세덕의 작품 ‘무의도 기행’
국립극단이 1940년대를 풍미한 희곡작가 함세덕(1915∼1950)의 `무의도 기행`을 1999년 6월 11일부터 22일까지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우리 국립극단이 월북 작가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창단 이후 처음이었다.
함세덕은 35세로 요절했기에 10여년 밖에 작품 활동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 암흑기, 광복 전후 혼란기를 통해 희곡 20여 편을 써내며 연극계 중심에 섰다. 대부분 유치진 연출로 공연됐던 함세덕의 작품은 잘 짜인 드라마 속에 암울한 시기의 꿈을 담아, 조국 잃은 사람들 가슴에 큰 울림을 안겼다. 1988년 우리 정부의 해금 조치로 그의 희곡들이 햇빛을 봤으나, 이번 공연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본격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
`무의도 기행`은 1930, 40년대 서해의 작은 섬 무의도가 배경.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한 시대를 암울하게 살 수 밖에 없던 어느 섬 소년의 고독한 성장기, 처참한 종말에 이르는 비극적 삶이 그려진다. 친딸까지 팔았던 비참한 가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대사엔 우리말 특유의 맛이 배어 있다. 이번 공연은 월북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묻혔던 우리 연극사의 한 부분을 재발견하는 일에 국립극단이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조선
[1980년] 음주측정기를 이용한 음주운전 단속 시작
← 음주운전감지기 도입에 관한 1980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 관련기사
1980년 6월 11일 치안본부는 차주 운전자가 늘어나면서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급증하자 미국에서 음주감지기 4백대를 도입, 전국 경찰에 나누어주고 음주 운전자를 강력히 단속토록 했다.
이 음주 감지기는 소형 휴대용 트랜지스터라디오 정도의 크기로 상단에 붙어 있는 파이프에 운전자가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버튼을 누르면 알콜의 함량이 숫자로 표시되게 제작됐다. 이 감지기는 주로 교통경찰이 휴대, 지그재그 운전을 하는 운전자나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의 음주여부 및 호흡 1ℓ당 알콜흡인량을 알아내는데 쓰였다.
기준 이상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적발되면 1년이하의 징역과 30만원이하의 벌금이외에 30일간의 운전면허정지기간이 길어지고 자동차사용 정지처분이 병과되도록 했다.
치안본부가 음주감지기를 도입하게 된 것은 1979년 한해동안 전국에서 음주운전으로 인해 2006건의 사고가 발생, 1백50명이 사망하고 1천7백11명이 부상했기 때문인데 이 사고 건수는 1978년에 비해 45.9%가 증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음주감지기를 이용한 음주운전자 적발-처벌은 개개인에 따라 다른 알콜반응도, 다시말하면 술이 센 사람과 덜 센사람, 맥주한병을 마시고도 운전할 수 없는 사람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감지기보다는 운전자로하여금 직선위를 걷게하여 똑바로 걷는가의 여부로 판정했다./조선
[1995년] 설치미술가 전수천, 베니스비엔날레서 특별상 수상
← 전수천씨의 작품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
1995년 6월 11일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관 개관 원년행사에 출품한 전수천씨의 작품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이 한국국적 작가로는 최초로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번에 전씨가 한국관에 출품한 설치작업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 은 지난해 가을부터 경주에서 구운 토우 8천개와 비디오 모니터 8대,각종 산업폐기물을 함께 설치해 고대와 현대,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며 몽환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특히 손으로 직접 빚은 신라시대의 토우 형상들과 각종 산업폐기물, 첨단 비디오설비 등을 결합해 한국의 전통세계를 보편적 조형언어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한국관 개관 이후 국제미술계 인사들의 호평과 찬사를 받았다./조선
[1985년] 소련의 금성탐사위성 베가1호의 착륙선이 금성에 착륙
1984년 12월 15일 발사된 소련의 금성과 핼리 혜성 탐사선 베가 1호(4,000 kg)는 1985년 6월 11일에 핼리 혜성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금성을 지나갔다. 베가 1호는 금성의 대기의 가운데 층의 구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탐사봉을 낙한산으로 금성 대기 중에 투하하였다. 이 탐사봉의 토양 실험은 실패했지만 탐사봉이 낙하하는 동안에 고도 54 km 지점에서 약 48시간 동안 떠 있었다. 베가 1호가 핼리 혜성을 만난 것은 1986년 3월 6일 이었다. /Google
[1979년] 한국-쿠웨이트, 국교수립
쿠웨이트는 한국과 1979년 6월 국교(國交)를 수립하였다. 1990년 8월 이라크군의 침공으로 이의 철군을 요구하는 다국적군에 의한 걸프전쟁에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5억 달러의 지원금을 부담하고 군의료진 200명과 수송장비 및 장병 150명을 파견하였다. 1991년 주한 쿠웨이트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82년 항공협정, 1983년 문화협정, 1984년 경제기술협력 및 무역증진협정,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체결되었고 2000년에는 과세방지협약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은 2억 4800만 달러, 수출 27억 16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중화학공업제품, 경공업제품, 식료 및 직접소비재 등이고, 수출품은 석유, 석유화학품, 가스, 광물, 화공품 등이다. /naver
[1979년] 존 웨인(John Wayne) 사망
← 미국 영화배우 존 웨인
본명은 Marion Michael Morrison 1907. 5. 26 미국 아이오아주 - 1979. 6. 11
지난 반세기동안 2백여편의 영화를 통해 미국인을 대표해 온 영화배우 존 웨인이 1979년 6월 11일 사망했다. 15년에 걸친 암과의 끈질긴 투병끝에 이날 오후 5시35분 캘리포니아주립대 메디컬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1938년 ‘역마차’로 각광을 받은 이래 서부극의 카우보이 기병을 비롯, 각종 영화에 해병대, 파일럿, 선장 등으로 등장해 무뚝뚝하면서도 자상한 ‘정의의 투사’로 전세계 영화팬의 심금을 울렸으며 ‘미국인’의 이미지를 세계에 홍보한 대변인으로 군림했다.
1907년 5월 26일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난 그는 192cm의 거구를 이용 남가주대 시절 미식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 후 영화계에 입문, 포드 감독에게 인정받아 배우가 됐다. 그후 10년 이상을 한결같이 값싼 B급 서부극에 출연하던 중 1939년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역마차’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붉은 강’ ‘기병대’ ‘그린 베레’ 등에 출연, 강인한 미국인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1970년 ‘진정한 용기’(1969)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생전에 그가 보지 못하고 받은 명예훈장에는 다음의 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존 웨인, 그는 미국인이다’ 라고.../조선
[1902년] 미국 감리교 목사, 교육자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사망
←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1858. 2. 6 펜실베이니아주(州) 손더튼 ~ 1902. 6. 11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의 서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부친 기드온과 독일계 매노나이트파 신자인 모친 마리아의 둘째 아들로, 어린 시절은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그의 조상은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스위스의 칸톤스(cantons)에 있는 계곡 appenzell에서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어려서는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랐다. 14살에 세례를 자원하여 받았으며, 웨스트체스터 고등(사범)학교 시절(18세, 1876년 10월 6일) 한 특별집회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은총과 감격을 느끼게 되어 선교를 위한 헌신을 다졌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기도회를 조직했는데 나중에 이는 웨스터체스터의 기독교청년회(YMCA)가 되었다. 20세 되던 1878년 가을 필라델피아 서부의 Lancaster에 있는 프랭클린 앤 마샬대학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으며,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져 어학에 능통하였다. 그는 Lancaster 제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리회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드류대학의 신학교(Drew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에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그해 성탄주간에 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885년 1월에 Drew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2월 2일에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은 후, 다음날 아라빅호에 몸을 싣고 태평양을 건넌다.
대한민국 순회선교
갑신정변 이후 국내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일본에 잠시 머물던 아펜젤러 부부는 3개월 뒤에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언더우드, 스크랜톤 선교사 등과 함께 기도회를 하고 세례를 베푸는 한편 학원선교에 힘쓰며 한국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1887년 4월 13일, 아펜젤러는 한국의 서북지방 평양까지 조랑말을 타고 선교지 답사 여행을 떠난다. 제물포 세관에 근무하던 헌트(J. H. Hunt)와 동행하여 떠난 이 첫번째 여정은 서울을 출발하여 고양, 장단, 옛 도읍지 송도, 김천, 통천, 평산, 서흥, 황주를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으며 5월 12일 다시 서울로 돌아온 한달간의 여정이었다.
다음해 4월에는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두번째 평양방문을 한다. 그러나 이때는 선교사에 대한 유언비어로 인해 선교금지 조치가 내려져서 한국정부의 시책에 협조하기 위해 즉각 귀경하게 된다. 금지령이 풀린 그해 10월에는 스크랜톤 의사와 같이 의주를 순회하면서 초가집 한채를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케 함으로써 감리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한명의 세례인과 14명의 학습인으로 구성된 교회였다.
이듬해인 1889년 8월에는 존스(G. H. Jones)선교사를 동반하여 말을 타고 충청도의 공주와 강원도의 원주를 거쳐 경상도의 대구와 부산까지 16일에 걸쳐 순회전도를 하였다. 신자 한 사람도 없이 둘이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상황속에서도 8개도 가운데 6개도를 선교차 방문 여행 하였고, 1888년 한해동안 약 7,200리(1,800Mile)의 미개척지를 순회전도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다양한 활동과 업적
아펜젤러는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시작, 고종으로부터 그 이름을 하사받은 배재학당을 비롯하여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 선교에 열중하였다. 당시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담하여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고,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뿐만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門)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 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 』(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 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톤,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활동 및 교육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44세의 안타까운 최후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이던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키 위해 인천에서 배로 출발했다. 오사가 선박회사가 운영하는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그날 밤 10시쯤에 어청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짙은 안개로 지척이 구분되지 않아 같은 회사의 키소가와 마루와 충돌하여 파선, 침몰했다. 당시 생존자 보울비의 설명에 따르면, 배가 충돌하자 그 충격으로 보울비 자신은 바닥에 쓰러졌고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방 맞은편 선실에서 독서를 하던 아펜젤러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치면서 계단을 향해 앞서 나가고 있었다. 2분도 채 되기 전에 갑판 앞부분의 반이 물에 잠겼고 선미는 물 밖으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배는 계속 가라앉고 아펜젤러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와 동행했던 그의 조수이며 비서인 조한규(조성규)씨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목포 집으로 가는 한 어린 여학생을 구하려는 듯 했다. 배는 거의 45도로 기울며 가라앉았고 다음 순간 보일러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뒤집어진 구명정을 붙들고 45분동안 물위를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결국 아펜젤러 목사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영원히 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사고로 아펜젤러를 비롯한 일본인 승객 4명, 한국인 승객 14명, 선원 8명이 사망하였다. 선교를 위해 삶을 바친 아펜젤러 목사는 주님의 말씀대로 목숨까지도 타인을 위해 바치는 큰 사랑을 이루고 떠난 것이다./선교타임즈 200007/ 0047
[1901년] 바이올린 연주자 채동선(蔡東鮮) 출생
← 민족음악가 채동선
1901. 6. 11 전남 보성~1953. 2. 2 부산.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졸업 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으며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 〈그리워〉에 곡을 붙였는데 그의 동생인 소프라노 선엽(善葉)의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되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37년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육자배기〉·〈춘향가〉 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 지휘도 했다. 52세에 부산 피난중 급성복막염으로 죽었다. 1983년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망향〉·〈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 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98년] 변법자강운동 개혁안 채택
← 장지동, 석판화
1898년 6월 11일 중국에서 일이난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캉유웨이(康有爲)의 급진개혁안이 채택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정치·사회 제도의 서구식 개혁이 제기되었다. 캉유웨이와 장지동(張之洞, Zhang Zhidong)은 각각 급진 개혁과 보수 개혁의 입장에서 서구식 산업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광서제는 캉유웨이가 제안한 개혁안 가운데 외국의 유익한 문물을 배우자는 안건을 우선적으로 채택했다. 이후 캉유웨이와 그의 제자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고문으로 추대되어 사회 각 부문의 전면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보수 특권층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개혁운동은 100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브리태니커
[1894년] 갑오농민전쟁 중 전주화약 체결
← 전봉준의 생가(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사적 제293호
1894년 6월 11일 갑오농민전쟁 중 농민군과 정부간에 휴전화약이 성립되었다.
그해 4월 전라도 무장면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5월 31일 전주성 점령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 지휘하의 정부군과 농민군 간의 공방전 속에 희생자가 늘어나자 정부는 청에 원병을 부탁했고, 이를 구실 삼아 일본군까지 상륙했다. 청·일의 개입으로 국제분쟁의 국면에 처하자 당황한 정부는 농민군을 회유했다. 농민군의 지휘자인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하겠다고 했다. 결국 농민군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전주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시행했다./브리태니커
[1864년] 20세기 초 대표적인 독일의 작곡가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출생
← 슈트라우스, Max Liebermann이 그린 초상화(1918)
1864년 6월 11일 태어남 / 1949년 9월 8일 죽음
"나는 일류 작곡가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급의 이류 작곡가이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947
슈트라우스는 20세기초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수업을 받았고,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21세 때부터 마이닝겐·뮌헨·바이마르·베를린 등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25세 때에는 교향시 <돈 주앙 Don Juan>으로 작곡가로서도 호평을 얻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로베르트 슈만, 뒤이어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썼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니체의 작품에서 따옴)를 비롯한 교향시들은 현대 오케스트라의 표현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작업한 <살로메 Salome>(1905)·<엘렉트라 Elektra>(1909) 등의 오페라들은 발표 당시 유럽의 가장 전위적인 작품들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나치와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심한 고초를 겪으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브리태니커
[1880년]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랜킨 출생
← 랜킨(1918)
1880. 6. 11 미국 몬태나 미줄라 근처~1973. 5. 18 캘리포니아 카멀.
강경한 여성해방운동가로서 평생 동안 평화주의자 및 사회·선거 제도 개혁가로 활동했다. 여러 대학에서 공부한 뒤 1909년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여성참정권운동에 관심을 보여 이후 5년 동안 워싱턴, 캘리포니아, 몬태나의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고, '전미여성참정권협회'의 법률서기가 되었다. 랜킨은 1916년 하원에 진출함으로써 상하원을 통틀어 최초의 여성의원이 되었다. 여성에게 남편과는 독립된 시민권을 부여하는 최초의 법안을 제출했으며 임산부와 유아에 대한 정부후원의 보건교육을 지지했다. 뿌리깊은 평화주의자로서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옹호했던 그녀는 1917년 대(對)독일 선전포고에 반대한 4명의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모험적인 진보성향은 공화당 상원의원 공천을 어렵게 만들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1940년 저넷 랜킨은 반전(反戰)을 선거 이슈화하면서 하원에 복귀했다. 진주만 기습(1941. 12. 7) 이후 대일 선전포고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말미암아 그녀의 정치생명은 사실상 끝이 났다. 랜킨은 의회 진출을 포기했으나 사회개혁에 관한 강연을 계속했고 조지아 주에 여성협동자영농장을 건설했던 1960년대까지 급진적인 남녀동권주의를 고수했다. 그녀는 다시 평화운동에 뛰어들어 베트남전 개입중지를 역설했으며 1968년 1월 15일 87세의 나이로 '저넷 랜킨 여단'을 자처하는 5,000명의 여성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앞에서 베트남전 반대시위를 벌였다./브리태니커
[1847년]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지도자 포셋(Fawcett, Dame Millicent Garrett) 출생
← 포셋
1847. 6. 11 잉글랜드 서퍽 알데버러~1929. 8. 5 런던.
적대적인 남성들에 대항하여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에밀린 팽크허스트와 그녀의 딸 크리스터벨 팽크허스트의 과격한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1905년부터 이들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871년 영국 최초의 여자대학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대학교 뉴넘 칼리지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녀는 급진적인 성향의 선주(船主)인 뉴슨 개럿의 10명의 자녀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다. 1867년 4월 23일 급진주의적인 정치가이며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정치경제학교수였던 헨리 포셋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이 시각장애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남편은 1868년 여성 참정권에 대한 연설을 계기로 시작된 그녀의 사회활동을 도왔다. 1897년 포셋은 전국여성참정권단체연합의 의장이 되었다. 1918년 드디어 약 600만 명의 영국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인민대표법(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이 통과되었다. 10년 뒤 영국의 여성들에게는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1919년 포셋은 전국동등시민권연합(National Union for Equal Citizenship)으로 이름을 바꾼 전국여성참정권단체연합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1901년 7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쟁중에 포셋은 영국 정부의 명령으로 보어인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조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자신이 이끌던 조직을 동원하여 조국을 지원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로부터 데임(Dame)의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그녀의 사후에도 계속 애독되고 있는 〈정치경제학 입문 Political Economy for Beginners〉(1870, 9판 1904)과 소설인 〈재닛 동커스터 Janet Doncaster〉(1875) 외에 〈여성의 승리, 그리고 그후 The Women's Victory─and After〉(1920)·〈내가 기억하는 것 What I Remember〉(1924)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4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현대 비자금 150억원 받은 혐의로 징역 12년 선고
2003년 ‘영화 100년간 최고의 영웅’, 그레고리 펙 별세
2003년 미국 프로 테니스선수 앤드리 애거시, 1000번째 경기 수립
1998년 중국 공산당과 일본 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이후 단절되었던 상호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
1997년 제2차 북미 미사일 회담 (뉴욕. -13일)
1988년 사회정화위원회 폐지
1984년 이탈리아의 공산당 서기장 베를링구에르 사망
1981년 제1공영호(선원21명) 서해북방한계선서 납북
1981년 이란의 켈만주에 대지진, 1500~3000명 사망
1980년 알지에 석유수출국기구(OPEC)총회, 원유의 가격통일 실패
1979년 미국 민간대외원조협회(CARE) 한국서 철수
1977년 네덜란드군, ‘몰루카’ 테러범 습격 인질 51명 중 49명 구출
1976년 김영삼 총재사퇴 선언
1974년 브라질의 대통령(1945-50) 두트라 사망 - 입헌민주주의 회복
1971년 리비아, 대만과 단교 중국 승인
1970년 러시아 총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사망
1969년 캄보디아, 미국과의 국교재개를 통고
1968년 프랑스, 반드골 학생데모 격화
1965년 베트남 쿠데타(5차)로 웬반티우 장군, 웬까오끼 장군 공동 집권
1942년 미국-소련 상호원조조약 조인(워싱턴)
1930년 중국 중앙위, 이입삼노선 채택 (도시무장봉기 결의)
1925년 삼시협정(미쓰야협정)으로 재만(在滿)한인의 단속강화
1923년 경성무선전신국 설치
1908년 의병장 허위 피체
1899년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한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출생
1895년 1955~1958년 소련총리로 재임한 불가닌 출생
1894년 동학군 전주성포기 동학혁명 종식 관군 전주성 점령
1815년 영국의 초상 사진작가 캐머런 출생
1475년 신숙주 사망
1294년 영국의 신학자 겸 철학자 로저 베이컨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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