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亂過中전란중에 入입한(있는) 在中七十萬同胞재중국70만동포
車相瓚 차상찬
離鄕去國리향거국하던(고향을등지고고국을떠난) 30餘年여년의 役事노정 = 酷吏혹리(혹독하고 까다로운 관리)/ 馬賊마적과 惡戰苦鬪악전고투하는 悲慘비참한 生活생활 /每年매년 增加증가되는 1,700의 留學生유학생 / 吳偑孚陳前오패부진영에 活躍활약하는 四勇將4명의용감한장군
1. 緖言서언(간략하게요약한글)
朝鮮조선과 中國중국은 國土국토가 接접한 故까닭으로 自來오래전부터 政治上정치상 深切심절한(깊은) 關係관계가 有유함(있음)은 勿論물론이고 兩民族양민족도 互相상호 往來왕래하고 互相(서로) 移住이주하얏다. 特특히 十數年십수년 以來이래로 政治勢力정치세력을 失실하고(잃고) 經濟경제의 逼迫압박을 當당한 우리 朝鮮人조선인은 中國중국의 南北滿洲남북만주를 無上무상의 樂地락지로 思사(생각)하고 年年년년이(해마다) 移住이주하야 其그 數수가 旣기히(이미) 70萬만 以上이상에 達달하얏다. 그러나 그들이 1次차 故國고국을 離리한(떠난) 後후에는 保護보호의 機關기관이 別無별무하고(특별히없고) 通信통신의 聯絡연결이 亦難역난하야(어려워) 果然과연 如何어떠한 地方지방에서 如何여하한(어떤) 生活생활을 하는지 詳知상지하기(자세하게알지) 不能불능하얏다(못하였다). 加之더해서今回금회(이번)에 起기한(일어난) 中國중국의 動亂동란은 直接직접 間接간접으로 在留재류하는(머물고있는) 우리 朝鮮人조선인에게 大影響대영향을 及급한다[큰영향을미친다]. 最近최근 奉天電봉천전보에 依의하면 奉軍중화민국군의 鎭守使진수사 鄧玉麟곽옥린 將軍장군이 安東안동에서 朝鮮人조선인 兵士병사를 募集모집하여 其 大部隊그부대가 旣기히(이미) 山海關산해관 方面방면의 戰線전선으로 出動출동하였다 하고 또 吳偑孚오패부 部下부하에도 3百餘백여의 朝鮮兵士조선병사가 有유하야 戰線전선에 立립하였다(섰다) 한다. 此가(이것이) 果然과연 正確정확한 事實사실인지 不知부지(알지못)하거니와 何方面(어떤방면)으로 보던지 今回이번 戰亂전란은 在留재류 朝鮮人조선인과 關係관계가 大切대절한(크게관계없는) 것은 事實사실이다. 余나는 今지금의 中國 戰亂중국전란을 際제(즈음)하야 特특히 在留머물고있는 同胞동포를 생각하는 同時동시에 그들의 事情사정을 잠깐 紹介소개하고자 한다.
2. 移住의 沿革이주의연혁
愛親覺羅氏애신각라씨가 興흥하야 大擧南下대거남하를 企望기망(성취되기를도모)함에 滿洲만주는 遂수히(드디어) 封禁봉금(일정한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음)의 地지가(땅이) 되야 朝鮮人조선인과 漢人한인의 侵入침입을 防止방지하게 되였다. 西歷서력 1628年년에 淸청의 太宗태종이 鴨綠江下流欖盤압록강하류[감람나무지대?]람반으로부터 鳳凰城봉황성을 經경유하야 靉陽邊門애양변문 城廠域성창역 旺淸邊門왕청변문에 至지하는(이르는) 一線일선에 防備방비를 設설치한 史實사실을 見견하면(보면) 17世紀세기의 初頭초두부터 朝鮮人이 滿洲만주로 移住이주하기를 圖도모함은 事實사실이다. (高句麗고구리 以前이전부터 朝鮮조선의 領地영지됨은 別問題별문제) 1626年년에 韓淸江都會盟한청강도회맹이 締結체결되야 長柵장책(긴울타리/목책) 以外이외의 地땅에서 朝鮮人의 居住거주를 禁금하고 1年년3回회 씩 柵목책을 開개하야(열어서) 交易교역을 하게 된 바 此이 移住이주 禁止금지는 凡언 19世紀세기 中葉중엽까지 지속되였으나 其間그간 秘密비밀히 侵入침입한 者자가 甚多심다하였으니(많았으니) 例례컨대 鴨綠江압록강 流域유역에서 朝鮮人의 採金채금(금채취)한 遺跡유적과 撫順무순(지명) 其他기타 炭坑탄갱(탄광갱도)에 高麗坑고리갱이 有유함과 如여한(같은) 것은 往時지나간때朝鮮人조선인의 移住이주한 明證명증으로(확실한증거로) 當時당시에 旣기히(이미) 遼河요하를 越월하고(넘어) 或혹은 露領노령 沿海州연해주 一部일부까지 亘긍하야(뻗어서) 各地각지 광구의 金금, 銀은, 銅동, 鐵철, 石炭석탄 等등을 採掘채굴하야 此이를 利用이용함과 如여하다(같다). 그러나 如斯여사한 (이러한)者자는 近代的근대적 의미의 所謂소위 移住이주라 稱칭(말)하기 不能불가능하고 淸朝末葉청조말엽에 至지하야(이르러) 封禁봉쇄지역의 威令위령이 漸次점차 解弛해이하고(해이해지고) 一面일면으로 露領로서아령 沿海洲연해주에서는 朝鮮人의 來往래왕를 歡迎환영하야 特殊특수의 保護보호를 함으로 國境地方국경지방에在住재주(거주하는) 朝鮮人조선인은 爾來이래(가까운때)生計생계의 途도(길)를 求구하기 위하야 陸續육속히(계속하여 끊이지 않고)鴨綠江압록강 及과 두만강을 渡도하야(넘어서) 永住的영주적(정착해오랜거주) 生活생활을 彼地저땅에서 營영위함에 至지하였다. 今지금에 各각 地方別지방별로 其그 沿革연혁(내력)을 擧거론하면 대개 左좌와 如여하다(같다).
▲欖감람나무 중국이 원산지이고 아시아의 열대지방 산야에서 자란다열매는 우윳빛으로 중국요리의 재료로 쓰기도 하고 호흡기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기도 한다. 열매를 먹기 위해 중국, 타이완 섬 등에서 심기도 한다 [인용 다음백과사전]
甲갑(첫번째). 鴨綠江압록강 對岸대안 西間島서간도 地方지방
朝鮮人이 鴨綠江압강 對岸대안(건너편에있는언덕)地方지방에 移住이주한 事일은 歷史역사의 加徵가징할(더증명할) 者자가 無무하나 數百年수백년 以前이전부터 韓淸兩國한청양국 人民인민이 鴨綠江압록강을 跨과하야(타고넘어) 雜居잡거한(섞여산) 것은 事實사실이다. 李朝리조 正宗정종 9年년 (西歷서기 178年)에 兩國人間양국인간에 누누 紛爭분쟁을 起기함으로 兩國양국이 互相상호 鎖國主義쇄국주의를 取취하야 沿岸연안에 兵員병원(병사)을 置치하고 越境者월경자를 互相서로 取締취체(주의를 하여 단단히 다잡거나 다스림)하다가 其後그후 憲宗 헌종11年년 (西歷서기 1845年)에 鎖國令쇄국령이 漸弛점이하매(점점해이해지며) 北鮮 地方북선지방의 人民인민은 관헌의 苛政가정(가혹한정치)에 苦고하는(고통을받는) 同時동시에 土地토지가 瘠薄척박하야 收穫수확이 少소함(적음)으로 封禁線봉금선(금지구역)을 突破돌파하고 對岸대안의 處女地처녀지를 開拓개척하기에 漸次점차 着手착수하얏다. 其後그후 哲宗철종 12年(西曆 1861年)에 渾江流域혼강유역 地方지방에서 中國人중국인이 採木事業채목사업을 盛성히(성행) 할 時때에 當初당초 筏夫벌부(나무군)에 加入가입할 目的목적으로 越境월경한 朝鮮人조선인은 其그 地方지방의 地味토지가 肥沃비옥하고 且開墾저개간의 容易용이한(쉬운) 것을 보고 農業농업에 從事종사하는 者자가 有유하여 遂수히(드디어) 朝鮮人조선인이 部落居住부락거주를 함에 至지하였다. 繼계속하야 李太皇 리태황(고종)6年(西歷서력 1869年)에 西鮮地方서선지방에 凶歎흉탄(흉년)이 有유하매 飢餓기아에 瀕빈한(물가/가까운) 朝鮮人조선인이 爭쟁을先선하야(앞 다투어서) 越境월경하니 移住이주朝鮮人의數수가 俄然아연(급작스레) 增加증가되고 翌年다음해에 此等이것등 移住者이주자 保護보호의 必要필요를 認인식하야 平安北道평안북도의 觀察使관찰사는 政府정부의 命명을 不待부대하고(기다리지않고) 鴨綠江압록강 對岸대안 地方지방을 28面면에 區劃구획하야 此이를 江界강계, 楚山초산慈城자성, 厚昌후창四郡사군에 分屬분속케(나누어 배치)하고 其後그후 面면의 廢合통폐합을 行행하야 李太皇고종 26年(西서기 1889年)에는 行政區劃행정구획을 江界郡강계군에 屬속한者자11面면, 慈城郡자성군에屬속한者자4面면, 楚山郡초산군에屬속한者자7面면, 碧潼郡벽동군에屬속한者자2面면 計계 24面면으로 分분하였다(나누었다). 此이와 先선하야(먼저) 李太皇고종 17年(西서기 1880)에 朝鮮政府조선정부는 經畧使경략사魚允仲어윤중으로 對岸地方대안지방 移住民이주민의 狀況상황을 視察시찰하얏는데 當時당시 輯安縣집안현에만 旣히(이미) 1,000戶호에 至지하얏고 光武元年광무원년(1897년)에 政府정부는 更경히(다시) 徐相懋서상무를 西邊界서변계管理司관리사에 任임명하야 對岸 一帶地대안일대땅의 朝鮮人을 保護보호케 하였으니 즉 通化縣통화현은 8道面도면 11面면에, 懷仁縣회인현은 祥和面상화면 外土面외토면에 寬甸縣관구현은 水上面수상면 外一面외일면에 興京府흥경부는 旺淸面왕청면 外一面외일면에 分轄분할케 된 바 當時당시 在住者거주자는 約약 37,000餘人여인이였다. 光武광무 7年(1903년)에 管內관내에 鄕約향약을 設설치하야 李容泰리용태를 鄕約長향약장 徐相懋서상무를副鄕約長부향약장 兼務겸무(겸직해서업무를보고)로 하고 次다음에 李完求리완구(現현輯安縣집안현 朝鮮人會長조선인회장)를 任命임명하얏다가 隆熙元年융희원년(1907년)에 間島問題간도문제가 解決해결되는 同時동시에 前전 鄕約향약을 廢폐지하고 自治制度자치제도를 認인정하게 되얏다.
乙을(두번째). 豆滿江두만강 對岸대안 北間島북간도 地方지방
朝鮮人의 北間島북간도에 移住이주한 沿革연혁은 亦역시 文獻문헌이 未備미비하야 可考가고(고찰하기)가 漠然막연하나 李朝 리조仁祖인조 6年(西서기 1628) 以來이래로 韓淸한청 兩國양국이 此이를 緩衝地帶완충(중립)지대로 하야 互相侵犯서로침범치 않게 하고 人民인민의 越江월강(강을넘어)私墾사적간척을 禁금한 것과 肅宗숙종 38年(西서기1712) 烏喇總管오라총관 穆克登목극등이 康熙帝강희제의 命명령으로 白頭山백두산 定界碑정계비를 立립한(세운) 事일를 見견하면(보면) 當時당시에 旣히(이미) 朝鮮人조선인의 移住이주 往來왕래가 頻繁빈번한 것은 推知추지하기(추정해서알기) 容易용이하다(쉽다). 然而그러나 北鮮地方人民북선지방인민은 官吏관리의 誅求주구[관청(官廳)에서 백성(百姓)의 재물(財物) 따위를 강제(强制)로 요구(要求)하여 빼앗음]와 天然천연의 不利불리로 因인하야 對岸地方대안지방으로 移住이주를 하던次中차에 特특히 李太皇고종 20年 癸未계미(1883년)에 西北經略使서북경략사 魚允中어윤중이 北鮮視察북선시찰을 할 際즈음에 越江禁止制度월강 금지제도를 철폐한 結果결과 公然공공연히 移住이주를 始시작하야 新開拓신개척에 從事종사하고 生活생활의 安定안정을 求구하였으나 吉林길림 將軍장군 吳大徵오대징이 豆滿江두만강 東北동북의 荒地황무지를 開拓개척하려고 視察시찰하다가 비로소 朝鮮人조선인의 移住者이주자가 多다함(많음)을 發見발견하고 其그 耕地경작지를 奪탈취하며 城外성밖으로 追放추방하고 殘留者잔류자(남은자)에게는 辮髮歸化변발귀화를 命명하며 且저 朝鮮人조선인의 改風易俗개풍역속할(풍속을쉽게바꾸는) 事일를 강요하야 횡포가 자심한(더욱심해진) 결과 이주자가 일시 감축되얏다. 其後그후 北淸事變북청사변에(光武 4年1900년) 露國軍兵로국군병이 局子街국자가를 襲습격하매 中國人중국인의 대부분이 吉林길림으로 避去피해도망하고 朝鮮人 이주자가 更히(다시) 증가되니 露軍로군이 退還퇴환한(물러가돌아간) 후에도 소수의 中國人중국인은 强강히(강하게) 朝鮮人에게 귀화를 慫慂종용치 못하고 但단히 (다만)소작인으로 此이를 사역하여 개척의 業업을 成성할 뿐이엿다. 此이로 인하야 이주자는 日復日增加하루하루증가되고 次다음에 統監府派出所통감부파출소가 間島간도에 설립되고 日韓合倂일한합병 후에 日本일본에서 이민 장려를 한 결과 朝鮮人이 自然자연 移出이출되야(이주해서) 今日금일의 盛況성황에 至지하얏다.(이르렀다)
丙병(세번째). 奉天봉천 地方지방
光武광무10년(1906년)에 平安北道평안북도 碧潼郡벽동군 金時禎김시정이 비로소 이주하야 開墾事業개간사업에 착수한 후 平安南北평안남북 慶尙南北경상남북의 농민이 점차 내주하야 혹은 황무지를 매수하고 혹은 中國人의 소작인이 되야 農耕농경에 종사하얏다. 당시 奉天都督봉천도독 趙爾巽조이선은 朝鮮人의 雜居잡거(이곳저곳거주함)에 관하야 上奏상주하되 「朝鮮人으로서 昔時지난날 高麗末年고리말년에 流寓유우한[떠돌아다니다가 본 고향(故鄕)이 아닌 곳에 임시(臨時)로 정착(定着)한 ] 자가 我國籍자기나라국적에 속한 일이 有유한 즉 금일 流寓유우(임시거주자)의 朝鮮民조선민도 역 후일에 我國籍아국적을 가히 취득할 민이 될지라. 此이를 외인으로 同視동시치(같은시각으로보는/취급하지는) 못한다」 운운한 이래로 朝鮮人조선인의 이주자가 증가되고 특히 安奉線안봉선 개통 이래로 奉天봉천지방과 朝鮮조선 간이 직접 연락됨으로 편히 이주의 추세를 촉진케 하얏다. 撫順縣무순현에 朝鮮人의 내주는 隆熙융희 4년(1910년)경에 平北평북 義州郡의주군 宋秉柱송병주金萬里김만리가 農耕농경의 목적으로 飽家屯포가둔에 내주함이 최초요 柳河縣류하현에 이주하기는 李太皇고종 20년 癸未계미(1883년)에 金華龍김화룡 등 수명의 농부가 通化小灣溝통화소만구로부터 내주함을 始시작하야 其後그후 隆熙융희3년(1909년)에 水田수전이 유망함으로 認인식하게 되며 이주민이 일시 激增격증(급격히늘어나게)되얏다.
丁정(네번째). 吉林길림 地方
吉林 朝鮮人의 移住史이주사는 확실한 기록이 亦역 無무하나(없으나) 약 10년 전에 北間島북간도로부터 來住래주하는(와서거주) 자가 有유하야 大正대정 4년경(1915년)부터 점차 其그 수가 증가되야 敦化돈화, 額穆액목, 樺甸화전, 盤石반석에서 농업에 종사하얏고 更히(다시) 大正 9년(1920) 南滿남만 일대의 旱魃한발(가믐)은 朝鮮人의 轉住전주(옮겨삶)를 促촉진하야 吉林길림 지방에 來래하는(오는)者자―激增격증하게 (급격히늘게)되얏다. 長春장춘 附近地부근땅에 來래하기는(오기는) 大正대정 3년경(1914년)에 상업의 목적으로 來住래주한 자가 嚆矢효시되고 其後그후 농업경영자의 이주민도 有유하얏다.
戊무(다섯째). 東支沿線 동지연선地方
上古상고檀君단군의 一族일족은 肅愼숙신의 수도 寧古塔영고탑에서 패권을 執집하얏고 其後그후 高句麗고구리 極盛時代전성시대에도 寧古塔영고탑 及과 東京城동경성 일대의 지방은 總총히(모두) 朝鮮民族조선민족의 割據地할거지였다. (現今지금 遺跡古墳甚多유적고적이많다) 寧安縣廳녕안현청의 古記錄고기록에 의하면 距今지금부터 170여 년 전에 東京城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야 약 4,000명의 朝鮮人조선인이 거주하얏는데 기세가 中國人중국인을 압도함으로 귀화자 외에는 皆退去모두퇴거를 명하얏다 云운하얏고 又또 寧古塔在住中國人영고탑에거주하는중국인의 5분1은 朝鮮人조선인의 血혈이(피가) 混혼하얏다(섞였다) 云운하얏다. 淸朝청조는 차등 朝鮮人조선인 세력의 可恐가공한(두려워할만한) 것을 知인지하고 一時일시 其그 이주를 금지하얏스나 其晩年청나라말년에 封禁봉금의 威令위령이 解弛해이함에間島간도방면으로부터 轉住전주하는(옮겨사는) 자가 증가되야 距今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新韓村신한촌을 형성하고 특히 아편재배 水稻수답 試作시험작물에 착수하야 頗파히(몹시) 유망하다는 評평이 有유함으로 北滿만주이주자가 현저 증가되얏다. 然而그러나 水稻試作수답시험작물은 大正대정6년(1917년)경에 穆陵在住목릉에거주한 安孔根君안공근 군이 北海道북해도 종소전대(밭에작은구획을정해 종자를심는재배법)를 이식함이 嚆矢효시가 되고 其後그후 牡丹江모란강 일대의 유역지방에 확장되야 今지금에는 旣墾이미간척한水田( 물을 쉽게 댈 수 있는 논)수전이 4,000 町步정보에 달한다 云운(말)한다. 此이를 地別땅별로 상술하면
1. 哈爾賓 地方하얼빈지방 此地方이지방에는 距今지금부터 30년 전에 旣히(이미) 이주자가 有유하였으나 離散이산(헤어져 흩어짐) 혹 사망의 결과로 年久者년구자(오래된사람)가 別無하고(별로없고) 대개 17년 내외의 人인뿐이다. 그네는 다 1900년 東支鐵道公事동지철도공사 시에 北鮮地方북선지방에서 노동자로 來래하얏다(왔다)가 仍居잉거하는(내친김에거주한) 자인데 아편 재배자가 최다하고(가장많고) 料理屋요리점, 여관업 기타 상업자도 多다하며(많으며) 又또 정치적 색채를 帶대한(띤) 인물도 不少불소하다(적지않다).
2. 一面坡地方일면파 지방 距今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요리업자 全敏赫전민혁이 南滿남만으로부터 始來시래한(오기시작한) 후 이삼년來내 西比利亞시베리아 及와 南滿남만의 轉住者(옮겨산자)가 증가하는 경향이 有유하다.
此이외에 橫道河子횡도하자 지방은 距今지금으로부터 29년 전부터 이주하야 부근 10리는 전부 朝鮮人이 거주하고 穆陵 목릉지방은 距今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남부 烏蘇里오소리 로부터 농경자가 來住래주하야(와서거주) 距驛역으로부터 3리 되는 지역에 新韓村신한촌을 成조성하고(이루고) 更히(다시) 東北동북13리 8面屯면둔에도 농민 이주자가 多다한다(많다).
巳(여섯째). 寧安縣영안현 地方
大正대정5년(1916년)경에 慶尙南道경상남도의 具卿淑구경숙君군이 海林해림에 來래하야(와서) 磨刀石마도석에서 농업을 營영하는 동시에 又또 崔桂華최계화君군이 寧古塔영고탑에 來하야(와서) 부근의 土地토지를 매수하고 농업을 營영하였으니 2인은 차지(이땅)의 선개척자다. 차(이)지방은 기중 地味토지가 비옥하고 水利수리가 (물의이용)양호하며 교통이 편리한 고로 사방의 이주자가 多다하야 大正대정 9년(1920년) 말에 3,000인에 달하더니 更히(다시) 其翌年그다음해에는 海林해림 부근 4,700人 寧古塔영고탑 부근 5,100人 계 9,800人이 되는 성황에 至하얏다. (이르렀다)
3. 戶口호구, 人口인구 及와 其그 分布狀況분포상황
南北滿洲남북만주의 朝鮮人조선인은 조사의 방편이 缺결함(부족함)으로 도저 其그 精細정세(자세한정보)를 知지할(알) 途도(길)가 無무하다. 그러나 최근 某所(모처) 조사에 의하면 滿洲만주 내 戶數호수는 15만 3,000호이요 인구 65만여라 한다. 물론 此이는 도시 기타 대촌락의 거주자를 망라하였을 뿐이요 산간오지까지 상세한 조사를 한 것은 안일 것이다. 試시험하야 日韓合倂 일한합병후 大正대정10년(1921년) 간에 新신히(새로) 滿洲만주 及와 西伯利亞시베리아에 이주한 朝鮮人조선인 數수를 조사하면 24만 1,000여 人에 달하는 바 同上年間위와같은 년간의 귀환자(돌아온사람) 5만 8,000인을 제하면 尙상히 18만 3,000인 이주 정착자를 可算가산(계산을더해)하겠은 즉 일반 세인이 칭하는 바 滿洲 만주약 70만인 西伯利亞시베리아 약 15만인이라 함이 大差큰차이가 無무할듯(없을듯)하다. 然而그러나 此이를 지방별로 구분하면 大畧대략 左表왼쪽표와 如하다.(같다)
中國在住중국거주 朝鮮人조선인 分布狀況분포현황
4. 그들의 敎育교육 及과生活狀態생활상황
朝鮮人의 滿洲만주 지방에 왕래 이주한 역사는 상술함과 같이 久遠구원하나(매우 오래됐으나) 실제로 일정한 구역 내에 생활의 근거를 하고 민족 又또는 사회적으로 상당의 세력을 형성함에 至지하기는(이르기는) 최근 30여 년 以來이래의 事일이다. 然而그러나 其그 이주자의 대부분은 전혀(모두) 무자력자로(힘없는자) 但히(다만) 上地상지가(이땅이) 광활 비옥하야 생활상 곤란이 無무하다(없다)는 풍설을 聞문하고(듣고) 맹목적으로 渡去도거한(넘은) 이와 又또 정치적 不平불평으로 표류하다가 일시 來住래주(와서거주)한 이들인 고로 원래 생활의 기초가 불확실하고 且저 이주민은 中國중국의 국적을 취득한 자 외에는 토지소유권이 無무하고(없고) 又또 토지의 차입에 대하야도 종종의 不利不便불리불편이 多다하며(많으며) 생활비 及와 농경자금도 이율이 甚高심고(매우높고)하야 식량과 如여한(어떤) 자도 춘하의 交교에(춘궁기) 차입하였다가 추수 후에 此이를 倍額배의액수으로 변상함이 상례다. 加之더하여中國官憲중국관헌의 誅求가렴주구와 마적의 掠奪약탈은 其그苛苦가(가혹한고통이) 실로 형언키 難난한(어려운) 외에 근래 獨立軍독립군의 관계로 각종의 부담이 또한 不少하야(적지않아) 비록 외면상 토지가 비옥하고 穀産곡물의생산이 풍부하나 생활은 대개 곤란하다. 尙상(더해서)又또 中國人중국인은 朝鮮人조선인이來住(와서거주할)당시에는 상당한 조건 하에 荒地황무지를 貸與대여하였다가도 其地가(그땅이) 점차 良田양전(좋은밭)으로 化변화하야 경작이 용이하고 收穫수확이 多다하게 (많게)된 것을 보면 野欲야욕이 돌발하야 혹은 소작료를 인상하고 혹은 토지의 반환을 청구하는 등 無理무리의(무리한) 박해가 多다하다. 其그 결과로 朝鮮人은 다년간 汗血한혈(피땀)을 流류하야(흘린) 개간한 良田양전을 一朝한순간 방기(放棄)하며[내버려 돌보지않고] 又또 或時혹시는 가옥까지도 방기하고(버리고) 오지로 轉轉전전 이주하야 新地새로운땅를 다시 개척하지 않을수없는 비참의 상태에 在재한다(있다). 그러나 원래 천연의 혜택이 多다하고(많고) 생활비가 극히 저렴함으로 旱魃한발(가믐) 기타 특수의 災厄재해에있지 않는 한에는 식량의 곤란은 別無별무하다(별로엾다). 此点이점은 反반히(반대로) 朝鮮 조선내지에 在재한(있는) 小作農民소작농민보다 우월하다. 그리고 이주민의 직업은 대개 9할 내외가 농업이오 其次그다음은 광부 상업 등이라 하나 亦 역시확실한 조사가 無무한(없는) 즉 詳知상세하게알기 難난하다(어렵다).
그네들은 십수호 집단이 有유하면 대개 서당을 設설하고(만들고) 자제의 교육을 圖도모하는 경향이 有유하나 대다수는 산간 계곡에 산재하야 2, 3호 내지 3, 4호가 접근함에 불과하고 그 거리는 10리 혹 5리가 되야 도로 교통이 극히 불편하고 加之더해서 西北間島 서북간도일부 지방을 제한 외에는 이주의 年月년월淺薄천박하야(오래되지않아) 생활의 기초가 확립치 못하고 거주 안정을 缺결한(부족한) 고로 실제상 전 호구 及와 인구에 비하면 교육의 기관이 극이 少數소수됨을 不免불면한다(면하지못한다). 근년에 至하야(이르러) 滿洲 만주일대의 교육열도 朝鮮 내지에 不讓하게(못지않게) 昻上앙상되얏스나(올랐으나) 생계가 裕足유족치(여유았게풍족하지) 못함으로 일시 설립한 학교라도 경비가 곤란하고 설비가 불완전하야 支持지지하기 甚難심난하며 敎員교원을 得득(확보)하기 難난하야(어려워) 일반이 痛切통절하게 思생각한다. 然而그러나 其中그중 교육이 비교적 발전된 지방은 西北間島서북간도다
조선인 중국유학생 상황
5. 今後지금이후의 朝鮮人조선인
滿洲만주지방에 이주한 朝鮮人은 이미70만 이상에 달하얏다. 비록 경제상 실력이 없고 政治上정치상 세력이없으나 祖先조상때부터 傳習한(전래되어익힌) 농업의 기능은 특히 발달되야 여하한 산간오지라도 一次일차 足跡족적이 入입하면 擧皆良田沃畓거의모두양전옥답으로 化변한다. 수천년간 深藏심장하얏던 (깊이숨겨져있던)천연의 寶庫보고 滿洲沃野만주옥야는 이미 朝鮮人의 手손으로 개척하게 되얏다. 滿洲만주는 사실상 朝鮮人조선인의 滿洲만주요 中國人중국인의 滿洲만주가 아니다. 낙엽이 歸根格귀근격(그뿌리로돌아감)으로 朝鮮人은 朝鮮 내지에서 放逐방축되야(쫓겨나) 자연적으로 祖先선조의 遺地유지인 滿洲만주를 占점하게 되얏다. 특히 中國人의 법령 解弛해이와 日本일본의 勢力不及세력불급(힘의불균형)은 朝鮮人 활동에 好個方便(좋은방편)을 與여하얏다(제공하였다). 그네들은 아편 재배를 자유로 하고(公許정부의허가 아님) 무기 휴대를 임의로 한다. (獨立軍독립군도 대개 근거를 中國지방에 함) 中國人중국인간에 喧傳훤전하는(떠들어대는) 예언과 如히(같이) 장래 滿洲만주는 白衣人백의인이 主翁주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今回지금회자되고있는 中國動亂중국동란에도 朝鮮人이 奉直兩派봉직양파에 다 참가하얏는데 비록 고용병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의기양양하야 득의의 秋(가을추수)와 如히(같이) 思생각하고 陣前진전(전쟁)에 出출한다(나간다). 특히 吳佩孚오패부 부하에는 원래 300여의 朝鮮勇兵조선용병이 有유한데 其그 장교 중 徐日甫서일보(中國名중국명 梁海友양해우, 北東航空學校북동항공학교출신 今爲지금 비행기장)君군은 비행술의 특기가 有유햐야 일반 中國人간에 명성이 분분하고 又또 旅長여장 鄭立정립(故고袁世凱원세개 애용군인) 營長영장 韓明詳한명상(中國名중국명 梁海里양해리 王士珍왕사진설립 陸軍學堂육군학당 졸업) 連將연장 安敬一안경일(中國名중국명 梁海島양해도 歐米人經營구미인경영大成學校대성학교 출신) 諸君제군은 명망이 多다한 용장으로 今回금회(이번전쟁)에 또한 출정하였다 한다. 이후 其그 전국이 여하히(어떻게) 전개되고 승부가 또 여하할지(어떨지) 此이는 逆睹역도키(앞일을내다보기) 難난하나(어려우나) 朝鮮人이 참전한 것은 특히 주목할 点점이다. 따라서 中國戰爭중국전쟁 지대에 산재한 동포의 생명과 재산이 각각으로 위험을 앞에둔 사실이다. 그러나 此이無依無恃한(의지할곳없는) 동포를 과연 誰누가 능히 보호하야 안전을 保보장할지 此際이즈음를 당하야 吾人은(우리는) 더욱 공포의 念생각이 有유하고 동정의 淚눈물를 금치 못한다.
1924년8월 17日
中國 중국天津천진에 대홍수가 出출하야(나서) 15,000인의 익사자가 生생한(나와) 참변이 有유하다.(있었다)
平北평북 楚山郡초산군 城面성면 安贊洞안찬동 安贊嶺안찬령에서는 金德三김덕삼을 수령으로 한 독립군이 경찰대와 교전하야 日일순사 1명을 사살하다.
8월18日
咸南함남 北靑북청 及과 豊山풍산 兩郡양군에 早霜조상(철보다이른서리)이 내렸는데 此이는 60년來래 初有(처음있는)의 天災천재지변이라한다
8월 26日 中國중국에 在재한 외국 公使團공사단은 上海상해 영사단 제의에 의하야 上海의 주위 30리 지점에서 開戰개전을 불허한다고 中國 외교부에 조회하다
29일 中國의 浙江절강 양군이 전투를 개시한 바 上海상해는 租界조차지 이외에 계엄령이 발포되고 廣東軍광동군은 시가에 放火 방화燒却소각을 개시하다
9월3日 孫文손문(손일선)씨는 本夜이날밤 군법회의에서 北伐북벌할 事일를 결의하고 군비 백만원 조달할 事일를 上海 상해에○恭綽공작에게 電命전보로명령
9월5일 浙江軍절강군 제1군 사령관 何豊林하풍림씨는 전선에 총공격 개시를 명령하야 유하방면에서 제1차 맹전한 결과 浙江軍절강군의 死者전사자 1,000여명에 달하다
9월19일中國動亂중국동란에 대하야 日英米伊일영미이 4국 육전대가 상륙하야 조계를 경계하고 日本일본은 中國動亂에 엄정 중립하기로 閣議각료회의에서 결정
◆북벌 제1선에 立립한 孫文손문씨는 昭關 소광大本營대본영에서 日本일본 모기자에 대하야 直隷派직예파는 今後금후 1개월 이내에 전멸하리라 壯言장담하고 또 日本은 英米영미의 후를(뒤를) 추종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中國의 新運命신운명을 이해하고 개발에 노력함을 望바라보며 尙又또 李烈鈞이열균을 日本에 특파하야 朝野조야에 호소하겠다고 哀訴的애소적 언사를 하얏다. 壯言장담하듯 하면 1개월 이내에 直隷軍직예군 전멸은 姑舍고사하고 1일 내에 中國중국통일이라도 할 것이다. 그러나 日本에 애소한다는 말을 들으면 자력의 부족을 폭로하는 것 같다.
인용 다음,네아버사전 출전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4년10월1일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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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고맙습니다~