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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찬호 (1973~)
한국인으로서는 메이저리그에 처음 진출한 야구선수이다.
1973년 6월 29일 공주에서 박제근-정동순씨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공주 중동 초등학교 3학년때 육상선수에서 야구선수로 전향했다.
이후 공주 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공주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에 2학년을 마친 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1994년 1월 14일 계약금으로 120만달러에 자유계약선수로 LA다저스에 입단하여
그해 2경기서 방어율 11.25를 기록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96년 다시 메이저리그로 복귀하여 4월 시카고 컵스전에서 첫승을 올렸다.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참여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병역면제가 되었다.
박찬호의 등번호는 61. 그러나 원래 61번은 박찬호의 등번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줄곧 16번을 달았으나 입단 당시(94년) 투수코치였던
론 페로나스키가 쓰고 있어 16을 뒤집은 61을 달게 되었다. 그
토록 달고 싶어하던 16번은 페로나스키 코치가 그만두던 95년에 입단한 노모의 차지가 되었다.
2001년 시즌을 마감으로 박찬호는 8년만에 LA를 떠나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연봉은 5년간 6500만달러(옵션계약에 의해 실제는 7100만달러)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해 내셔널리그에서 아메리칸리그 소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저스에서 박찬호는 에이스 케빈 브라운에 밀려 제2선발에 머물렀다.
하지만 에이스급이 없는 텍사스에서는 실질적인 에이스 투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텍사스 이적 후 박찬호는 허리 부상 등으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다.
2010년 8월 4일, 내셔널 리그 중부 지구 팀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박찬호를 영입하였다.[27]
2010년 9월 13일,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로 개인통산 123승 97패를 기록해,
노모 히데오가 2005년 수립한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과 타이를 이뤘다.
그로부터 몇 주 후인 2010년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 구원등판,
3이닝 6삼진의 호투와 함께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는 박찬호의 개인통산 124승 기록이다.
이로서 노모 히데오가 2005년 수립한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는 위업을 세웠다.
2.박지성 (1981~)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1981년 서울 출생이다. 현재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소속.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초등학교 시절 처음 축구를 시작한 박지성은 명지대에 입학한 후
2000년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경기에 데뷔하였으며, 2000년 6월 대학을 휴학하고
일본 프로리그팀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했다.
최연소 J리그 진출 한국선수였던 그는 주전으로 맹활약하며
2001년에 2부리그로 전락했던 팀을 2002년에는 1부리그로 끌어올렸다.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어 활약함으로써 차세대 축구스타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02년 5월21일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헤딩 동점골을 성공시킨데 이어
5월26일 세계랭킹 1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왼발로 동점골을 뽑아내 이목을 끈
그는 6월14일 월드컵 D조 예선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한국의 월드컵 4강진출의 밑거름이 됐다.
성실함과 재능으로 월드컵 당시 한국팀 감독이었던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그는 2002년을 마지막으로 J리그를 떠나,
2003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네덜란드 프로축구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2005년 7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3.김연아 (1990년 9월 5일 ~ )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010년 동계 올림픽 여자 싱글 챔피언, 2009년 세계 선수권 챔피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메달리스트, 세계 선수권 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또한, 2009년 4대륙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우승, ISU 그랑프리 파이널 3회 우승을 비롯해,
참가한 모든 국제 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09년 세계 선수권에서 총점 207.71을 기록해 여자 싱글 최초로 200점을 돌파하였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쇼트 프로그램 78.50점, 프리 스케이팅 150.06점,
총점 228.56점으로 세계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다.
김연아는 1990년 9월 5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아버지인 김현석과 어머니 박미희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김연아는 7살인 1996년에 스케이트를 처음 시작했고,
14살인 2003년에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김연아의 코치로는 지현정, 김세열 등이 담당했었고,
2007~2010년엔 캐나다의 브라이언 오서가, 2010년 10월 이후로는 피터 오피가드가 맡고 있다.
김연아의 대부분 프로그램의 안무는 2006년부터 함께한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이 만들었다.
훈련지는 2007년부터 2010년 8월까지는 캐나다 토론토 크리켓 스케이팅 컬링 클럽이었고,
현재는 페어출신 미국인 선수이자 미셸 콴의 형부인 피터 오피가드와
미국 LA 이스트 웨스트 아이스팰리스 에서 훈련중이다.
현재 소속사는 올댓스포츠이며, 공식 스폰기업으로는 KB국민은행, 나이키, 현대자동차 등이 있다.
김연아는 주니어 데뷔 후 역대 참여한 경기에서 3위 밖에 밀려난 적이 없으며,
이런 기록은 1960년 캐롤 헤이스 이후 김연아가 처음이다.
2006-2007시즌 충격적인 시니어 데뷔와 함께 세운 세계 신기록을 자신이 계속 경신하는 중이며,
마지막에 세운 세계 신기록은 2010년 벤쿠버 올림픽에서 받은 점수다.
2010년 월드컵 이후 뉴욕 타임즈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혔으며,
미 국무부 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에게 편지를 받고 미셸 콴이 김연아의 아이스 쇼에서 복귀를 하는 등
다방면의 저명인사와도 친분이 있다. 미셸 콴, 크리스티 야마구치, 알렉세이 야구딘, 카타리나 비트,
샤샤코헨 등 피겨 스타들 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언론들과 은 김연아를 피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한다.
G20 홍보대사, 유니세프 친선대사 등 다방면의 홍보대사를 역임하며 광고모델로 얻은 수입의
대부분을 피겨 꿈나무들을 위해 기부하는 등 김연아는 명실상부한 '스포츠 스타', '피겨 스타'다.
군포시의 신흥초등학교, 도장중학교, 수리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재학중이다. 취미는 웹서핑, 음악감상 등이 있다.
4.추신수 (1982년 7월 13일~)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난 프로야구 선수로, 부산고를 거쳐
2000년말 계약금 137만 달러를 받고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였다.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선수(MVP)와 함께 최우수투수로 선발되기도 했지만 시애틀 입단 후 타자로 전향했다.
2002년과 2004년 마이너리그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 출전하였고
2004년 시애틀이 자체 시상하는 '올해의 마이너리거'로 뽑혔다.
2005년 시범경기에서 타율 0.350 1홈런 4타점으로 맹활약한 후,
시애틀 입단 후 5년만인 2005년 4월 한국인 타자로는 최희섭에 이어 2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서게 됐고 등번호는 54번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로 올라와서 4경기에서 11타수 1안타 4삼진에 그치고
중견수 수비도 적응하지 못해 결국, 2006년 7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전격 트레이드됐다.
2009년, 2010년 아메리칸 리그에서 2시즌 연속 3할 및 20-20 클럽 달성에 성공한 유일한 선수이며,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2010년 11월 19일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에서 대만의 상대로 9:3으로 승리하여
우승하며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5.박세리 (1977년 9월 28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여자 프로골퍼이다.
1977년 대전에서 3녀중 둘째로 출생하여 초등학교 6년때인 89년 골프광인 싱글핸디캐퍼
아버지 박준철씨에 이끌려 골프를 시작한 그녀는 1996년 국내 프로골퍼로 데뷔하였고,
1997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프로테스트에 1위로 데뷔하였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 데뷔한 지 7개월만인 1998년 5월 메이저인
'LPGA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올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골프 스타로 떠 올랐다.
이후 98년 또다른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해 그해 LPGA
'올해의 신인왕'을 수상했다. 2001년 '브리티시여자오픈'에 우승,
2002년 'L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최연소 메이저 4승을 기록했다.
미키 라이트가 지난 60년 25세 4개월여만에 미LPGA 최연소 메이저 4승 기록을 세웠으나
박세리는 만 24세9개월여만에 메이저 4승을 기록한 것이다.
2003년 10월엔 국내에서 열린 남자대회 '동양화재컵 SBS프로골프최강전'에서 공동 10위를 차지,
남자대회 '컷 통과'와 함께 '톱10' 진입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또한 박세리는 2004년 5월 10일 LPGA투어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명예의 전당 입회에 필요한 포인트 27점을 모두 채웠다.
그러나 투어경력 10년이상이라는 입회 조건때문에 2007년에 한국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2006년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6. 반기문 (1944.6.13~)
1944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나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충주고 2학년 때 '외국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보고 외교관의 꿈을 더욱 키우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1970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5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외무부에 재직중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 유학하여 1985년 4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2년 주뉴델리 부영사를 시작으로 1976년 주인도대사관의 1등서기관,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2년 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거쳐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다.
1993~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 총책 역할을 하였다.
또 1997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이 망명할 때 중국과 필리핀을 오가면서
밀사 역할을 하여 망명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외교통상부 내에서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나 있다.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중인 2006년 2월 유엔 사무총장직에 출마할 것을 공식 선언하였다.
같은 해 10월 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단독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14일 유엔 총회에서 공식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07년 1월 1일부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 2001년 오스트리아 명예대훈장을 받았고,
2002년에는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6년에는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 알제리 국가유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7.장미란(1983년 10월 9일~)
대한민국의 여자 역도 선수로 신장 170cm에 체중 114kg이며, 고양시청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때부터 국가대표로 뛰기 시작한 그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2006~2009년 대회 4연패를 달성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2010년 11월 현재 +75급 세계 랭킹 3위에 올라 있다.
장미란은 1983년 10월9일 새벽 강원도 원주에서 장호철씨와 이현자씨의 2녀 1남 중 맏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체중이 5.9㎏였던 장미란은 상지여중 3학년 초까지 평범한 소녀로 자라났다.
학교성적은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고, 피아노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큰 체격만큼이나 식욕이 좋아 어머니로부터 너무 많이 먹는다며 자주 구박을 들은 것 정도가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역도를 시작한 때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98년 겨울방학 무렵으로,
공부에 흥미를 잃고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좋은 고등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역도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역도를 택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뒤늦게 시작한 역도였지만 장미란은 금방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바벨을 잡은 지 열흘 만에 출전한 강원도내 중학생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고무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역도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고,
역도를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2002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장미란은 2002년 아시안 게임 여자 역도 최중량급(+75㎏)에서 은메달을 땄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역도 +75㎏급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이후 2005년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 여자 +75㎏급 용상과 합계 금메달, 인상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여자 역도 +75kg급에서는 인상에서 139kg으로 세계 신기록을 세운
중국의 무솽솽에게 합계 4kg을 뒤져 은메달에 머물렀다.
그녀는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특수재능 보유자 체육특기자로 합격하여 2005년 입학했다.
2007년 2월 20일에는 강원도 원주시청에서 경기도 고양시청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계약금 1억7천만 원, 연봉 1억 원 등 3년간 총 4억7천만 원의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으며,
이는 한국 역도 사상 남녀 선수를 통틀어 최초의 연봉 계약이었다. 그러나 소속팀 변경 직후
옛팀이었던 원주시청이 대학생 신분으로 실업팀에 소속되어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장미란의 선수자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결국 부득이하게 고려대학교 자퇴를 선택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장미란은 8월 16일 오후 베이징항공항천대학 체육관에서 열린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kg과 용상 186kg을 들어 올려 합계 326kg을 들어 올려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했다.
공동 세계 랭킹 1위였던 라이벌 무솽솽은 올림픽에 불참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훈련하다 허리부상을 당해 정상적인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참가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75kg급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하계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모두 한 번 이상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당시 경기에서 장미란은 중국의 멍수핑과 접전 끝에 311kg의 동일한 합계 중량을 기록했으며,
이에 따라 체중이 780g 더 가벼웠던 장미란이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2월 4일 고양시 덕양구에서 개관한 국내 최초의 역도 전용 체육관은
장미란 선수의 이름을 따 ‘장미란 체육관’으로 명명되었다.
8.박태환(1989년 9월 27일 ~ )
대한민국의 수영 역사상 최초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에서의
금메달과 자유형 200m에서의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수영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는 5살 때 의사의 추천으로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 수영을 처음 시작했다.
대청중학교 3학년 때인 2004년 대한민국 선수단 중 최연소 국가 대표로 주목을 받으며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으나 자유형 400m 예선에서 긴장으로 인한 부정출발로 실격당했다.
2005년 한 해 동안 무려 여섯 개의 대한민국 신기록을 세우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
2005년 11월, 마카오 동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자유형 400m에서 3분 48초 71로 대한민국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자유형 1500m에서 15분 00초 32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은메달을 땄다. 1500m는 이 때가 생애 첫 출전이었다.
2006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15회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시안게임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후 그는 태릉선수촌을 나와 개인 훈련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코치 교체 등 잡음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7년 1월부터는 괌과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2개월 여 동안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2007년 3월 25일에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자유형 400m 경기에서 예선 2위의 성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그는 350m 지점까지 4위를 달리다가 마지막 50m에서 역영을 펼쳐,
3분 44초 30으로 2·3위를 기록한 튀니지의 오우사마 멜로리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랜트 해켓을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기록은 자신이 갖고 있던 대한민국 기록이자 아시아 기록을 1초 42 앞당긴 것이다.
2007년 8월 21일에는 프레 올림픽 대회인 2007 일본 국제 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3분 44초 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박태환은 2008년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현재 경기도 용인시 죽전캠퍼스에 재학 중이다. 그동안 단국대뿐만 아니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한체대 등 대학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아왔다.
박태환과 가족의 결정은 간판보다 장래 진로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더욱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도 이번 결정에 "만족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태환의 꿈은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뒤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다
2008년 1월부터는 12월 까지 배우겸 가수 윤은혜와 함께 의류 제조 업체 베이직하우스의 제6대 광고 모델로 활동 하였다.
또한 김연아와 함께 출연했던 다이내믹 코리아 홍보대사와 KB국민은행 광고를 시작으로 SK텔레콤 휴대폰 광고,
'2009 코리아매치컵 세계요트대회'의 홍보대사와 우유소비홍보대사로 활동하였고 2010년에는 서울교육청은 추진하는
‘서울 학생 7560+ 운동’의 저변 확대를 위해 그룹 소녀시대의 서현과 홍보대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에 은메달까지 추가하며
한국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박태환이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부터 광고모델 요청을 20건 넘게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8월 10일에는 베이징의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수영 400m 자유형에서 3분 41초 86의
기록으로 그랜트 해켓, 장린 등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어 8월 12일에 벌어진 수영 200m 자유형 종목에서
1분 44초 85의 기록으로 마이클 펠프스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했다.
올림픽 이후 심적 부담감 등의 이유로 심각한 부진에 빠진 박태환은 2009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자유형 200m, 400m, 1500m 전종목 예선탈락이라는 부진에 빠지게 된다.
전신수영복에 대해 적응을 못하던 그는 2010년 1월 1일 부터 전신수영복 금지 규정이 생기면서
다시 한 번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2010년4월 부터 80일간 호주 전지훈련에 매달린
그는 1500m를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지구력 위주로 훈련을 하게 된다.
2010년8월 19일 2010 팬퍼시픽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200m 은메달을 손에 거머쥐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올렸다.
하지만 하루에 두 경기를 소화한 박태환은 주종목인 1500m에서는 8위 라는 부진한 성적을 내게 된다.
그러나 2010년 8월 21일에 열린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중국의 장린을 따돌리고 전대회에 이어 2연패를 하게 된다.
한편 박태환은 2005년 울산 전국체전, 2007년 광주, 2008년 전라남도 전국체육대회에서 MVP를 수상하였으며
그동안 2005년 전국체전 4관왕, 2006년 ~ 2008년 연속 5관왕에 올랐다. 또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수영 국가대표,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로 뽑혔다.
2010년 11월 14일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제 16회 아시안 게임 남자 200m 자유형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 최고 기록을 0.05초 앞당기면서 금메달을 땄다. 남자 400m 자유형,
남자 100m 자유형에서도 나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전 대회(2006년 도하)에 이은
2대회 연속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쌓게 되면서 한국 수영사의 최고의 대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도핑검사를 여느 선수보다 많이 받았다.
9.백남준 (1932.07.20~2006.01.29)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작곡가, 행위 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세계성과 한국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계 속에 우뚝 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치열하게 실천한 위대한 예술가이다.
서울. 거부의 아들로 태어남
백남준은 1932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백낙승씨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홍콩을 무대로 한 무역상이었다.
그의 부친은 당시 종로 5가와 동대 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백씨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대부 격이었다.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임
백남준은 애국 유치원과 수송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남자가 시끄럽게 피아노를 뚱땅거리면 못쓴다"는
부친의 엄격한 훈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큰누이 희득(熙得)의 피아노 레슨 시간을 이용하여 어깨너머로 슬금슬금 피아노를 배웠다.
그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게 된 때는 경기 공립 중학교(당시 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경기 중학 음악 교사는 피아니스트 신재덕(申載德) 선생(전 이화여대 음대학장, 89년 작고)이었다.
신재덕 선생은 재주덩어리인 백남준에게 피아노뿐만 아니라 작곡과 성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음악 수업을 시켰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가 이건우(李建雨)를 만나 백남준은 음악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백남준은 음악에 대한 재질은 뛰어나서 이건우로부터 사사 받고 있을 무렵에 다섯 개의 간단한 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일본으로 유학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거기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백남준은 집안의 대이동 등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51년 도쿄대학 미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거기서 백남준은 전후 일본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타케우치 토시오(竹內敏雄) 교수로부터 미학을,
노무라 요시오(野村良雄)로부터 음악학을,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시라이시 아키오(白石顯雄) 교수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특히 노무라 요시오 교수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에다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던 경력을 가진
평화주의자였다. 백남준은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 서적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 백남준은 당시 현대 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뮌헨 대학 대학원의 음악과 석사 과정에 응모하여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독일에 도착한 56년에는 백남준은
뮌헨 대학에서 음악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은 당시 준비 중이던
안톤 베버른에 관한 음악사 석사 학위 논문을 중단하고 보수적인 뮌헨을 떠나 보다 전위적인 음악이 환영받던
프라이부르그로 옮겨버렸다. 그 곳에서 백남준은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로부터 작곡의 기본에 관한 다양한 사항들을 배었다.
뮌헨대학에서 존 케이지를 만남
58년에는 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 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케이지는 서양 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18세기 악기가 내는 소리만을 음악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고
정 관념에 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 음악가이다. 그는 종래 음악의 정의를 폭넓게 해체시킨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공격적인 행위 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2년 5월에 백남준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조셉 보이즈을 만났다.
보이즈는 낯선 독일에 살던 한국인 백남준을 극진히 보살펴주며 동시에 퍼포먼스를 함께 열어 자신과
동반자 관계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켜주었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였다. 백남준과 보이즈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관여되어 있다.
독일 부퍼탈에서 음악을 전시함
63년 백남준은 독일 유학 시절에 부친이 보내주는 학비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5·16군사혁명이 나면서 재산이 몰수되는 등, 집안이 어렵게 되자 부친은 학비를 더 이상 부쳐줄 수 없다는
연락과 함께 마지막 송금을 하게 되었다. 그 마지막 송금액으로 그는 텔레비전 13대 샀다.
그리고 3월에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는 텔레비전 13대가 동양의 젊은 예술가 백남준에 의하여 호되게
괄시 당하고 억압당하는 매우 공격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발상에다 그 전시가 전자 텔레비전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 비디오 예술의 첫 전시회로서 백남준 신화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 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이라는 예술 영역을
새로 개척한 이벤트인 동시에 비디오 역사의 장을 연 문제의 전시이다.
그는 13대 가운데 12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온전히 살려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을 하도록 조작해 놓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조작하여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하였고 이것을 'tv 참선'으로 제목을 붙였다.
배치 방법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우연적으로) 유도하였으며 관객이 접근하여 매만지거나 건드려야 작동되도록,
즉 tv 문화를 관객의 지배 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전시회의 기본적인 개념은 60년대 대중 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라디오+그림'으로 해석해 볼 때 음과 이미지의 결합은 예술에서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관객이나 언론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미국 뉴욕으로 옮겨감
64년 6월, 미국 뉴욕에서는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이 전위 음악가이자 플럭서스 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만과 백남준은 '괴짜들'을 멋지게 공연한 뒤, 당시 뉴욕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던 팝아트의
물결을 응시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정착하였다. 그곳에는 케이지가 있었고,
플럭서스의 동지인 조지 마치우나스, 알란 카프로우, 조지 브레히트, 벤자민 패터슨,
앨리슨 노울즈 등 독일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그의 뉴욕 정착을 적극 돕고 나섰다.
무어만은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인 도움으로 백남준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이들은 관념적 예술 형식을 버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예술의 이름으로 시도하였으며
신체적인 밀착 공연을 벌인 것은 물론 심지어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등 스캔들도 일으켰다. 당시 뉴욕 예술계는 예술과 외설 시비에 대한 차별성 및
예술적 표현 자유의 확보를 위하여 이들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결과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외설과 예술의 표현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판결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백남준 미학-참여와 소통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놓고 예술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예술은 이 때문에 늘 공격적이고 반미학적이며 매체
저항 의지를 담고 있다. 또 관객이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에 관계하고 작품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차원으로
발전되었는데 관객 참여 방식에 의한 예술적 실천은 백남준 미학의 중요한 하이라이트이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예술의 독재, 또는 독백 예술로 간주하였다.
백남준 예술의 재미는 역시 예술과 대중의 만남이며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이다.
예술 대중주의를 위한 백남준의 시도는 바로 인간화된 예술을 향한 도전이었으며 그의 시각은 그래서 위력적이다.
백남준은 단순히 비디오 예술의 첫 개척자나 시행자가 아니라 새로운 비디오 예술 도구나
방법론을 개발해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가 개발한 비디오 기술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자석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의 이미지를 뒤틀리 하면서 예술적으로 바꾸었던 시도는
후배 비디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여 비디오카메라가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속성을 다양한 컬러와 이미지효과를 곁들여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다른 비디오 예술을 창조한 것은 백남준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10. 이철호
노르웨이 사람에게는 미스터 리로 통하는 한국인이 있다.
노르웨이에 라면을 처음으로 알린 미스터 리. 머나먼 북극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을 바꾼 라면 왕 미스터리.
그는 노르웨이 최초의 한국인 이철호이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의 노르웨이 왕국. 산과 호수의 나라요,
해운왕국이기도 한 노르웨이는 산유국으로 일인당 국민 소득 이만 칠천 달러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진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이다. 그러나 인구 400만. 단촐하기만 한 이 바이킹 후예들의 삶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 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2000년 11월 초, 노르웨이의 북부, 인구 1만 8천명의 작은 도시 나르빅의 지방 신문에는
그 전날 있었던 학생들의 무단 결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연인 즉, 그 지역에 새롭게 문을 여는 백화점의 개업 기념 라면 시식 행사에 참석한
'미스터 리'를 보기 위해 일단의 학생들이 결석했다는 것이다.
이때 그 백화점의 라면 시식 행사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바비 인형 같은 북구의 금발 미녀들이 코믹한 외모의 이철호 씨를 둘러싸고
'미스터 리'를 연호하며 미스터 리가 직접 끓인 '미스터 리' 라면을 맛보기 위해 줄을 서고,
사인을 받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미스터 리'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의 상표이자, '라면'이라는 식품을 최초로
노르웨이에 퍼뜨린 이철호를 가리킨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말한다. 노르웨이에는 왕이 두 사람이라고.
국왕과, 라면 왕 미스터 리. 'king of noodle'로 불리우며 노르웨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철호,
팬클럽까지 있는 그의 목소리와 모습은 영화, tv, 라디오 광고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벽안의 젊은이들. 미스터리 덕분에 이들은 벌써 라면 맛에 길들어져 있다.
이철호가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개발하여 한국의 한 라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미스터 리 라면은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라면 미스터 리만큼이나 사람 미스터 리를 또한 좋아한다.
미스터 리 덕분에 북유럽의 소녀들에게도 이제는 라면이 친숙한 음식이 됐다.
그러나 10여 년 전만 해도 노르웨이에는 라면이 없었다.
그러나 국수를 좋아하는 이철호는 자기가 먹으려고 라면을 들여 왔고 혼자 먹기 아까워 라면을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하면서 마치 솥 닦는 쇠줄이나 걸쭉걸쭉한 걸레 같은 것이라고
이상한 것이라고 안 먹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것이라 1년도 좋고 2년도 좋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안 먹으면 내가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라면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온 것이었다.
요리사인 그에게 라면왕이라는 호칭과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 것은 바로 라면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라면왕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판매소에 가져다 놓아도 한 쪽에 그대로 쌓여 있고,
맛보라는 라면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러나 이철호는 사람들이 귀찮아 할 정도로 꾸준히 찾아다녔다.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다. 라면이 걸레 같다며 꺼리던
노르웨이 사람들을 라면 미스터 리보다는 미스터 리를 먼저 좋아하게 만들었고,
성실하면서도 기발하고 코믹하면서도 진지한 그 자신을 좋아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라면은 절로 팔리게 되었다. 이렇게 노르웨이 사람들이 라면을 먹게 하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철호는 라면 세 박스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연간 8천만 개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음식으로 치부하던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라면을 먹게 한 것은
이철호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구의 저녁 해는 일찍 진다. 오후 서너 시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저녁때면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다.
불편한 다리로 하루 종일 서있는 이철호는 저녁이면 무척 고단하다.
그러나 그가 꾸준히 초중고를 찾아다니는 것은 젊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자기가 육체적으로 건강이 부족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머리,
이 안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루어낸 자신을 떳떳이 내보이면서.
이제 그는 초중고에서 아주 인기 있는 강사이다. 그
의 강의는 젊은 학생에게 삶의 목표와 그리고 노력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한
내용을 주축으로 한다. 그것이 가능하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신념에 기인한다
인구 400만 명의 노르웨이에 연간 8000만 개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서 6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는 라면 왕이 되기까지 그는 평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천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철호는 한국 전쟁의 와중에 가족들과 헤어진다.
13살 때의 일이다. 먹을 것을 얻으려고 미군부대 주위를 전전하던 그는 구두도 ‹m고,
심부름도 해주던 그는 귀염을 받기 시작한다. 고등학생이던 형의 어깨너머로 익힌 몇 마디의 영어 덕분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폭탄 파편으로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치게 된다. 그러자 미군들은 그를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노르웨이의 이동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의료진들은
이철호의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전신 깁스를 한 그를 노르웨이에 데려왔다.
이렇게 그는 노르웨이의 최초의 한국인이 된 것이다.
다리를 절기는 해도 7년 간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그는 노르웨이에 남기로 결심한다.
구두닦이가 하나도 없는 노르웨이에서 구두닦이를 하면 성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두닦이를 하려고 하여도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초 학력은 있어야 했다.
고학을 시작한 그는 청소, 접시닦이, 벨보이, 변소치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며 호텔 경영학과 경영학을 배웠고 자신의 어릴 적 꿈인 구두닦이 대신 요리사의 마스터가 되었다.
이철호는 딸만 셋을 두었다. 이 딸들이 사춘기 때부터 혼자 힘으로 키우다시피 했다.
스위스에서 요리 공부를 할 때 만난 아내는 독일인이었다.
역시 요리사였던 그녀는 머나만 나라에서 온 혈혈단신 이철호를 잘 이해해 주던 사람이었다.
딸 셋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몄으나 아내는 어린 딸을 두고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애들이 어느 정도 크자 아버지에게 여자 친구를 구하던지 결혼을 하라는 성화에 못 이겨 1
0여 년 전에 한국 여성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잃어버리고 있던 한국말을 한국인 아내에게 배워 다시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의 한국에 대한 인식과 사고 방식은 그가 한국을 떠나온 5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한국을 잊지 않으려 그가 홀로 쏟아 부은 노력은 눈물겹다.
초등학교 때의 교과서를 읽고 또 읽어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그 노력 덕분인지 교과서 내용을 모두 외워버린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노르웨이 생활 45여 년. 그 중 30여 년은 노르웨이 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우렸고,
지난 10년은 한국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기간이었다. 그는 노르웨이에 한국을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편 그는 25년 전부터 매년 11월 두 번째 금요일, 한국 전쟁에 참전한 노르웨이의 의료진들을 위한 만찬을 열어왔다.
이날은 은혜를 갚는 날이다. 아니 기억하는 날이다. 한국 전쟁 때에 노르웨이는 전투 병력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600여 명의 의료 병력을 보내왔었다. 처음 500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100여명으로 그 숫자가 매년 줄어들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지만, 왠지 허전함이 앞선다고 한다.
이철호 혼자서 이 일을 이끌 때보다는 교민회와 대사관이 함께 주최하기 때문에 많이 짜임새 있는 모임이 되었다.
이철호는 세월이 더 흘러 열남은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면 집으로 초대해서 행사를 치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이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 행사야말로 이철호의 꿈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자신의 은인인 노르웨이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두닦이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이철호. 그는 언제부터인가 노르웨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는 젊어 한때 물에 적신 빵을 먹을 만큼 가난했고, 혼자서는 걷지 못할 만큼 몸도 불편했으며
머나먼 땅에서 이방인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미스터 리.
그러나 산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산으로 갔던 그는 이제 라면 왕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한국과 노르웨이 두 개의 조국을 행복하게 해 줄 꿈을 꾼다.
11. 전월선(1958~ )
일본의 오페라 계에는 한국인 프리마돈나 전월선이 있다.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당당히 전월선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오페라 계를 석권하고 있는 그녀. 그녀의 노래에는 혼이 실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월선은 일본이라는 좁은 무대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노래 하나만으로
쉽게 넘을 수 없을 것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한계선을 재일 교포 오페라 가수라는 명함으로
자유로이 오가며 크나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의 힘찬 행진은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고의 오페라단에 입단하는 사건을 계기로 전월선이라는
이름을 일본에 널리 알리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던 중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된다.
바로 1985년 평양 세계 음악제에 초청된 것이다. 이때 김일성 주석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힘찬 행진은 그녀를 일본 문화청 예술제에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초청되는 결과를 얻게 한다.
또한 1998년에는 한국에서 일본어로 노래한 최초의 가수라는 사건을 일으켰고,
1999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첫 오페라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처럼 그녀는
'수선화가 핀 듯한 스타', '38도선을 초월한 가희', '통일을 노래하는 프리마돈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15년 전인 1985년에, 전월선은 일본의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다. 그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당당하게
일본 이름이 아닌 전월선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여 왔다. 그녀는 공연에서 오페라 아리아와
일본 가곡 등의 레퍼토리 외에 남북한의 가곡으로 공연 내용을 이끌어 왔다. 전월선은 일본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은 오페라 가수다. 굳이 한국 이름을 가지고 대학 생활,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전월선은 조국의 사랑이 담긴 자신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은 것이다.
전월선은 대학 시절부터 독창회를 열 때에는 꼭 우리 가곡을 불러왔다.
배타적인 일본 문화계에서 오히려 당당히 한국 이름을 가지고 가곡을 부르는 모습으로 인해
그녀의 명성을 더욱 빛을 발한 것일까? 일본 문화청 예술제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초청되는 결과를 얻는다.
외국 국적의 음악가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문화청 예술제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음악가 미야케하루나(三宅棒名)의
연주로 아리아, 가곡, 현대 음악 등 세계 6국의 언어로 노래하게 되었다.
1985년 북한(北韓) 의 평양에서 열린 세계 음악제에 초대되어 세계 80개국의 음악가와 공연하여 폐쇄된
북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김일성 앞에서 노래하는 전월선은 또한 1994년 한국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 카르멘" 공연의 카르멘 역을 연기해 찬사를 받았다.
이로써 재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남한과 북한의 무대에 모두 공연을 실행하게 된다.
그녀의 한국 첫 공연은 일본에서도 "38도선을 초월한 가희"라고 커다란 반응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한다.
광복 50년의 해인 1995년 한국과 일본의 교량 역할이 되고자 동경에서 "전월선 오페라 리사이틀"을 개최하게 된다.
이 공연으로 그는 뛰어난 가창력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게 된다. 전월선으로는 또 한 번의 도약이었다.
전월선은 1996년 12월 한일 오페라 갈라 콘서트, 1998년 1월에 2002년 월드컵 한일(韓日) 공동 개최 오페라 갈라 콘서트
"아시아에서 세계로"(일본의 산트리-홀)에서도 재일 교포로서 유일한 프리마돈나로 연속 출연하였다.
그만큼 그녀는 일본 무대에서 아니 세계 무대에서 인정 받는 프리마돈나이다.
1998년 10월에는 서울시와 도쿄가 우호 도시로 된 10주년이 되는 때였다. 전월선은 도쿄의 친선 대사로서 선정되는데,
서울과 도쿄에서 한국의 노래와 일본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공식적으로
일본어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전월선이 한국과 일본의 협력에 교량 역할을 하는 모
습은 큰 화제가 되었다.
그와 친교를 맺어온 한 지인은 "남북한과 일본 문화 모두에 정통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전월선씨"라며
"일본에서 김대중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다고 평할 정도인 만큼 남북한과 한일 문화교류에
전씨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다"고 그를 평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남북과 한일 문화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류 협력에 자신의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번의 큰 아픔을 겪게 된다. 학도병으로 일본에 끌려와 고
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일본 아이들에게 '조센징'이라며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조국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확고한 교육관을 가진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녀는 조선 민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일본 아이들에게는 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지기 싫다는 생각으로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는 민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는데, 특히 춤, 노래, 무용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그러나 졸업 후 일본에서 명문으로 알아주는 도쿄 예술대학을 가기 위해 입학 원서를 내었다.
하지만 충분히 입학할 수 있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입학을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전월선은 이에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러한 억울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으로
춤과 노래를 배워 나간다. 그후 그녀는 자신의 실력으로 도쿄 예술대학을 입학하게 되고,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그녀에게 또다른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페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전
월선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려 하는데, 여기서도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어려우면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 최고의 오페라단인 이기회를 목표로 삼게 되고
무난히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전월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실력을 늘리기 위하여 성악뿐만 아니라 현대무용,
재즈 댄스 등의 무용을 특별히 배운다. 이때 그녀는 본격적 무용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특히 스페인의 훌라맹고 댄스는 프로급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영역과 실력의 차별화로 성공하는데,
입단 3년만에 독창회를 여는 소득을 얻게 된다.
더욱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이기회에서 오페라의 주역을 맡게 되는 결실을 얻는다.
남북한 모두에서 공연을 펼치며 `38선을 초월한 가희(歌姬)'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전씨는
남북 모두에 혈육이 있는 `민족 비극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남과 북 양쪽을 오가며 노래하는 최초의 오페라 가수 전월선.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민단 활동을 하고 있는 경남 진주 출신이고, 북에는 두 살 때 헤어진 오빠가 살고 있다.
이처럼 전월선의 환경은 누구보다 그녀에게 남북 분단의 아픔을 절실히 느끼게 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경상남도 출신이시죠. 그런데 지난 60년대에는 사촌오빠가 월북,
졸지에 이산가족이 돼 버려 `민족의 아픔'을 제 스스로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남북 공연을 실현한 뒤에 전월선은 통일을 원하는 가곡 "고려산천 내 사랑"을 서울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이 노래를 듣는 재일동포들은 어느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이나 북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련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자매들 아니련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 그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고려산천 내 사랑'을 부르며 하나의 조국을 갖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전월선은 이제 개인이 아닌 남북을 잇는 친선대사의 역할을 자인하고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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